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의 서거 소식에 기쁨의 변증법으로 추모한다

넬슨 만델라가 세상을 떠났다. 내 평생 나침반으로 삼아온 세명의 M이 있다. 모차르트, 마르크스, 그리고 만델라다. 그 중 유일한 생존 인물이었던 그가 이제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 그는 이미 역사 속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구태여 추모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는 살아 생전에 이미 만신전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델라가 나에게 지표가 되었던 까닭은 그의 불굴의 투쟁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굴할 줄 아는 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인류의 최소한의 보편적 가치 이외에는 어떤 도그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든 그 장소와 시간에 맞는 인간 존중의 길을 찾아서 실천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부정변증법적이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의 변증법이고 긍정의 변증법이다.

부정변증법과 기쁨이라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좌파 지식인들 중 가장 염세적이고 우울한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결국 문제는 문화라는 것" 을 밝혀낸 큰 업적을 남겼다. 문제는 문화예술이 자본에 의해 문화산업으로 포섭되었다는 것이며, 몇 안 남은 문화의 만다린들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벤야민에게는 이것이 아우라가 사라지는 긍정적인 현상이었겠으나, 아도르노에게 이는 몰개성한 대중의 전체주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절망적인 현상이었다. 이 세상 곳곳이 체제와 자본에 의해 장악당해 버렸으니 아직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할 수있는 일은 소스라치며 절규(이디오신크라시)하고 어렴풋한 희망을 모방하는 것(미메시스) 뿐이다.

그의 제자 하버마스는 그 절규를 의사소통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절망의 벽을 넘으려 했다. 그런데 의사소통행위로 절망의 벽을 넘으려면 사람들의 소통적 합리성을 전제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전제하는  순간 체제, 자본에 의해 왜곡된 문화를 비판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가장 중요한 의의가 흔들리고 말았다. 결국 그 역시 소통적 합리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에 의한 의사소통구조의 왜곡을 비판하는 쪽으로 가다가 급기야는 일상 담화 비판으로 선회. 사실 이런 일상 담화 비판, 특히 화용론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거대담론에 매몰된 진보이론들이 보지 못한 지점들을 많이 드러낸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바로잡으면 세상도 바로잡힐까 하는 의문 앞에서 여전히 무력하다.

이제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가서 아도르노가 절망했던 그 지점에서 다시 고민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분명 그 통곡의 벽을 넘기는 했지만 다만 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역시 문화를 응시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로큰롤 혁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 돌파구다. 물론 아도르노도 로큰롤 음악을 경험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혁명적인 힘을 보는 대신 자본에 의해 표준화되고 대량생산되는 문화상품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로큰롤은 분명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모든 요소의 총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큰롤은 끊임없이 자본주의의 아픈고리를 두드리는 갈고리가 되며, 그것을 절규가 아니라 흥겹게 춤을 추며 해낸다.

그래서 로큰롤의 본고장이었던 미국, 그리고 그 근방인 멕시코에서 아도르노의 진정한 계승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파티스타 부사령관인 마르코스다. 흔히 사파티스타를 총질하는 게릴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은 전세계를 상대로 활약하는 문화게릴라였다. 그들이 정말 총으로 승부를 봤다면 진즉 모조리 토벌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르코스의 여러 저작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 낙관성, 간결한 심미성, 그리고 유머다. 그들은 절규하는 대신 노래했고, 소스라치는 대신 춤을 추었으며, 어렴풋한 희망을 모방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네그리도 비슷한 귀결에 도달했다. 네그리 사유의 특징은 긍정의 변증법이다. 기존의 변증법은 항상 정립된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세우지만 네그리의 사유는 정립된 것을 이용하거나 연장하여 혹은 그 너머에 새로운 것을 세운다. 즉 굳이 부정, 반정립 할 이유가 없다. 이건 실천적으로 매우 무서운 사유방식이다. 만약 자본이 어떤 억압장치를 만들면 노동자는 거기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슬그머니 자기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아예 그걸 생까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나선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역시 이름이 부정이지 사실상 긍정 변증법이다. 아도르노는 정립된것, 기존의 것에 대한 반정립, 반대라는 의미로 부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그건 아니라는 의미로 부정을 사용했다. 그건 아니다. 그럼? 난 새롭게 하겠다. 이 새로움은 그것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과 다름, 그것 너머의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것 역시 정립되는 순간 부정되고 나는 또 다른 새로움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게 부정변증법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사유인 것이다.

한참 먼 길을 돌았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철학적 논의 따위 하지 않고서도 이 부정변증법에 가장 전범이 될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만델라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응용하고 어떤 장벽에 부딪쳐서도 그 너머를 응시했던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이룩한 것을 완수되는 즉시 부정하고 그 너머를 다시 바라보았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많은 혁명가들이 이른바 해방 이후 압제자로 전락한 것과 달리 그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영화 사라피나는 그런 점에서 만델라에 대한 거대한 찬송가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소울 계통의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흥겨운 춤곡들이다. 이들은 이 속에 분노와 울분을 감춘다. 이들은 분노를 말하지 않고 그것이 극복된 그 이후를 그려나간다. 탱크와 총칼 앞에서도 이들은 춤을 춘다. 이들은 탱크와 총칼 너머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것이 두렵지 않다. 현실의 장벽은 이미 부정되었다. 그리고 부정된 것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사라피나에 나오는 노래들을 만델라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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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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