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숙의민주주의에 대하여(1)

우리나라 진보 운동권들의 고질병이 있다면, 유행을 탄다는 것이다. 뭔가 하나 유행한다 싶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그 말을 주문처럼 달고 다닌다. 물론 그 의미를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았고, 관련 문헌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 진영 훌륭한 분들이 사용하는 말이니까 "좋은 말" "선" 가치 판단해버릴 뿐이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관련 용어들이 그런식으로 남용되었다. 프레임이라는 사회심리학 용어가 아주 쉬운 의미로 남용되었다. "미국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절규를 전염병처럼 쉽게 퍼뜨린 그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더니 요즘은 숙의민주주의가 유행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 이게 직접민주주의와 연결이 되더니, 숙의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는 참된 민주주의, 대의제, 다수결은 빈껍데기 민주주의 처럼 폄하되고 있다. 이게 역시 한창 유행했던 집단지성과도 결합되어, 집단지성에 의한 숙의민주주의가 전문가 집단의 독재를 통제한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 잘 하면 처방전까지 환자들의 '숙의'를 통해 정하게 생겼다. 막상 숙의민주주의가 뭔지, 숙의가 뭔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이런 한심한 상황을 그냥 둘수 없어서, '국민 사회교사'인 내가 나선다. 세계 어느나라나 중학교 2학년 중 똑똑한 학생의 지적 이해능력이 성인 평균보다 조금 높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 수준에 맞춰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숙의민주주의라는 말은 참 어색하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숙의라는 말 부터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조선 후궁 직급도 아니고. 한자를 억지로 붙놓은 단어인데, 뜻을 풀면 깊게 논의한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슷한 의미의 한자 조합으로 심의민주주의라는 말도 많이 쓰고, 적어도 내가 정치학 공부할때는 심의민주주의라고 했다. 이때 심의 역시 "영상물 등급 심의위원회" 의 심의가 아니라 깊은 논의라는 뜻의 심의다. 

영어로는 deliberative democracy와 discursive democracy가 같이 사용되는데 사실상 의미는 동일하다. 심사숙고하다라는 동사 deliberate의 형용사형이 민주주의 앞에 붙어서 숙의라는 말로 옮겨진 것 같은데, 그 보다는 토론과 토의를 통해 정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는  discursive가 산만한, 논점이탈이란 뜻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는 의미를 가진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숙의민주주의에는  별 대단한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결정과정(정치는 항상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의 중심에 토의, 토론, 합의의 과정이 있다라는 고전적인 뜻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토의, 토론, 합의가 중심에 있다면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다수결과 투표다.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가령 가족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국내여행과 해외여행으로 의견이 갈린다고 하자. 그럼 이걸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다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가족 중 가장 권위있는 사람, 가령 할머니가 확 정해버리는 것이다. 군주정이나 독재가 여기 해당된다. 

두번째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다. 다수결은 단 한명이라도 더 많은 지지를 얻은 안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여행파, 해외여행파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고, 서로 충분한 토론을 한 다음에 합의점을 찾아가는 방식이 있다. 이 둘을 간단히  표결과 합의로 대비시킬수 있다. 표결의 장점은 어떻게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며, 단점은 그 과정에서 소수파의 의견이 묵살되고, 사실상 다수의 강압이 될수 있어, 승복하지 않는 구성원들이 많을 수 있고, 중우정치의 경우처럼 결정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채로 무작정 투표할 경우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합의의 장점은 모든 구성원들이 결정된 사항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모두 결정에 승복할수 있고, 무책임한 결정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단점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갈등요인이 많은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합의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가족여행으로 돌아오면, "자 다수결!" 이러면 단 10분만에 결정을 내릴수는 있지만, 만약 4:3으로 국내여행으로 결정되었을때 해외여행을 원했던 3명이 여행에 불참하거나, 혹은 자기들끼리 계획세워 외국으로 날아가버릴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반면 이것을 합의로 정한다면 해외여행을 원했던 세명이 국내여행을 가야 할 이유를 납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일곱명이 모두 기꺼이 국내여행을 갈수 있다. 하지만, 밤새도록 해외야, 국내야 그러면서 입씨름만하다가 깨질수도 있다(우리나라 풍토상 이럴 가능성이 더 크다).  

이 합의와 표결을 서로의 장점만 도입한 것이 바로 숙의민주주의다. 즉 충분한 토론으로 합의를 시도하고, 그래도 안될 경우에는 다수결로 표결. 이게 바로 숙의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절차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미 2500년 전 아테네에서 이루어지고 있던(혹은 그렇다고 페리클레스가 주장하던) 정치다. 페리클레스는 그 유명한 전몰장병 추모연설에서 "우리 아테네에서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때 민회에서 토론에 붙인다. 어떤일을 정할때 토론없이 바로 표결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자뻑했다. 한마디로 "아테네 정치는 숙의민주주의다."라고 말한 셈이다.

여기까지 일단 정리해 보면, 직접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대중민주주의, 반전문가주의 등의 의미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성급한 표결 이전에 충분한 토론 및 합의시도, 이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오해가 발생한 까닭은 숙의민주주의를 '소환'한 20세기 후반의 정치학자들이 '대의정치'의 한계와 위기를 합의의 정치를 통해 보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진보인사들 중 만사를 이분법으로 보는 버릇이 있는 분들이 숙의민주주의를 마치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대의제의 반대편인 것 처럼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퍼뜨렸다. 반면 보수인사들은 숙의민주주의 그 자체를 족보도 없는 듣보잡 용어 취급하며, 진보좌파들의 떼정치의 또 다른 이름이다라고 비아냥거렸다. 둘 다 틀린 셈이다.

그럼, 대체 20세기 후반의 정치학자들은 왜 합의의 정치를 소환하여 숙의민주주의의 길을 열었던 것일까?
졸려서 여기까지.. 다음은 언제가될지 기약이.... 

블로그 주인장이 쓴 책들입니다. 클릭해 주세요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문재인 정부 1년, 학교에 남은 것은 냉소 뿐

교사 소진(번아웃)을 설명하는 모형들과 그 대책

참여정부와 운동권의 실패: 진보교육감 데자뷔?(1) 남자, 남자,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