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에 일침을 놓은 "안녕하시냐고 묻지마라"라는 글, 미안하지만 꼰대짓 맞다.


요즘 "안녕하시냐?" 대자보가 대세다. 대학생에서 중고등학생, 주부, 성매매여성까지 곳곳에서 대자보가 등장하고 있다. 대자보 열풍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 모였다하면 숟가락 얹기 도사들인 기존 운동권, 기존 진보진영의 꼰대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진솔하게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생산한다 하더라도 대중에게 호소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사투리로 이야기 하기 때문에(미국, 계급, 민중 등에 만사를 환원시키는), 스스로 손글씨로 장문의 글을 설득력 있게 써야 입장권이 주어지는 대자보 행렬에 끼여 들수도 없고, 끼여 들어본들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강변하면서 듣지 않는 청중들에게 '너희들이 잘 몰라서', '아직 어린 것들이라', '개념이 없어서' 등의 이유를 대며 혀를 찬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를 일컬어 '꼰대질'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운동권, 진보진영에 모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꼰대질' 이다.


그런데 최근 또 다시 꼰대질 논란이 일어났다. '민중언론 참세상'에 실린 박병학의 '안녕하냐고 묻지마라'라는 칼럼 때문이다. 이 칼럼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서 내 소견을 밝혀보려고 한다. 원문에는 숫자가 없지만 편의상 내가 붙였다. 원문을 보고 싶은 분은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기사 원문 링크: 원래 나는 진신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 글을 조곤조곤 씹는 버릇은 없다. 그러나 교육자의 입장에서 젊은이들의 그나마의 항변에 가슴아파하기는 커녕 냉소와 지적질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위선으로 몰아붙이는 글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도 없다. )


1. 20대라는 건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라고 해서 어떤 공통성을 가정할 수 없다. 젊은이들 한 떼거리를 20대라고 부르는 순간 성별, 인종, 성적지향, 무엇보다도 계급의 문제가 사라진다. 20대라고 다 같은 20대일까?(필자 주: 부르주아의 자식도 있고 노동자의 자식도 있지 않겠는가?)

이건 운동권의 정말 해묵은 논리다. 이 글에서는 성별, 인종, 성적지향도 점잖게 한 자리를 주었지만, 페미니즘 초창기에만 해도 '여성'이라고 다 똑같냐,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통성을 상정하면 계급차별을 희석시키며,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포섭된다 따위의 비판이 빗발쳤었다. 교육운동에서도 "아이들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계급도 차이도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엾다라는 말 속에서,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 속에서 교사들은 자신의 소부르주아적 감상을 정당화 한다."라는 식으로.  
물론 젊은이를 꼭 20이라는 숫자로 한정짓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성별, 인종, 성적지향, 계급은 공통성을 설명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되는데 유독 '젊은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통분모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신좌파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68혁명도 계급의 혁명이 아니라 세대의 혁명이었고, 복지 혜택 감소를 반대하며 나라를 뒤엎었던 그리스나 프랑스의 대규모 시위도 기본적으로 세대의 갈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운동권은 흔히 한줌의 부르주아라는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젊은이(20대라는 숫자가 의미 없다고 치면)들 중 부르주아의 자녀 역시 한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30대 기업의 영업이익을 모조리 합쳐도 삼성전자 하나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1998년 이래 중산층이 사실상 붕괴해 버린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라고 다 같은 젊은이인 줄 알아?"라고 할 수 있는 부르주아 청년이 있어야 얼마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젊은이는 노동자의 아들딸이며 노동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정규직을 차지한 기성세대들(그들도 노동자다)의 무관심 속에 젊은이들의 미래는 점점 옹색해지고 있다. 젊은이라는 공통성으로 뭉칠 이유가 충분히 되지 않는가?
 2. 그래도 대학에 다니는 ‘20대’들은 대자보라도 붙여서, 안녕하지 못하다느니 부끄럽다느니 지껄일 수도 있고 ‘시대에 정직하게 응답하는’ 젊은이인 것처럼 스스로를 꾸밀 수도 있지만, 대학 문턱에도 가지 못해 책 끼고 다니며 술이나 처먹는 대학생들 말고 기계 돌리며 쇳밥 먹는 젊은이들은? 밭 갈고 소 먹이는 젊은이들은?

이건 80년대, 아니 넉넉히 잡아 90년에나 통하는 논리다. 그때는 분명 대학생이라는 것은 젊은이들 중 특권층이었다. 나는 80년대때 파업 투쟁중인 공장에 지원투쟁을 다니면서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어린 노동자들과 많이 만났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 진학률이 86%나 되는 시대다. 대학 근처도 못가서 기계 돌리며 쇳밥 먹는 젊은이들을 대학의 낭만이라며 책 끼고 술이나 처먹는 젊은이들과 대비시킬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계 돌리며 쇳밥먹는 일자리를 우습게 아는데, 요즘 세상에 그런 일자리 자체가 희귀하며, 그럴 능력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갑이다. 대학생들하고 비교도 되지 않는 위치란 뜻이다. 청소공무원 모집에 대졸자들이 무더기로 응모하는 시대다. 학교 청소원과 청소공무원의 차이는 하는 일이 아니라 정규직이냐 아니냐에 있다. 대학생 중에서도 정규직이기만 하다면 기꺼이 쇳밥 먹는 젊은이 행렬에 가세할 젊은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오히려 기계에서 쇳밥먹는 젊은이들은, 밭갈고 소먹이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연대체가 있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조직이 있다. 그러나 막연하고 불안한 미래만 바라보며 무정형의 덩어리로 살아가야 하는 대학생들은 어디에 자기 생각을 하소연할까? 


3.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자보 써 붙이고 국정원 댓글, 쌍용자동차, 밀양송전탑, 철도 파업 등등 굵직한 화젯거리들을 갖다붙이지만 그런 대자보조차 쓸 수 없는 다른 젊은이들에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이 깔고 앉아 있는 방석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때때로 부끄러움을 똥처럼 한 무더기씩 싸 놓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딴청을 피울 것이다.

대학생들은 대자보씩이나 쓸 수 있는게 아니라, 대자보 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누구를 신경써 주는가? 그나마 대자보에 취업난, 청년실업 등등의 이야기만, 즉 자기들의 어려움만 쓰지 않고 쌍차, 철도 등 공공의 문제, 즉 남의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이 기특하지 않은가? 여기에 칭찬은 하지 못할망정 똥 타령까지 하면서 비아냥 거릴 것은 뭔가? 지금 이 대자보가 똥 무더기로 보이나? 그들이 부끄러워서 대자보를 쓴 것으로 보이나?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배설하기 위해? 하나라도 작은 공통성의 단초가 있으면 그것을 찾아 연대를 넓혀나가는 것이 진보와 좌파의 미덕일텐데, 저리 베베꼬인 똥 같은 마음으로 무슨 운동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진신류가 1%의 지지에서 맴돈다고 말하면 듣기 좋은가?


4. 그들이 정말 부끄럽다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책임지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다. 아니, 방법이라기보다는 시작이라고 해야겠다. 대학을 당장 그만두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끝내 가지 못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대학과 함께 지긋지긋한 토익과 상식 공부도 시원하게 때려치우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스스로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편굴 같은 도서관을 뛰쳐나와 삶다운 삶을 살아 보는 것이다. 마음껏 시간을 낭비해도 되고 실컷 게을러져도 되니 자신이 하고 싶은 무언가를 틀어쥘 때까지 안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실업급여나 법정 최저임금으로 살아 보는 것이다.

자기가 못한 일을 왜 남더러 하라고 하는가? 지금 대학생이 법정 최저임금으로 살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알바하는 대학생들이 휴가비, 명품 가방비 벌려고 알바하는 것으로 보이나? 이미 최저임금, 아니 그 이하의 시급 받으며 고생하는 젊은이들이 대학생들이다. 참고로 실업급여는 이미 받던 임금이 있어야, 즉 일단 취업을 해야 받는 돈이다. 여기가 유럽인줄 아나?


5. 안녕하시냐고 묻지 마라. 어차피 다들 안녕 못한 거 알고 있잖은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누구와 함께 뭘 먹고 살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대자보 쓸 시간에 그냥 토익 책을 보든가 잠을 자라. 그게 오히려 스스로에게 더 솔직해지는 길이다. 어쩜 말을 그딴 식으로 할 수 있냐고 내게 따지기 전에, 이렇게 함부로 말하고 있는 내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 뭔가를, 서걱거리기만 하는 대자보 한 장보다 더 힘차게 펄럭일 수 있는 뭔가를 내게 보여 달라. 부끄러움에 푹 파묻히지 말고 더 뜨거운 무엇으로 스스로를 그득히 채운 모습을 보여 달라. 제발 부탁이다.

선생 중에, 선배 중에 제일 재수 없는 인간이 "껍냐? 그럼 날 이겨 봐" 라고 말하는 무리들이다. 아니 못 이기니까 학생이고 후배지. 지금 이걸 말이라고 하나? 철학 공부 좀 했다면 아포리아를 알 것이다. 모든 행동의 출발은 그 곤혹, 부끄러움, 난관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포리아를 느끼는 사람에게 부끄럽냐, 집어쳐라 하지 않고, 자, 그럼 같이 구도의 길로 가자며 권유를 했다. 부끄러움은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거기다 대고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라고? 이건 마치 100점 맞을 자신 없으면 공부하지 마 하는 것과 같은 말 아닌가? 그러니 어쩜 말을 그딴 식으로 할 수 있냐고 따지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말 하는 내 코를 납작하게?" 라는 자뻑은 또 뭔가? 필자 말대로라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젊은이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 필자가 능력있고 필력있는 진보 지식인이라면(만약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공연히 지면 낭비하지 말고 언론사의 한정된 공간에서 물러 날 일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을 모욕해서 그마저도 못하게 기를 죽이는 것잉 니라,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부끄러움의 대열로 끌어 내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6. 끝으로 궁금한 점 한 가지, 젊은이들에겐 대자보와 인터넷이라도 있지 나이 마흔이 넘은 어르신들은 끓는 속을 어디다가, 누구에게 풀어야 할까? 스스로를 기성세대라 부르며 젊은이들에게 괜히 미안해하는, 그리고 그 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그 어르신들은?

에라, 이 인간아. 별 걱정을 다 한다. 내 나이 며칠 뒤면 마흔 일곱이다. 이딴 소리 듣고싶지 않다. 2008년 촛불이나 아니면 당장 오늘 오후에 시내 나가 봐라. 태반이 마흔 넘은 어르신들이다. 그리고 마흔 넘은 어르신들 인터넷 잘 하고, 대자보는 원조다. 2008년 촛불이 꺾이고 진보지식인이란 작자들이(주로 진신류) 입을 쳐 닫을때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블로그 쓰고 트위터 하면서 힘을 길러간 사람들중 태반이 40대다. 그래 자네 말대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괜히 미안해하기나 하고 부끄러워 하기나 한다. 그래서 대자보에 뭐라도 화답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감정의 똥 취급하는 자네는 대체 그런 글로 뭘 얻고자 하는가? 대자보가 싹 사라지길 원하는가, 아니면 대자보 썼던 젊은이들이 자네 글에 자극받아 대학 때려치우고 사파티스타라도 되기를 원하는가?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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