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30.

동네야구와 프로야구, 그리고 학교

프로야구 시즌이 한창 막바지다. 리그가 출범 35년째를 맞이한 우리나라 프로야구 수준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초창기에는  일본리그의 퇴물선수가 휩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메이저리그 유명선수들이 즐비한 나라들을 격파하고 세계 정상권을 두드려볼 정도까지 올라왔다. 

이렇게 우리나라 프로야구 수준이 몇단계 올라서게된 결정적인 공로자 중 한 사람으로 이광환 전 LG감독을 꼽는다. 그가 도입한 분업야구가 우리나라 야구를 주먹구구 동네야구에서 진정한 프로야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가 도입한 분업야구라는 것은 요즘 관점에서 보면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선발투수의 5일 간격 로테이션, 선발투수, 중간계투(승리조, 추격조), 마무리 투수의 역할분담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에야 상식이지만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다음경기 선발투수가 마무리로 등판하고, 6회나 7회부터 마무리 투수가 나와서 3-4회씩 던지고, 에이스 투수는 선발, 계투,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하는 일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주먹구구로 팀을 운영하다 보니 선수들의 생명도 짧았다.

 요즘에는 서른살 정도는 되어야 베테랑 선수 대접을 받지만, 김시진, 최동원, 이상윤, 이상군 등 80년대 명투수들은 하나같이 서른살이 되면서 사실상 선수 경력을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분업야구가 도입되면서  적어도 프로야구에서는 에이스급 투수는 1선발 혹은 마무리 중 하나만 담당하고, 나머지 상황에서는 성에 안차더라도 다른 투수들이 나름의 특기를 살려가며 적절히 등판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 에이스급 선수가 팀의 거의 모든 투구를 책임지는 그런 야구는 이제 고교야구에서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30년이 지나면서 야구도 발전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라진게 없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라는 경기장에는 교과수업과 학급지도를  담당하는 교사,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직원, 그리고 학교 전체의 업무를 관리하고 관장하는 교장, 교감이라는 선수들이 있다. 그런데 아직도 학교에서 교사들은 수업과 학급지도에만 전념할수 없다. 행정사무를 맡아서 담당하기도 하고, 학급이나 교과의 범위를 넘어서는 학교 관리업무를 당당하여 수행하기도 한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투수가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던지는 것은 물론 유니폼 빨래, 장비관리 및 구입, 경기장 확보, 경기일정 관리 등의 일까지 모두 도맡아서 하는 수준이다. 

과거 주먹구구로 운영되던 야구팀에서는 이런 잡무를 주로 신참선수나 경력이 짧은 선수들이 도맡아서 했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 역시 이런 교육 외적인 업무들을 신규 교사나 저경력 교사에게 전가하고 있다. 가장 프로페셔널해야 할 공교육기관이 마치 동네야구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교육을 20세기 교실에서 19세기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식으로 비하한다. 그러나 실제 우리나라 학교의 시설은 미국이나 유럽을 능가하는 최첨단 수준이다. 교사 역시 미국이나 유럽이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있다. 문제는 학교나 교사가 아니라 학교 운영방식인 것이다. 21세기 교실에, 21세기 교사들을 모아놓고 19세기 방식으로 운영한다면 당연히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최고의 선수들이 최고의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더라도, 팀 운영이 동네야구 방식이면 경기력은 물론 선수 생명도 짧아지는 것고 마찬가지다. 최고의 학생들과 최고의 교사들이 모아놓고 역할분담마저 제대로 안된 주먹구구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니 학생은 불행하고 교사는 교직을 선택한 것을 후회할수 밖에 없다.

교육 혁신. 별거 없다. 학교 구성원들이 먼저 자기 본연의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자. 교사가 교육에만 집중할 경우 교장, 교감, 직원의 행정부담이 늘어난다면 직원을 더 채용하거나 업무를 줄여야 한다. 선수들의 역할분담이 정착된 다음에야 이런저런 전략과 전술이 빛을 발하듯, 학교 구성원들의 역할분담이 정착된 다음에야 이런 저런 교육개혁도 빛을 발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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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6.

영화 '에베레스트' 감상기 버전 1: 등반가의 관점에서

영화 '에베레스트'는 전형적인 산악영화가 아니다. 산악영화라는 장르의 특징인 불굴의 인간의지 혹은 재난 속에서 꽃피는 인간애 따위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 가깝다. 그럼 그 공포의 주인공은? 바로 에베레스트 산이며, 자연이다. 그리고 이 잔혹한 살인마는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공포스러운 아름다움.

고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이제 하나의 관행이 되어버렸다. 물론 근대 등반의 개척자인 조지 말로리는 그런 질문이 짜증나서 퉁명스럽게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대답했고,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인 에드먼드 힐러리(미국 정치가와 아무 상관 없음)는 "그런거 질문하는 사람들을 피하려고"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등반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 영화에서 비극의 씨앗이 된 인물은 "그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는데 가서 보지 않으면 죄악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일행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생환한 한 등반가는(이름을 말하면 스포일이 되니) "산에 오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 어두움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둘을 합치면 뭐가 될까? 그것은 바로 중독이다. 아름다움에 중독된 것이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이 가진 치명적인 중독성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세이렌(사이렌)신화로 표현하였다. 세이렌이 선원들을 유혹하여 끝내 목숨까지 버리게 만드는 힘은 다름아닌 노래다. 여러 미술작품에서는 세이렌을 미모의 인어나 요정으로 표현하지만, 실제 신화에서 세이렌의 외모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선원들은 욕정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의 유혹에 이끌리면서 파멸한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면 아름다움에의 추구, 즉 에로스는 자기보존의 원리, 경제원리마저 초월한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예술만이 철저한 자기보존 원리의 지배하에 있는 자본주의를 벗어날 단초라고 주장하였다. 

참, 어려운 질문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이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죽는 것과, 이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보존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 이 중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삶일까? 물론 사람들은 말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죽는게 더 멋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길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고, 그 길을 선택할 경우 결국 시간의 문제일뿐 자기 파괴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자기파멸의 과정을 어떤 동정심도 감동도 없이 냉정하게 보여준다.  키가 8848미터나 되는 거대한 세이렌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취하려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응징을 가한다. 이 응징 앞에서 사람들은 참으로 무력하고 미약하며 철저하게 파괴되며, 이 영화는 그 과정을 너무도 냉정하게 재현하여 보는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그 파괴는 목숨을 잃는 것 정도가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 역시 파괴된다.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결국 인간성, 인간애가 파괴되는 경험을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산악영화 장르에서 나타나는 위대한 인간승리,  고결한 인간애 이딴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데드존이라 불리는 해발 8천미터 이상 구간에서(경우에 따라 7500미터 이상도) 는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동료는 산채로 버려지는 수 밖에 없다. 그를 구하려 했다가는 결국 자신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잔인한 역설이다. 자기보존 원리에 철저했다면 애초에 그곳에 오르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일단 오르게 되면 지상보다 몇곱절 더 철저한 자기보존 원리에 따라 행동하며, 그 과정에서 이기성의 극한까지 발휘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이 세이렌의 아름다움은 두번 보여지면서 이른바 수미쌍괄 형식을 취한다. 첫번째는 원정대가 베이스켐프를 향해 가는 트레킹 구간(영화에서는 트레킹을 훈련이라고 번역해서 아주 뜻이 이상해졌다. 하긴 아이스폴을 빙벽이라고 번역한 것도. 차라리 빙하폭포라고 하던가)에서 바라볼때 초원 너머로 나타난다. 초원 너머로 보이는 하얀 봉우리들은 과연 신들이 살것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두번째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한 모습으로 세상을 굽어보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난다. 이때 그 아름다움은 공포 그 자체다. 그런 잔혹한 파멸이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게다가 나 역시 산에 미쳤던 리즈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소름끼친다.

그 시절 나는  통 속의 물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인 영하 24도의 추위 속에 뺨을 두드리는 눈알갱이에 맞아가며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가는 일을 즐겼다.  그런 추위 속에서 눈밭을 다지고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작은 텐트속에서 침낭하나 의지하고(아무런 난방도구 없음) 밤을 지새우기도 일쑤였다(잠을 잔다기 보단 그야말로 밤을 지새운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보내고 맞이하는 아침 태양의 그 찬란함, 그리고 온통 하얗게 반짝이는 능선과 봉우리들이 펼치는 아름다움은 주기적으로 주입하지 않으면 금단현상에 몸부림을 치게 만드는 마약과도 같았다.  그 추위속에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느라 온통 굳어버린 관절들이 하나하나 녹아내리고 세포 하나하나까지 햇빛을 받아 깨어나는 듯한 느낌은 이런 글줄로는 절대 전달할 수 없다. 

즉 산에서 극한의 경험을 하려는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것이다. 살아있고 깨어있다는 기쁨을 즐기려는 것이다. 그것은 지루한 반복만을 계속해야 하는 일상 속에서는 절대 느낄수 없는 것이다.(베르그손에 따르면 반복=죽음이다).

문제는 그 아름다움은 중독성이 강해서 점점 더 강한 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과 경험이 늘어날수록 과거에는 극한의 경험을 주었던 산이 편안한 하이킹 코스로 바뀌게 된다. 즉 반복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향상되고 경험이 늘어나도 절대 쉬워지지 않는 곳, 절대로 익숙해진 기술과 경험의 반복이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해발 8000미터 이상의 이른바 죽음의 지대다. 이는 산소가 지상의 30% 밖에 안되는 그 구역에서는 특별히 위험한 일을 겪지 않더라도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흘이면 죽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도 소용없다.  

그런 곳을 자꾸 찾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불을 찾아드는 불나방? 그런데 80년대때 대학생들은 자신들을 불나방에 비유했다. 고문과 투옥, 심지어 의문사까지 흔하던 시절, 그 위험을 무릅쓰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은 자기보존 원리 따위는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민주주의라는 혹은 민중이라는 대의와 가치를 위해 불나방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은 실존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올바른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짜릿함과 이를 통한 살아있음에의 자각,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자꾸 생각이 길어져서 안되겠다. 여기까지만 쓰고 급 마무리 한다.
결론: 에베레스트는 호러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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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2.

자유주의자 권재원의 자유주의 타령

자유주의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1차적인 권리로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기본적인 자유는 당연히 내 생각(마음)과 내 몸의 자유다. 그래서 나의 자유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용은 함께 간다. 

 자유주의가 지켜야 하는 자유는 하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점점 범위가 확장되었다.  

1. 최초의 자유는 신체의 자유다. 내 몸은 내 맘대로. 당연히 첫 출발점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에 의한 신체의 침해, 즉 체포와 구금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함부로 체포당하지 않을 권리(미란다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영장없는 구금 금지 등등)는 자유의 핵심이자 알파다. 그 유명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규정한 것이 바로 '왕이 귀족이나 신하를 함부로 잡아가두지 못하게 하라'다. 

그 다음 등장한 것이 

2. 재산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신체의 자유의 파생물이다. 이 재산이 내 것인 이유는 내 신체가 작용(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6-17세기 자유주의자, 심지어 존 로크조차 경작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농경지에 대한 소유권은 철저히 옹호하면서 그냥 땅, 임야 등(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면 나대지)의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계몽사상의 등장과 함께 이성을 가진 합리적 존재로서 인간의 '의식'이 주체로 정립되고, 따라서 이 의식의 자유가 자유주의의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  

3. 사상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이를 드러내어 표현할 각종 표현의 자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에는 

4. 연대의 자유(혹은 정체성의 자유) 까지 등장하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가 등장한 이후 시장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시장자유주의자들, 그 극단적인 편향인 오스트리아 학파 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통칭 자유주의라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들을 부르는 가장 좋은 말은 센델이 지칭한 리버타리안 보다는 그냥 '자유시장주의자'가 가장 적절하다.  

오늘날 제대로 꼴을 갖춘 나라에서 대부분 신체의 자유와 재산의 자유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금 몇 퍼센트 가지고 재산의 자유를 운운하는건 찌질하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자유의 문제는 

사상과 양심, 그리고 표현의 자유, 연대의 자유 영역에서 발생한다.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누가 자유주의의 적인지 자명하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말살하고 거침없이 좌파를 척결하고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횡횡하는 집단이 누구인가?
교과서를 국정으로 획일화 하여 똑같은 걸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언론을 교묘히 틀어쥐고 언론사는 물론 포털까지 자기 맘에 안드는 보도가 나오는 것을 원천봉쇄하려는 집단은 누구인가?
더 나아가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말살하고 시위를 막는다는 명목하에 불법채증을 감행하고 닥치는대로 시민들을 연행했다가 48시간동안 구금하는 일을 당연하게 자행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심지어 빨갱이를 잡아야 한다면서 시민들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며 불법 도청을 감행하고 그게 잘못이 아니라 심리전이라고 우겨대는 집단은 누구인가?
연대의 자유는 커녕 노조가 나라의 적이며, 경제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온 국민의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공교롭게도 그들은 갈수록 자유주의적인 미국과 멀어지고 집산주의적인 중국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자유에 대한 전방위적인 말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에 침묵하면서 기껏 세금 좀 더 걷어서 루저들 좀 먹여주자는 주장, 그것도 실행도 못하고 주장만 하는 새정연만 갈궈대는 자유주의자는 대체 뭐하는 자유주의자인가?
나도 새정연은 좋아하지 않는다. 새정연이 반자유주의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무능해서 싫다. 그런데 새정연보다 더 무능, 아니 무능을 넘어 무식한 발언을 하고 다니는 인물이 대선후보 1위란다.

덧, 이렇게 자유주의적이면서도 내가 자선활동(즉 어려운 사람을 도와도 내가 직접할거야)이 아니라 누진세에 기반한 복지정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겸손하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어려운 사람을 돕기위해 재산을 사용할 덕성일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겸손하다. 분명 돈을 꺼내야 할 상황에선 덜덜 떨 것이다. 

또 나는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 겸손하다.지금은 비록 나름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있지만, 언제든지 크게 실패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 가난한 사람들은 노오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 모습이 될 수도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따라서 잘나가고 있을때 복지정책을 위해 내는 세금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생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역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거의 잔혹한) 복지제도가 정착할수 있었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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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9.

전교조 지도부의 기우

그동안 전교조 비판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전교조가 딱히 더 잘해서는 아니다. 다만 별 영양가가 없어서다. 그런데 정작 전교조 지도부에서 무척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내가 조합원으로 있을때, 그리고 심지어 조합의 주요 활동가로 열심히 뛰어다닐때는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던 그들이 막상 나가고 나니 신경을 쓴다. 무엇보다 전교조에서 탈퇴하면서 이주호 측근으로 가버린 전직 간부들(그 전직 간부들과 내가 굳이 따지자면 전교조 내에서 직급이 비슷하다. 나도 나름 전교조 고위직? 출신이다.)과 달리 나는 조합을 탈퇴한 다음에도 여전히 진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으며, 진보 내에서의 영향력도 유지하고 있으니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전교조 지도부에게서 두려움, 초조함이 느껴진다. 정권에 탄압 따위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걸 즐기는 편이다. 그들의 두려움은 혹여 자기들보다 영향력 있는 누군가가 조합원을 빼 갈까봐 느끼는 두려움이다. 법외노조로 전락할 경우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조합원 감소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기우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미 나갈 사람은 다 나갔다. 

전교조에 염증을 느낀 사람, 전교조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고 느낀 사람, 그리고 일종의 우산 삼아 전교조에 가입했다 그게 별 영양가가 없다고 느낀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이미 다 나가고 없다. 아직까지 전교조에 남아있는 조합원들은 의리와 미련때문에 쉽사리 전교조를 끊을 수 없는 분들이다. 따라서 법외노조가 아니라 불법노조가 되더라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합원들 중 이탈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설사 내가 전교조 지도부가 걱정하는 것 처럼 적극적인 조직 활동에 나서서 그들 표현대로 '어용노조'를 만든다고 한들, 지금까지 굳건히 남아있는 조합원들 중 몇명이나 따라나서겠는가? 괜한 걱정이다.

2. 아직 안 들어간 사람은 어차피 안 들어간다. 

전국의 교사는 30만명이 넘는다. 조합 가입이 비교적 눈치보이는 사립학교 교사를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20만명은 될 것이다. 그런데 전교조 조합원은 4만에 불과하다. 나머지 16만명 중 전교조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20-30대 교사들의 전교조 조합률은 1%대를 맴도는데, 특별한 계기가 없는한 점점 더 떨어질 것이다.  나는 외람되게도 20-30대 교사들에게 알량하지만 영향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워낙 조직활동 같은 거 싫어하고 회의니 집회니 하는 거 싫어하기 때문에 나서서 무슨 조직을 만들거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지만, 설사 내가 2030 교사들을 선동하여 무슨 '어용노조'를 만든다고 치자.  그건 전교조 조합원을 빼가는 것도 아니고 또 전교조 예비 조합원을 줄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전교조라는 이름으로는 연대할수 없었던 그러나 교육에 대한 고민은 공유하고 싶었던 젊은 교사들의 연대망을 제공함으로써 교육운동의 외연을 넓히는 결과가 될 것이다. 

3. 어용노조는 어디에 있나?

19세기, 유럽에서 노동운동이 한창일때 자본가들은 교묘한 술수로 노동조합을 무력화 시키는 노조 파괴자들을 동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노조 파괴자들이 유령 노조, 사용자 편에서 일하는 노조를 먼저 설립해서 진짜 노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선점하기도 했다. 바로  세칭 '어용노조'다. 그러니 어용노조의 기준은 투쟁성이 아니라 누구를 유리하게 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차마 말 못하겠다. 2005년인가 2006년부터 전교조는 뭐 할때마다 교육운동가들의 맥을 빠뜨렸고 교육관료, 교육기득권들을 점점 유리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교육기득권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기득권까지 전교조를 빌미로 삼아 진보 전체를 공격했다. '전교조에게 학교를 맡길수 없다.'란 구호를 외치는 순간 사립학교법이 날아가고 선두를 달리던 진보교육감 후보도 날아갔다. 결과적으로 '어용'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또 다른 교원노조를 만드는 일에 나설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다른 교원노조가 만들어질때 전교조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어용이니 노조파괴자니 부르는 것은 가소롭게 받아들인다. 전교조는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한다. 이미 전교조를 빠져나간 수만명의 옛 동지들을 다른 조합으로라도 연대의 틀 안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전국에서 흩어지고 고립된채 뜻은 있으나 힘을 펴지 못하던 수많은 젊은 의로운 교사들의 꿈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모아주는 그런 조직이 있다면 이는 교육운동이라는 파이자체가 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운동의 파이 전체가 커졌을때, 그리하여 전교조가 교육운동이라는 파이의 유일한 조각이 아니게 되었을때 비로소 부당하게 전교조에게 집중되는 정권의 칼날은 무디어 질 것이다.
만약 교육운동이라는 파이가 아니라 '교육노동운동'이라는 파이를 키운다고 주장들 하신다면 할 말없다. 부지런히 교육노동운동 하시고, 다른 쪽에서는 교육운동 하면 된다. 어차피 두 운동은 디엔에이가 다르니까 각자 적성에 맡게 모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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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