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2.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 교사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판하지만, 어떤 시대인지, 어떤 뒤떨어짐인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학교를, 어떤 교육을, 어떤 교사를 희망하는지 스스로에게 말 할 수 있습니까?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교육, 그리고 이를 향한 새로운 교육운동의 항로를 찾아보는 저 희망의 항해도를 그리는 모험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의 항해에 동참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이메일: hagi814@gmail.com
트윗: @hagi87
신문 칼럼: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70


(덧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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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주의) 이 블로그에 뜨는 광고는 구글이 임의로 전송하는 것으로, 이 블로그의 필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2017. 7. 12.

전교조를 망친 사람들은 강경 투쟁파가 아니다.

고전을 인용하면서 주장하는 글 쓰는걸 싫어하지만 이 말 만큼은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맹자의 진심하편 37장의 내용이다. 


만장이 맹자에게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집 문 앞을 지나가면서 내 집안에 들어오지 아니할 지라도,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그 오직 향원鄕原뿐이다。 이 향원鄕原은 덕德을 해친다' 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을 향원鄕原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말이 행동을 돌보지 않고 행동이 말을 돌보지 않으면서도 '옛 사람이여, 옛 사람이여!' 를 뇌인다. '하는 짓이 어째서 그다지 쌀쌀하고 친근할 수 없는가? 세상에 났으면 이 세상에 맞게 살면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만 하면 되는 것을' 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속생각을 숨기고 세상에 아첨하는 자가 바로 향원鄕原이다."
만장이 말했다. "한 고을 사람이 모두 품성좋은 사람(원인原人)이라 일컬으면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없거늘, 공자께서 '덕의 적'이라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비난하려 해도 꼬집어 지적할 만한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것이 없다. 흐름에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과 합류하며, 거함에 충신忠信한 듯하며, 행함이 청렴결백한듯하여 뭇 사람들이 좋아하고 자기 스스로도 옳다고 여기는데, 이런 사람과 요순堯舜의 도道에 함께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덕의 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호박같이 둥근 세상 좋은 말만 하며 두루두루 잘 사는 사람이 오히려 악인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악인은 그 악을 들어 비판하고 끌어내릴 수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딱히 비판할 거리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렇다고 뭔가 뚜렷하게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입으로는 온갖 폼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진심으로 올바름을 위해 나서는 사람을 갈등이나 일으키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전교조가 이 모양이 된 원인도 바로 그들 향원들에게 있다. 물론 나는 현재 집행부의 단무지 정책, 그리고 소수 좌파 운동권의 음모가적 운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 단무지 정책을 마음껏 밀고 나갈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그렇게 해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잘못된 정책을 펼때마다 조합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들끓고 탈퇴자가 줄을 이으면 아마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 강경파 집단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술자리나 친목모임에서만 그 집단을 비판하고,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쉬쉬하던, 그래서 비판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탈퇴도 하지 않고,  강경파로부터 조합을 되찾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새로운 조직을 세우는 것도 아니면서, 다만 미련만 남아 조합비를 내면서 그들의 자금을 대주던 당신들 말이다. 

물론 당신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착함은 군자의 착함이 아니라 향원의 착함이다.  당신들이 바로 오늘 이 참담한 지경을 만든 범인이다. 

2017. 6. 20.

학종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학종 다음의 셀프학종


나는 학종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학종에 대해 우려가 있다.  여기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대학 입학을 위한 학종이 아니다. 학종은 대학 입학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미 우리 사회가 특정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대단한 프리미엄이 생기지 않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대학 졸업한 다음 취업을 하려 할 때 , 공무원 시험을 제외하면 결국 대부분 괜찮은 기업의 신입사원 선발방식은 학종과 매우 비슷하다. 어쩌면 기업이 먼저 하고, 이게 학종으로 내려온 것일수도 있다. 어쨌든 대입과 신입사원 선발방식은 동기화될 수 밖에 없다. 80년대의 신입사원 선발방식 역시 학력고사 방식의 일제고사였다.

지금은 학종의 시대. 일자리를 얻으려면 좋건 싫건 학종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문제는 대학교는 생활기록부도 없고, 담임 선생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취업을 하기 위한 스펙 관리와 자신을 드러내 보일 각종 자료와 기록은 본인들이 알아서 챙겨야 한다. 셀프 학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이 이런 방식으로 사원을 뽑는 까닭은 시험과 실력의 상관관계를 이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은 오래된 관행, 오래된 믿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선생님이 없는 이 셀프 학종에서 학생들은 비로소 가정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실감한다. 자소서 한번 쓰기 위해, 면접 대비하기 위해, 그리고 각종 스펙 디자인 하기 위해 거액의 컨설팅을 받고 레슨을 받는 것은 흔하디 흔한 일이다. 그걸 뒷받침할만한 경제력이 안되는 가정의 학생은 결국 이 땅에 남아있는 마지막 학력고사 모델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신림동 고시촌과 노량진 고시촌의 그 엄청난 차이.....물론 기업은 기업대로 학생의 역량을 평가하고 싶지, 부모의 서포트 능력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경제력으로 치장된 후광을 벗기기 위한 갖가지 압박면접 기법 등을 개발하지만, 썩 성공적인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공무원 중에서 유독 교사는 학종 방식으로, 아니 수능정시+학종 방식으로 선발한다. 교사가 되기 위한 길은 실로 장대하다. 중학교때 부터 진로를 세워 두고 대학 졸업할때 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또 대학교 가서도 사교육까지 받지 않으면(이게 또 엄청 비싸다), 교사 되기 어렵다. 공무원 시험하고는 아예 그 출발부터 다르다. 대학교 졸업할 무렴, "그래, 난 교사가 되겠어" 이렇게 결심하고 머리 싸매고 공부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결국 저 기나긴 코스에 필요한 정보를 많이 얻고, 그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집안의 자녀들은 교사라는 일자리를 차지하고, 안되는 집안의 자녀들은 기간제 교사를 전전하는 장수생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학교의 정규교원/비정규교원의 문제가 자칫 잘못하면 계급문제와 중첩될 위험까지 있다.

좋지 않다. 삼성전자 직원이야 출신계층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일만 잘하면 되니까. 하지만 교사는 다르다. 교사는 공화국을 대변하는 존재이며, 세속의 성직자다. 그러니 교사 집단 자체가 그 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특정 계층, 그것도 상류 계층에 치우친 교사집단을 가진 나라는 국회 대신 귀족원을 가진 나라만큼이나 위태롭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느새 그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더군다나 명색이 국립인 교대는 일반 대학보다 각종 기회균등 계통 선발 비율이 결코 높지 않다.

교사는 참여정부 시절에는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고, 정부의 실정을 가리기 위해 화살을 돌리던 동네 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4년 전부터 그런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주요 언론이 교사 디스에 앞장 섰는데, 요즘에는 마이너 언론이나 댓글 찌질이들이 주로 교사 디스에 앞장선다.

주요언론과 정부고위직, 그리고 여론주도층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서일까? 교사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서일까? 그럴리가 없다. 다만 그들 중 귀여운 자신들의 아들 딸을 교사로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즉 교사는 어느새 여론주도층이 자기 자녀들을 위해 챙겨주어야 할 희소 자원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여기는 내 새끼 자리다."

이게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이미 잔인한 진실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이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해 보고 싶은데, 여력도 돈도 시간도 없다. 이건 다만 가설일 뿐이다)


<잘 읽으셨으면 아래 링크에서 제 책들도 살펴 봐 주세요>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2017. 5. 12.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됨을 자각한 공공의식을 갖춘 그런 국민, 즉 시민이 주인 되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오는 정치가 아니라 시민에 의해 권력이 만들어지고 견제되고 교체되는 정치다. 물론 이러한 일에 필요한 지식, 기능, 태도를 갖춘 사람이 ‘훌륭한’ 시민이 있을 경우의 일이다. 이 훌륭함은 도덕적인 선, 착함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을 다룬 <윤리학>과 훌륭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을 다룬 <정치학>을 구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으로서의 덕을 “공직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하였다. 시민은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랏일을 맡아 볼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기능, 그리고 문제를 사적 이해관심이 아니라 공공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 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까닭도, 군주정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당시 피렌체 시민들이 훌륭한 시민으로서의 덕성을 갖출 가망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지식과 기능, 그리고 공공선에 대한 관점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우리 본능을 억제함으로써 얻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훌륭함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육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잘 교육된 시민이 필요한 것이다. 민주시민교육은 민주주의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육이다. 민주시민교육 없는 국민주권은 결국 폭민 정치로 흐르고 만다.

민주시민 교육의 핵심은 다양하고 폭넓은 독서다

민주시민교육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공직을 담당할 수 있는”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자칫 공무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능처럼 오독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노량진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공무원 시험 대비 코스들을 민주시민교육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분명 “공직을 준비”하는 교육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직이 오늘날의 관료와 전혀 다른 뜻이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공무원, 직업적 관료는 19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개념이다. 고대 아테네, 그리고 더 나아가 로마에서는 공공의 일을 직업적 관료가 아니라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 공직을 담당한다는 것은 전문적인 관료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문제에 대한 토론을 주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말한 시민으로서의 훌륭함이란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때 사리사욕이 아니라 공공의 관점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하여 훌륭하게 발언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토론의 능력은 민주시민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고대 아테네나 로마보다 훨씬 복잡하다. 공공의 문제 역시 논리와 수사만으로 다룰 수 있는 경우가 별로 없고, 다양한 전문적인 분과학문의 지식을 요구한다. 특히 21세기 이후 사회적 쟁점의 70% 이상이 과학기술 혹은 사회과학과 관련된 문제이다. 과학적 소양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 환경문제, 경제적 불평등 문제, 교육 문제 같은 쟁점에서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과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면 토론에 참가하지 못하거나, 공연한 고집과 생떼를 부리기 쉽다.
물론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모든 시민이 전문적인 과학기술자나 사회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을 충분히 이해하고, 과학적 견해를 이해할 수 있을 수준의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토론처럼 보이지만 실상 서로의 주장을 강변하며, 결국 목소리 큰 쪽의 뜻대로 사회가 움직이다가 큰 손해를 보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시민들은 점점 의사결정 과정에서 밀려나며, 과학기술, 사회과학 분야의 소수 전문가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만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후반부터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며,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기다.
또한 토론은 다양한 견해, 관점에 대한 관용을 전제로 한다. 특정한 종류의 사고방식이나 견해를 혐오하는 사람은 토론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토론을 끝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관용’은 “그래야 한다.”라는 도덕적 당위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관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실제로 그런 생각과 삶을 자주 접해보지 않았다면, 막상 실제 상황에서 관용의 정신은 쉽게 발휘되지 않는다. 이성은 “관용해라”라고 명령하지만, 감정은 어느새 경계하거나 꺼리고, 심지어는 혐오하는 것이다.
다른 생각, 다른 삶의 방식을 다양하게 미리 경험해 두어야 하며, 그 경험을 자주 성찰적으로 검토해 두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겠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러 나라의 역사, 문학을 읽고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된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 학생들 중 상대방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많이 아는 학생들일수록 혐일, 혐한 감정이 낮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관용은 단지 도덕적 태도가 아니라 많이 알고 경험하는 만큼 발휘되는 것이다.

책으로 깨어있는 시민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책으로 귀결된다. 민주시민이란 책을 많이 읽는 시민이다. 민주시민 교육은 책을 많이 읽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회적 쟁점을 토론하는데 필요한 자연과학, 사회과학적 지식들, 그리고 논리와 수사는 요점정리식 수업을 통해 얻을 수 없다. 관련 문헌들을 찾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여러 다양한 나라, 민족의 역사, 문학, 다양한 삶의 방식과 견해들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도 역시 책을 읽는 것이다.

어느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깨어 있음”은 정의감, 도덕적 비분강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선악논리를 통해 자신을 선이라 믿고 촛불이든 태극기든 들고 광장에 나서는 것이 시민참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런 저런 선동과 파시즘이 기승을 부릴 뿐이다. 깨어있는 시민이란 폭넓고 다양한 독서, 그리고 꾸준한 사색과 토론을 통해 시민으로서 훌륭함을 갈고 닦아서, 어떠한 거짓 선동, 흑백논리, 혐오조장에도 넘어가지 않는 그런 시민이다. 이런 시민들이 서로 손을 잡을때 민주주의는 완전히 정착하고, 어떠한 종류의 독재나 반민주정도 틈을 노리지 못할 것이다. 


2016. 11. 13.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음성을 사용하지 않고 문서로만 피라미드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대학 투국장은 단과대 투국장에게, 단과대 투국장은 각 학과의 대표들에게, 과대표는 과의 동료, 후배들에게. 매 전달 단계에서 택이 전달완료되면 전달된 문서는 소각합니다.(미션 임파시블 처럼)

이제 각 과대표들은 동료와 후배들을 데리고 17시20분경 종로3가로 갑니다. 여기서 어슬렁어슬렁 하면서 동 뜨는 것을 기다립니다. 경찰들은 어디서 시위를 하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만약 이미 경찰이 깔려있다면 이건 택이 셌다는 뜻(프락치 의심)이기 때문에 그날 투쟁은 나가리 됩니다. 경찰이 깔려있지 않다면 택이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17시 30분. 동이 뜹니다. 여기서 동이란 제일 먼저 구호를 외치며 도로를 점거하는 학생을 말합니다.일종의 신호탄입니다. 이렇게 동이 뜨면, 주변에 어슬렁 거리던 학생들이 일제히 도로로 뛰어듭니다. 수가 충분히 많으면 도로 점거가 가능하지만, 적으면 한 두 차선만 점거하는 옹색한 시위가 됩니다. 전투조는 화염병,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시위대 본대 전방 50-100미터 쯤 앞에 전선을 치고 시위 공간을 확보합니다.

대체로 시위가 시작된 것을 경찰이 알아채고 출동할때까지는 10-15분 정도가 걸립니다. 그 사이에 죽어라 구호 외치고, 준비한 선전물을 주변의 시민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마침내 경찰이 도착합니다. 만약 경찰이 도착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역시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냥 계속 구호를 외치고 있겠죠. 하지만 경찰이 절대 그냥 있을리 없습니다. 경고방송 이딴 거 없습니다, 시위장면을 발견하면 즉시 진압과 체포입니다.

당시 시위 진압 경찰은 전투경찰(의경이 아닙니다)과 무술경찰(사복 체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투경찰이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쏘아 심신을 미약하게 만든 뒤 방패를 들고 전진하여 점점 포위망을 죄어들어오고, 충분히 근거리가 확보되면 무술경찰들이 달려와서 마구 구타하고 체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시위대의 폭력은 방패부대(전경)가 포위망을 죄어 오는 것을 저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화염병과 짱돌을 던지면 전경들이 그걸 막느라 걸음을 멈추고 방패를 들어 올릴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화염병과 짱돌을 던지며 10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화염병과 짱돌은 무한정 공급되지 않지만, 최루탄은 무한정 공급되기 때문에 그 이상 버티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10분이면 시위대 본대가 미리 약속한 퇴각로를 통해 도망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화염병과 짱돌이 동이난다 싶으면 사복체포조가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오는데, 만약 이때 이미 본대가 도주에 성공했으면 전투조도 모험이나 영웅놀이 하지 않고 죽기살기로 도주합니다. 아직 본대가 다 퇴각하지 못했으면, 쇠파이프를 사용하여 사복체포조를 저지하는데, 이미 이 지경이 되면 망한 싸움이며 아주 많은 연행자와 부상자가 발생합니다. 도주에 성공하여 살아남은 학생들은 약속해 둔 2차 집결 장소를 향해 이동하고. 2차 집결 장소에서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이게 80년대의 폭력시위입니다. 단 10분 구호를 외칠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단 10분 구호 외쳤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개처럼 얻어맞고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악적으로 행사 했던 폭력 말입니다. 영웅적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를 향해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의 도주시간을 벌고, 동료들이 도주했다 싶으면 즉시 전투를 집어 치우고 본인도 죽어라 도주해야 했던 그 폭력 시위 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낭만도, 통쾌함도 없습니다. 청와대로 돌격해서 전두환을 처단하는 것은 커녕 종로2가, 종로3가, 을지로 입구 정도에서 단 10분이라도 진실을 외칠 시간과 공간을 얻기 위해 그렇게 치고박고 싸워야 했습니다.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무조건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키고 체포하려 했던 1980년대의 상황과 지금은 매우 다릅니다. 광화문이면 어떻고 청와대에서 멀면 어떻습니까? 도심에서 상당히 긴 시간동안 심지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가능합니다. 전두환의 전 자만 말하면 허리춤을 잡힌채 개처럼 끌려갔던 시대와 다릅니다. 이미 요즘은 1980년대에 화염병과 짱돌을 던져가며 간신히 얻었던 말할 자유보다 몇배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관절 폭력을 뭐에 쓰겠단 말입니까?

글이 길어집니다. 여러 편으로 나누어야겠습니다. 어쨌든 1980년대에 왜 시위에 폭력이 수반되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이 전형적인 80년대 시위양상이 뒤집어진 1987년 6월 항쟁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잘 읽으셨으면 아래 링크에서 제 책들도 살펴 봐 주세요>





2016. 10. 24.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다다랐고, 슬슬 볼셰비키 혁명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라고 무의식중에 말하고 있는 셈이다."혁명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라고 외치던 그 구호처럼 말이다. 과거 CA전사들과의 차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볼셰비키 혁명을 외치고 있다는 것을 알며 의식적으로 외쳤지만, 386 꼰대들은 무의식중에 그 논리에 스며들어 말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무의식중에 과거 학습했던 케케묵은 소비에트 교과서의 변종을 읊어대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정치란 원래 형식이며 절차다. 형식과 절차는 제도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며 본질적으로 평등을 지향한다. 그래서 민주정치가 가능한 것이다. 형식적 민주주의 이외에 또다른 민주주의는 없다. 다만 그 형식과 절차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집행되는가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5년마다 왕을 한번씩 교체한다는 게 과연 이렇게 조롱의 대상이 되고 민주화가 실패라고 단언할만큼 사소한 것일까? 지구상에는 5년마다 왕을 선거로 교체하는 것 조차 제대로 못하는 나라가 수두룩하다. 당장 2014년 홍콩을 노랗게 물들였던 우산혁명을 보라. 그들은 아직도 완전하 형태의 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 본토는 그마저도 없다. 
물론 우리나라는 이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불완전하다. 하지만 지난 30년간의 민주화 과정을 송두리째 비웃고 부정할수 있는가? 군사독재에서 민주정치로 넘어간 나라들 중 단 숨에 군사독재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는 세계적인 정치학 교과서에 곧잘 실리는 우수사례다.  칠레나 스페인은 군부에게 일정부분 지분을 양보해야 했고, 필리핀은 이후 혼미의 혼미를 거듭하고 있으며, 동성혼 합법화가 논의될 정도로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화 정도가 높은 나라인 대만조차 최근까지 중고등학교에 교관(예비역이 아니라 현역장교다!)이 남아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김진만, 김성곤이 남산에 끌려가서 불구가 될 정도로 고문을 당했지만, 김무성, 유승민은 당당히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로 돌아왔다.30년 전에는 사람만 모이면 바로 최루탄이 터지고 백골단이 구타하며 연행했고, 가두 집회나 시위 10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꽤 시간이 지난 다음에 경고방송이라도 하고 나서 달려든다. 이 차이가 작은가? 이게 그냥 시간이 지나가서 저절로 이루어진걸로 보이는가? 지난 30년 동안 겨우 5년마다 왕을 교체하는 것 외에 그 속살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세계의 모범이라 할만한 지난 30년간의 민주화 과정을 송두리째 부정하지 말자. 원래 민주화는 정권의 교체과정보다 공고화 과정이 더 길고 어렵다. 이 공고화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독재잔당들의 권력 탈환 시도보다 민주화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다. 이 냉소와 체념은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것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 민주화 했다더니 뭐가 달라지는게 있어? 이런 식의. 그리고 그 부정은 뭔가 큰 거 한방을 기대하게 만든다. 혁명과 같은. 큰 거 한방은 당연히 카리스마있는 큰 지도자와 연관되고, 그게 바로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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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6.

백남기씨 경찰폭력 희생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쟁점: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백남기씨 사건과 관련해서 유족, 특히 딸을 비난하는 우익의 주장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치료 중단을 요구했다거나, 외국 여행을 갔다는 등의 비난이 그것이다.

나는 그게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나는 연명치료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시점, 즉 현 상태의 호흡과 맥박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환자 상태 개선을 기대할 수 없고, 장치를 제거할 경우 단 시간 내에 즉시 사망에 이를 것이 확실시 되는 상태라면 이미 사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법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어서,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할 경우 의사가 연명장치를 제거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여도 이를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환자 역시 자살 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즉 연명장치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순간 사실상 사망인 것이다. 나 역시 의식이 있는 동안에 연명치료를 중단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한 요구할 것이고, 의식이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주변의 친지들에게 그런 내 뜻을 남겨 놓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판례는 "환자 본인의 의사"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환자 본인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지 않는한, 가족이 아무리 요구해도 병원은 숨넘어갈때까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우걱우걱 계속 할수밖에 없다. 이건 어쩔수 없는 상황이며, 가족측도 병원측도 서로를 비난할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만약 환자가 코마상태라면 어떻게 하느냐? 이 경우는 추론을 통해 환자의 의사를 판단해야 한다. 판례는 이렇다.

" 환자의 사전의료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진입한 경우에는 환자에게 의식의 회복가능성이 없으므로 더 이상 환자 자신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여 진료행위의 내용 변경이나 중단을 요구하는 의사를 표시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 등에 비추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인정되어 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연명치료의 중단을 선택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에는 그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사회상규에 부합된다."

환자가 코마상태라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힐수 없는 상태라면, 평소 환자의 삶에 대한 태도, 발언 등을 통해 이 사람의 가치관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거부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족이 "연명장치 제거해 주세요" 이걸로 해결되지 않고, 이와 관련한 환자의 평소 발언이나 글 등을 모아서 "자 이 자료들을 보세요 환자가 의식이 있다면 필시 연명치료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라고 요구해야 하고, 그래도 안 들어주면 그것들을 증거로 병원측을 피고로 하는 연명장치 제거 청구소송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환자 가족과 병원측에서 빼도박도 못하는 지루한 상황이 계속될수 있다. 가족들은 더 이상 연명치료 해 봐야 몇달 드러누운 환자를 보는 것 외에는 결국 사망할 것임을 알고 있고, 의료진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가족들은 환자의 의사를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하고, 의료진은 이 경우 연명장치를 제거하면 '살인'으로 처벌받을수도 있기 때문에 존엄성이 무너진 상황을 마냥 계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가족들은 마음 속에서 이미 고인을 보내 드릴수 있다. 법적인 문제 때문에 다만 기계에 의지하여 신체가 바이탈 사인을 만들어내고 있을뿐(즉 진동하는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 이미 존엄성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서는 돌아가신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 속에서 고인을 하늘나라로 보낸 가족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유주의자라면 이런 태도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중요한 단계다. 이 마침표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찍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존엄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계에 의해 호흡과 맥박을 강요당하면서 바이탈 사인을 억지로 토해내는 상태까지 살아 있는 것으로 친다면, 그 죽음은 존엄성으로부터 너무 거리가 멀어진다. 나는 존엄성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상태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바이탈 사인을 강요받고 싶지 않으며, 억지 호흡을 토해내고싶지 않다.

따라서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할때 그 뜻이 존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명치료 외에는 남은 것이 없을때 고인을 마음속에서 미리 보내드린다고 해서 그 유족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물론 백남기씨 유가족이 그랬는지는 확인할수 없다. 다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윤서인이 같은 논리로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