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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을 하층민으로 전락시킨 중산층 괴담. 중산층의 정확한 의미는?

이른바 중산층의 기준이라는 것이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보며 많은 직장인들은 "아, 나는 감히 중산층에 끼지도 못하는구나"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일부 진보지식인들은 "봐라. 유럽인들의 중산층 기준은 얼마나 우리와 다른가?" 하며 또다른 버전의 국개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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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의 기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개소리다. 여기에 나와 있는 한국, 영국, 프랑스의 중산층의 기준은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중산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회과학에서 중산층은(말 부터 틀렸다), 엄밀히 말하면 중간계급(middle class)이라고 말해야 정확한 용어다.

간단히 말하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낀 계급이란 뜻인데, 18세기에는 주로 부르주아를 일컫는 말이었고(영국이나 독일에서는 20세기 초반까지도 부르주아를 중간계급이라는 말로 불렀다), 20세기에는 주로 관리, 전문직 종사자, 노동계급 상층(일명 노동귀족), 혹은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 들을 일컫는 말이었다(자영업자를 구 중간계급, 전문직을 신 중간계급이라고 부름). 물론 관리, 전문직 종사자들이 일반적인 노동계급보다 더 부유할 가능성이 크지만 반드시 소득 수준이나 소유하고 있는 자산을 가지고 분류하지는 않았다.

물론 사회학자마다 이 중간계급이 무엇이냐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 다음과 같은 지표에 합의하고 있다.

1) 고등교육 이수
2) 아카데믹(학위, 교원자격), 법조, 전문기술, 의료, 정치, 행정 등의 자격 보유(놀고 있거나 가난하더라도)
3) 주택 보유, 안정적인 직장과 같은 부르주아 가치에 대한 믿음
4) 사용하는 언어습관, 교육받은 장소, 가족이나 지인들의 수준, 직업 등 사회적 요인
5) 문화 생활의 종류

여기에 경제적인 지표가 없는데, 굳이 집어 넣는다면 OECD기준인 중위소득의 50%~150% 범위 안에 있는 가구가 중산층이다. 우리나라의 가구 중위소득은 2011년 기준으로 월 350만원 정도다. 따라서  월 가구 소득 175만원~ 475만원, 2년동안 경제가 성장했다고 치고 넉넉 잡아 200만원~500만원의 월소득을 올리는 가구가 경제적으로는 중간계급이다.

그런데 연봉정보 사이트에서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뭐라고 대답했나? 월 급여 500만원이상이라고 한다. 가구 소득도 아니라 월 급여 500만원 이상이니 가구 소득은 700만원 이상을 바라보는 모양인데, 이건 중산층의 기준이 아니라 상층의 기준이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잘 살지 는 않는 나라다. 월급여 500만원에 부채없는 30평대 아파트에 현금 1억 이상 보유하고 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상위 10% 이내에 훌쩍 들어간다. 통계자료를 100번을 뒤져도 틀림없다.

그런데 이 따위 기준을 중산층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진짜 중산층들은 기가 죽고 맥이 풀리며, 자괴감에 빠지고 마침내 분노를 느끼며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성화를 퍼부어 댄다. 아무리 생각해더 저따위 기준은 중산층들에게 노동력을 더 쥐어짜기 위한 공작에 불과하다. "너 아직 멀었으니 더 일 해라, 더 많이 일해라. 그리고 너의 자녀들은 더 많이 공부시켜서 중산층 한 번 시켜 봐라. " 이런 음험한 목소리가 마치 들리는 듯 하다. 아니면 현대 그룹에서 사주했나? 집 사고, 차 사라고? 그럼 전화기는?

강조하는데, 중산층의 기준은 소득 보다는 직업, 학력, 문화다. 설사 소득기준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저 위의 한국 중산층의 기준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눈이 높고, 경제적으로 욕심이 많은 한국인들의 특성, 일제시대때 부터 왜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된 "조선인은 눈은 높아 욕심은 많으나 막상 성공할 재주를 갖추려고는 하지 않아 사기 쳐먹기 매우 쉬운 족속"이라는 기질의 증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중산층의 기준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건 사회적, 문화적 기준의 중산층을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저 내용 그 자체에 크게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저 내용들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고등교육이 중요시 하는 가치들이다. 영국은 합리적 비판적 논리적 교육을 강조하고, 프랑스는 예술적, 정의적 교육을 강조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니 저 기준이 보여주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중산층의 기준을 주로 고등교육 이수와 중산층 문화에서 보고 있고, 저 위의 기준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기대하는 행동양식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써 놓은 것이다.

자, 이제 우리나라 중산층을 제대로 정의내리자. 저 연봉사이트의 얼토당토 않는 기준, 영국과 프랑스의 과장된 기준도 버리자. 그렇다면 대충 다음과 같은 소박한 기준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1) 경제적 기준: 가구 월 소득 300-500만원
2) 학력 기준: 4년제 대학 졸업
3) 자기 집 보유하고 있거나 이를 마련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과 예금이 가능함
4) 안정적인 직장을 보유하고 있거나 이를 얻을 수 있는 전망과 계획이 있음
5) 생업과 무관한 취미를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 기능을 익히고 있거나 그럴 여력이 있음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뭔가 멋진 문화적인 내용도 넣고 싶지만, 중산층은 상대적 개념이다. 그 나라의 중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이 저 두 나라와는 비교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웃어 넘기고, 이 정도만 남겨 두자. 자, 당신은 어떤가? 이만하면 충분히 중산층인가? 사실 한국에서 이 정도로 살기도 무지무지하게 어렵다. 그러니 제발 30평 아파트, 자산 10억 따위 헛소리는 중산층 기준에서 모두 지우자.

참고로, 미국에서는 미래를 계획하고 이를 위해 당장의 지출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매우 중요시 한다. 이는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소득 수준, 그리고 자신의 자산을 계획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문화, 교육 수준을 모두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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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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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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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