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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공격은 실패했다. 전교조가 이 기회를 잡으려면?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될 위기에 몰렸다. 이 글이 읽히는 시점에서는 이미 법외노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론을 신경 쓸거라는 전망도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그런거 신경 안쓰기 때문에 강행 할 것이다. 얼른 보면 이명박이 감히 못한 전교조 축출을 박근혜는 해치웠으니 보수진영에서 개가를 올릴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고 멀리 보면(수구 보수에게는 절대 없는 능력이다), 이들의 공격은 실패했다. 무너져 가는 전교조를 오히려 살려놓는 악수를 두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교조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는 2003년부터 이미 전교조의 위기가 운위되었다. 어쩌면 합법화된 그해로부터 위기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위기는 조직이 축소되어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육운동의 중심으로서의 위상이 무너졌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합법화 이후 전교조의 교육운동 내에서의 권위와 위상은 조합원 1만명에 불과하던 불법노조 시절보다도 실추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합법화 이전에는 자기를 소개할때 "전교조 해직교사"라고 소개하면 곳곳에서 악수를 청하고 우러러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전교조 간부들은 곳곳은 커녕 조합원들로부터도 냉소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합법화 이전에는 일선 학교 분회가 활동의 중심으로살아있었고 백가쟁명이 들끓었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분회는 선전물 받아보는 단위로 전락하고 집행부만 분주한 조직이 되었다. 합법화 이전에는 전교조 하면 사람들이 '참교육'을 떠올렸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정치운동', '노동운동'을 떠올리게 되었다. 합법화 이전에는 "전교조이기 때문에 참교육을 했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참교육을 하는 교사들이 마지못해 조합에 적을 유지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전교조는 보수진영의 공격이 아니라 진보진영의 내부비판에 의해 고립되기도 했다. 전교조에게 가장 뼈아픈 기간은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시사인, 그리고 진보평론에서조차  전교조를 맹렬히 비판한데다가 여성조합원의 성폭행 사건까지 터졌던 2008-2009년 기간일 것이다. 이때는 진보진영에서조차 전교조는 일종의 터부로 취급되었다. 진보교육감 후보들은 자신이 전교조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빴고, 2008년 촛불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주경복 후보는 공정택 후보의 "너 전교조 2중대지?" 한 마디에 훅가서 낙선하고 말았다.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진보의 오점처럼 취급되는 상태에서는 조합원 수가 10만명, 20만명이라 할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전교조는 서서히 뇌사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같은 분회원 낯을 보아 적을 유지하고 있다가 학교를 옮김과 동시에 탈퇴했고, 20대 젊은 조합원들은 가뭄에 콩나듯이 들어왔다. 이 상태로 10년만 지나면 전교조는 자연사 할 것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그런데 전교조는 본의아니게 지금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내 기억에 지난 10년간 전교조가 이렇게 진보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진보진영 뿐 아니라 민주당을 포함한 야5당까지도 전교조를 지지하기 위해 단결하고 있다. 전교조가 이렇게 이른바 민주진보진영의 단결의 구심점이 된 것은 1989년 대량 해직사태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조합비만 내는 조합원으로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던 조합원들조차 회춘하고 있다. 서로 연락망을 개통하고, 전망을 나누며, 앞으로 무엇을 할지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모처럼 조직이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자연사하던 전교조에게 강력한 강장제를 주사한 꼴이 되었다.

이제 공은 다시 전교조에게로 넘어갔다. 이 호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어갈 것인가? 법내 법외는 중요하지 않다. 법외라 하더라도 교육적, 도덕적 권위를 움켜쥘수 있다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다시금 이 땅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지향하는 세력들, 시민들의 눈이 전교조를 주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기사회생이냐 완전한 확인사살이냐가 결정될 것이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2000-2012의 모습은 버리고, 1989- 1999 사이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 그때 전교조가 권위를 움켜쥘수 있었던 이유는 "전교조 교사는 남달랐기 때문"이지, 전교조가 가두에서 무시무시한 투쟁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989년 전교조 교사들이 경찰에게 연행되어가는 모습은 연약하고 엉성했다. 하지만 그 연약하고 엉성한 모습이 머리띠와 조끼를 똑 같이 맞춰입고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연상케 하는 강인한 대오로 주먹질을 하는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교조는 그 동안 교육자가 아니라 행정관료가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교육현실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교육자가 아니라 투쟁가가 조합을 좌지우지하는 조합현실도 비판해야 한다. 다행히 아직은 이 땅의 참교사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전교조 적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을 세워서 조합의 중추로 삼고, 이들의 목소리가 조합의 행보에 적극 반영되게 하며, 조합이 이들의 교육활동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이를 모든 교사들에게 보급하는 유통망이 되게 하자. 이런 노력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진 전교조는 합법 비합법을 넘어 교육부마저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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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