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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 교사에게까지 담임을 시켜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부장을 시켜라

교실붕괴, 교권실추 등등이 이슈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교권실추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사회가 교육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 사회가 교육을 존중하면 교권은 저절로 신장되며, 사회가 교육을 하찮게 다루면 교권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다. 최근 교사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권이 실추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사회가 교육을 하찮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경쟁밀도가 높아지면서 교육에서의 경쟁밀도도 높아졌기 때문에 비롯된 현상이지 사회가 교육을 존중하고 있어서는 아니다. 교육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교육에서 높은 성취를 얻으려고 하는 사회에서 교육은 도구적으로 취급되며, 이때 자연스럽게 효율을 중요시하는 시장주의가 스며든다.

이는 교육 투입에 비해 교육 성과를 높이자는 것인데,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보여주듯, 교육의 성과는 단기간 내에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교육에서의 효율은 결국 투입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해마다 스승의 날만 되면 ‘교사는 있고 스승은 없다’는 상투어가 난무하지만 실상 1997년 이후 교육정책에서 교사는 스승은커녕 다만 교육에 투입되는 비용, 인건비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원의 노동강도를 높이고, 비정규직 교원의 비중을 늘리는 것을 효율화랍시고 추진해왔다.

1997년 이래 학급당 교사 배치 기준은 늘어나기는커녕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서울지역 중학교의 경우 15년 동안 학급당 교사 정원은 10% 이상 줄어들었다. 경제 성장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 정원만 줄어든 것이 아니다. 정규직 교사의 비율도 줄어들었다. 1995년만 해도 비정규직 교사의 비율은 중학교의 경우 2.6%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3년에는 비정규직 교사의 비율이 무려 17.8%로 급증했다. 특히 이 비율은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8.7%나 늘어났다.

15년간 증가율보다 3년간의 증가율이 더 많은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정규교사 반, 비정규 교사 반이 될 날도 멀지 않다. 교사의 수는 줄이고, 비정규직 교사의 비중을 늘리는 이런 흐름이 갈수록 가속화되는 이런 흐름, 그리고 이런 흐름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여기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나 문제제기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학교를 무성의하게 다루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산 증표다.

더욱 놀라운 소식이 있다. 현재 학급 담임교사의 15%가, 특히 중학교는 20%가 비 정규직인 기간제 교사들로 충원되어 있고, 심지어 정규직 교사 중 담임 비율은 40%인데, 기간제 교사 중 담임 비율이 무려 66%가 넘는다는 소식이다(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0928_0012393985&cID=10301&pID=10300). 이는 사회가 교육을 무성의하게 다룰 뿐 아니라 이제는 교사들 조차 교육을 무성의하게다루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학교가 안팎으로 무너지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처음 발령받은 1992년만 해도 학급 담임교사는 아무나 할 수 없었다. 기간제 교사는 물론이려니와 정규직 교사도 발령 받고 적어도 1년이 지나기 전에는 학급 담임(정식 명칭은 학급 담당교사)을 배당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부임하면서 학급 담임을 희망하자 당시 학교장은 “당장은 어렵고 한 3년 차가 되면 담임을 배당해 드릴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발령받기 전 기간제 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감히 학급 담임을 맡아보겠다고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정규직 교사도 이 정도였으니 비정규 교사에게 학급을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기간제 교사에게는 학급 담임 등 책임이 중한 업무를 맡기지 않는다.’는 지침도 있었다. 이는 비정규 교사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학급 담임의 책임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급 담임을 중하게 여긴 것은 담임교사는 학생의 인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누가 생각해도 지극히 상식적인 처사이며, 교육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처사다.

그런데 중학교 학급 담임의 20%가 비정규교사이며, 정규교사의 40%가 담임을 맡는 반면, 비정규교사의 60% 이상이 담임을 맡고 있다는 현실은 교사들 스스로 학급 담임이라는 중요한 일을 힘 없는 비정규직들에게 떠넘기고 싶은 부담으로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교사들의 무책임만을 질책할 일이 아니다.

중학교 학급 담임은 사춘기 한 가운데에 있는 청소년들의 인성교육과 생활지도의 최전선에 있는 그야말로 수십 명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하면서도 또한 고달픈 직책이다. 그런데 중학교 교사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고달픔에 지치면서 정작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정과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이를 벗어버리고 싶은 멍에로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소명의식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사회가 교육을 ‘효율’의 논리로 재단하고 있는데, 교사인들 ‘효율’의 논리로 대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교사들에게 담임을 전가하는 과도기를 거쳐, 마침내 약자인 기간제 교사에게 집중적으로 담임을 전가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선 일선 학교에서부터 교육을 존중하고, 담임의 책무에 걸맞는 존중과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일선 학교, 특히 중학교는 교육의 최전방을 책임지는 담임보다는 행정업무를 분담하는 부장이 더 우대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험 많은 교사들이 담임을 이탈하여 행정직으로 옮겨가려는 ‘효율적’ 판단을 막을 수는 없다. 만약 학교에서 담임이라는 보직과 부장이라는 보직을 동등하게만 대우해 준다면, 그리고 행정업무까지 분담해야 하는 담임의 업무를 교육으로 한정시켜주기만 한다면 중견 교사들은 다시 담임을 맡기 위해 몰려 올 것이다.

또 담임을 맡을 인원이 부족하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인원만큼을 정규 교사로 새로 채용해야 한다. 교사의 20% 이상을 비정규직으로 채워놓고, 그 비율을 해마다 늘려가면서 담임교사 중 비정규직이 많다고 개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청년실업 해소는 학교에서 교사라는 좋은 일자리를 늘림으로써 해소되는 것이지 온갖 종류의 비정규 교원을 늘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교육 예산이 부족하고, 어차피 20%가 비정규 교사일수 밖에 없어서 학급 담임을 시킬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들에게 부장을 시키고, 기존의 부장들을 담임으로 돌려야 옳다. 부장교사라는 것은 결국 행정일을 담당하기 위한 자리지만, 담임은 교육을 담당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컴퓨터 등에 능한 젊은 교사들이 부장 일은 더 잘할수 있지만, 많은 경험과 인생의 경륜이 필요한 담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교의 중심을 교육과 행정 무엇으로 보느냐에 대한 철학의 문제다. 실제로 초등학교에서는 오히려 젊은 교사들을 부장에 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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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