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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정체성 흑인의 자부심 -제임스 브라운

정체성(Identity)란 무엇일까?
끈떨어진 근대사회, 전통적인 모든 공동체가 해체되고 그 위상이 흔들리는 근대사회에서 고독을 몸서리치는 인간은 어디에 자신의 영혼을 정박할까?

어쩌면 18세기 이후의 역사는 끊임없는 정체성의 역사였던것 같다.
20세기까지는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이 위력있었다. 원래 비참함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분격하고 떨쳐 일어나라고 주어졌던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이 도리어 자부심의 근원, 자랑스런 노동자까지 변천하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현대인의 끝없는 천착을 보여준다.

마뉴엘 카스텔의 말대로 영혼의 정박처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은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 정체성의 근거로 삼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등 자랑스러울 것 없는 "알콜중독 재활자 모임", "매맞는 아내의 모임"까지도.

진보진영은 이 점을 많이 놓치지 않았다 싶다. 당신의 비참함과 어려움을 통해 거짓된 정체성, 거짓된 자부심을 파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새로운 정체성의 기획과 구성에는 무관심했다. 노동자계급은 오늘날 그리 위력적이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정체성이며, 종교족,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과 비교하면 한결 경쟁력이 떨어진다.

여기 한 음악가가 있다. 그는 기존의 흑인 음악이 자신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승화시켜왔던것과 달리 도리어 흑인임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랑스럽다고 외친다. 이때부터 인종분제는 억압, 피억압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억압과 소외를 그치고 백인이 누리고 있는 것을 나눠달라는 애걸이 아니라 지금 흑인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라는 당당한 목소리가 된다.



제임스 브라운의 대표곡 Say Loud, I'm Black and I'm Poud(크게 말해봐, 난 흑인이라서 자랑스러워)를 살포시 올려본다.

공통의 장소

인간은 유목민이다.
인간은 정주민이다.

인간은 유목민이면서 정주민이다. 인간은 늘 지평선 너머를 동경하면서, 뒤돌아 서면 보이는 정착지를 꿈꾼다. 인간은 안전한 유목을 꿈꾼다. 인간은 방랑의 중간중간을 보듬어주는 그런 안전한 장소를 꿈꾼다.

창조력의 파노라마(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1악장)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심지어 유행가 가사에도 등장할 만큼 대중적인 곡이다. 특히 그 2악장은 샹송으로, 깐쏘네로, 팝으로 번안되어 세계에서 가장 친숙한 멜로디 중 하나가 되었다.

너무도 친숙해지다 보니 도리어 무시당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음악을 좀 듣기 시작한 중급자들은 손쉽게 모차르트를 무시한다. "너무 뻔하다.", "너무 익숙해서 흥미가 없다"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너무 뻔하고, 너무 대중적이 된 작품들 속에 대단히 복잡하고 대단히 오묘한 기법들이 숨어있다는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위대함이다. 아니 어쩌면 그 복잡함과 오묘함이 친근함과 익숙함을 만들어내는 동력일수도 있다.

특히 디누 리파티는 그 속에 감추어진 영적인 폭발력까지 표현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모차르트 연주자라고 할 수 있다. 드러냄과 감춤, 거침없음과 기법으로 단두리침 사이의 칼날같은 균형이 바로 모차르트 연주의 생명임을, 그리고 그것이 모차르트의 삶이었으며 그의 예술의 고갱이임을 디누는 잘 알고 있는듯 하다.

특히 시종 단정하고 정갈하게 연주하다가 그 동아 응축된 에너지를 한꺼번에 터뜨려내는듯한 1악장의 카덴짜 부분은 숨이 막힐듯하다. 디누가 오래 살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신이 질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빛나는 연주를 불치병이 던져대는 끝없는 고통과 싸워가며 완성한 디누의 퉁퉁불은 손가락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우울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타나 k310(a단조)는 일종의 마약 같습니다. 흔히 어머니의 죽음이 영향을 주었다고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찬란하게 밝은 k309, k311도 작곡한 것을 보면 그것과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다만 모차르트는 예술적 균형을 위해 밝은 곡과 우울한 곡을 함께 작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점이 모차르트를 대단하게도 만들고 때로는 두렵게도 만드는 점이지만, 그는 모친의 시신을 옆에 두고도 밝은 곡을 작곡할 수 있고, 아이의 출산을 보면서도 슬픈 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긴 코메디언 빌 코스비도 아들이 사망한 날 세상에서 가장 웃긴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있었죠.

결국 위대한 인물은 자연스러운 정서와 감정을 자신의 의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로써 자신의 내면이라는 가장 막강한 폭군을 통제하게 되고, 진정으로 자유로워 진다는 것이겠죠.

어쨌든 이 a단조 소나타는 모차르트의 여러 작품들 중 가장 어두운 곡이며, 격정적인 곡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구조적 엄밀성, 2악장의 서정적인 칸타빌레, 3악장의 거침없는 격정등은 깊은 감동과 정취를 안겨줍니다.

여기에 다시 피아니스트들 중 가장 정서가 풍부한 디누 리파티의 연주가 더해지니까, 도저히 제 정신으로 듣기 어려운 영혼의 소리가 만들어집니다.

서평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문득 서평을 쓰려니 좀 귀찮이즘이 발동해서 걍 퍼옴

{조지 레이코프_<코끼리는 생각하지 마>_#2} '말'이라는 덫
-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언어를 취합하는 것이다.
- 예시) '세금 구제(tax relif)' ; '구제'는 무언가 나쁜 것으로부터 지켜주거나 빼낼 때 쓰는 단어이다. 때문에, '세금+구제'라는 용어 자체로부터, 구제의 대상인 세금은 '고통'의 은유가 되는 것이다.

# 진실과 프레임
-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 개념들은 누가 사실을 알려 준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우리 두뇌에 존재하는 시냅스와 맞아떨어져야 한다.
- 진보주의자들이 단순히 '보수주의자들에게 진실을 들이댔을 때',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보수주의자들이 그 사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프레임을 지니지 않는 한, 이런 방법은 효과가 전혀 또는 거의 없다.
- 예시*) 고교 평등화를 깨뜨릴 경우, 전국 고등학교가 대학처럼 서열화 되면서 교육적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이 사실을 몰라서 고교 평등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 그들은 '어리석지 않'다. 단지, 그렇게 서열화 시킴으로써 경쟁력 없는 학교는 자연스럽게 퇴출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경쟁, 효율 프레임)
- 예시**) 9.11 테러 당시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후세인이 9.11의 배후라고 생각하는 것->이것이 세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렇게 믿는 것이 적합한 것.
- 예시***) 2000년 대선에서 고어는 부시의 감세안이 상위 1퍼센트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사실 되풀이해 강조. 그는 나머지 99%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따라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난한 보수주의자들은 그에게 등을 돌림. 왜? -> 보수주의자로서 그들은 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