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3.

요즘 하고 있는 수업

















내 취미이자 특기랄 수 있는 연극 활용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단행본까지 출판하고 논문도 몇편 썼지만, DIE(Drama in Education)은 매번 새롭습니다.
이번 주제는 "국가의 탄생"입니다. 엄청나게 거창하죠? 중학교 3학년 사회과 정치단원에 나오는 사회계약론을 익히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걸 말로만 익히면 추상적인 내용이라 도통 인스톨이 되지 않습니다. 직접 겪어 봐야죠.

학급을 둘로 편성했습니다. 왼쪽 사진에 나오는 학생들은 로크 조입니다. 오른쪽 사진에 나오는 학생들은 홉스조입니다. 이들은 각각 로크와 홉스의 주장에 따라 사회계약에 이은 국가의 설립을 몸으로 표현합니다.

왼쪽 사진은 입법부가 인민의 신탁에 어긋나는 결정을 했기 때문에 인민이 들고 일어나서 혁명을 일으키는 광경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그 유명한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 장면을 연습하고 있는 모습니다.

아주 엄격하고 무서운 선생님 반이라 위축되어있던 아이들조차 일단 이 활동이 시작되자 아주 활발해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활동이 가능하려면 학생들이 흉금을 터 놓을 정도로 릴랙스 되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꽉 막힌 수업을 하고 있다가, 또 꽉 막힌 얼굴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연극하자" 그런다고 해서 학생들이 움직여주지는 않습니다.

이번 학기는 이런식으로 국가의 탄생, 공공이슈 토론, 경제의 역사, 모의 주식시장 등을 연극으로 한번 운영해 보려고 합니다. 2학기에는 몇 가지 사회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탐구하는 과제를 주고 이를 다큐멘터리나 영화로 제작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수업은 강의식입니다.^^



2011. 3. 22.

아무리 싸움판이라도 정서는 좀 다듬어야 하겠기에,괴테, 들장미, 그리고 슈베르트와 브람스


요즘 선거야 뭐야 해서 다들 신경들이 날카롭습니다. 그럴때일수록 예술의 향기 속에서 삶에 대한 성찰과 사색이 필요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괴테, 슈베르트, 그리고 브람스를 선사합니다. 1년 전의 글이지만, 다시 한번 돌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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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절세의 명시 들장미. 독일어의 압운을 지키면서 읽어보면 더더욱 이 시가 왜 명시인지 알수 있지만, 그 시의 의미에 대해서는 엉뚱한 가십수준의 내용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가십이 어느 목사의 딸을 사랑했다가 결혼하지 못해서 그 죄책감에 "남자들이여 처녀를 함부러 건드리지 마라"라는 뜻에서 이 시를 썼다는 것이리라. 물론 그 죄책감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저런 청교도적인 시를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괴테의 유물론적 경향과 범신론적(같은 뜻인가?) 성향을 완전히 망각한 유치함의 극치다.

괴테의 예리한 풍향계는 남자와 처녀의 관계에서 바로 근대성의 특성을 읽었다. 그것은 바로 의식철학, 즉 주체-객체 철학이 가져오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 자연의 대상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핵심인 소외였다. 물론 그는 이를 명료한 이론적 진술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을 이론적 진술로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식철학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이는 오직 천재적인 직관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게오르크 짐멜이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괴테는 자연과의 일체속에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감상과 객관적인 자연이 구별되지 않는다. 즉, 한 소녀를 아프게 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과 자연을 객체화 함으로써 느끼는 분리감과 소외가 구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보편적인 아픔은 개인적인 감상으로써만 표현될수 있다. 보편적인 아픔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진술하려하면 도리어 소외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시를 다시 읽을수 있다. 소년은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소유하려 한다. 왜 그럴까? 그는 자신과 들장미를 포함한 자연이 이미 하나의 전체임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과 들장미를 주체-객체의 관계로 파악한다. 따라서 그가 오래오래 들장미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기 위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들장미를 꺾는다. 즉 파괴한다. 이로써 그는 그 아름다움을 향유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게 된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다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과 들장미가 이미 하나임을 알지 못하기에 또 다른 들장미를 파괴하러 갈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향후 괴테의 거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가 된다. 젊은 베르테르가 사랑과 소유를 구별할 수 있었다면 과연 자살했을까? 파우스트가 지식을 소유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났다면 그 방황이 필요했을까?

이 한 편의 시에 간명하게 표현된 내용을 헤겔은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얼마나 장황하고 복잡하게 기술해 놓았던가? 그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말이다.

이제, 들장미의 이런 내용을 음미하며 이를 노래로 들어보자. 앞의 것은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것이고, 뒤의 것은 브람스가 곡을 붙인 것이다.


영화 레인에서 슈베르트의 곤돌라 노래

구 블로그의 음악 포스팅을 살리고 있습니다. 음악을 올리기 어렵게 만든 블로그스팟의 빈틈을 이용해서 계속 음악 부활에 성공한 포스팅을 전면으로 올리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삶을 너무 경직되게 바라본다. 경직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현재를 종속시키고 왜곡시킨다. 경직된 가치를 품고,매사를 그 가치에 맞춰 평가한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도 그 가치를 배신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보지 못하고 타인을 그 가치에 맞추어비난하고 꾸짖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까운 사람, 가까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린다. 요즘 영화들을 보면 확실히서양인들의 세계관의 변화를 느낄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한 구획, 기획, 이를 통한 전체적인 규율과 통제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무너지고 있다. 오히려 그런 합리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정서적인 것들, 작은 것들, 그리고 그 소소한 차이들의 이해와 공감이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 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들자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 없다는 정말 평범한진리... 하지만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것은 항상 우리가 뭔가 더 먼것, 더 큰것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아닐까? 그 와중에 서로를 인간으로, 그리고 나와의 관계 자체가 가치있는 그런 동료로서 바라본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으로바라보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여성 정치인은 정작 오랫동안 같이 지낸 가정부를  가사 도우미로만바라보았고 가정에서 소외된 동생의 아픔에 무관심했음이 드러난다. 그 여성정치인과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던 이민2세 청년은  그녀를다만 다큐멘터리의 피사체로만 또 자신이 겪은 불평등과 부조리의 장본인이라는 분노어린 바라보았기에 그 아픔까지 새기지 못했다.이런 식으로 우리는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을 자꾸 나와 너 사이에 집어 넣으면서 그를, 그녀를 차가운 대상으로만들어 관계의 의미를 가려버린다.



그리고 비가내린다. 비는 마치 관계를 가린 먼지를씻어내기라도 하듯 내리고, 이 비를 피하기 위해 하룻밤을 보내게 된 어느 농가에서 마침내 이들은 마음을 터놓는다. 서로의 상처를알게 되고, 서로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된다.


이 세계의 인간이 60억이라는데, 내가 알고지내는 사람은 100명도 안될 것이다. 확률로 따지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적은 숫자인데, 이 인연은 보통인연이 아닐 것이다.이렇게 수억분의 1의 확률로 만난 몇 안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차가운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니 우리의 삶이 그토록 고달픈 것이아닐까? 우리의 시간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오지못할 소중한 것들이고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들이 아닐까? 그렇게 아주 가까이 삶의 지혜가 있고, 해방이 있고, 진보가 있는게아닐까?


마음이 찌푸릴때 들으면 한두소절만으로도 금새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주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합창곡"곤돌라 뱃사공의 노래(der Gondelfahrer)"와 함께 영화 "레인"은 내 삶을 그리고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냥 긴 말 필요없이 슈베르트의 음악이나 듣자

2011. 3. 21.

개드립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교장들, 그리고 교총

먼저 저작권 운운할까봐 먼저 기사 링크

http://news.nate.com/view/20110321n13834?mid=n0403

이 기사의 팩트는 이렇다.

1)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이 전국 초중고교 교장 1천1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2) 응답자의 67.5%가 교과부와 시도교육청간 정책혼선이 학교 현장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3) 교과부와 일선 시도교육청간 정책혼선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식 정책이 교육계에 확산된 탓'이란 응답이 50.4%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어서는 '일부 시도교육청의 편향된 정책 시행'(42.4%), '교과부와 시도교육청간의 정책 주도권 경쟁'(6.4%) 등 순이었다.

4) 교과부의 시도교육청에 대한 정책 조정기능에 대해서도 '미흡하다'는 응답이 87.4%로 대다수였다.

자 , 이제 이걸 하나 하나 살펴보자.

1) 왜 교장에게만 물었을까? 이거부터 정당화 해야 한다. 설마 교총은 일부 진보교육감이 당선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집단이 교장단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부정부패가 만천하에 알려져서 공분을 일으키고, 그래서 진보교육감이 약진했다. 그러니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지역에서 가장 힘겨운 처지가 된 집단은 교장들일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을 물어본다는 것인가? 한국교총은 교원단체총연합인가, 교장총연합인가?

2) 교과부와 교육청의 정책혼선이 학교현장에 큰 영향을 미치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이건 정답이 정해진 설문이다.

3) 포풀리즘식, 편향된 정책 등 설문 문항에 이미 자극적이고 가치편향적인 용어들이 춤을 추고 있다. 게다가 이 용어들은 정치적으로 특정 성향의 집단이 반대성향을 욕할때 즐겨 쓰는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이 포함된 설문 문항이 어떤 특정 성향의 집단에게 던져지게 되면 응답 빈도는 굳이 세어볼 필요도 없이 뻔하게 나온다.  한 마디로 이 설문 조사는 쓰레기다.

4) 교과부의 시도교육청에 대한 정책 조정기능이란게 대체 뭔가? 시도교육청의 정책을 교과부가 조정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건 한 마디로 진보교육감의 정책을 교과부가 나서서 무력화 시켜달라는 요구다.  진보교육감들은 교장의 87.5%가 이런 반란세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개과천선의 가망이 없다. 그냥 다 쳐내는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교장들이 "애들 못 때리고, 선생 앞에서 호통 못 치고, 돈 못 해먹으니까 불편해 죽겠다. 교과부 장관이 좀 나서서 애들 때리고, 선생 갈구고, 돈 해 먹을 수 있게 해줘"다. 차라리 그냥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자. 공연히 유식한 척 하면서 무식한 티 내지 말고

젊은 교사 예비교사가 움직인다


꽤 지난 이야기지만 2월 26일에 참교육으로 여는 세상이라는 단체로부터 교육 불평등에 대한 발제를 부탁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흔히 있는 그런 시민단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젊은이들이 한 방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20대~ 30대 젊은 교사들, 그리고 예비교사들이었습니다. 이 중에 전교조 조합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전교조와 큰 관련이 있는 모임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작금의 교육 현실에서 문제의식을 느낀 젊은 교사와 예비교사들이 모여서 의견을 교환하면서 점점 커지고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이건 정말 고무적이었습니다. 전교조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40대 조합원이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있으니, 가히 이촌향도의 농촌 꼴이 되어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젊은 교사들은 이기적이며, 개인주의적이라는 불평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젊은 교사들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다만 전교조가 그 움직임을 포착하고 받아안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젊은 교사들이 매혹을 느낄 만한 뭔가가 없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명박과 공정택이 이들 젊은 교육자들을 각성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30대 교사들이 독서모임을 하겠다면서 마치 전교조 처음 설립할때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뭔가가 느껴집니다. 뜻 있는 교사들의 맥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맥이 꼭 전교조일 필요는 없고, 전교조가 그 맥에 동참하고 싶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저 젊은 교사들의 모임을 링크 해 둡니다.

참교육으로 여는 세상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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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20.

해직교사 복직 소식을 들으며 떠오르는 기억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액션을 취했다는 이유로 어이없이 해직되었던 교사들의 복직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이제 교단에 돌아갈 일만 남았겠지. 애초에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그 소회는 다른 분들만큼 크지는 않다. 다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

2008년 처음 그 분들이 해직되었을때, 20대 젊은 분들이 계셔서 특히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블로그를 통해 상담, 혹은 조언,  태클? 비슷한 것을 구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었다.

1) 너무 심려치 마라. 짧으면 2년, 길어도 3년이면 복직 된다. 법리적으로 검토해 봐도 이건 무조건 당신들이 이길 사안이다.

2) 그렇게 되면 그 동안 밀린 임금 왕창 이자까지 받게 될테니 그냥 아주 긴 방학이라고 생각하라. 혹은 교수들에게나 주어진 연구휴식년이라고 생각해라.

3) 그렇다면 문제는 그 2년간의 방학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그 기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잡아라. 그 동안 대학원을 다니는 것도 괜찮고, 여러 학술단체나 학습모임을 하는 것도 괜찮다. 복직했을때 전문인으로서 훨씬 업그레이드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준비하라.

4) 다만, 해직교사라는 상징성때문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게 될 집회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마라. 아스팔트에 날린 시간은 그야 말로 매몰비용이다.

그랬더니 그 분은  가르치는 방법, 내용 같은 것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위 아스팔트 일, 그러니까 운동권 용어로 실천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중요한 공부가 아니겠는가 하는 답변을 했다. 그리고는 별 교류가 없었다. 그리고 들리는 소식으로는 곳곳에 다니면서 아스팔트의 전사가 되시고, 투쟁의 상징이 되신 것 같다. 그리고 끝나면 어김없는 술자리도.....결국 4)로 일관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그 분들 모두 복직을 하게되었다. 그런데 그 분들 중 어느 분이 트위터로 "2년 8개월의 경력 중 2년 3개월이 해직기간인 선생이 온다니 교장이 바들바들..." 계열의 글을 올리시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상당한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걱정해야 할 사람은 교장이 아니라 복직하실 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졸업시킨 학생 어머니 중 의사가 있었다. 그 의사는 아들이 초등학교때 담임과 트러블을 일으키자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의사를 잠시 쉬고 아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아들이 위기를 넘겨서 의젓한 중학생이 되자 다시 복귀하려 했으나, 이미 몇년 사이에 의학이 너무 많이 달려나가서 복귀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게 전문직의 세계다. 그래서 의사가 대접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그 뜻이야 아무리 고귀했다 할지라도 2년 이상 현직에서 벗어나 있었던 교사는 복귀에 앞서 상당한 두려움과 걱정을 느껴야 정상이다. 나는 1년간 전교조 부대변인으로 현직에서 벗어나 있었다가 이대로는 내 전문성이 썩어버릴까봐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그 나마 대학교에서 6학점 정도 강의를 했으니 그럭저럭 선생으로서의 능력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1년간 정말로 소위 활동가로만 있었다면 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젊은 해직교사들에게는 학교로 돌아감이 주는 설레임과 또한 현직에서 벗어났었다는 두려움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다.

물론 나는 그 분들의 운동성과 의기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운동성이 교사의 가치를 높여주지는 않는다. 운동성은 전문성의 한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은 무엇보다도 튼튼한 기본이 있을때 비롯되는 것이다. 부디 저 젊은 해직교사들이 해직기간 2년여 동안 철저하고 피나는 기본지식과 기본기 수련을 놓지 않았기를 기원하고 또 그렇게 빋어 본다.

1995년(96년?) 전교조 해직교사 1500명이 복직했을때 그들이 겪은 가장 큰 고통은 두가지였다. 1) 5년만에 아이들이 엄청 달라져 있어서 적응이 안된다는 것 2)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기술이 더 이상 참신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운동가로서는 몰라도 적어도 교사로서는 매우 평범한 수준 이상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보다 2년 선배 복직 교사가 있었는데, 85학번이셨으니 겨우 1년만에 해직되신 분이었다. 그리고 5년을 해직교사로 보내다가 학교로 돌아오셨는데, 불행히도 그 5년간 교사로서 요구되는 기본지식과 기술을 꾸준히 연마하지는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뜻의 고매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수업에서 학생들의 흥미를 모으지 못해서 고통스러워 하셨고, 거의 부적응 교사같이 힘들어 하셨다.

교사는 앞에 학생이 있으면 가르치고, 없으면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 기본적인 삶을 해직기간동안 깨지 않고 꾸준히 연마했기를, 그리고 앞으로 해직될 교사들도 이 기본을 늘 견지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교조가 해직자들에게 생계비나 대줄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원할 체계를 갖추어 두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2011. 3. 18.

상당히 짜증나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 보도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도하는 우리 언론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 어떤 면에서는 호떡집에 불난 한국 언론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오히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게다가 여기에 과학자나 공학자까지 데려다가 인터뷰 형식으로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렇게 불안을 증폭시키는 이유가 뭔지, 혹 뭔 음모라도 있는게 아닌지 의심이 갈 지경이다. 그러는 와중에 스리슬쩍 최시중은 넘어가고 장자연은 잠복하고.....

한국식 원전 보도를 가상으로 재구성 해 봤다.

기자(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지금 일본인들은 공황상태.... 방사선 수치가 기준치의 3000배, 5000배... 이대로 가면 체르노빌 대 참사.... 폭발을 향해 가고 있는거 아니냐..... (이러면서 마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앵커(긴박한 목소리로): 현지 외국인들이 탈출이 시작되었다면서요?....

(이런식의 이야기가 오간다. 이렇게 오가는 뉴스를 하루에 몇번씩 일주일째 봐야 한다.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이 들때쯤 전문가를 모신다)

앵커: 박사님 모셨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단도직입적으로)원자로가 폭발할까요?
박사:(황당~~~ 과학자들은 이렇게 극단적인 질문에 익숙하지 않다) 지금으로선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고, 아직 내부 데이터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확답을 드릴수는 없습니다만, 직접적인 핵폭발까지 갈 가능성은 적지 않나(전형적인 과학자의 답변... 확률적 대답... 그러나 앵커는 이것을 이용한다)
앵커: 아, 그러니까 폭발할 가능성도 있단 말씀이시죠?
박사: (과학자 스럽게) 여러가지 변인들을 고려해 봐야겟지만,,,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완전히 닫아둘수는 없습니다.
앵커: (이미 폭발의 확률이 적어도 있다는 답을 들었으니 바로 들이대는 말투로) 만약 폭발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죠?
박사: (여기서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조건이 주어진 상태에서의 현상을 물어 본 것이니) 원자로가 폭발했을 경우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
앵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이 인터뷰는 1) 만의 하나 폭발할 수 있다. 2) 폭발하면 우린 모두 시망이다. 이런 분위기로 마무리 되는 셈이다. 확신을 가진 질문자와 과학자다운 조심스러운 답변의 조합이랄까? 간교한 언론인이 순진한 과학자를 이용한다고 할까? 어쨌든 자꾸 공포심을 조장해서 시청자를 붙들어 매려는 선정성에의 욕구가 우리나라 언론사의 본능인 모양이다.

이제 이런 식의 보도 정말 짜증난다.

2011. 3. 17.

조선일보 개드립 좀 작작해라

조선일보가 개드립 하는거야 이제 다시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번 드립은 정말 극치를 달린다. 저들의 연일 계속되는 혁신학교 까기의 일환일 것이다. 조중동 연합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중 김상곤, 곽노현이 포함되는 모양이다. 그 중요성을 진보라는 진영은 모르는 것 같다.

링크를 걸긴 했지지만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17/2011031700085.html


조선일보 트래픽 올려주지 않도록 일부 발췌한다.
이 기사의 핵심은 이거다.

1) 서울시 교육감이 문예체 활성화 프로그램을 실시한다(이건 깔 수 없다)
2) 여기에 외부 전문가 단체가  학생 교육을 지원한다(이것도 깔 수 없다)
3) 그런데 이 단체 중 좌파단체가 있다 (오호, 이건 딱 걸렸다)
4) 그 단체는 4대강 반대 퍼포먼스를 하고 용산참사 진혼극을 한 단체다(그런데 이게 왜 좌파지?)
5) 공교육에 이렇게 정치적인 편향을 가진 단체가 참여하면 안된다.(이건 웬 궤변)
6) 이건 너무 비교육적인 처사다. 교육감의 개인 철학으로 학생과 교사를 실험하려 한다(중앙대 이성호 교수의 발언)

결국 이 중 시비를 건 것은 3) ~6)번이니 이 주옥같은 개드립들을 하나씩 다루어 보자.

3) 이 단체들 중 좌파 단체가 있다.
조선일보 탁기자도 인정했듯이 이 단체들 중에는 대한 축구협회 같은 소위 정상적인 단체들도 있다. 대개는 소위 정상적인 단체들이다. 그런데 탁기자는 이 중 좌파성향의 단체가 하나 끼었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전의 공정택 사기꾼이 실시했던 한국 근현대사 특강의 강사들은 어떠했는가? 그들 중 상당수가 우파성향 단체에서 상당히 물의를 일으키며 활동했던 인사들이었다. 내가 하면 역사 바로잡기이고 남이 하면 편향인가?
오히려 문예체 외부지원단체는 일종의 쇼핑몰 같아야 한다. 좌파적인 단체도 있고, 우파적인 단체도 있고 골고루 있는 것이며, 이게 일선 학교의 선택을 받는 것이다. 도대체 중립적인 단체가 어디 있나? 모든 사람은 정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은 오히려 다양한 정치적 경향을 두루두루 경험하면서 자기 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중 어떤 경향을 교육 현장에서 배제하려는 시도 자체가 지극히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4) 좌파단체라는 근거로는 정말 우습다. 4대강 반대한 단체에는 천주교 주교단도 있었다. 조계종도 있었다. 결국 개독 외에는 모두 좌파종교란 뜻이로군. 그리고 용산참사에 울분을 느끼지 않고 뭔가 행할 마음이 없었다면 그건 우파가 아니라 냉담한 것이다.

5) 공교육에 정치적 편향을 가진 단체가 참여하면 안되는가? 그럼 전두환 장수 기원했던 교총소속 교사들부터 몰아내야 하겠군. 하지만 그 사람들도 남아있는 이유는? 교육은 무슨 증류수 같은 게 아니다. 그런 이념의 무균실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겪을 혼란을 생각해 보았는가? 공교육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가 다양한 이념적인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면 교육에도 그런 스펙트럼이 있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 공교육은 너무 우편향이었다. 그런데 이걸 중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눈에는 균형을 맞추어 가는 과정이 오히려 좌편향으로 보이는 것이다. 좌파단체가 참여하는게 문제라면 우파단체도 같이 참여해서 균형을 맞추면 될 일이다. 그게 교육적으로 더 올바르다.

6) 교육감의 개인적 철학으로 교육을 실험하지 말라. 이건 개드립의 하일라이트다. 저 이성호라는 교수는 명색이 교육학 박사인 내가 논문을 쓰면서도 한번도 인용하거나 찾아본 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교육학자로서의 명망은 그다지 없고, 이념 놀이로 한 자리 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왕년의 정원식, 이영식 같은 사람들처럼. 우파라서 그러는게 아니다. 이홍우 같은 분은 보수파지만 얼마나 훌륭한가? 그쯤 되어야 교육의 순수성을 운운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성호는 그러기에는 너무 이념적으로 우파색을 자주 드러내었다. 이주호의 단짝이자 한국논단의 필진 아닌가? 그런 사람이 편향된 철학 운운하는 것은 참 우습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교육감의 개인적인 철학을 운운하는 것은 더욱 우습다. 우리는 흔히 교육감의 교육철학이 뭐냐고 묻지 않는가? 그리고 철학 없는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가? 교육감은 당연히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걸 실험하려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대체 뭐 하러 교육감을 하겠다고 나섰는가? 초등생부터 밤늦도록 공부로 뺑이치고 경쟁판을 돌리자는 건 공정택의 나름 철학이었다. 그래서 일제고사야 뭐야 난리를 쳤다. 그거야 말로 어린 아이들을 개인적인 저급 철학으로 실험하는 것 아니겠는가? 교육감의 개인적 철학을 운운하려면 초등생 밥 굶기고 시험 준비시키는 다른 지역 교육감부터 까고 이야기 하시라. 그리고 교육감의 개인적인 철학이 문제면 거기에 합당한 비판을 하고 토론을 벌이라. 교육감이 자신의 철학을 교육정책에 반영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교육감을 두지 말고 로봇을 세워두자는 말과 같으니. 하긴 우리 대통령 각하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철학으로 온 국민을 상대로 실험을 하지 않았나?

더 말하고 싶은데 잎이 아파서 여기서 멈춘다.

2011. 3. 8.

커피 원가가 123원? 정신나간 기사 (1) 경제학적 측면에서

TV에서 아메리카도 한 잔의 원가가 123원인데 3500원에 팔고 있어서 커피 애호가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갔다.

엠비시 원문 기사

원두 가격이 10g당 123원이라고 했으면 될 것을,  기자는 아주 선명하게 "원가는 고작 123원"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커피전문점, 카페 점주들은 30배의 폭리를 거두는 악덕 상인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뭐라고 반박하면 순식간에 "이 된장년" 운운하는 마초들의 반격이 가세한다. 이 마초들이 촛불 세력과 꽤 중첩되는 것도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쨌든 커피 원가 운운하는 기사의 부당성을 한 번은 경제적 측면에서 한 번은 문화적 측면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나 역시 일년에 커피를 400잔 이상 마시는 입장이라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

가격은 어떻게 결정될까? 소위 수요-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결정되는 가격은 공급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가격이다. 즉 독점기업이 아닌 다음에야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과 다른 가격표를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지금 커피전문점에 뛰어 들었는데, 아메리카노 한잔 가격이 3500원이라면 내 멋대로 4500원을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설사 3500원에 팔면 적자가 날지라도. 그럴 경우는 시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반면에 2000원에 팔아도 충분한데 3500원에 형성되어 있다면 경쟁업체를 고사시키기 위한 전략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2000원에 팔 이유가 없다. 이미 시장에서 형성된 3500원에 팔고 과욋돈, 즉 특별잉여가치를 챙기면 그만이다. 이걸 폭리라 부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없체보다 훨씬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는 것이 거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만큼 더 좋은 기술을 가졌거나, 더 좋은 원료구입처를 개척하거나 한 수고 없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그건 특별한 수고에 대한 특별이윤이지 폭리가 아니다.

만약 커피전문점이 하나 혹은 소수에 불과해서 이들이  담합하거나 해서 커피 값을 올린다면, 이것이 비난받아야 하고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폭리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커피전문점 시자은 독과점 시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스타벅스가 1위로 되어 있기는 하나 결코 시장지배적인 위치에는 있지 않다. 도리어 커피 값은 스타벅스가 커피빈이나 파스쿠치보다 더 저렴한 실정이다.  스타벅스 외에도 스타벅스와 충분히 경쟁상대가 될 수 있는(시쳇말로 된장녀들에게 듣보잡이 아닌) 커피전문점만도 앤젤리너스, 할리스, 탐앤탐, 파스쿠치, 커피빈, 카페베네, 커핀그루나루 등 즐비하다. 이런 정도 상황에서 이들이 담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 반드시 배신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피전문점의 커피값은 결코 일부 업자들의 악덕 폭리가 아니다. 이건 우리 나라에서 몇 안되는 정상적인 시장 가격이다. 된장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세상에 우리 나라에 된장녀가 수백만명, 결국 결혼 적령기 여성이 전부 된장녀라고 우기지 않을거면 이런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시장은 된장녀 몇명의 선호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라면값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라면 시장은 라면 시장이고, 커피 시장은 커피 시장이다. 라면이 4000원이라고 해서 커피가 그것보다 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라면은 그 정도 가격에서 대체할 수 있는 상품이 많지만, 즉  배가 고플때 라면집이 없으면 다른 거 먹어도 되지만, 또 직접 끌여 먹어도 되지만, 커피는 그렇지 않다. 커피가 땡길때 이걸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은 커피집밖에 없다.  따라서 충족기회:선호 비율에서 즉 희소성에서 라면집은 커피전문점과 비교될 수 없다.

게다가 저 123원은 한계비용 중에서 원료비만 계산한 것이다. 커피 추가 한 단위를 생산하기 위해 투입되는 비용에는 노동임금, 연료비, 전기요금 등도 포함되어야 한다. 또 커피를 주어진 기간동안 몇잔이나 판매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 평균고정비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인테리어 비용, 커피머신 비용 등은 일단 투입되면 커피 한 잔에 분산되어 회수되지 않는 이상 되찾을 길이 없다. 판매하는 커피 잔수가 많을 수록 한 잔에 포함되는 이들 고정비용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스타벅스처럼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지 않은 더 작은 업체들에게는 더 많은 평균고정비용이 커피 한잔의 원가로 계상될 것이다.

따라서 커피 원가는 원두 값이 아니라 한계비용(추가 한잔에 들어갈 임금, 원료비, 연료비)+평균고정비용(각종 고정 설비, 임대료, 인테리어, 기계값을 예상판매잔으로 나눈 값+감가상각)이 되어야 한다. 이 값은 회사마다, 또 점포마다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 이 값이 시장 가격보다 낮으면 커피전문점은 진출하지 않을 것이고 높으면 진출 할 것이다. 그런데 시장가격은 수요-공급의 함수다.

스타벅스, 커피빈 밖에 없던 시장에 우후죽순 전문점이 진출했지만 아직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더 많은 공급자가 들어설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직도 새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고 있다. 이제는 대기업 뿐 아니라 동네표 커피점들도 가세하고 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커피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면, 그때는 커피값이 좀 내릴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고, 다음에는 오히려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적인 관점에서의 설명을 좀 해 보려고 한다,

2011. 3. 7.

술에 취한 나라....

얼마 전 한국 성인의 1인당 연간 알콜 섭취량이 14.6 리터라는 놀라운 보도가 있었다. 술을 14.6리터를 마신다는 것이 아니라 알콜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소주로 환산하면 여기에 5를 곱해서 성인 1인당 연간 소주 73리터를 마신다는 뜻이 된다. 소주 한 병이 0.36리터니 연간 소주 200병을 마신다는 것이니, 정말 어마어마한 술 소비량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세계 최강은 아닌데, 상위권에는 헝가리, 러시아, 우크라이나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반면 일본은 우리의 2/3 수준을 마시고, 중국은 1/3 수준을 마시는 것으로 나왔다. 중국 본토보다 술을 더 안마시는 홍콩이나 대만은 우리의 1/4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술 마시는데 드는 돈,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각종 의료비, 대리 운전 등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는 가히 술 경제권이 따로 하나 설정되어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이런것도 고스란히 GDP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술을 집에서 먹지 않고 주로 술집에서 마시기 때문에 소주 200병에 3000원을 곱하면 60만원이다. 여기에 적어도 술값만큼은 안주발을 세운다고 치면 술+안주값으로 1인당 120만원을 소비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건 소주로만 환산한 것이니 그야말로 최소한이다. 그리고 안주 값도 지나치게 작게 잡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술이 파생시키는 각종 용역도 만만치 않다. 한국적 현상이라고 할만한 대리운전이(이건 한국의 과다 자동차와 과다 음주 문화의 기묘한 결합이다) 실로 엄청난 고용을 창출하고 있는 실태를 보라. 게다가 택시도 탈 것이고 하니 이런 식으로 술 자리 때문에 추가로 사용할 교통비도 1년에 일인당 20만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또 술집이 창출하는 고용 역시 엄청날 것이다. 그래서 술이 창출하는 용역을 교통비 포함 1인당 30만원을 잡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 외에 술 때문에 파생되는 각종 의약품 비용도 1인당 5만원 정도를 잡아 볼 수 있다. 그 외에 이런 저런 잡경비를 계산하면 두루두루 해서 한 사람이 술에 사용하는 돈은 연간 160만원 정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무려 1500달러, 그러니  GDP의 8%가 알콜 및 알콜 파생관련인 셈이다. 게다가 소주뿐 아니라 각종 양주 맥주 등까지 생각하면 족히 GDP의 10%는 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1인당 GDP가 비슷한 대만보다 사는게 팍팍하게 느껴지는 까닭이, 우리 GDP가 술 때문에 과다계상된 탓은 아닐까 하는 농담까지 나올 판이다.

게다가 술 때문에 상실되는 심신의 능력은 노동 효율성의 저하로 나타나서 생산성을 떨어뜨릴 것이다. 술 문화가 보편화되면 현재의 욕망을 유보하는 성향을 떨어뜨려서 자본 축적도 방해할 것이다. 또 술자리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풍토는 투명성과 신뢰성을 저하하여 사회적 자본을 현저하게 축소시킬 것이다. 이런 등등을 감안하면 지금 더 늘어나는 추세인 이 무시무시한 알콜 폭주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안 보일 지경이다.

술... 중국 정도만 마시자. 이렇게 계속 술 퍼먹는 문화가 확산되고, 음식점과 술집이 구별 안되는 상황이 계속되면, 정말 한국이 싫어질 것이다.

2011. 3. 3.

손봉호 교수님에 대한 추억

얼마 전 손봉호 교수님이 한국 개신교회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한국 개신교회는 사상최악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사실 손봉호 교수(이하 존칭 생략) 나의 은사님이다. 나의 석사 논문 지도교수이셨으며, 박사과정때도 네번의 코스를 빠짐없이 수강했었다.

그 분은 정년퇴임하기 직전까지도 총명함을 잃지 않은 대단한 지성인이셨으며, 그 명망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과는 상당히 격의 없이 지내셨다. 나는 아직까지도 교수님 댁 마당에서 "구제역이 유행이라는데 돼지고기나 실컫 구워 먹세" 하신 말씀에 따라 바베큐 파티를 벌였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 지금 경인교대 교수인 설 아무개 선생은 교수님 마당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서 과일을 따기도 했다.)

애덤 스미스는 노인은 미덕인 현명함, 무게있고 신중함에 약간의 젊은이 스러운 장난기와 가벼움이 가미되었을때 가장 훌륭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로 진중하고 근엄하시지만 때때로 가벼운 농담과 장난도 즐길줄 아셨던 손봉호 교수는 참으로 훌륭한 노인이며, 이 나라 노인의 귀감이라 할만했다. 이 사회가 그분에게 보냈던 신뢰는 2003년 이른바 네이스 파동때 교육부와 전교조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도 입증되었다. 이 사회에 참으로 원로라 부를만한 몇 안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분에 대한 내 신뢰는 매우 깊어서 지난 몇년 별안간 뉴라이트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났을때도 뉴라이트의 내막을 잘 모르고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경석이란 인물이 그 분의 눈을 흐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은 뉴라이트 앞잡이 명단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떡하니 나타난 것이 한국 개신교를 맹비난하고, 그걸로 모자라서 한기총 해체운동을 하겠다는 폭탄 선언이었다.

평소에 손교수는 "나는 살아서는 검사의 미움을 받고, 죽어서는 목사의 미움을 받는다."고 했는데, 정말 연세가 아주 지긋해 지시자 하신 말씀을 책임 지려고 나서는게 아닐까 싶다. 목사의 미움은 이제 확실해 졌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시당초 개신교 자체가 그렇게 썩을 수 밖에 없음을 진작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때때로 그 명철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라는 신앙이 그 명철함을 가리는 경우를 왕왕 보아왔기 때문이다. 아마 한동안 뉴라이트 앞잡이 노릇 하신것도 개신교 신앙에 눈이 가려져서 이용당하는 줄 모르고, 저 개신교 집단이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리라.

이 분의 개신교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했다. 예를 들면 한국은 시민운동이 발달해서 6월 항쟁 등이 가능했지만, 일본은 시민운동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일본에는 기독교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놀라운 주장을 하신다거나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개신교가 시민운동을 담보하는 도덕적 보루이기는 커녕 이 땅에서 가장 썪어빠진 집단이었음이 드러났으니 저리 분노하실만도 하다.

하지만 손봉호 교수의 비판은 한기총에서 멈춰서는 안될것 같다. 진정 양식있고, 양심있는 철학자라면 어쩌면 개신교 자체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의 눈길을 던져야 한다. 한국에서 부패한 사기집단인 개신교가 미국에선 거대한 비즈니스집단 아니면 정치집단화 되고 있는 등  피장파장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이구동성 "종교 같기 때문"이다. 즉 개신교는 종교가 줄 수 있는 영적인 체험이란 기능 자체를 거의 상실하고 있단 뜻이다. 아니 애시당초 개신교는 그것을 부정하고 합리적인 신앙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개신교 철학자들은 카톨릭을 "비합리적인 미신"이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 퍼거슨, 버크 같은 사람들... 오직 데이빗 흄만이 개신교 역시 또 다른 미신이라며 그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다.

은사님더러 개종하라거나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를 지도할만한 위치에 있는 철학자라면 자기 신앙 때문에 너무도 오랜 시간동안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조차 철저하게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적어도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정년때까지 금전과 명예의 보상을 누렸던 분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분은 신학자로서 사회적 역할을 하신 것은 아니었으니.

2011. 3. 2.

B급좌파 까기(2) -김규항 2

김규항 이야기는 오늘로 마치려고 한다. 사실 이번에 하고자 하는 말은 김규항에 대한 것이 아니라 김규항이 구사하는 개념과 용어들에 대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규항의 인격은 다소 편협하지만 그래도 배울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구사하는 '진보'개념이 사람들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개념을 논쟁적인 의미를 담고 사용하지 않고 판단의 준거로 사용해 버리면, 결국 자신이 내린 그 개념의 정의 안에 감금당하고 마는 셈이다. 사실 이 개념은 김규항 뿐 아니라 모든 B급 좌파들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문사회 고전들 중 '진보'라는 단어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책은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자본론? 천만에. 직접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아니면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학 원리'일 것이다. 특히 마셜의 책은 '진보'로 시작해서 '진보'로 끝난다. 즉 B급좌파식으로 말하자면 이 진보라는 말은 원래 좌파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사도들"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좌파가 진보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건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간에 "인류의 상태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을 믿고 있다면" 누구나 진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우파는 지금보다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생산과 분배가 이루어져서 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다면 그걸 진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좌파의 진보도 그닥 다르지 않다. 아니 사실상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다만 자본가의 이윤이 정당한 몫이냐 아니면 단지 착취에 불과하거나 잘 봐줘야 일종의 필요악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릴 뿐이다.

혹은 인류의 욕망 자체가 물질적인 욕망을 넘어서 보다 정신적이고 미적인 수준으로 고양되어 지금처럼 경제적 분배를 놓고 다투는 경지를 넘어서는 것을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진보란 지금보다 나은 인류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은 상태인가를 놓고 이념이 갈릴 뿐이다. 따라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면 그게 사회주의자건 개량주의자건 관계없이 진보라 불릴 자격이 있다. 진중권도 진보고, 조국도 진보다. 물론 나도 진보며, 장관되기 전의 이주호도 진보다. 반면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한국교총과 교장단은 진보가 아니며, 민주노총과 노동귀족들도 진보가 아니며, 전교조 지도부들도 진보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김규항은 다소 진보라 부르기 위태로운 지점에 있다.

사회주의를 말한다고 해서 꼭 진보는 아니다. 예컨데 요제프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결국은 관료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될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슘페터는 진보가 아니다. 그는 경제의 활력과 기업의 모험심이 차가운 집산주의로 응결된 결과로 사회주의를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사회주의에 대한 묘사는 좌파의 그것과 다를바가 없다.
반미반제를 말한다고 해서 진보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김정일이나 카다피를 진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물론 자본주의 너머를 사유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너머를 사유하지 못한다고 해서 진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먼 훗날을 내다보는 진보나, 지금 실현 가능한 개선을 시도하는 진보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은 후자가 더 소중하다. "자연은 도약하지 않기"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게 진보인 것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마르크스야 말로 가장 보수적인 사상가다. "공산당 선언"의 거의 절반은 자본주의 예찬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가능한 토양을 자본주의가 만들었으며, 실상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껍데기만 남겨놓고 거의 공산주의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아니면 그 거대한 생산력의 사회화는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자본주의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 다양한 신분과 계급을 모조리 철폐해서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노동자로 단순화 했겠는가?

기실 사회주의는 이미 자본주의가 다 이루어 놓은 것에 거기에 알맞은 옷을 입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미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사적소유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미 소수의 자본가 외에는 평준화된 계급을 마저 평준화 하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당시 경천동지할 발언을 퍼붓고 다니던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비하면 자본주의 찬양론자에 가깝다. 하지만 "소유하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이다."라며 절규했던 프루동이 마르크스보다 진보적인가? 심지어 19세기 초 자본주의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은 원조 보수주의자인 에드먼드 버크였다.

결국 마르크스는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에 충실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토양이 충분히 성숙했을때 그것을 토대로 가능한 것이지, 용기와 반자본주의 결기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양질전환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물론 양적 변화만으로는 소위 "근본적 변혁"이 이루어졌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질적 변화는 양적변화가 누적된 결과다. 즉 근본적 변혁을 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라 그 순간 순간 요구되는 변혁을 꾸준히 누적시키다가 어느 임계점에서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혁명은 공격성과 폭력성을 갖춘 사람들이 계속 모여서 음모를 꾸미다가 한 순간에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낡은 체제를 아래에서부터 하나 둘 바꾸어 나가다가 마지막에 화룡점정을 하는 것이(그 마저도 불필요할 수 있다) 다. 결국 체제의 변혁은 나중이고, 삶과 일상의 변혁이 먼저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이걸 강요할 뜻은 없다. 다만 근본적 변혁을 꿈꾼다는 이유로 소위 진보 진영에서 성골 행세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 "진보"라는 딱지는 무슨 신성불가침한 것이라서 아무나 붙일수 없는 그런게 아니라는 것만 강조해 두려고 한다.

이런....

Twitter / seungjoon ahn: 음원사이트에서 600원짜리 노래 한곡이 팔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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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1.

B급 좌파 까기 (1) 김규항 -1

요즘 이명박 정권은 바야흐로 공포물에서 코메디물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 덕분에 이 정권에 대한 비판의욕이 그만 사라졌다. 이미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거기에 말 보태봐야 예능감 모자라는 내가 할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요즘 나를 열받게 만드는 집단은 저들이 아니라 소위 진보진영의 지식인(무슨 지식을 갖췄는지는 모르겠지만)들이다. 이명박 정권이 스스로 무너져 내릴때 기회를 잡기는 커녕 스스로의 꼴통성을 폭로하면서 진보진영 전체를 좌꼴로 전락시키는 몇몇 수구 좌파들 말이다. 그래서 이들 몇몇을 골라서 좀 치려고 한다. 그 중 1번 타자는 김규항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아무 감정이 없다. 일면식도 없을 뿐 아니라 이 사람이 쓴 책을 사 본적도 없고, 이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다만 간혹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잡문들을 보다가 하도 기가 막혀서 반쯤 읽다가 던져버린 기억 뿐이다. 왜 집어던지냐고? 김규항. 이 사람은 소위 좌파라고 자처하는 집단에서 꼰대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기독교 방송 보면 볼수 있는 목사들 있다. 신도들에게 한바탕 호통을 치면서 "당신들이 주님을 위해 뭘 했소? 주님이 당신들께 너희들은 나를 외면하고 .... " 이렇게 말하는 목사들... 그럼 신자들은 흐느끼며 깊이 반성한다. 그런데 김규항의 화법이 딱 그렇다. 여기서 주님을 빼고 "근본적인 변혁"만 집어넣으면 된다. "너희들은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하지 않았다. 고로 너희들은 좌파 아니거나 기회주의자다." 여기서 다시 깊숙한 한 마디, " 나같이 고결한 사람도 B급 좌파 밖에 안되는데, 너희들이 무슨 좌파며 진보냐? 썩 물렀거라."


이런 식으로 김규항에 의해 진보로부터 축출된 사이비들의 목록은 이렇다.


1)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 정진하는 지식인들
2) 소수자 운동, 여성 운동 등 신사회운동들
3) 환경 생태 운동
4) 진중권 등 개인의 자유를 숭상하는 무리들
5) 조국 등 범민주 연대를 주장하는 세력들


이들의 혐의는 모두 같다.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하지도 않으면서 감히 "진보"를 사칭해서 우매한 대중들에게 "진보"의 신성함을 오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들은 한나라당보다 더 나쁜 놈들이다. 진보편이 아니면서 진보편인척 하는 2중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변혁"이라는 말이 참 묘상하다. 왜 이리 베베 꼬고 있나? 차라리 오세철 교수처럼 "사회주의"라고 말하는게 더 진정성있고 솔직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변혁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체의 운동은 진보도 좌파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간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말하지 않고 묘상하게 진보, 근본적 변혁 따위 말을 사용하니 싸움이 벌어지고 종교재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잡혀갈까봐 겁나서일까? 아니다. 책을 팔고 글을 팔아야 하는데 "사회주의"라고 선명한 용어를 썼다가는 금민 처럼 소수파로 전락할까봐 두려워서다. 즉 상당한 대중들에는 영합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선명성은 보이고 싶고 하니 이 두 마리 새를 다 잡기 위해 저런 애매한 용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것이 진정 좌파를 자처해서는 안될 민족주의 진영에 대해 김규항이 이마를 들이대며 싸우는 꼴은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남한 진보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민족주의가 우파가 아니라 좌파에 가서 붙어있고, 그것도 다수파가 되어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 김규항이가 뭐라고 한바탕 붙는 꼴은 본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당연하다. 어차피 김규항의 책이나 글은 범진보진영 울타리 밖으로는 한 발자욱도 나가지 못하며, 중도파 한 사람도 설득해내지 못한다. 그러니 범진보진영에 만연해 있는 민족주의 정서를 건드릴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등등을 미루어 볼때 김규항은 선명한 사회주의자라기 보다는 교묘한 이념비즈니스맨이자 좌파 기회주의에 더 가깝다. 그런데 그 시장이 점점 조국, 진중권 같은 굵진한 인물들에게 잠식당하니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마치 삼성이 애플까 언플하듯이 말이다.


문득 김규항 본인이 누가 진보인가를 규정한 기준이 생각난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불온함이 중요하다.  그런데 겉보기에 아무리 불온해보여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불온함이 아니다. 반대로 그다지 불온해보이지 않지만 지배체제가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불온한 것이다. 이건 김규항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김규항은? 그 강직하고 비타협적인 언설에도 불구하고 지배체제가 김규항에게 위협을 느끼긴 커녕 그 존재나마 인식하고 있을까 싶다. 반면 그가 자유주의자로, 엘리트중간계급으로 몰아세운 진중권과 조국은 어떠한가? 김규항이 평생 구경도 못해봤을 여러가지 교묘한 탄압과 방해공작을 받지 않았던가? 혹은 곽노현이나 김상곤은 또 어떠한가? 이들 역시 지배체제가 김규항의 무시무시한 발언보다 더 위협을 느끼지 않던가?


아, 물론 여기서 지배체제란 현 정권을 말하는게 아니라 자본주의 부르주아 집단을 말하는 것이라고 둘러대면 또 할말이 없다. 자본주의가 입이 있나, 손이 있나? 자본주의가 위협을 느끼는지 아닌지 어찌 확인하겠는가?


그럼 김규항은 이렇게 대답하리라. 신자유주의에 얼마나 맞섰는가가 기준이라고. 그런데 정작 김규항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분석적으로 정리한 글, 혹은 자신의 신자유주의 이해를 밝힌 글을 본 적이 없다. 대체 이 사람은 뭘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걸까? 그런데 그것과 맞서 싸우라고 외치니 대체 상대를 보여주고 대적시켜야 할게 아닌가?


본인이 안 밝히니 내가 밝힐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김규항이 구사하는 몇몇 개념과 용어들을 좀 정리해 볼까 한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