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국격을 북한, 캄보디아 격으로 떨어뜨리자는 소리

한때 완전히 사라진 단어였던 국정교과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수준 이하의 한국사 교과서 하나(교학사)를 지키고자 교육부가 8종 교과서 전체에 수정 보완을 지시하며 시작된 물타기가 이제는 8종 교과서가 모두 오류가 있는 것은 검인정 제도 자체의 문제라는 식으로 덤터기로 발전하더니, 아예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자는 종점에 도달했다. 보수 교육 단체, 새누리 당은 물론 이제는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이런 여론을 조장하고 있다. 얼마나 더 시대를 역행해야 이들의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 멈출 것인지 걱정될 지경이다. 어쩌면 국민소득이 1000달러 수준으로 내려 앉아야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국정교과서가 낯선 세대들을 위해 용어 설명을 하자. 현재 교과서는 소정의 검인정만 통과하면 여러 출판사가 자유로이 발행할 수 있으며, 학교에서 이들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 제도가 도입되면 국가가 지정하는 하나만 교과서가 된다. 즉, 학교에서는 국가가 지정하는 단 하나의 교과서만 가르치라는 것이다. 대입이 절대적인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교과서 발행을 관장한다는 것은 국가가 지식을 관장하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

이는 파시즘의 전형적인 정책이다. 예컨대 북한은 현재 모든 교과서가 국정이며, 우리나라도 5공화국 까지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가 국정이었다. 현재도 북한, 필리핀, 캄보디아 등 독재국가나 저개발 국가에서나 국정교과서 제도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민주화 이후 국정교과서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과목명도 일본 제국주의가 붙인이름인 국사에서 한국사로 바뀌었다. 국정교과서의 폐지는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그리고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다는 헌법 정신에도 부합한다. 국가가 교과서를 직접 관장하는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자주성을 그 밑둥에서부터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제도조차 헌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있다. 어떤 책이 교과서로서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이 자주적이고 전문적으로 결정할 일이지, 국가가 나서서 교과서로서의 자격 여부를 결정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검인정 과정의 문제를 트집삼아 국정교과서로 회귀해야 한다는 일부 보수단체와 정부의 주장은 시대를 거스를 뿐 아니라 해괴하기까지 하다. 설사 검인정 과정이 허술하여 수준 이하 교과서가 통과된다 하더라도(예컨대 이번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그것이다), 여러 종의 교과서가 발행되는 체제에서라면 일선학교 교사들이 그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식민통치와 제국주의를 미화해서 물의를 일으킨 일본 후쇼사 역사교과서가 일선 학교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은 것이(채택률 0.4%) 그 좋은 사례다. 만약 국정교과서 체제였다면 단 하나뿐인 교과서가 수준 이하의 교과서일 경우 다른 대안이 없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입게 된다. 그러니 무엇을 가르칠지, 그리고 어떤 교과서가 가르칠만한 것인지 여부는 헌법에 따라 교육 전문가인 교사들에게 맡길 일이지, 정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다.

그러자 일부 보수단체들은 현재 검인정 교과서 체제에서는 전교조 교사들이 집필한 교과서를 일선학교 전교조 교사들이 채택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도 다르지만 설사 사실이라 할지라도 소위 보수 교육자들의 실력부족을 고백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전교조 교사는 전체 교사의 1/4에 불과하다. 반면 자기들 자랑대로 보수단체인 교총은 1/2 의 교사들이 가입해 있다. 그러니 전교조성향의 교과서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소위 보수 교육자들도 모여서 자기들의 교과서를 만들면 그만이다. 산술적으로는 보수성향 교과서가 진보성향 교과서보다 훨씬 더 많이 발행되는 것이 정상이다.그러니 검인정 제도는 특별히 보수에게 불리하지 않다. 만약 보수성향 교과서보다 소위 전교조 성향의 교과서가 더 많다면 이는 전교조 교사가 교총 교사보다 더 실력이 있다는 증거일 뿐 국정교과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전교조가 학교의 교과서 채택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주장도 궁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총 교사가 전교조 교사보다 그 수가 훨씬 더 많다. 그러니 전교조가 좌파 성향의 교과서가 채택되도록 학교에서 압력을 행사한다는 주장은 교총 교사들이 전교조 교사들보다 게으르다는 것을 증명할 뿐, 국정교과서의 필요성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국무총리와 보수세력에게 역사의 교훈 하나를 알려주겠다. 우리나라에서 민주화 운동, 혹은 지금 정부의 눈으로 볼 때 소위 좌경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대는 1980년대다. 그럼 그때 그 젊은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소위 좌경사상을 배웠을까? 그 시절은 초, 중, 고등학교까지 모든 교과서가 국정이었다.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국정 국어, 국사 교과서로 배웠고, 교련수업까지 받았다. 그때는 전교조도 없었다. 좌파적인 내용의 수업은커녕 토론식 수업을 했다거나 협력학습을 했다거나 학생들에게 풍물을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교사가 해직되던 시절이다. 정흥원 총리나 지금 정부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인 학교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정으로 배우고 전교조 없는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격렬한 반정부투쟁을 했고, 아직도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역설적이지 않은가? 누가 그들에게 좌경 사상을 가르쳤는가? 바로 전두환이다. 그들은 어떤 책으로 좌경사상을 배웠는가? 군부독재에 허덕이던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즉, 특정한 교직단체나 교과서가 아니라 억압과 착취가 만연하는 사회 현실이 바로 젊은이들을 좌파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억압과 착취가 온존하는 한, 심지어 점점 늘어나는 한 교과서가 국정이다 아니다는 논란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시민적의 자유가 계속 위축되고 삶이 점점 고단해 진다면 교과서가 아무리 국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시험 때 외우고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거짓말들에 불과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보수단체와 정부는 이 교훈을 잊지 말기 바란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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