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학생인권 조례를 개정해서 교권을 회복? 이 무슨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

12월 28일에 기미가 보이던 감기가 김빠지고 맥빠진 서울시청, 광화문 집회 갔다와서부터 기승을 부렸다. 그 와중에 12월 30일에 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 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조중동은 일제히 "학생권리만 강조한 곽노현 조례 개정예고"라는 식으로 타이틀을 달았다.

몇몇 청소년 인권운동하는 지인들이 나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감기때문인지 감기약 때문인지 머리가 도통 돌아가지 않아, 글 한 줄 쓰는데도 시간이 몇십분씩 걸려, 이제야 그럭저럭 완성하게 되었다. 칼럼 하나 쓰는데 두시간이면 충분했던 싱싱한 머리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

이하, 칼럼에 들어갈 내용이다. 칼럼이 노출되는데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 블로그로 공유시켜서 미리 미리 쓰임이 있게 하려고 한다. 


서울시교육청이 서울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서울시의회가 이것을 의결해 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교육부가 제기했던 무효소송 때문에 1년이 넘도록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이번에는 개정안 때문에 또 다시 표류할까 우려스럽다. 어쩌면 문용린 서울교육감이나 교육청의 보수층 일각은 개정안의 통과가 아니라 학칙이 제·개정되는 민감한 학년말에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대로 적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마저 가능하다.

서울시 교육청 담당자는 학생들이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를 소홀히 하여 일선 학교의 학생지도가 어려움을 겪고 교권이 실추되는 등 부작용이 있어 이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 학생인권조례는 제정되기가 무섭게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제기한 무효소송에 계류되었고, 보수적인 학교장들은 1년이 넘도록 아직 무효소송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학생인권조례를 사실상 사문화된 법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학교 현장에 제대로 적용되지도 못한 학생인권조례가 무슨 부작용을 보여 줄 수나 있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백보를 양보하여 이들의 주장대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침해되어 일정부분 개정이 필요하다고 치자. 그런데 막상 이 개정안 내용을 보면 학교장이 학칙에 따라 복장·두발 등 용모에 관한 사항을 정할 수 있고, 교사가 합리적인 의심이 있는 경우 소지품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교권강화라며 들어 와 있다. 교권의 개념을 학생들에 신체나 복장에 대한 통제권이라고 잘못 이해하지 않는 한, 혹은 교권을 학교장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라고 강변하지 않는 한 이 개정안이 교권을 강화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학생이 교사에게 대들거나 서로 얼굴 붉히는 상황을 가장 많이 만든 장면이 바로 이 놈의 복장검사, 두발검사였다. 그런데 그 복장검사, 두발검사를 교사가 소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이 복장, 두발 규정은 "학교장의 취향"일 뿐이다. 학교장의 취향이 어느새 "선악의 기준"으로 둔갑하여 모든 교사들에게 이것을 바탕으로 학생과 일대 전쟁을 벌이도록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장이 복장, 두발 규정을 멋대로 제정할수 있게 하는 것은 교권을 저 맨틀 이하까지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교권이라는 말 자체도 애매하다. 교권은 도대체 누가 가지는 어떤 권리란 말인가? 부모의 친권조차 아동의 인권을 우선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 법체계인데, 과연 교사, 아니 학교장의 교권이 학생의 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나라 법체계에서 나온 발상이란 말일까? 당연히 교권은 그런 것이 아니다.

흔히 교권이라고 부르는 권리는 대한민국 헌법 32조에서 보장하는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헌법 조항의 의미는 교육을 담당하는 전문가인 교원은 정치적 혹은 그 밖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오직 자신의 전문적인 판단에 의해 자주적으로 교육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교권은 교원이 교원-학생의 교육적 관계에 간섭하는 온갖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오직 교육전문가로서의 판단에 의해 교육할 수 있는 권리이지, 학생에 대해 더더군다나 학생의 인권을 거슬러가며 행사되는 권리가 아니다. 이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수 있는 판사의 권리가 피고인에 대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를 간섭하는 외부 압력에 대해 행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침해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일부 학생들이 학생인권조례를 오해하여 마치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처럼 굴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는 교육의 대상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며, 그 교육 역시 인권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처럼 학생들의 머리모양이나 복장을 좌지우지 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처벌하지 못하여 박탈감을 느끼는 일부 교사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일부 비정상적인 교사들의 비뚤어진 욕망의 박탈을 교권침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교권침해는 이런 것들이다. 뉴 라이트 성향의 극우 인사를 교사 연수 강사로 초빙하여, 강사보다 더 전문적이고 학식이 깊은 교사들에게 강제로 이를 듣게 한다거나, 학교장이 특정교과서를 채택 혹은 배제하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교장단 회의라는 친목단체에서 학교장들이 담합하여 법정 수업일수보다 5일이나 수업일수를 늘려, 8월 무더위가 한창일 때 개학하게 만드는 것이 교권 침해다. 공공기관 적정 실내온도 지침과 무관하게 냉난방기의 가동을 학교장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 여름에는 찜통, 겨울에는 이글루 같은 교실에서 수업하게 하는 것이 교권침해다. 장관의 생각에 따라 교육과정을 엿가락처럼 바꾸고, 학교마다 특정한 프로그램을 이행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교사가 학생들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각종 업무를 만들어 부과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교사의 전문적이고 양심적인 판단을 믿지 못하여 각종 누가기록부니 뭐니 하는 장부만 자꾸 만들어서 기록하게 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자, 그렇다면 교권 침해의 주범이 누구인지 바로 답이 나온다. 학생이 아니라 바로 교육청, 교육부의 교육 관료들, 그리고 교육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비뚤어진 정치인들이 바로 교권침해의 장본인들이다. 교권은 바로 이들의 압력으로부터 교실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교권강화를 외치는 소위 보수교육단체는 이런 교육 관료와 정치권의 압력으로부터 교권을 보호하도록 한 서울교권보호조례에 대해 거의 목숨 걸다시피하고 반대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권은 교장권, 혹은 교육 관료권에 다름 아님을 고백한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개정안을 내어 놓아도 좋다. 어차피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주장을 내어놓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라. 그냥 교칙을 마음 내키는 대로 정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교장권 회복이라고 솔직히 이유를 밝히라. 학생의 인권을 제한해야만 보장받거나 회복될 수 있는 교권이라면 그건 애초부터 교권이 아니며 병든 권리이다. 그런 권리를 교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권에 대한 모욕이며, 교사에 대한 모독이다.

----
여기까지 써 놓고 나니 약기운 때문에 잠이 쏟아진다. 그냥 여기서 덮으련다. 이른바 진보교육진영은 권재원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진영이 모른다면 나 스스로라도 나의 소중함을 알아야겠다. 따라서 좀 쉬련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블로그 주인이 쓴 책들 전체 소개
(주의) 이 블로그에 뜨는 광고는 구글이 임의로 전송하는 것으로, 이 블로그의 필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