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체벌의 사각지대, 학원. 학부모의 관심만이 답이다.

미디어 오늘에 기고했던 컬럼인데, 데스크에서 실어주지 않아서, 블로그로 옮깁니다.

70, 80년대에 중,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대부분 체벌에 대한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피해자였던 경우도 있고, 친구가 매 맞는 것을 보고 떨었던 경우도 있겠지만, 어느 경우나 불쾌한 경험이긴 마찬가지다. 체벌의 양태도 다양했다. 손바닥을 회초리로 몇 차례 얻어맞는 것은 기본이고, 거의 각목에 가까운 몽둥이로 10회 이상 얻어맞거나, 이마에 불이 번쩍 하고 느낄 정도로 손바닥으로 뺨을 맞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심한 경우는 손과 발이 모두 동원되어 교사의 분이 풀릴 때 까지 무차별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학교에서 체벌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진보교육감을 중심으로 체벌을 엄격하기 단속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하는 법령까지 갖춰졌기 때문이다. 현재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는 신체나 도구를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를 직접 가격하는 처벌을 금지하고 있다. 물론 체벌이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며, 순천 모 고등학교의 어이없는 사건도 있었지만, 적어도 수도권 지역에서는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지는 추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있다.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학원에서의 체벌이 수면위의 문제로 떠올랐다. 숙제를 해 오지 않았다고 학원강사가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매를 때렸다거거나, 자습실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학원 직원이 이가 부러질 정도로 뺨을 때렸다거나 해서 노출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문제집을 풀게 해서 틀린 개수대로 매를 때리거나 하는 경우가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학원 강사들의 신분이 공직자가 아닌 사인이고 학원은 공공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민형사상의 소송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를 구제할 수 없고, 학원에 관리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런데 두드러진 상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치 2주 이상의 상처가 나 형사고발이 가능할 정도의 두드러진 체벌만이 간혹 수면위로 노출될 뿐이다. 그 외에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원 강사의 체벌은 사실상 아무런 제재 방법이 없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상해 여부와 관계없이 법령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 결과는 공교육의 비정상화다. 학생들은 학원 숙제를 하지 않거나, 학원 시험에서 점수가 떨어지면 매를 맞기 때문에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특히 국영수사과 이외에 입시와 무관한 학교 교과 시간은 으레 학원 숙제를 하거나, 학원 시험공부를 하는 시간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그러다 걸린다 하더라도 단지 훈계를 들을 뿐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학원에 가서 매를 맞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체능, 실업 교과 시간에 학원 시험공부를 하다 걸리면 교사에게 강하게 저항하기까지 하며, 특히 강남권에 이런 사례가 빈번하여 예체능, 실업 교사들의 명예퇴직 릴레이를 불러오기도 했다.

학원은 학원대로 "애들을 꽉 잡았다"는 평가를 들어야 학부모들의 선택을 받기 때문에 애들을 잡는 가장 쉬운 방법인 체벌에 의지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학원에서는 학교와 달리 교우관계, 책임과 의무, 예절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오직 "성적"과 관련된 이유만으로 체벌을 하기 때문에 아이가 다치지 않는 한 이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기대한다. 이렇게 3박자가 맞아 떨어지면서 학원에서 체벌은 음지의 독버섯처럼 계속 번식하고 있다.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 금지되려면 교육이 이루어지는 모든 장소에서 금지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보니 많은 학생들의 인권은 여전히 유린되고 있으며, 학생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존중하는 교사를 안 때리는 만만한 상대로 골라 목표로 삼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교육당국 역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기에 학원의 체벌을 근절시키고자 애를 쓰고, 학원에 체벌을 금지한다는 공문을 내려보냈으나 소용이 없다. 현행 교육법령이 체벌 금지를 학생의 권리 규정이 아니라 학교장의 권한 규정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원 강사는 학교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직접 해당 강사를 고소 고발하지 않으면 학원 체벌은 그대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서울의 경우는 학원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조례에서 "학원 등에서 교습 또는 그 밖의 목적을 이유로 학습자의 신체·정신상의 자유로운 활동을 강제로 제약하는 행위를 할 수 없으며, 건강유지를 위하여 교습시간을 적절하게 안배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규정해 두고 있으나, 학교가 학생인권조례를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원 역시 이렇다 할 강제규정이 없는 조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조례보다 훨씬 상위법인 청소년보호법 제 30조의 청소년 학대 금지 규정을 준용하면 5년 이하의 징역까지 벌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숙제 해 오지 않았다고 상해가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만 체벌을 가하는 것이 청소년 학대라고까지 할 수 있느냐는 다툼의 여지가 있어서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

결국 열쇠는 학부모에게 있다. 학부모가 학원에서 아무리 사소한 체벌을 당하더라도 이를 자녀에 대한 폭행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는 한 학원의 체벌은 사라지지 않는다. 민형사상의 소송이 어려우면 적어도 때리는 학원에는 아이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이라도 세우고 공유해야 한다. 성적을 올린다는데 매 정도야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 아이들은 그 정도 수준 이상의 폭력에 언제든지 노출되어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교육당국의 관리감독이 어려운 학원에서 아무런 자격도 법적 책임도 없는 강사들임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학부모들의 각성과 행동이 필요하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