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31.

개나 소나 파시즘 타령이니 한번 따져 보자

요즘 나꼼수 때문에 좌우 진영이 모두 어지럽다. 우파진영에서는 감히 자기들을 향해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다면서 저질방송이라고 부르며 분개하고 있다. 그런데 좌파진영에서는 나꼼수 뿐 아니라 나꼼수에 열광하는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반지성주의" "노빠현상의 재현" "파시즘"이라는 담론이 난무하고 있다. 진중권은 "닥치고 정치"를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비유하고 있는듯 하다. 이제 김어준은 FROM좌빨 TO파시즘 이라는 좌우 정치 스펙트럼의 양 극단을 총 망라하는 정치이념의 전체집합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일단의 좌파지식인들은 사회과학을 모르는 어리석은 대중들을 닭이라 부르며, 그 대중들의 열광에게 "파시즘"이라는 사회과학 용어를 붙여주었다.
그런데 저 지식인들은 실제 사회과학자들은 파시즘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매우 꺼린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파시즘을 정의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정의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살펴보자.

우선 파시즘의 기원에 대해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담론은 비합리주의, 반이성주의, 반지성주의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게오르크 루카치가 "이성의 파괴"라는 저작을 통해 반동적인 낭만주의 사상이 어떻게 파괴적인 파시즘의 단초가 되었는지 역설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와 모더니즘(합리성에 기초한)적 질서의 답답함이 경제 위기 등과 맞물려 낭만적인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이성에 반감을 가지는 일단의 폭민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강한 반이성주의, 비합리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본능과 감정의 해방을 갈구한다. 따라서 이들은감정을 움직이는 적절한 상징과 이미지 조작을 통해 쉽게 정치적으로 집단동원된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이때 가장 잘 사용되는 상징조작의 소재는 국가나 민족이다. 그러고 보면 박정희도 국가와 민족을 어지간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관점은 파시즘의 초동단계인 광범위한 대중운동(나치 돌격대로 대표되는)에 대해서는 그런데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이후 사회를 철저한 수용소 사회로 재구조화한(돌격대에서 ss로)과정이나 홀로코스트의 고도의 치밀함, 그리고 실제 파시즘 정권들은 한결같이 복고적이라기 보다는 기술지향적이었다는 점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즉 반지성주의, 반이성주의로 파시즘을 설명하는 것은 피상적이며 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파시즘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정신분석적 관점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빌헬름 라이히다. 라히히는 파시즘 자체보다는 파시즘에 동원되는 사람들의 인성 형성에 촛점을 맞춘다. 그러한 권위주의적 인성은 바로 가부장적인 리비도의 억압을 통해 형성된다. 억압을 통해 형성된 권위추종적 대중들이 형성되면, 이들은 자연스럽게 가부장의 역할을 하는 지도자에게, 더 넓은 권위인 국가나 민족에게 복종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허버트 마르쿠제나 에리히 프롬도 일부 수용하여 리비도의 억압과 강박증적 인성이 어떻게 권위에 굴종하는 1차원적 인간을 무더기로 양산하는지 비판한 바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파시즘을 자본의 비상관리체제로 바라본다. 대공황이 심화되면서 자본의 약한고리에 해당되는 국가들(식민지 부족국들)에서는 노동계급의 폭발을 억제하기 위해 이들에게 한면으로는 민족과 국가라는 열광의 대상을 주어 그 폭발적 에너지를 돌리며, 집단적인 희생양을 제공하여 그들의 불만을 전가시키며, 다른 면에서는 폭압적인 기구를 이용하여 소수화된 저항하는 노동계급을 분쇄하는 체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오늘날 실제 사료에 의해 거의 부정당하고 있다.

반면 하이에크는 파시즘을 철저히 독일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영국의 개인주의, 자연주의의 전통이 부족한 독일인들의 뿌리깊은 집산주의가 결국 파시즘으로(국가사회주의)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에게 사실상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질적 차이는 없다.

내기 취하고 있는 관점은 파시즘을 모더니티의 극단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내가 이렇게 말했더니 일단의 사회학도들(학자는 아직 아닌)이 루카치, 만하임, 하이에크 등이 나치의 비이성적 광기를 비판했던 사례를 들먹이며 도대체 내가 학위를 어떻게 땄는지 신기하다며 입방정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입장은 나 혼자 생각이 아니라 아도르도,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아렌트가 가지고 있는 파시즘에 대한 관점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아도르노의 "도구적 이성"이다. 도구적 이성은 어떤 대상을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조작해야 할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합리적인 추론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구적 이성은 대상을 표준화하며, 이는 결국 세계를 합리적 사고에 종속시키는 동일화로 발전하게 된다. 세계는 목적들의 관계가 아니라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사고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이를 위해 표준화된다. 특수성은 소멸된다. 그리고 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모든 사람들은 아렌트의 용어로 표현하면 다만 "견본"으로 간주된다.

이 도구적 이성은 파시즘의 창안물이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은 이 도구적 이성이 도달하게 될 종점이다. 도구적 이성은 사회가 조직되는 원리이며, 계몽의 소산이다. 각각의 인간들을 사회구성원이라는 하나의 견본으로 동일화 한다. 따라서 그 사회의 이름으로 개별 인간들이 조금 손상되어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세계가 '관리된 세계'이며, 이 관리가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이루어질떄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아렌트 역시 이를 "개별성"의 소멸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범주아래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은 철저히 계몽적인 사고방식이다. "유태인"이라고 범주화된 이상 아렌트와 아도르노 혹은 로스차일드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나치의 수용소는 유태인들을 모두 벌거벗기고 삭발시켜 아무런 차별성 없는 한 무더기의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파시즘의 하수인들은 이들 개개인들의 차별성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면 상상력과 감수성이 발동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나 아렌트가 바라본 파시즘은 막스베버가 말한 "영혼없는 전문가"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 외에도 파시즘을 규명하려는 관점들은 많다. 예컨대 빌프레도 파레토의 관점에서 파시즘은 엘리트 순환 주기 중에서 사자형 엘리트가 권력을 잡는 시기다. 역사는 파시즘과 자유주의를 오가는 시계추다. 하지만 이들 관점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들이 있다. 따라서 이 공통의 전제들을 통해 우리는 파시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할 수 있다.

1) 일단의 불만에 가득한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모여는 있으나 고독한)

2) 이들이 동일성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상상된 공동체

3) 이들이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약속된 미래

4) 그 미래를 설명해주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그러나 합리적일 뿐 실증적이지는 않은)과 그 이론을 표현하는 미적 수단

이 중 핵심은 동일성을 느낄 공동체와 약속된 미래다. 이 두가지가 바로 대규모의 대중동원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동원된 대중들은 동일화 되기 때문에 개별성을 상실하며, 개별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자기들 반대편의 개개인들을 마구 공격할 수 있게된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다만 사악한 반대집단이라는 동일체의 부분들로만 간주되기 때문이다.

나는 파시즘 관련 이론들을 아무리 리뷰해 보아도 나꼼수를 통해 파시즘의 전조를 읽어낸다는 건 오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나꼼수는 기본적으로 어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근거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철학은 "좌든 우든 좋은데, 적어도 기본은 된 지도자를 뽑자"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의 추악함을 폭로하자, 폭로하되 비분강개 하지 말고 조롱하자" 정도다. 그들이 어떤 환상적인 미래와 그 로드맵을 제시한 적이 있는가? 물론 나중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온 팩트만 보자.

또 어느 트위터리안 말대로 나꼼수가 환빠처럼 위대한 민족을 내세우길 했나, 아니면 일본인 중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키기를 했나? 혹은 그들이 어떤 동일성의 위험을 보여준 적 있는가? 물론 우리편이니까 봐주자 논리를 가지고 그렇다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철저히 대의제의 틀 안에서 그럴 뿐이다. 뭉치자, 몰려가자 청와대로 우리난 하나다 아니다. 그들의 주장의 최대한은 항상 투표하자다. 투표 외의 나머지 영역은 김어준 말대로 "댁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 나는 나꼼수 팀에게서 하나된 단결에 대한 강조 따위를 들어본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김어준의 성격과 행동방식 자체가 파시즘적 인간형과는 상극에 가깝다.진중권 말대로 막장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적 인간은 뭔가 고결한 이상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그 이상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나 적으로 간주하여 무참히 파괴한다. 고결한 이상과 나꼼수? 영 거리가 멀다.

차라리 나꼼수보다는 월드컵 응원전이 파시즘의 전조를 더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 나는 월드컵 응원전의 파시즘적 위험성을 경고하다가 블로그가 폭파될뻔 한 적도 있다. 저 용감한 반 파시즘 전사들은 그럴떈 꼭 침묵들을 지키거나 같이 축구얘기 했다. 그래서 파시즘이 무서운거다.

물론 나꼼수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에 대해서는 누구나 문제제기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제제기는 그 이야기들에 대한 반대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루어져야지, 저 말을 믿는 너희들은 저질, 이러면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하물며 이렇게 정의내리기 어렵고 뜻도 많은 파시즘이라는 말을 남발하면서 할 일은 더욱 아니다. 내 입장에서는 파시즘은 계몽의 변증법이 도달한 정점이기 때문에 "계몽"을 내세워서 "감정"을 폄하하는 논객들이 도리어 파시즘에 한 발 더 다가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급히 작성한 글이라 인용이나 내용이 다소 부정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을 "파시즘을 정의내리기 어렵다. 누구를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건 따라서 더욱 위험하다. 나꼼수 현상을 파시즘으로 보기는 어렵다. " 정도로 요약하면 되겠다.


2011. 10. 30.

싱가포르: 유리병 속의 행복? 한국은 우물안 전쟁터?

나는 아시아 여행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유럽이나 미국보다 편안하고, 또 안전하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복작대는 것이 좋은 관찰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도 매력적이다. 특히 추위를 타는 나에게 따뜻한 남쪽에 있는 선진 중화권(홍콩, 마카오, 대만, 싱가포르)은 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다. 중국 본토는 웬지 정감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지역 여행을 다닌 한국인들 중 며칠간 입맛이 안 맞아서 거의 굶다시피 했다는 사람들을 제법 많이 보는데, 언어, 인터넷에 이어서 입맛까지도 갈라파고스가 되어서야 어쩔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이 지역의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식이다. 입맛 짧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그 동안 진한 양념과 조미료에 길들여진 입맛을 정화하고 볼 일이다.

그런데 아시아의 4룡의 일원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 4룡은 두루두루 꿰고 있어야 할텐데, 홍콩, 대만은 수차례 방문했지만 싱가포르르를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강제로 가는 연수지만 그걸로 위안을 삼고 일단 싱가포르로 고고싱 했다.

일단 싱가포르에 대한 기본 정보(이하 CIA 월드팩트 참조)는 1인당 국민소득이 41000달러로 과거 이들을 지배했던 식민 종주국인 영국, 일본과 맞먹는다. 게다가 소득수준에 비해 물가도 싸다. 1인당 국민소득으로는 우리나라 두배나 되지만 물가는 겨우 10% 정도 비싼 수준이니 엄청나게 싼 편이다. 그래서 구매력환산 국민소득(PPP)으로는 62000달러에 달해서 세계 5위다. 인구 수천, 수만명 짜리 극소국가를 제외하면 노르웨이, 룩셈부르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에 속한다(참고로 PPP기준 대만은 34000달러, 일본 33000달러, 우리나라는 29000달러).
각종 국가경쟁력 순위, GDP뿐 아니라 이런저런 것들을 통틀어 따져보는 삶의 질 지수에서도 항상 최상위권에 랭크된다. 예컨대 평균 기대수명은 81.9세로 세계 최 장수국 중 하나이며, 실업율은 2.2%로 완전고용을 넘어 거의 초과고용 수준이다. 수치상으로 일단 확인한 바는 거의 환상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박정희를 비롯한 한국의 위정자들에게 늘 모델 역할을 했으며, 특히 "아시아인에게는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가 적합하다"는 담론의 발상지라는 것 정도.

물론 정신승리의 대가들인 일반 한국인들은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의 소국으로 여겨서 까불어 봤자 동남아에서 좀 잘사는 거지 뭐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우리 뿐이며, 제3국의 눈으로 봤을때 우리와 싱가포르의 격차보다 우리와 말레이지아의 격차가 훨씬 적다. 이건 접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이 강제연수의 제목이 선진국 탐방인데, 왜 싱가포르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사회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사람이다.

일단 방문한 첫 느낌은 부유한 선진국이 맞기는 맞다는 것. 멀라이언 파크에서 싱가포르 강 건너편에 보이는 싱가포르 시청 일대의 풍경은 참으로 멋있고 아름다웠다.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공항부터 남달랐다. 공항 곳곳이 수목원처럼 꾸며져 있었으며(심지어 화장실에조차), 그윽한 음악이 흐르고 배색도 세련되었다. 환승 터미널에는 정말 공짜로 앉아도 될까 싶은 카페형 소파들이 있엇고, 심지어 누워 잘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자 도시는 더욱 력셔리해졌다. 사실 싱가포르에 갔다 서울에 왔을때 서울의 도심 풍경이 상당히 누추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정도다. 아래 사진 두 장은 싱가포르에서 도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멀라이언파크에서 찍은 도심 풍경이다.


그리고 서울로 치면 강남에 해당되는 오차드 로드 일대 역시 세련되고 우아했다. 거리마다 빌딩만한 가로수들이 우거져 있었으며, 서울 같았으면 자동차들이 버젓이 주차되었을 넓직한 인도에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고 있었다. 우리나라 강남에서 볼 수 있는 그 천박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디가나 도시는 우아하고 깔끔했으며 품위있었다. 사람들도 조용했고, 무례하지 않았으며, 까딱하면 한 대 처 맞을 것 같은 삭막한 얼굴의 남자들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화려한 빌딩들의 뒷면으로 들어서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눈치 빠른 람들은 사진만 보고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뭔가 활기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지루하다고 할까? 도대체가 번화가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사람이 없다. 아래 사진은 우리나라로 치면 종각역에 해당되는 래이플스 역 광장이다. 오전 11시 현재, 사람이 겨우 이렇다. 이런 풍경은 어딜 가나 볼 수 있다. 화려하고 멋들어진 초현대식 빌딩 사이에 몇 안되는 사람들이 오가는 풍경. 완전고용을 달성한 나라의 위엄인가? 다들 일 하러 갔나? 아니면 너무 더운 나라라서 밖에 나오지 않는것인가? 그렇다면 다른 열대지방의 대도시인 홍콩의 템플스트릿이나 침사초이, 타이페이의 스린이나 시문처럼 야시장 문화가 발달해야 한다. 그런데 싱가포르는 야시장 문화도 찾기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홍콩이나 타이페이에선 지천으로 널려 있는 노점상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지저분한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싱가포르와 여러가지 여건이 매우 흡사한 홍콩을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홍콩 역시 중국계가 인구의 대부분이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중계무역과 금융산업의 중심지이며, 1인당 국민소득도 33000달러로 당당한 선진국이며 물가도 싸서 PPP가 47000달러니, 여러모로 싱가포르와 경제수준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홍콩은 수없이 방문했고, 앞으로도 틈만나면 방문할 것이지만, 싱가포르는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매력이 없다. 이 두나라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음 사진은 홍콩의 중심부인 애드미럴티 일대다.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서울을 누추해 보이게 만드는 엄청난 빌딩 숲이다. 빌딩들이 높을 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훌륭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홍콩의 진짜 매력은 이런 으리으리한 빌딩들이 아니라 그 뒷면이다.


그 뒷면으로 가면... 이런 풍경이 나온다. 우리의 꼬깔콘 시장의 천박한 미학이라면 당장 때려 부수고 위의 빌딩처럼 꾸미고 싶었을 그런 낡은 동네. 하지만 이 선명한 대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가 보지 않으면 모른다. 게다가 이렇게 당당히 버티고 있는 낡은 풍경은 결코 누추하지 않다.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심지어 이런 풍경까지 나온다. 여기는 결코 빈민굴이 아니다. 홍콩의 최대 쇼핑가라 할 수 있는 코스웨이 베이의 한 골목이다. 물론 여기서 몇 발짝 나가면 타임스퀘어, 리가든 같은 세계적인 쇼핑몰들이 하늘을 찌르며 서 있다. 싱가포르에서 좀체 찾기 힘들거나, 찾았다면 진짜 지저분한 빈민굴인 그래서 결코 당당하지 않았던 그런 풍경이다. 이런 낡고 지저분해 보이는 건물들은 홍콩 뿐 아니라 타이페이, 까오슝 같은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속까지 낡고 지저분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싱가포르의 속은 어떨까? 다음의 사진은 싱가포르의 어느 사립학교의 교무실 풍경이다. 이 학교는 일년 학비가 우리 돈 700만원에 달하는(식비, 교재비 별도) 그런 학교다. 이게 국민소득 6만불짜리 나라의 학교로 보이는가? 이게 저 위의 환상적인 도시 풍경에 어울리는 교무실로 보이는가? 이럴때 쓰는 말이 아마도 외화내빈이 아닐까?


결국 싱가포르에서 느낀 것은 한국이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공관원은 싱가포르가 동남아에서나 선진국이지 한국보다 못하다라고 정신승리성 발언을 하며, 그 근거로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해서 겉보기는 깔끔하고 아름답지만, 답답하고 지루한 삶을 들었다. 어떤 작가가 이것을 가리켜서 유리병 속의 행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리병 안에서 모든 것이 안전하고 좋으니 그 밖의 세상을 모르고, 자기들이 최고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홍콩과 같은 중화권인데도(중국 정부는 싱가포르에게도 홍콩, 대만과 같은 일국주의를 적용한다) 이런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애초에 출발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홍콩은 자유인들의 도시였고, 싱가포르는 회초리맞아가며 훈육되는 신민들의 도시였다. 영국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바위섬에 불과한 홍콩을 조차하여 여기에 무역 거점을 삼았고, 그러자 돈냄새 잘 맡는 광동인, 객가인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홍콩이라는 도시가 점점 확장되었다. 이들 광동인, 객가인들은 원래부터 정부말 안 듣기로 유명한 종족들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부나 공권력을 불신하며 오직 자기들의 신용을 통해 맺어진 가족(혈연보다 넓은 개념)만을 믿는다. 영국 식민당국도 구태여 이들을 통제할 이유가 없고, 중국으로 반환된 다음에는 이들을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도시가 되었다.(물론 이걸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개방의 증거로 채택하기도 한다)
반면 싱가포르는 범죄자와 해적의 소굴인 타락한 도시를 자애롭고 정의로운(?) 래이플스 경이 와서 계도하고 훈육하여 타락에서 구한(?) 도시다. 애시당초 이 도시는 영국인들의 훈육과 계도를 받았으며, 영국이 물러가자 자연스레 리콴유의 훈육과 계도를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한국인들이 싱가포르가 답답하다고 여기는 것은 한국이 기본적으로 홍콩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정자들이 늘 싱가포르를 모범적인 대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이상향이 싱가포르이기 때문이다. 즉 다스리는 자는 싱가포르를 꿈꾸는데 실제 사람들은 홍콩적으로 사는 괴리가 발생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따라서 이건 엄밀히 말해서 홍콩적인 자유가 아니다. 언제든지 훈육과 계도가 국가로부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훈육과 계도가 성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리콴유를 비롯한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엄격하게 훈육과 계도를 했지만 동시에 자신들도 그렇게 살았고, 철저하게 백성들에게 혜택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권위를 획득했고, 세계적인 훈육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는 그러라 하고 자기들은 엄격하게 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혜택을 자기들끼라 나누어 먹었다. 그러니 권위가 서지 않고 훈육이 먹히지 않는다. 유일한 방법은 몽둥이로 두드려 패서 훈육하는 것이다. 물론 백성들은 몽둥이가 보이지 않으면 당장 법을 어긴다. 그러니 한국적인 분방함을 홍콩적인 분방함과 혼동하면 안된다. 이건 자유가 아니라 개방이 아니라 사람들이 법을 무시하거나 편법을 쓰는 것, 한 마디로 무법천지에 불과하다. 이게 개방과 자유가 아니라는 증거는 한국인들이 가정에 돌아가서 아이나 부인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당장에 답이 나온다. 홍콩이나 대만 사람들은 가정에서도 우리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결국 우리나라는 자유롭기는 하지만 일종의 전쟁터로서의 자유이며, 약탈의 자유다. 그 결과는 빈곤선 이하 인구가 15%라는 세계적(!)인 결과다. 참고로 중국은 10%, 말레이지아 5%, 대만은 1.2%다(대만과 우리의 국민소득이 거의 같기 때문에 빈곤층 인구비중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는 대만 하층보다 못사는 사람들이 열명에 하나라는 뜻).
그런데 왜 주재 교민들은 싱가포르가 답답하고, 한국이 그립다고 했을까?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은 대체로 금융계 종사자, 정유업계 종사자, IT종사자, 그리고 외교관들이다. 즉 한국은 이들에게는 자유롭고 재미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돈이 많아도 제약이 있는 싱가포르와 돈이 많아지면 그 제약을 무시해도 되는 한국, 그 차이인 것이다.

싱가포르는 유리병속의 행복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나라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 들판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을 표현할 가장 적당한 말은 유리병속의 전쟁일 것이다. 싱가포르식 계도, 훈육 국가 모델을 고수하고 있는 이 나라는 유리병만 가져오고 행복은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유리병 속에서 죽기살기로 싸워서 경쟁해야 행복해진다고 하면서 유리병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었고, 빈부차를 확대시킨것,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들판위의 경쟁이었다. 경쟁은 경쟁대로 둔채로 국민을 다시 유리병속으로 몰아넣는 이 정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투표가 던져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니, 교과부에 제출할 해외탐방 보고서 써야 하는데 내용이 왜 이래? 다시 써야겠다.

2011. 10. 27.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9 -교사가 되면 좋은 점(3)

탐구하고 사색하는 삶

생물 분류학에서 인간을 지칭하는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는 다들 아시다시피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학명에는 인간의 본성, 본질이 생각에 있다는 의미가 다분합니다. 여기에 행복한 삶이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까지 연결하면 탐구하고 사색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이 됩니다. 물론 이건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한 고대 사상가들의 지나친 일반화입니다. 분명 사람에 따라서는 탐구하고 사색하는 삶이 진저리치고 지루한 삶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부가 좋은 분, 평생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좋으신 분이라면 교사가 최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차선은 되는 몇 안되는 직장 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 최선은 대학 교수가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 때 그랬던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지금은 장담 드리기 어렵습니다. 사실 저도 대학교수가 되려고 하고, 또 될 뻔 하기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 두고요.

제가 교수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세속의 영달 등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교수가 교사보다 더 위의 직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종류의 직업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되려고 했던 것은 쓸데 없는 행정 잡무에 시달리지 않고 순전히 교육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학 사회를 알면 알수록 그 곳은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온갖 교묘한 술책과 정치술을 발휘해야 하는 곳이었고, 그것은 내가 가장 자신없어 하고 혐오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각종 연구소나 개발원의 연구원도 공부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국책연구소의 경우는 정부의 요구에 따라, 민간연구소의 경우는 펀드를 대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른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남의 요구에 따라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탐구가 아니라 노동입니다.

하지만 교사의 공부에는 그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이라면 어떤 공부를 하던지간에 공부를 하고 있으면 그것은 일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물론 공부 하고 있지 않아도 일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근무시간 이후에도 거래선 관리, 각종 접대, 이런 저런 자잘한 콘퍼런스 따위 신경쓰지 않고 편안한 장소에서 몇 시간이고 원 없이 공부 할 수 있는 직업이 교사입니다.

물론 겨우 어린 학생들 가르치는데 무슨 원 없이 공부 타령이냐?’ 이렇게 힐난하거나 냉소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학교 사회교사가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거나 하버마스의 소통행위 이론같은 난해한 정치, 사회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깊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아이들 수준에서 가르칠 수 있는 감각이 아니겠느냐 이런 반문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자기 분야의 고급 지식을 습득한 교사가 도리어 아이들 수준으로 가르치는 일도 더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원래 어려운 글 보다 쉬운 글 쓰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며, 어렵게 가르치는 것 보다 쉽게 가르치는 것이 더 넓고 깊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과에 다니는 학부생들에게 일반인을 상대로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을 강의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칸트의 책을 그대로 읽어 내리기에 바쁠 것입니다. 적절한 사례를 드는 것도, 또 칸트의 문장을 알기 쉽게 바꾸어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면 평생을 칸트만 연구한 노학자라면 아마도 유머까지 섞어가면서 일상생활의 예를 들어가면서 아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 참으로 깊고 폭넓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강요까지 받는 직업이라니, 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공부라는 말입니다. 겨우 대학교에 들어갔을 뿐인 젊은이들을 거침없이 공부의 달인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이 천박한 풍토에서 이 공부라는 말의 의미는 너무도 왜곡되어 있어 일대 숙청(?)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이때는 오히려 영어가 도움이 됩니다.

저는 공부라는 말을 study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study는 배움(learn)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배움은 아무리 자기주도적 학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의 구별이 있는 현상입니다. 선생과 제자가 있죠. 하지만 공부는 내가 나의 스승이며 내가 나의 학생인 그런 행위입니다. 즉 탐구(inquiry)와 성찰(reflection)으로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탐구는 어떤 문제(problem)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탐색하고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일수도 있고 현실에서 부딪치는 사태일수도 있고 혹은 해결되어야만 하는 이론적 난제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것이 해결되어야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문제를 풀기위해 지식을 탐색하고, 적용하고, 그 결과 새로운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모두 탐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초에 이 탐구는 그 결과를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 가정에서 새로운 지식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탐구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탐구하고 공부하는 삶은 스스로 진화하는 삶입니다.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사람은 환경에 더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으며,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환경을 바꾸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에 직면하거나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적용하고 또 필요한 지식을 탐색하는 이러한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 아니 사실은 상당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지루한 과정입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를 즐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에 입직하는 젊은 교사들에게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여기에 대해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가 교사가 되기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공부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하느냐 하는 앙칼진 항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서점에서 교원 임용고시라는 코너가 따로 있길래 그곳을 좀 둘러보다가 그곳에 전시된 교재들을 보고 기겁했습니다. 예를 들면 탁명진 교육학이니 조하섭 교육학이니 하는 책들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은 인류가 수천년 동안 고민하며 누적한 교육의 지혜들을 단지 몇몇 요목으로 정리된 암기거리, 단순 정보로 전락시켜 놓았습니다. 만약 교사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이런 책들의 잘 정리된 요목들을 달달 외우고, 응용문제를 연습하고, 그래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학교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더욱 암담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한 교사들은 결국 학생들도 이런 식으로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는 단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정보를 암기해 두었다가 그 순간에 인출하고, 그러고 나면 잊어버리는 그런 악순환의 연속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아아, 실제로 많은 교사들이 그렇게 공부해왔고, 그렇게 공부시켰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제가 앞에서 강조한 탐구하고 사색하는 그런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여러분의 교육학 공부는, 임용 준비 공부는 모두 헛짓입니다. 진정한 교육학 공부는 여러분이 첫 수업에 임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계속될 것입니다.물론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암기한 화석같이 단단한 굳은 정보들을 학생들에게 억지로 주입할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 성장할 준비가 되어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전자를 선택한다면 여러분도 학생도 모두 공부하지 못하는 불행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바로 진정한 공부를 향해 가는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교사는 그런 진정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부여받았고, 게다가 일 자체가 공부일 수도 있는 아주 특혜 받은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2011. 10. 23.

혁신학교 기반 닦기 (1)

이건 제가 준비하고 있는 저서의 기본 얼개를 일단 차례차례 던저보고 반응을 보려는 것입니다. 제 논리 대로라면 여기는 제가 본격적으로 논객질 할 수 있는 홈 그라운드입니다^^

서론: 혁신학교의 꿈과 우려: 어디로 가야 하나?

2008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2010년 전국 6개 시도에 진보교육감들이 당선되면서 교육의 일대 혁신이 시작되었다. 이 혁신은 무엇보다도 6개 시도에 들불처럼 확산되는 혁신학교를 통해 구현되기 시작되었다. 이것은 환영해야 할 일이면서 또한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교육이 억압과 통제의 식민지 교육, 군사 독재 교육의 잔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학생들의 성장을 돕기는커녕 이들을 편협하고 불행하게 만든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끓어 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공교육의 핵심기관인 학교부터 이런 구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학교혁신의 요구는 1980년대부터 거세게 솟구쳐왔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학교만큼은 민주화의 무풍지대였다. 오랫동안 학교를 지배해왔던 교육관료와 사학재벌 집단은 거대한 마피아처럼 뭉쳐서 자기들의 지배체제를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일부 교사들은 아예 제도권 밖의 각종 대안학교를 통해서만 미약하게나마 그 꿈을 실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제도권 학교에서는 아주 작은 혁신이라도 관철시키려면 거의 전쟁에 가까운 충돌과 갈등을 거쳐야만 했고, 심한 경에는 해직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전국교직원 노동조합, 2011).

그런데 경기도, 서울을 필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혁신 시도마저 강압적으로 억압하며 해직으로 위협했던 시도 교육청이 앞장서서 혁신학교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낡은 교육의 혁신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을 징계했던 교육감이 앞장서서 혁신학교를 장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탄압을 각오해야 했던 교육혁신을 이제는 교육청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박수 받아가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기도의 경우는 이미 2년 이상, 서울에서도 벌써 1년가량 혁신학교가 교육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운영되었다.

그러나 교육혁신의 모범이 될 만한 모형을 제시하고, 여러 교육자와 학부모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 모든 학교에 널리 확산되게 만든다는 혁신학교의 목표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도리어 잡음이 먼저 들리기 시작한다. 혁신학교가 바른 길로 가고 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격론이 벌어지는가 하면, 혁신학교를 빙자하여 예산만 털어먹는 짝퉁 혁신학교가 속출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까지 들려오고 있다. 또 혁신학교 안에서도 자발적으로 혁신학교를 운영하려는 혁신적인 교사와, 학교가 혁신학교로 지정되었기에 할 수 없이 따라가는 중도 혹은 보수적인 교사들 간의 갈등도 나타나고 있다. 급기야 혁신학교의 주력을 담당하고 있는 경기도의 전교조 지부장이 진보교육감의 원조 격인 경기도 교육감에게 혁신학교의 80%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라고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혁신학교가 시작된 것은 길게 잡아 2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벌써부터 실패나 성공을 논하기는 다소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갖은 탄압과 어려움과 맞서며 일구어 나간 혁신학교가 아니라 교육청의 전폭적인 지지와 막대한 예산지원을 받아가며 추진해 나간 혁신학교라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첫째, 혁신학교가 여기에 쏟아 붓고 있는 교사들의 노력과 열정에 비해 기대만큼의 교육적 성과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설사 성과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것이 일부 교사들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기 위한 각오와 결단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혁신학교는 혁신적으로 교사들을 죽인다.”라는 살벌한 농담까지 나돌고 있는 실정이며, 이 말이 어필하여 혁신학교 신청 안이 교무회의에서 부결된 사례까지 나타난다.

물론 몇몇 혁신학교에서 눈에 뜨일만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광 뒤에는 교사들의 엄청난 헌신과 희생이 숨어있다. 물론 이 헌신과 희생은 자발적이며, 이런 헌신과 희생을 한 교사들을 폄하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이는 좋게 말해 열정적인 헌신, 나쁘게 말하면 초과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교사들에게 도덕적인 질타를 가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혁신학교는 확산되기 어렵다. 이건 마치 모든 병사들이 위대한 용사가 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새로운 전술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혁신학교가 확산되고, 마침내 낡은 교육을 일신할 수 있으려면 특별한 각오와 초인적인 헌신을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건전한 이성을 갖춘 교사들이 상식적인 수준의 노동만으로도 이를 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혁신 학교진보 교육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과 방향이 불분명하다. 만약 진보교육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혁신적인 입시교육을 실시하는 학교 역시 혁신학교라 불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이 극찬했던 덕성여중 같은 학교에서는 혁신적인 입시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던가? 또 학교에서 학원 수업까지 흡수해서 밤 10시까지 학생들을 붙잡아둔다는 발상 역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이런 학교를 혁신학교라 부를 수 없다. 이건 혁신학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혁신학교는 진보적이라야 한다. 즉 사회의 개선과 발전에 기여해야 하며, 학생과 교사들의 가능성과 관심의 확장에 기여하여야 하며, 그 개선과 발전의 과실이 특권층이 아니라 사회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해야 하며, 그 사회의 일체의 억압과 차별이 사라지게 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즉 혁신학교는 이 사회가 더욱 살기 좋으면서 민주적인 세상이 되도록 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각종 혁신학교 실천 사례들이나 제안들을 살펴보면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연결이 부족하다. 단지 학교에서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하여 다루고 평등한 나눔을 강조하여 가르친다고 해서 진보적인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나는 북한보다 미국이 더 좋아요혹은 삼성을 욕할 것이 아니라 삼성만큼 성공하는 기업을 세우면 될 것 아닌가요?” 라고 말하는 학생에게 분노의 따귀를 날리는 교사를 진보적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진보교육은 민주주의를 구태여 목 놓아 외치지 않아도, 평등이니 나눔이니 하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일상적인 교육내용을 학습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어떤 특권도 거부하는 평등관과 협동관이 형성되도록 해야한다. 즉 진보교육은 교육 내용에 직설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교의 관계, 즉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셋째, 혁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어떤 학생관,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는지 그 과학적 정당성이 불분명하다. 혁신학교를 주장하는 교육자들이 지금까지의 교육을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교육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교육이 인간의 혹은 아동·청소년의 본성에 어긋나는 교육임을 과학적인 근거와 함께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비판은 다만 지금까지 이루어져왔던 교육에 대한 단순한 편견이나 반감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새롭고 진보적인 교육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학습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혁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그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과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 부분이야 말로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혁신학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혁신학교들은 청소년 유락시설이 아니라 엄연한 공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사회적 자원을 투입하는 만큼의 사회적 산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제 아무리 학생들이 행복하고 즐겁다 할지라도 그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기여할 능력을 기르는 것, 즉 노동과 아무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다만 유한계급의 장식물에 불과한 것이며, 그런 일에 땀흘려 노동한 사람들로부터 걷은 세금을 투입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 네 가지를 종합해 보면 현재 혁신학교가 봉착한 문제는 혁신학교의 교육철학”, “혁신학교의 교육학의 부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 혁신학교는 무엇을 혁신하며, 2) 혁신함으로써 무엇을 지향하며, 3) 그 혁신의 내용은 어떤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4) 그것을 통해 어떻게 진보에 기여하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전체적인 통찰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혁신학교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교사들의 책임도, 또 그렇다고 진보교육감의 책임도 아니다. 진보교육감의 탄생과 혁신학교의 확산은 분명 박수칠만한 일이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경기도 한 군데서 김상곤 교육감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도 기적처럼 느껴졌었는데, 무려 6개시도(인구로는 전국의 절반 이상에 서울까지!)에 한꺼번에 진보교육감이 등장할 것이라고는 미처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진보교육감들이 등장하고 그 동안 교육혁신을 꿈꾸었던 교육자들에게 그 동안 꾸었던 꿈을 현실로 옮기라며 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 하나가 통째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이들 혁신적 교육자들은 학교에서 작은 변화 하나라도 관철시키려고 학교 관리자 심지어는 교육관료 전체와 격렬하게 싸워야 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작은 변화 하나 하나에 대한 아이디어들은 풍부하게 가지고 있지만 , 학교 전체를 더 나아가 교육체제 자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기대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이다. 교사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집단지성을 꾸려보려 하여도, 학문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의 집단지성은 계속 그들의 상식과 통념의 범위만을 맴돌 뿐이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조망은 굳이 레닌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너머를 사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너머로부터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문적 기반이 부족한 상태에서 혁신학교가 주어졌다. 이렇게 급하게 과제가 던져질 경우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의존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매뉴얼이다. 결국 핀란드 학교, 프레네 학교, 그리고 일본의 배움의 공동체 같은 모형들이 매뉴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런 혁신학교들의 혁신의 배경과 목적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와 토론은 생략되고, 속성으로 이 학교 모델들을 이해하고 적용하고 제도화하는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 동안 주입식 교육에 쩔어 있던 한국의 학교는 혁신마저도 주입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혁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 전체적인 교육혁신의 비전 없이, 이런 저런 모델에서 따온 각종 아이디어들을 적용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혁신학교에서는 참으로 다양하고 참신한 활동들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활동들이 어떤 공통의 지향점으로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들은 힘은 힘대로 들지만 자신들의 활동이 무엇을 이루는데 기여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확신과 신념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좋은지는 설명하기 어려운상황에 처한 것이다.

차근 차근 살펴보자. 혁신학교 운동은 혁신의 대상을 전제한다. 혁신학교가 공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지향하는 만큼, 이는 일단 현재 한국 공교육이 큰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직관적인 반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 공교육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문제의식에는 보수, 진보가 따로 없다. 학부모들은 사교육의 늪에 빠져 엄청난 초과노동을 강요당하며, 학생들은 끝도 보이지 않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입시교육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을 상하고 있다. 신뢰를 잃어버린 공교육과 교사들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온 국민의 질타를 받고 권위마저 상실해 심지어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구타당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혁신학교 운동은 다른 종류의 한국 공교육 문제 해결책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혁신학교 외에도 꽤 많은 문제 해결책들이 제시되었지만, 그것들은 결국 사교육 대책, 입시제도 개혁, 공교육 강화 방안 등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대책들은 이른바 대증 요법이나 눈가리고 아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이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사교육’, ‘입시과열’, ‘공교육의 신뢰 상실등은 교육 위기의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의 위기는 이미 대증요법으로 해결될 수준을 넘었다. 위기의 증상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원인을 찾고, 해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혁신학교 운동은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 “학교란 무엇이며 여기에서는 어떤 활동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대증요법을 넘어서고 있다.

따라서 혁신학교의 성공은 여타의 잡다한 교육 개혁 정책의 성공과는 그 격이 다르다. 이것은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새로운 교육의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제는 근본적인 것에 대한 성찰과 이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 혁신학교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원도 더 많은 인력도 아니다. 목적지가 부산인지 목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운전자에게 수만 가지 자동차 조작법을 알려준다 한들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혁신학교 활동들을 하나로 아우르며 이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총제적인 전망과 이를 정당화할 학문적 기반이 필요한 것이다.

이 학문적 기반은 철학, 정치학, 학습심리학, 인간과학, 사회학, 경제학을 망라하여 기존의 교육학과 교육체제가 낡고 퇴행적인 것임을 입증해 내고, 장차 학교와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해 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토론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바탕이다. 즉 혁신학교는 교육제도와 교육학 전반에 대한 혁신과 함께 일어날 때 비로소 제 갈 길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외국에 다녀옵니다. 목요일부터 재집필합니다.)

2011. 10. 19.

나꼼수와 함께 논객의 시대가 갔나?

모처럼 잉여시간이 남는 날이다. 나는 진모 허모 선생처럼 전업 논객이 아니라 한 편의 글을 공들여 쓸 수 없다. 그러니 잉여시간 남는 날 여러편을 우루루 쓰는 수 밖에. 그러니 꼼꼼하게 논지를 다듬고 하는 건 기대도 못한다. 오타나 안 나길 바랄뿐(그런데 많이 난다.)

요즘 나꼼수 대세론에 대해 논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고, 그게 또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나는 "논객"이 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논문 쓰는 사람은 아닐테고. 그렇다고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도 아닐테고. 주장이 담긴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이라면 저널리스트, 칼럼니스트일텐데, 굳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저 말을 쓰지 않고 "논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까닭이 뭘까? 논객들이 대체로 PD출신인 것을 보면 "우리말 사랑하기"의 민족정신의 발로도 아닐테고.

어쨌든 이 특별한 종류의 글쟁이들이 나꼼수를 까기 시작했다. 심지어 허지웅은 나꼼수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없는 현상을 개탄했다. 허지웅은 슬기롭게도 나꼼수 자체를 까는게 아니라 김어준을 다른 세사람과 분리해 내고, 김어준만 집중적으로 무책임한 선동꾼, 반지성주의자로 매도했다. 굳이 따지면 김어준을 매도한것이 아니라 유사 메시아 기질이 강한 김어준의 반지성주의적 위험을 지적하지 않은 지식인들을 매도했다. 반면 김규항은 주둥아리로만 주절대는 나꼼수따위가 뭐냐 우리끼리 낄낄거리는건 가치없다. 나가자 투쟁이다, 실천이다 라면서 어김없이 도덕적인 질타를 했다. 진중권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바 대로 나꼼수만 적당히 패는게 아니라 곽감을 검찰 이상으로 두드려 패다가 오히려 진보인사들에게 뭇매를 맞고 잠시 은퇴했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를 개탄하거나 "반지성주의"를 개탄하는 것을 보면, 이들 논객들은 자신들이 "논객"이니만큼 "논"으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이 그들의 "논"에 열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그들은 전문적인 "논"을 펴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논"이라고 하는 것이 약간의 논리와 말재주로 글 한편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문"과 "에세이"를 어떻게 구별하는가를 보면 "논"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논문은 사용하는 개념들마다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고 오개념 여부를 진단하고, 제시하는 인용이나 자료마다 그 타당성과 신뢰성을 따져가면서 쓰는 글이다. 이렇게 따지는 과정이 논 하는것이며, 논한 결과물이 논문이다. 그러니 "논객"이라 불리는 분들은 "논"하는 분들이 아니며, "논리"의 진영을 대변하지도 못한다. 굳이 따지자면 최장집, 김동춘, 김기원, 선대인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김용옥 이런 분들이 논객이다. 물론 그 전문성 범위 안에서만 논할수 있으며, 그 범위를 벗어나면 다만 일반인의 비평이나 감상에 불과하다. 예컨대 선대인은 경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논객이지, 교육에 대해 뭐라고 주장을 할때는 논객이 아니다. 만약 교육에 대해서도 논객이 되고자 한다면 그 전에 충분한 소양이 있음을 누차에 걸쳐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논객이라 흔히 불려왔던 진중권, 허지웅 같은 분들은 전문분야 밖의 글을 주로 쓰거나 아니면 아예 전문성의 범위가 없다. 진중권이 쓴 칼럼, 포스팅, 트윗 단문들을 모집합으로 한 뒤 무작위로 100개만 표집한 뒤 표집된 글들을 주제별로 분류한다면 아마 "미학"에 대한 것이 가장 적을 것, 아니 거의 없을 것이다. 허지웅, 김규항 이런 분들은 아예 전공 미상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분들이 쓴 글들의 거의 대부부은 "논"한 것이 아니다. 아, 내가 쓰는 이 글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냥 감상문이다. 하지만 내가 교육에 대해 말하고, 교육운동에 대해 말하고, 또 사회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때는 "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아마도 내가 썼던 곽노현 관련 글, BBK관련 글들보다 현저하게 인기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사용되고 있는 "논객"이라는 용어가 워낙 보편화되어 다른 용어로 굳이 바꿀 이유가 없다 치더라도 이들을 "논"하는 사람들로 한정지어서는 안된다. 논객은 논하는 사람을 넘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정치분야는 전문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이기 때문에(행정과 정치는 다르다) "논"할 줄 아는 사람들만 정치에 대해 말을 하고 글을 쓸 수는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사실 정치영역 논객에게 "논"의 요소는 결정적이지도 않다. 반지성주의니 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니 하고 한탄해도 정치라는 영역은 거의 예술에 가까운 영역이며 비전을 미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집단이 이기는 영역이다. "논"하는 정치가는 인기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판에서 "논"하는 논객도 인기 없다.

그러니 흔히 논객이라고 불리며 대중들의 인기와 관심을 끌었던 분들이 대중들의 호응을 받고 심지어 팬덤까지 이룬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진중권이 발터 벤야민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쓴 글에 관심 가질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나? 그가 쓰거나 배출한 문장들은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논"했으면 대중들은 하품을 하며 그들에게서 떠났을 것이다.
논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그들이 김어준을 개그맨, 선동가라고 부르는 상황을 보면 또 역설이지만 그들은 개그를 하고 선동을 했다. 대중들이 그들에게 열광했던 까닭은 세상의 여러 현상 이면에 있는 진리를 진지하게 배우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중들은 통쾌하고 즐거워서 그들에게 열광했다. 그들이 재수없는 수꼴, 꼰대들에게 말펀치를 날리고, 수꼴들이 그 말펀치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쩔쩔 떠는 꼴을 보니 즐거웠을 뿐이다. 보수 엘리트들의 권위적인 언변 앞에서 찍 소리 못하면서 억울함에 치를 떨때, 그들을 통쾌한 언변으로 박살을 내어주니 통쾌했을 뿐이다. 무섭고 두렵던 엘리트들을 말 한 두마디로 희화화 해서 조롱해 주었기 때문에 열광했던 것이다. 그들은 키보드 워리어였으며, 키보드 개그맨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개그를 결코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몽테스키외가 말했듯이 조롱과 경멸이야말로 억압과 독재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이다. 두렵고 억압적이던 대상을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 어떤 독재정권도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이 사실은 같은 중화권이라도 대만 드라마와 중국 드라마의 기본 코드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웃음이다. 그리고 우리의 논객들은 바로 웃음을 주었다. 진중권이나 여타 논객들이 수꼴을 공격하면 관전하는 대중들은 "송곳 작렬! 변희재 떡실신! 조갑제 혈압 상승!~" 이러면서 즐겼던 것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수꼴들에게 "빅엿"을 작렬하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토록 비판하는 나꼼수와 기능적 등가물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꼼수가 그들보다 훨씬 진화된 형태라는 것 뿐이다. 어떤 식으로 진화했을까? 다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그들의 웃음을 유포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망을 찾아내었다. 신문사 칼럼을 얻으려고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고, 140자 트윗 글자 제한때문에 쪼잔해지지 않아도 되는 팟 캐스팅을 찾아 낸 것이다. 또 그들은 조롱하고 희화화 하는 것이 논객의 가장 큰 무기라는 점을 직감했다. 그리고 점잖게 지성인 흉내를 내면서 조롱할 것이 아니라 아주 대어 놓고 조롱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문어의 필터링을 거치기 마련인 글보다는 생생한 육성이 대 놓고 조롱하기에는 보다 효과적이다.

촛불이 사그라들고, 우리나라가 민주국가라고 믿었던 보루들이 하나 둘 거의 중국 수준으로 망가져갈때, 그래서 담이 꺾이고 기가 사그라든 국민들에게 육덕진 목소리로 그 억압자들을 껄껄거리며 조롱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퍼져나갈때 거기에 열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열광할 뿐 아니라 "저 사람들 저러고도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멀쩡하다. 그리고 그들이 멀쩡한 만큼 2008년 이후 겁먹고 흩어진 대중들은 다시 용기를 되찾는 것이다. 메시아주의라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그들은 메시아 맞다. (나는 결코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월드컵 기간 중에 축구국대에 열광하는 길거리 응원에서 파시즘을 우려하는 글을 썼다가 성지순례관광을 당한적도 있는 사람이다. 무비판적 메시아주의를 비판하는 진, 허 양씨가 월드컵 현상에 대해 대회 기간중에 균형잡힌 글을 쓴 적이 있던가?)

메시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나꼼수가 눈물나게 고마운 사람들 중 하나다. 고마운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싸움을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논객들은 아직도 우리가 87년 체제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토론을 통해 반대 논리를 하나 둘 논파해 나가고 우리편을 하나 둘 설득해 내는 정도를 고집한다. (사실 정작 그들도 그렇게 해 오지 않았다.) 하지만 87년 체제는 이미 다 무너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그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87년의 성과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독재잔당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설복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다. 도덕이 아니라 전술이 요구되는 시기이며 순결성이 아니라 쪽수를 늘려야 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모두가 쫄아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때, 이렇게 대중들이 쫄아 있어서 손쉽게 노출된 대장들이 하나 둘 참수될때(곽노현의 참수는 치명적이다. 이게 치명적이지 않고, 곽노현을 쉽게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학교에, 교육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쫄지마, 저 새끼들 졸라 허접이야!" 하고 대담하게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고맙겠는가? 설사 그 말이 거짓 선동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나중에 역풍을 맞게 될지라도 말이다. 나는 쫄아서 탄압 받느니 한번 화끈하게 게겨보고 역풍을 받는 쪽을 선호하겠다.

다른 하나는 제대로 빅엿을 먹여주기 때문이다. 기존의 논객들이 먹이는 빅엿은 주로 저들의 대장이 아니라 그들의 쉴드전담 똘마니들을 향해 작렬했다. 그리고 그 빅엿의 종류도 주로 말뒤집기, 말꼬리잡기, 논리로 뭉개버리기 등 주로 말과 관련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꼼수팀은 국회속기록과 탐사보도자료들을 통해 아주 "구체적인 빅엿"을 "몸통도 아닌 머리"를 향해 연달아 먹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빅엿을 드신 분이 이렇다할 반격도 못하는 것이다. 아니, 저 논객님들은 이 순간 통쾌함과 즐거움이 아니라 "역풍이 오면 어쩌지?" 걱정부터 들었단 말인가? 아 참, 진중권은 17회 빼곤 안들었다고 했지? 하나를 들으면 23개을 아는 대 천재....

논객들은 예전에 다소 허접하게 봤던 김어준이 뜨는 것이 몹시 불안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꼼수에 대해 그레이트 빅 착각을 하고 있다(듣지도 않고 까니 착각할 수 밖에 없지). 나꼼수는 김어준의 방송이 아니다. 나꼼수는 주장하지 않는다. 김어준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 방송을 자주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실제 이 방송을 주도하는 사람은 정봉주와 주진우다. 김어준이 하는 역할은 사실상 추임새다. 자칫 지루한 팩트 나열이 될 수 있는 프로를 맛깔스럽게 꾸며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 그 한계를 넘어가지도 않는다. 가끔 그 개그스러움이 지나칠때가 있기는 하지만.

정봉주와 주진우는 우리 논객님들과는 다루는 정보의 양과 질이 다른 사람들이다.
"김어준이 바라본 곽노현의 눈 빛"때문에 곽노현을 옹호하는 프로를 제작했다고 생각하는 논객은 대체 이 프로를 몇편이나 들어봤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난 17편을 들으면서 "곽노현 눈빛 봤어요?"란 대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대사가 없어도 곽노현에 대한 수사가 매우 정치적이고 무리하다는 점은 분명히 설득력있게 개진될 수 있었다. 법에 저촉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진중권이 듣고 화가 났다는 17회의 메시지도 곽노현 만만세라기 보다는 "화부터 내지 말고 좀 살펴보자"였다.

사실 곽노현 건과 관련해서 무책임한 선동을 한 측은 나꼼수 측이 아니라 아무런 사실관계도 밝혀진게 없는 상태에서 기자회견 끝나기가 무섭게 용수철처럼 "교육감 사퇴"를 요구한 진중권 쪽이다. 게다가 "선의로 2억을 지원해주는 친구가 있으면 그 좆이라도 빨겠다."라고 망발을 한 자가 김어준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말 개그의 진수다. 이런게 선동이 아니면 뭐가 선동인가?

나꼼수는 그런 감성을 자극하는 멘트, 선동적인 멘트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프로를 듣는 사람들도 거기에 선동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말 선동되었으면 벌써 폭동이 일어났어야 하지 않는가? 이 프로의 힘은 저격수 정봉주와 악마기자 주진우의 엄청난 고급 정보들이며, 이 정보들이 너무 지루하게 전달되지 않게 적절히 추임새를 넣어주는 김어준의 입담이 이루는 철저한 분업 시스템에 있다. 물론 김용민 PD의 기술력과 편집능력을 빼놓을 수도 없다. 나꼼수는 항상 이런 포맷으로 진행된다. 주진우가 뭔가를 캐 온다. 정봉주가 캐온 정보를 정치권의 동향과 연결지어 본다. 김어준이 멋대로 결론 내리고 껄껄거린다.

이 "멋대로 결론"은 핵심이 아니다. 이 프로의 핵심은 저격수와 악마의 폭로이며 김어준의 결론은 조롱이며 야유다. 즉 정치적으로는 폭로를, 그리고 대중에게는 야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통상 과거에는 폭로는 곧바로 분노, 분노를 유발하는 선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꼼수는 폭로에 이어 조롱을 선사한다. 이게 바로 인기의 비결이다. 상대방의 각종 명예훼손 송사에 시달리기 마련인 저격수와 폭로전문기자가 아직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은 그만큼 이들의 정보력이 뛰어나단 뜻이다. 팩트와 자료를 움켜쥐고 있으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메시아주의를 경계하라 어쩌라 하는 소리도 개 풀뜯어먹는 소리다. 메시아주의가 위험한 것은 맞다. 메시아주의는 민중의 자발성을 몇몇 위대한 지도자의 전능함에 넘기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을 통해 행복을 보장받으려는 태도다. 그런데 나는 대중들이 나꼼수에 열광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나꼼수를 만능해결사로 여긴다는 징후는 찾지 못했다. 징후를 찾지 못했는데 미리 비판하라는 요구는 너무 앞서나간 요구다.

실제로 나꼼수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래를 예언하지도 않는다. 김어준이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장미빛 환상을 말하긴 하지만, 그걸 중심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을 복음을 만들거나 하지도 않는다. 이건 다만 폭로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 사회의 지배세력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폭로할 뿐이다. 폭로한 다음에는 분노를 하건 조롱을 하건 혹은 그 폭로의 진위여부를 더 꼼꼼히 살펴보건 간에 그건 들은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물론 나꼼수 콘서트 같은 거 하면 엄청난 환호성과 거의 종교 부흥회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겠지만, 그건 일종의 스타 팬덤이다. 나꼼수의 위상은 메시아라기 보다는 록스타에 더 가깝다.

어차피 가카를 혐오하는 사람들끼리 들으면서 낄낄거리는 프로가 실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고 얻어들은 이야기가지고 쓴 전형적인 골방 논객의 말이다. 24편까지 다 들어보면 가카를 주로 다루기는 하지만 이 사회 지배층들의 꼼꼼함이 곳곳에서 폭로되고 있음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가카는 다른 지배층들이 은밀히 충족시키는 탐욕을 너무도 공공연하고 당당하고 기상천외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에 호연지기로 별도의 특별 칭송을 받고 있을 뿐이다. 가카의 꼼꼼함은 과연 경제인 답게 이 사회의 경제시스템의 빈틈을 절묘하게 이용한다. 그래서 가카의 꼼꼼함을 잘 따라다니다 보면 나중에 월가가 왜 문제인지, 금융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다 생각해 낼 수 있게 된다. 주진우나 정봉주(특히 주진우)가 사회 지배층의 문제들을 폭넓게 폭로하다가 가카에게 충실하지 못한 불충죄로 김어준에게 지적당하는 장면이 얼마나 많은지 들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실천이라고?
곽노현 사건때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질수 있었던 "이놈이나 저놈이나" 냉소주의를 뭉개고 박원순이 운신할 공간을 만들어준 것은 실천이 아닌가?(아 참 이건 나꼼수만의 공이 아니다. 내가 원조고 나꼼수가 뒷북이다 ㅋㅋ 증거자료 있다. 나는 8월28일에 이미 국면전환을 예고했고, 8월 29일에 민주당과 진보논객들의 몰락을 예고했었다.) 논객들은 생각해 봐야 한다. 곽노현이 자기 말 듣고 즉일로 사퇴했으면 과연 이 시장선거가 박빙이라도 되었을까? 김규항은 생각해 봐야 한다. 박원순이 어눌하게 대응하여 전세가 역전당하고, 그 대단하신 진보명망가 수십명이 모인 선대위가 갈팡질팡할때 누가 이 전세를 다시 해볼만하게 만들었는지? 이게 실천이 아니면 뭐가 실천인가?

그런데도 저런 소리들이 나오는 거 보면 이분들은 나꼼수를 듣지 않았거나, 듣더라도 "김어준 따위" 이런 선입관을 가지고 건성으로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분들은 나꼼수의 기본적인 성격도 오해하고 있으며, 이것이 얼마나 저 지배층들의 지배에 큰 균열을 낸 쾌거를 이루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결국 논객의 시대는 가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종류의 논객이 등장했다. 새로운 논객은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주무기를 가진 네명의 논객이 자신의 장점만을 가지고 달려드는 분업 시스템, 그리고 최신의 통신기술을 활용하는 산업혁명을 거친 시스템 논객이다. 구형이 신형에게 밀려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나는 구형논객이라 밀려난다"라고 해야 옳지 내가 밀려난다고 해서 모든 논객을 도매금으로 몰락시키는 처사는 지나치게 오만하다(음. 주어가 없다).

(지금 글은 교정을 본 글이다. 작성 1시간, 교정 30분). 나는 워드치는 속도와 글 쓰는 속도가 같다. 이런 유치한 깔대기를 대는 이유는 진중권의 은퇴글을 보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라고 말한 오연호 사장 들으라고 하는 얘기다. 그럴 사람 많다. 이 땅의 글쓰는 사람들을 죄다 진중권 잣대로 환원해서 비교하는 오사장의 처사는 매우 오만하다. 논객이 뭐 용가리통뼈인가? 누구나 비전을 그려내고 폭로와 풍자를 하고 나름의 주장을 펼수 있으면 그게 논객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으면 뜨는거고 아니면 가라앉는거다.

물론 논객끼리 비판할 수도 있다. 그 비판전에는 당연히 관객이 붙는다. 그리고 키케로가 말했듯이 인민은 스스로 나라일을 맡아볼 만큼 현명하지는 못해도 더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유능하다. 그러니 청중을 빼앗긴 논객이 "반지성주의" "선동"을 탓하는것 만큼 추한 꼴도 없다. 만약 논문으로 승부보는 것이었으면 청중은 고려요인이 못된다. 하지만 그들이 논문 배틀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논객간의 혈투는 청중이 결정한다. 변희재, 조갑제 등이 저 논객들에게 논리와 학문적 근거에 승복했는가? 그들은 절대 승복 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희재 패, 조갑제 패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결국 청중들의 반응때문이었다. 청중의 열화같은 지지덕에 기세좋게 밀어붙였다가, 본인들이 그 입장이 되자 반지성주의를 탓하는 것은 이중잣대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