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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권재원의 자유주의 타령

자유주의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1차적인 권리로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기본적인 자유는 당연히 내 생각(마음)과 내 몸의 자유다. 그래서 나의 자유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용은 함께 간다. 

 자유주의가 지켜야 하는 자유는 하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점점 범위가 확장되었다.  

1. 최초의 자유는 신체의 자유다. 내 몸은 내 맘대로. 당연히 첫 출발점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에 의한 신체의 침해, 즉 체포와 구금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함부로 체포당하지 않을 권리(미란다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영장없는 구금 금지 등등)는 자유의 핵심이자 알파다. 그 유명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규정한 것이 바로 '왕이 귀족이나 신하를 함부로 잡아가두지 못하게 하라'다. 

그 다음 등장한 것이 

2. 재산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신체의 자유의 파생물이다. 이 재산이 내 것인 이유는 내 신체가 작용(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6-17세기 자유주의자, 심지어 존 로크조차 경작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농경지에 대한 소유권은 철저히 옹호하면서 그냥 땅, 임야 등(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면 나대지)의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계몽사상의 등장과 함께 이성을 가진 합리적 존재로서 인간의 '의식'이 주체로 정립되고, 따라서 이 의식의 자유가 자유주의의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  

3. 사상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이를 드러내어 표현할 각종 표현의 자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에는 

4. 연대의 자유(혹은 정체성의 자유) 까지 등장하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가 등장한 이후 시장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시장자유주의자들, 그 극단적인 편향인 오스트리아 학파 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통칭 자유주의라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들을 부르는 가장 좋은 말은 센델이 지칭한 리버타리안 보다는 그냥 '자유시장주의자'가 가장 적절하다.  

오늘날 제대로 꼴을 갖춘 나라에서 대부분 신체의 자유와 재산의 자유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금 몇 퍼센트 가지고 재산의 자유를 운운하는건 찌질하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자유의 문제는 

사상과 양심, 그리고 표현의 자유, 연대의 자유 영역에서 발생한다.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누가 자유주의의 적인지 자명하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말살하고 거침없이 좌파를 척결하고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횡횡하는 집단이 누구인가?
교과서를 국정으로 획일화 하여 똑같은 걸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언론을 교묘히 틀어쥐고 언론사는 물론 포털까지 자기 맘에 안드는 보도가 나오는 것을 원천봉쇄하려는 집단은 누구인가?
더 나아가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말살하고 시위를 막는다는 명목하에 불법채증을 감행하고 닥치는대로 시민들을 연행했다가 48시간동안 구금하는 일을 당연하게 자행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심지어 빨갱이를 잡아야 한다면서 시민들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며 불법 도청을 감행하고 그게 잘못이 아니라 심리전이라고 우겨대는 집단은 누구인가?
연대의 자유는 커녕 노조가 나라의 적이며, 경제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온 국민의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공교롭게도 그들은 갈수록 자유주의적인 미국과 멀어지고 집산주의적인 중국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자유에 대한 전방위적인 말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에 침묵하면서 기껏 세금 좀 더 걷어서 루저들 좀 먹여주자는 주장, 그것도 실행도 못하고 주장만 하는 새정연만 갈궈대는 자유주의자는 대체 뭐하는 자유주의자인가?
나도 새정연은 좋아하지 않는다. 새정연이 반자유주의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무능해서 싫다. 그런데 새정연보다 더 무능, 아니 무능을 넘어 무식한 발언을 하고 다니는 인물이 대선후보 1위란다.

덧, 이렇게 자유주의적이면서도 내가 자선활동(즉 어려운 사람을 도와도 내가 직접할거야)이 아니라 누진세에 기반한 복지정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겸손하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어려운 사람을 돕기위해 재산을 사용할 덕성일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겸손하다. 분명 돈을 꺼내야 할 상황에선 덜덜 떨 것이다. 

또 나는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 겸손하다.지금은 비록 나름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있지만, 언제든지 크게 실패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 가난한 사람들은 노오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 모습이 될 수도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따라서 잘나가고 있을때 복지정책을 위해 내는 세금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생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역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거의 잔혹한) 복지제도가 정착할수 있었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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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