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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가능한 과제만 내라는 공문. 학원 숙제를 위해 학교의 창조적인 수업과 평가를 제한하라고?

요즘 학교나 교육청에서는 행복과 창조가 유행이다. 물론 학생, 교사, 혹은 공무원이 행복하거나 뭔가 창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모든 공문서, 모든 사업,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행복이나 창조라는 접두사가 붙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적어도 이름에 창조나 행복을 붙이면서 이명박, 공정택 시절과 같은 노골적인 국영수 몰입교육 경쟁강화 교육 같은 비교육적 만행의 여지는 줄어들었다.

한때는 단순한 지식암기가 아니라 창조성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교조 교사 식별법에 나올 정도로 금기시 된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말도 거의 상식처럼 되어있다. 학교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지필평가를 지양하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수행평가를 강화하고, 문제 기반학습, 토론 수업, 탐구 프로젝트 학습, 연극이나 영화 제작 같은 수업을 개발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바야흐로 교육계에 창조 르네상스가 열린 것일까?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행복과 창조는 공문서 제목에 붙는 접두사에 불과하다. 심지어 행복과 창조를 읊조리는 교육관료들조차 창조적인 수업을 위해 입시교육을 포기할 용기나 전망, 그러한 교육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단적인 예가 해마다 시험 기간이 되면 각급 학교에 뿌려지는 방과후 집에서 해야 하는 과제를 지양하고 활동과 평가를 가능하면 수업 시간 중 학교 안에서 해결하라는 내용의 공문이다.

이 공문은 앞에서 강조한 창조니 탐구니 하는 화려한 수사들을 단숨에 무력화 시킨다. 어떤 창조적인 작업도 수업시간 45분 안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탐구도 학교 안에 있는 시설과 자료만으로 그 시간 안에 진행될 수 없다. 교대 사대에서는 교사를 학습의 완성자가 아니라 촉진자, 안내자로 가르친다. 교사는 배움을 자극 할 뿐, 진정한 학습은 학교 밖의 실제 삶 속에서 배운 것, 자극 받은 것에 따라 배운 것을 확장하고 적용시키는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창조적인 교육이란 뜻이다. 학생들이 동료들과 혹은 부모와 함께 도서관, 박물관, 문화시설, 지역사회 등을 다니면서 삶 속에서 배움을 구현하도록 격려하고 고무해야 창조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배움이 행복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창조적인 교육을 위해 과제는 필수적이며, 그 과제 중에는 히 학교 밖에서 해야 하는 것 방과후에 해야 하는 것이 상당히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학교 안에서 해결하고, 수업 시간 중에 해결하라는 공문이 날아온다. 창조적인 교육과 배치된다. 결국 이런 모순적 요구에 처한 학교에서는 얼마 안 되는 수업 시간 중에 해결할 수 있는 과제로 활동을 제한하여 쪽지시험 수준에 불과한 평가를 한 뒤 문서 상에는 행복, 창조와 관계되는 엄청난 수업과 수행평가를 한 것처럼 꾸미는 화장술이 팽배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애초에 이런 공문이 내려간 근거가 더 기막히다. 그 근거는 '학생들의 과도한 학업부담'때문에 학부모들의 민원이 많아서’ 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 민원이 정말 학생들의 학업부담이 과중하다고 안타깝게 여기는 그런 민원일까?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즐겁게 놀고 가족과 친교활동이나 문화활동을 해야 하는데 학교가 내 주는 과제와 수행평가 때문에 이런 활동들이 어렵다는 그런 민원일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학생도, 교사도 심지어 학부모도 잘 알고 있다. 물론 학생들이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와 수행평가 때문에 부담을 호소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방과후 시간의 대부분을 학원에서 사교육 받도록 강요 받고 있기 때문이며, 학원에서 내 주는 단순 문제풀이, 선행학습, 단순암기 등의 숙제물량공세에 이미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학원이 보통 밤 아홉 시가 지나야 끝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학생들이 과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방과후의 약간 정도 시간 아니면 심야시간 밖에 없다. 그런데 학원 과제의 분량은 이 정도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학생들 중 상당수가 학교 수업시간에 학원 과제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문이 지시하는 대로 학교에서 수업시간 중에 과제를 할 수 있도록 하더라도 학생들은 그 시간에 학교 과제가 아니라 학원 과제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학원에서는 과제를 안 해오면 때리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학원 숙제가 그리고 그 과제를 하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교육적인가 하는 것이다.당연히 비교육적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창조적인 교육에 역행한다. 그렇다면 책임과 전문성이 있는 교육당국이라면 방과후까지 이어지는 과제나 수행평가를 줄여 달라는 민원에 대해 오히려 학원을 보내지 말고 그 과제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대답을 해야 옳다. 그런 과제와 수행평가는 앞으로 우리 공교육이 지향할 방향이기 때문에 학원에 보내고 학원 숙제 할 시간을 위해 이것을 축소할 이유가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옳다. 공교육 기관에서 사교육 사정까지 봐 주면서 수업을 운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학원 숙제 규제에 나서야 한다. 이미 세계적으로 시효가 지나간 단순 암기, 문제풀이 숙제에 학생들이 푹 젖어 있고, 그걸 학교 수업시간에 몰래 해야만 겨우 시간 내에 제출하여 매를 면할 정도니 이래서야 무슨 교육이 이루어 지겠는가?

학교에서 조금만 맞으면 인권 유린에 민사소송까지 감수하는 학부모들은 어째서 학원에서 맞는 것에 대해서는 이리도 무감각한지 신기할 따름이다. 학원의 무지막지한 구시대적 숙제에 허덕이는 것에는 아무 생각 없다가, 학교 수행평가 과제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사실은 답을 알고 있다. 학원 숙제는 국영수 문제 푸는 것이고, 학교 수행 과제는 뭔가 그리고 만들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원 숙제는 입시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착각을 주고 학교 과제는 웬지 입시를 방해하는 시간낭비로 보이기 때문이다. 학원에서는 성적이 떨어졌다고 벌을 주고, 학교에서는 성적과 무관한 일로 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이율배반과 교육을 가장한 내숭을 받아주어야 하나?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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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