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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A보고서에서 등수만 보지말고 분석을 보자. (신문이 보도하지 않는 것들)

PISA 2012 결과가 나왔다. 피사 보고서는 모두 네권이나 되는 매우 두툼한 보고서로, 피사 점수(performance) 뿐 아니라 여러가지 변수들을 종합하여 교육정책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효과가 있거나 없는지 판단하기 위한 연구결과로서 꼼꼼하게 읽어볼 가치가 있다.게다가 2003년에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지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일종의 종단연구로서의 가치도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를 읽을때는 여러 변수들간의 관계, 그리고 10년간의 시계열 자료 등을 따져봐야 그 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역시나 이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 나와 있는 등수에만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면서 진보들이 칭찬하던 핀란드의 등수가 하락한 것을 보고 "얼씨구나"하는 반응이다. 여기에 대해 진보교육계에서는  피사라는 평가에 교육이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원론적 반발로 대응하고 있다. 두 입장 모두 너무 피상적이거나 너무 추상적이다. 피사 보고서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네권짜리를 다 읽을 여유가 없어서 '수학' 영역에 대해 분석한 1권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동아시아 부국들이 절대적인 강세를 보이는 점수



먼저 한국인들이 가장 관심있어하는, 그리고 이것만 보면 그 뒤는 안보고 제끼는 등수. 일단 순위가 높다. 샹하이-차이나는 빼자(상하이에 살고 있는 농민공들의 자녀까지 포함한다면 절대 이 퍼포먼스 나오지 않는다. 이런식이면 우리나라도 강남3구만 따로 시험치게 할 수 있다). 그럼 1. 싱가폴, 2. 홍콩, 3. 대만, 4. 한국, 5. 마카오, 6. 일본 순으로 상위권이 매겨진다.







이 순위를 보면 한 마디로 아시아 부국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그 다음은 서유럽과 북유럽, 그 다음은 동유럽과 남유럽, 이런 식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높은 순위는 우리나라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동아시아의 특징이다. 생뚱맞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베트남을 보라. 저 역시 동아시아 문화권의 효과다. 베트남이 말레이지아만큼만 살았어도 아마 10위권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2. 못살아도 공부 시키고야 말겠다는 집념



피사 연구진은 만만하지 않다. 그냥 아, 선진국들이 공부 잘하네, 그리고 선진국 중에서는 동아시아 선진국이 잘하네, 이러고 넘어가지 않는다. 물론 사회-경제적 지위가 학업성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정설이기는 하다. 그러나 피사연구진은 학생들의 성취도 중 사회-경제적 지위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지를 분산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가 다음의 그래프다.





이 그래프에서 좌상단에 있는 나라들은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성적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나라들 중 공부를 잘하는 나라들, 좌하단에 있는 나라들은 공부를 못하는 나라들이다. 우상단에 있는 나라는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성적에 영향을 적게 미치는 나라로서 공부 잘하는 나라, 우하단은 공부 못하는 나라다. 좌하단에는 나라들이 빽빽한데, 좌상단에는 한산하다는 것은 빈부차가 학업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 중 공부 잘하는 나라가 있기 어렵다는 뜻이다.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대체로 우상단, 즉 빈부차가 학업성취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성적도 높은 나라에 속해있다. 대만과 싱가포르가 빈부차 효과가 비교적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이 두 나라가 비록 작지만 꽤 복잡한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이다.(대만은 9개나 되는 소수민족, 그리고 중국어보다 대만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남부지방 등의 문제: 만약 시험문제가 중국어로만 나왔을 경우 점수에 영향을 줌/ 싱가포르는 말레이계의 문제: 시험문제가 영어나 중국어로만 나왔을 경우 점수에 영향을 줌) 또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나라들은 우하단에 주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잘살거나 못살거나 죽기살기로 공부해서 점수가 높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나라들은 잘살거나 못살거나 지지리도 공부 안해서 골고루 점수가 낮고, 서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균형점에 위치해 있고, 남유럽과 중남미는 안습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자, 이제 동아시아 선진국의 높은 점수가 이들이 잘살아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의 점수를 이토록 높여 놓았을까? 우선 우리나라의 경우를 설명하는 것은 쉽다. 다음 그래프들을 보라.





이 그래프 중 위의 것은 자녀가 서른살이 되었을때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비율을 보여준다. 여러나라 비교하면 복잡하니까 우리나라와 독일만 비교하자.  우리나라 부모는 겸손하게 60%만이 자녀가 전문직이길 희망한다. 독일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아래 그래프를 보라. 자녀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갖기 바라는 부모의 비율은? 우리나라가 80%를 넘어서 당당 1위로, 전문직에 종사하기를 바라는 학부모보다 훨씬 더 많다. 반면 60%의 부모가 자녀가 전문직이기를 바랬던 독일의 경우 대졸 희망은 30%를 조금 넘는다(!!). 이 극명한 차이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전문직이 되지 않을 학생들도 대학을 나와야만 하고, 독일은 전문직에 종사하고자 하는 학생들도 굳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직종이 전문직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한국은 일반적인 직장이라도 잡으려면 대학을 나와야 하고, 독일은 심지어 전문직이 되는데도 굳이 대학이 필요 없을수도 있다는 뜻이다. 자, 그럼 어느나라 학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빡세게 시키겠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다.


3. 그래서 불행한 우리 학생들



우리의 높은 교육열은 결국 삶의 절박함에 의해 강요된 불안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다음 그래프는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한 학생들의 비율을 가지고 매긴 순위다.




이 그래프를 보면 특이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아시아 선진국은 모두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OECD평균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 학교라면 이지메를 떠올리지만 일본 학생의 80% 이상이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싱가폴, 홍콩, 대만 다 마찬가지다. 오직 우리나라면 60% 의 학생이 그렇다고 응답하여 압도적인 차이로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결과를 거칠게 해석하면 홍콩, 싱가폴, 대만, 일본 학생들은 즐겁게 공부도 잘하고,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는 잘하는데 불행하다. 도대체 왜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전혀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는지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



(참고로 핀란드 학생들도 60% 대의 학생만 행복하다고 응답해서 하위권이라는 것인데, 이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다른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80% 이상과 상당히 다른 결과다.)



4. 동아시아의 높은 학업성취는 지속가능할까?



많은 학부모들(자기 아이는 잘할거라는 착각에 빠진)을 현혹시키는 환상중 하나가 수준에 맞게 분반수업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억측이다. 그러나 10년간의 시계열자료는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의 그래프를 보라.




오른쪽으로 갈수록 수준별 분반수업을 강화했다는 뜻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학생들의 학업 동기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이 둘간의 관계는 정확하게 반비례를 그리고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꾸 영미식 신자유주의 타령을 하는데, 정작 미국과 영국은 수준별 분반수업을 가장 추진하지 않는 편에 속하며, 덕분에 학업동기 하락을 크게 겪지 않았다. 희망이 있고 지속가능한 것이다. 물론 북유럽 나라들 역시 수준별 분반수업을 그다지 시행하지 않았고, 높은 학업동기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수준별 수업을 어느정도 진행 한 것으로 나오며, 그 결과 기대값보다 훨씬 큰 학생들의 동기저하를 겪고 있다. 이들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10년간 학생들 학업동기가 하락한 것으로도 상위권에 포진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꾸준히 학업동기는 하락하고 있는데, 학업성취는 향상되고 있다? 학생들의 머리가 점점 더 좋아졌다거나, 아니면 선생들이 훨씬 더 우수해졌다거나 하는 변수가 없다면, 이건 갈수록 점점 더 빡세게 공부를 시켰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를 속단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동아시아 선진국들의 현재의 높은 학업 성취는 앞으로 지속가능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 높은 학업성취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 억지로 갈궈서 얻어진 성취이며, 그 댓가로 여러 인성 문제, 자살, 가정파괴 등의 부작용을 남기고 있는 성취인 것이다.



5. 교육복지와 교육성취는 함께 간다



다음 그래프도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 그래프의 가로축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교육 형평성이 높아지는 것, 즉 교육자원이 여러 계층에게 골고루 할당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로축은 피사 성취도다. 흔히 형평성과 효율성을 이야기하면서 이 둘을 상충관계로 보는 경제적 관점이 있다. 그러나 이 그래프는 교육에서는 형평성과 효율성이 동시에 성취가능하다는 것을, 아니 형평성이 커질수록 효율성도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래프의 직선을 경계로 위에 있는 나라들은 그 나라 교육형평성에 비해 교육성취가 높은 나라, 아래에 있는 나라는 형평성에 비해 성취가 낮은 나라다. 이걸 아주 상세히 볼 필요는 없고 멀리 떨어져 있는 극단값이 그렇다는 뜻이다. 예컨대 샹하이는 교육형평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성취도가 높다. 대만, 베트남, 홍콩, 싱가폴, 한국, 일본도 그러하다. 나라에서 교육자원을 공평하게 분배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들 어떻게든 공부 시킨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교육형평성이 비교적 높은 나라에 속하지만(역설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학생들이 많은 지역 공립학교에 서울대 출신 교사들이 가장 많다는...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그 형평성에 비해 훨씬 높은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 교육의 지속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게 결국 사교육으로 등골이 휘고 있단 뜻이니까. 이건 지속가능하지 않다.한마디로 오버페이스 중이란 뜻이니까. 이 오버페이스를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다. 가계파산, 청소년 자살..... 그리고 대학만 들어가면 그만인 공부. 만약 PISA가 25세를 대상으로 다시 35세를 대상으로 실시된다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대한민국 어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반면 핀란드를 보라. 교육형평성이 가장 높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는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핀란드는 이번에 성취도가 2009년보다 떨어지자 몇년 사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불평등이 다소 심화된 탓이라고 바로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형평성을 다시 높이면 성취도도 다시 회복된다고 바로 해법이 나온다. 이건 지속가능하다.







6. 교사 월급의 2중성



마지막으로 조금 낯 뜨겁지만 교사의 처우에 대한 부분. 아래 그래프를 보자. 가로축은 교사의 보수가 그나라 평균소득보다 얼마나 더 많으냐 하는 것이다. 100이하면 평균 이하란 뜻이다. 그리고 세로축은 피사 점수. 얼른 보면 아무 경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나라들을 1인당 국민소득 20000달러를 기준으로 분류했을 경우는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20000달러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교사의 보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학업성취가 조금씩 떨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반면 20000달러를 넘는 나라들에서는 교사의 보수가 높을수록 학업성취가 조금씩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기울기가 매우 완만하기 때문에 이걸 근거로 교사의 보수를 높여라, 깎아라 할 수 있을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피곤하다. 그만 하련다. 하여간 이런 자료 나오면 등수만 보지 말고, 또 무조건 피사 나빠 그러지 말고 좀 꼼꼼히 살펴보자. 특히 진보진영은 이런 보고서를 읽고 고민하는 학구적인 태세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의기충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대는 진즉에 지나갔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인용한 자료는 OECD가 발간한 PISA 2012 in Focus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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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