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단상: 순직은 기본? 타인의 생명을 쉽게 요구할 수 있는 사회?

나는 원래 한쪽으로 쏠리는게 싫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쏠리면 반드시 의심하고 회의하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사회적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한겨레 나들에 기고한 '교사가 참사를 만났을때'라는 글이 꽤 호평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런 글을 써서 광역 어그로를 도발하는 것도 내 역할이다. 지금 상황에서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을 비판하면 아마 광역 어그로의 끝판왕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 앞에서 '유가족 일동' 명의로 된 유인물이 돌고 있다. 실제 유가족 일동의 공식적인 유인물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뿌린 것인지는 모르곘지만, 이 유인물은  정부의 무책임을 질타하는듯 하더니만 느닷없이 단원고등학교와 교사들을 비난하고 있다. 실상 단원고 교사에 대한 비난이 유인물 내용의 절반 가까이 된다. 교사들 역시 14명 중 겨우 2명만 살아남은 희생자일텐데, 그 2명에게 학생들 버려두고 탈출했다고 비난하고, 마치 그 교사가 기간제라서 그랬던 것인양 호도하고, 몽땅 진도에 내려와 온갖 시다바리 다 하고, 심지어 시체 공시작업까지 한 교사들까지 비난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교사들인들 뭘 더 알 수 있었겠는가? 학생들 인솔하고 간 담임교사, 인솔책임자 교감, 그리고 학년부장까지 몽땅 목숨을 잃었는데, 다른 학년 교사들이나 희생자 유가족이나 알고 있는 내용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피차 해경 브리핑 외에는 아무 정보 들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 뻔히 아는 처지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싶다. 교장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교장은 전체적인 책임을 지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럼 교장만 비난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지금 단원고 교사들이 그대로 있는 한 학교 정상화에도 반대한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몹시 불쾌했다. 저게 공식 기자회견 등이 아니라 유인물이기 때문에 유족 전체의 입장은 아닐 것이며, 희생자들을 분열시키고 분노를 정부가 아니라 학교로 돌리려는 공작의 일환일 가능성이 크다고 일단 믿어 본다. 순직한 11명의 교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먼저 표시하는 성숙한 모습은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교사 유가족과 학생 유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면서 힘이 되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불쾌했던 것은 그 속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명관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생명경시 풍조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또 다른 생명경시의 가해자가 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인가?  "왜 죽였냐?"라는 물음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왜 살아남았냐?"라는 물음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내 가족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족의 살아남은 목숨이 원망스러울수는 없는 일이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목숨은 그것이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인 것이 아닌 한, 언제나 축하하고 위로받을 일이다. 목숨을 잃은 보상은 결코 다른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보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목숨을 살림으로써 보상된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의 사형집행 장소에서 형 집행 정지를 요청하는 어머니들의 기사가 나오는 것이다.

상황 하나 가정하자. A교사가 수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총을 든 괴한들이 학교에 난입했다. A교사는 교실 뒷문을 열고 학생들과 함께 죽기살기로 뛰었다. 뒤에서는 총소리가 들렸다. 몇몇 학생이 총에 맞았다. A교사도 총에 맞았지만 다행히 급소를 피했고, 경찰 특공대에 의해 구조되었다. 또 다른 괴한은 B교사가 수업하는 교실에 뛰어들었다. B교사는 학생들이 모두 괴한의 사정거리를 벗어날때 까지 괴한의 총을 붙들고 늘어지다가 끝내 괴한의 총에 맞고 즉사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그 다음 어떻게 되었을까? A교사에게는 온갖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그 비난은 A교사가 자살할때까지 그치지 않을수도 있다. 특히 A교사 학급에서 사망한 학생들의 유가족의 비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정부는 유가족과 A교사를 격리한다거나 등의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A교사에 대한 비난의 물결속에 순직한 B교사에 대한 예찬은 잠시 나타났다 쓸쓸히 장례식장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B교사는 영웅이 되는 대신 마땅히 할 일을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참 목숨값 쉽다.

만약 미국이었다면? B교사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A교사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할 것이다. 다만 B교사에 대한 예찬과 존경이 훨씬 부각될 것이다. 그 까닭은 A교사 역시 총기난사범의 희생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난사범에게 학교 문을 열어주었다거나 공모자가 아닌 한, 혹은 자신이 탈출하기 위해 학생을 방패막이로 썼다거나 하는 등의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은 이상 미국에서는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고 비난할수는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왜 네 목숨을 바치지 않았느냐?"라고 따지는 것이야 말로 청와대의 어느 분 말씀대로 "살인과도 같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가 다른 사람 목숨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나라의 법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도록 되어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은행강도와 격투와 추격전을 벌려 마침내 강도를 잡은 은행 직원이 해고되었다. 자신의 생명과 고객의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은행 규칙에 아예 "무장강도가 위협할 경우 순순히 들어 주어라."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선장이 배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법이 실제로 규정된 나라가 거의 없는 것도 이때문이다. 선장은 승객의 구조를 위해 최선의 조치를 다 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선장에게 '목숨'을 요구할 수는 없다. 배와 함께 가라앉는 선장은 다만 영화에서나 나올 뿐이며, 혹은 낡은 중세의 관습일 뿐이다. 선장에게 할 수 있는 비난은 "왜 탈출해서 살았느냐?"가 아니라 "왜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았느냐, 아니면 못했느냐?"일 뿐이다. 만약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허둥대다 그랬다면 그 나약함과 비겁함을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살인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물며 배나 비행기에 탑승한 순간 교사는 학생과 마찬가지로 승객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챙기다가 목숨을 잃은 교사들의 고결함을 예찬하는 것만 가능할 뿐, 구조된 교사에게 "왜 살았냐?"는 식의 비난을 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자연권 1조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권 1조는 자기 본성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힘을 사용할 권리이며, 로크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생명, 재산,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것을 지킬 권리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운항 시스템이 망가진 상황이라면 이미 자연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때 자연권에 충실하게 따른 사람을 한 마디로 생명의 본능에 따라 움직인 사람을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물론 칭찬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는 그냥 보통 사람이다

우리가 순직한 사람을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바로 이 자연권 1조마저 극복할 정도로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순직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실존적 고뇌끝에 내리는 어렵고 고결한 선택이다. 그래서 그만큼 더욱 존경받아야 한다. 심지어 위기 상황에서 자기 자식마저 못 챙기고 탈출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재난 발생시 일단 탈출하고 나서는 "앗, 내 아이가 저 안에 있어!"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다. 그리고는 이미 너무 위험해져서 진입을 주저하는 소방대원을 비난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하물며 남의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잃은 교사들이 대단한 것이다. 살아남은 교사가 특별히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데 어느새 우리 사회는 순직을 마치 직무에 당연하게 따라붙은 기본 옵션처럼 생각하는 풍토가 조성된 것 같다. 어떤 직무가 "목숨"을 요구해도 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우리 사회의 잔인성을 반영한다. 아, 참으로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삭막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바라건대 저 유인물이 유가족 일동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뿌린 것이기를 바란다. 침몰하는 배에서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부모, 혹은 부모를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자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식을 위해 혹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살아남음" 을 비난하는 것은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사태에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탈출한 사람들이 아니라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한 국가다. 심지어 탈출한 선원들 조차 그 상황에서 그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면 "못난이"로는 취급할 수 있어도 "죽일 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죽음 앞에서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선원들이 탈출하고 난 다음에도 세시간이나 물에 떠 있었던 배에서 구조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이 크게 위협이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한 명도 꺼내오지 못한 해경과 그 관리담당자인 정부가 문제인 것이다. 그 외에 분노와 비판의 대상을 돌리는 일체의 시도는 희생자들을 두번 죽이는 행위이며, 이 참사의 본질을 흐림으로써 앞으로 제2, 제3의 참사가 계속되게 하는 일종의 미래 살인 행위다. 다 걷어 치우고 딱 하나만 생각해 보자.

하늘나라로 간 저 아이들이 겨우 두명 살아남은 자기 선생님이 자기 가족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겨우 두명 살아남은 교사들이 쌍욕을 듣고 있는 상황을 보며 간신히 살아남은 70여명의 학생들은 "난 선생이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견디기 어려운 죄책감 속에 고통받을까?

박근혜의 "살인과도 같은 행위" 발언을 비판했던 가디언지 칼럼의 일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누군가를 벌하고자 하는 유가족과 대중의 욕구를 억누르기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책임과 의도라는 보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과실 혹은 '공포'가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살인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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