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15의 게시물 표시

동네야구와 프로야구, 그리고 학교

프로야구 시즌이 한창 막바지다. 리그가 출범 35년째를 맞이한 우리나라 프로야구 수준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초창기에는  일본리그의 퇴물선수가 휩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메이저리그 유명선수들이 즐비한 나라들을 격파하고 세계 정상권을 두드려볼 정도까지 올라왔다. 

이렇게 우리나라 프로야구 수준이 몇단계 올라서게된 결정적인 공로자 중 한 사람으로 이광환 전 LG감독을 꼽는다. 그가 도입한 분업야구가 우리나라 야구를 주먹구구 동네야구에서 진정한 프로야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가 도입한 분업야구라는 것은 요즘 관점에서 보면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선발투수의 5일 간격 로테이션, 선발투수, 중간계투(승리조, 추격조), 마무리 투수의 역할분담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에야 상식이지만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다음경기 선발투수가 마무리로 등판하고, 6회나 7회부터 마무리 투수가 나와서 3-4회씩 던지고, 에이스 투수는 선발, 계투,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하는 일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주먹구구로 팀을 운영하다 보니 선수들의 생명도 짧았다.

 요즘에는 서른살 정도는 되어야 베테랑 선수 대접을 받지만, 김시진, 최동원, 이상윤, 이상군 등 80년대 명투수들은 하나같이 서른살이 되면서 사실상 선수 경력을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분업야구가 도입되면서  적어도 프로야구에서는 에이스급 투수는 1선발 혹은 마무리 중 하나만 담당하고, 나머지 상황에서는 성에 안차더라도 다른 투수들이 나름의 특기를 살려가며 적절히 등판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 에이스급 선수가 팀의 거의 모든 투구를 책임지는 그런 야구는 이제 고교야구에서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30년이 지나면서 야구도 발전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라진게 없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라는 경기장에는 교과수업과 학급지도를  담당하는 교사,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직원, 그리고 학교 전체의 업무를 관리하고 관장하는 교장, 교감이라는 선수들이 있다. 그런데 아직도 학교에서 교사들은 수업과 학급지도에만 전…

영화 '에베레스트' 감상기 버전 1: 등반가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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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베레스트'는 전형적인 산악영화가 아니다. 산악영화라는 장르의 특징인 불굴의 인간의지 혹은 재난 속에서 꽃피는 인간애 따위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 가깝다. 그럼 그 공포의 주인공은? 바로 에베레스트 산이며, 자연이다. 그리고 이 잔혹한 살인마는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공포스러운 아름다움.
고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이제 하나의 관행이 되어버렸다. 물론 근대 등반의 개척자인 조지 말로리는 그런 질문이 짜증나서 퉁명스럽게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대답했고,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인 에드먼드 힐러리(미국 정치가와 아무 상관 없음)는 "그런거 질문하는 사람들을 피하려고"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등반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 영화에서 비극의 씨앗이 된 인물은 "그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는데 가서 보지 않으면 죄악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일행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생환한 한 등반가는(이름을 말하면 스포일이 되니) "산에 오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 어두움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둘을 합치면 뭐가 될까? 그것은 바로 중독이다. 아름다움에 중독된 것이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이 가진 치명적인 중독성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세이렌(사이렌)신화로 표현하였다. 세이렌이 선원들을 유혹하여 끝내 목숨까지 버리게 만드는 힘은 다름아닌 노래다. 여러 미술작품에서는 세이렌을 미모의 인어나 요정으로 표현하지만, 실제 신화에서 세이렌의 외모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선원들은 욕정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의 유혹에 이끌리면서 파멸한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면 아름다움에의 추구, 즉 에로스는 자기보존의 원리, 경제원리마저 초월한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예술만이 철저한 자기보존 원리의 지배하에 있는 자본주의를 벗어날 단…

자유주의자 권재원의 자유주의 타령

자유주의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1차적인 권리로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기본적인 자유는 당연히 내 생각(마음)과 내 몸의 자유다. 그래서 나의 자유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용은 함께 간다. 

 자유주의가 지켜야 하는 자유는 하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점점 범위가 확장되었다.  

1. 최초의 자유는 신체의 자유다. 내 몸은 내 맘대로. 당연히 첫 출발점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에 의한 신체의 침해, 즉 체포와 구금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함부로 체포당하지 않을 권리(미란다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영장없는 구금 금지 등등)는 자유의 핵심이자 알파다. 그 유명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규정한 것이 바로 '왕이 귀족이나 신하를 함부로 잡아가두지 못하게 하라'다. 

그 다음 등장한 것이 

2. 재산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신체의 자유의 파생물이다. 이 재산이 내 것인 이유는 내 신체가 작용(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6-17세기 자유주의자, 심지어 존 로크조차 경작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농경지에 대한 소유권은 철저히 옹호하면서 그냥 땅, 임야 등(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면 나대지)의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계몽사상의 등장과 함께 이성을 가진 합리적 존재로서 인간의 '의식'이 주체로 정립되고, 따라서 이 의식의 자유가 자유주의의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  

3. 사상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이를 드러내어 표현할 각종 표현의 자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에는 

4. 연대의 자유(혹은 정체성의 자유) 까지 등장하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가 등장한 이후 시장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시장자유주의자들, 그 극단적인 편향인 오스트리아 학파 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통칭 자유주의라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들을 부르는 가장 좋은 말은 센델이 지칭한 리버타리안 보다는 그냥 '자유시장주의자'가 가장 적절하다.  

오늘날 제대로 꼴을 갖춘 나라에서 대부분 신체의 자유와…

전교조 지도부의 기우

그동안 전교조 비판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전교조가 딱히 더 잘해서는 아니다. 다만 별 영양가가 없어서다. 그런데 정작 전교조 지도부에서 무척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내가 조합원으로 있을때, 그리고 심지어 조합의 주요 활동가로 열심히 뛰어다닐때는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던 그들이 막상 나가고 나니 신경을 쓴다. 무엇보다 전교조에서 탈퇴하면서 이주호 측근으로 가버린 전직 간부들(그 전직 간부들과 내가 굳이 따지자면 전교조 내에서 직급이 비슷하다. 나도 나름 전교조 고위직? 출신이다.)과 달리 나는 조합을 탈퇴한 다음에도 여전히 진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으며, 진보 내에서의 영향력도 유지하고 있으니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전교조 지도부에게서 두려움, 초조함이 느껴진다. 정권에 탄압 따위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걸 즐기는 편이다. 그들의 두려움은 혹여 자기들보다 영향력 있는 누군가가 조합원을 빼 갈까봐 느끼는 두려움이다. 법외노조로 전락할 경우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조합원 감소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기우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미 나갈 사람은 다 나갔다. 

전교조에 염증을 느낀 사람, 전교조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고 느낀 사람, 그리고 일종의 우산 삼아 전교조에 가입했다 그게 별 영양가가 없다고 느낀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이미 다 나가고 없다. 아직까지 전교조에 남아있는 조합원들은 의리와 미련때문에 쉽사리 전교조를 끊을 수 없는 분들이다. 따라서 법외노조가 아니라 불법노조가 되더라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합원들 중 이탈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설사 내가 전교조 지도부가 걱정하는 것 처럼 적극적인 조직 활동에 나서서 그들 표현대로 '어용노조'를 만든다고 한들, 지금까지 굳건히 남아있는 조합원들 중 몇명이나 따라나서겠는가? 괜한 걱정이다.

2. 아직 안 들어간 사람은 어차피 안 들어간다. 

전국의 교사는 30만명이 넘는다. 조합 가입이 비교적 눈치보이는 사립학교 교사를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