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4.

제가 민주주의 교육에 밑거름이 될 책을 냈습니다.

민주주의 교육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며 두 권의 책을 내었습니다.(이하 출판사 보도자료입니다.(그림을 클릭하면 인터넷 서점으로 연결됩니다)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민주주의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 주는 정치교육의 필수 고전 목록을 담았다!”

이 책은 정치를 공부할 때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을 담고 있다. 사회교사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선정된 15편의 고전은 청소년뿐 아니라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 관심 있는 시민 역시 놓치기 아까운 목록이다. 페리클레스와 공자, 마키아벨리, 홉스와 로크와 루소, 마르크스와 아렌트를 만나는 동안, 우리 정치교육이 놓치고 있는 민주주의가 무엇이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민주주의는 어느 한 사람, 한 시대의 창안물이 아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채택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란 많은 사상가와 정치가가 몇 천 년 동안 꿈꾸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발전하고 변화한 결과물이다. 물론 지금도 진행형이다. 정리된 몇 개의 개념이나 간단한 요약, 짤막한 인용문을 통해 이해한 민주주의는 오해에 머물기 쉽다. 그렇다고 방대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고전을 다 읽기도 쉽지 않다.
이런 문제에 착안하여 현직 교사가 대표적인 정치 사상가의 저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발췌해서 엮었다. 교과서에서 차용한 개념의 전후 맥락이 생생하게 살아 있기에, 고전을 읽는 맛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흐름을 꿰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민주주의 교육을 새롭게 시작하다
― 현장 교사의 정치교육 노하우가 오롯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수천 년 동안 많은 사상가와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제기하고 대립하고 논쟁해 온 생각의 실타래들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정치교육은 이렇듯 논쟁을 통해, 심지어는 투쟁을 통해 형성된 민주주의의 개념을 고정된 정답, 이미 정리된 개념으로만 가르쳐 왔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생각들이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되고, 어떤 쟁점들 속에 발전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사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에 살아 있는 민주주의 교육, 스스로 사고하는 정치교육을 위해 오랫동안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해 온 교사들이 한 권 한 권 꼼꼼하게 읽고 토론하며 가장 중요한 정치사상 고전들을 가려내어 핵심이 되는 대목을 충분히 발췌하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엮은이들의 노력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필수 고전목록이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인류 정치사에 눈뜬 학생들은 자신이 어떠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시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업에 바쁜 일반 시민들이 플라톤이니 로크니 루소니 하는 사상가들의 저작을 따로 시간을 내어 읽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민주주의를 일궈 온 생각들을 잘 편집해 놓은 이 책이야말로 민주 시민 교육에 일익을 담당할 것이다.


청소년과 시민들이 정치학 고전을 ‘직접’ 읽다― 고전을 읽으며 민주주의에 대해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키우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홉스의 《리바이어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등은 누구나 한번쯤 탐독에 도전해 봤음직한 굵직한 정치사상 고전들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혹은 여러 교양서에서 인용되거나 정리된 개념으로 고대, 근현대 정치 사상가들의 주요 저작과 생각들을 접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텍스트인지라 감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어떤 저작을 어떤 흐름으로 읽을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워 읽기를 중단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민주주의가 고대부터 지금까지 어떤 핵심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는지 추적하고 있다. 특히 고전을 독자들이 직접 대면하여 읽게 함으로써 누군가의 요약이나 정리가 아닌 사상가와 독자가 직접 만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물론, 처음 고전 읽기에 도전하는 독자들을 위해 친절한 안내를 곳곳에서 하고 있다. 해당 사상가의 저작에서 민주주의 사상과 관련하여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대목들을 놓치지 않고 발췌하여 보여 줌과 동시에 발췌하지 않은 대목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간략히 요약함으로써 해당 사상가의 저작 전체를 일별할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또 주요 대목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해설을 원문 중간중간에 넣음으로써 독자들은 누군가와 함께 강독을 하듯 책을 읽어 갈 수 있다. 더불어 사상가 개인의 생애는 물론 그 사상이 싹틀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자세히 살피고, 이 사상이 전파된 흔적이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줌으로써 고전 원문 밖의 정보도 충실히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고전 원문을 직접 읽으며 민주주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독자들을 위한 충실한 정치사상 입문서이다.



차례

1권 고대 편: 페리클레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1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민주주의
1장 자발적인 민주 시민을 말하다 -페리클레스 전사자 추모 연설
2장 이상적인 올바른 국가를 제시하다 -플라톤 《국가》
3장 실현 가능한 최선의 국가를 구상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4장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국가를 꿈꾸다 -키케로 《국가론》
5장 신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국가를 생각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2부. 고대 중국의 민본주의
1장 문화와 교양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다 -공자 《논어》
2장 측은함으로 선한 본성을 지키는 나라를 생각하다 -맹자 《맹자》

2권 근현대 편: 마키아벨리에서 아렌트까지


1부. 근대 계몽사상과 민주주의
1장 시민이 타락하지 않아야 공화정이 가능하다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2장 국민의 동의로 세운 국가라야 비로소 자유롭다 -홉스 《리바이어던》
3장 최고 권력인 입법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로크 《통치론》
4장 자발적인 사회계약으로 더 큰 자유와 평등을 얻다 -루소 《사회계약론》

2부. 근대 민주주의 그 이후
1장 자발적인 시민 결사체가 다수에 의한 폭정을 경계한다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2장 소수의 취향과 의사가 존중받는 것이 자유다 -밀 《자유론》
3장 민주주의는 경제적 불평등까지 해결해야 한다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4장 인간에게서 법적?도덕적 인격을 제거하면서 전체주의는 시작된다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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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관련 주요 외신 보도 분석

앵무새 한국 방송들과 소설가 조중동을 아무리 읽어 봐야 제대로 된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외신을 통해 한미 FTA의 득실을 따져 봅니다. 저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미 FTA는 미국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래야 한다입니다. 그러니 정부는 솔직하게 국제 경제 균형과 무역판의 유지를 위해 미국에게 양보할 수 밖에 없음을 밝히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위해 지혜를 모으자고 하는 것이 책임있는 자세지, 한미 FTA덕분에 대박납니다 하고 사기 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 물론 대박 날 한국인이 있기는 합니다만....(이하 기사는 해럴드 경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먼저 월스트리트 저널입니다.
South Korea has far higher tariffs than the U.S. and, as a result, will see bigger changes in the variety and cost of goods after the trade deal takes effect. South Korea also has long had a surplus in the trade relationship with the U.S., a cushion that, over the past five years, amounted to an average of $12 billion annually. Analysts estimate that the South Korea's surplus will continue but will become smaller, chiefly because it is likely to sharply increase its imports of U.S. agricultural products.

"한국은 그 동안 미국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해 왔다. 그 결과 이 협정이 효력을 발휘하면 상품의 가격이나 종류에서 미국보다 더 많은 변화에 직면할 것이다. 한국은 그 동안 미국과의 교역에서 어마어마한 흑자를 봐 왔으며(5년간  평균 120억 달러/년), 분석가들은 한국의 흑자가 당분간 지속되기는 하겠지만 미국으로부터 농산물 수입이 급증하면서 흑자 규모가 줄어 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이 그 동안 미국에 수출하던 자동차, 섬유 등은 이미 made in Korea가 아니고, 섬유는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 자동차는 현지에서 생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애시당초 무역장벽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한미 FTA로 딱히 더 팔릴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반면 미국산 농축산물이나 미국의 금융기업들, 그리고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지적재산권은 바야흐로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죠.
그래서 “그 동안 한국의 관세가 미국에 비해 훨씬 높았으며, 내년 초 협정 발효 후 한국은 결과적으로 상품의 다양성과 가격에서 미국에 비해 더 큰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점잖게 지적하는 것 아닐까요? 즉 상품의 다양성은 미국 상품들이 들어온다는 것이며, 가격의 변화는 미국산의 가격이 아주 저렴하게 된다는 것이죠. 반면 미국에서의 한국산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고.

다음은 블룸버그통신. "미국 농산물의 3분의 2가 무관세로 한국에 수출되고 5년 이내에 공산품 관세의 95% 이상이 없어질 것". 그럼 한국산의 미국에서의 변화는? 블룸버그는 아예 그 점은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각국 장관들의 호언장담들만 주절주절 나열하고 마네요. 하긴 블룸버그의 관심사는 주식값이니까. 한국의 자동차, 화학, 섬유주를 주목하라 뭐 이정도?

물론 한국산 자동차에 붙던 관세 2.5% 삭감되는것 마저도 미국 자동차 노동자들이 불안해 하기는 하지만 이거야 "미국 수출용 자동차는 미국 현지 공장에서 생산하겠다" 한 마디면 쫑입니다. 그래 놓고 정작 임금 싼 멕시코에서 생산하겠죠. 한국이나 미국이나 노동자는 속여먹여야 맛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니.

자, 이러니 한미 FTA로 한국의 시장이 넓어졌다, 수출길이 열린다,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겠죠? 시장이 넓어지긴 합니다. 미국 시장이요. 수출길도 열리죠. 미국의 수출이요. 거듭말하지만 저는 이거 자체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왜 아닌 척 하냐는 거죠.

참, 표정관리하고 있는 재벌들. 미국 기업들이 몰려와서 진검승부할까봐 두려워 할까요? 체질 개선의 계기가 될까요? 긴장하고 있을까요? 원 천만에요. 우린 여기서 만고 불변의 진리 하나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만 떠올리면 됩니다. 그 동안 보호무역 덕분에 한국 자본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게 유리했습니다. 만약 한미 FTA로 미국이 유리해지면? 간단합니다. 미국 자본이 되면 됩니다. 예를 들면 대만 최대의 자동차 회사는 폭스바겐타이완입니다. 그게 독일회사 아니냐고요? 천만에요. 명백히 타이완 국적 회사입니다. "양안 협정"으로 중국이 타이완 기업에게 특혜를 주니까 독일 자본이 타이완에다가 그런 회사를 세운겁니다.

그러니 우리 재벌들은 오히려 쾌재쾌재 할 것입니다. 미국 기업들이 몰려와서 귀찮은 한국 정부의 규제를 ISD칼로 날려버릴테니까요. ISD로 미국 기업이 재판에 이겨 규제가 사라지면 그 기업만 규제가 해제되는 게 아니라 모든 기업이 다 자유(자본의 자유, 탐욕의 자유)의 과실을 누리게 되니까요. 게다가 미국 기업들도 한국에 직접 법인을 세우기 보다는 한국 자본들과 이래저래 합작법인을 세울 가능성이 많아질테니 미국에게 넓어진 한국시장은 한국 재벌에게도 넓어지는 겁니다.

다음은 여당의 강행 처리와 ‘최루탄 소동’에 대한 BBC의 보도..

“여당인 한나라당이 모여 비준안을 151대 7로 가결했다. 야당 의원 대부분이 기권한 가운데 한 야당의원은 표결 전에 최루가스를 터뜨렸고 다른 야당 의원들은 강행 처리에 야유를 퍼부었다....한국의 농민들과 일부 노동자들이 생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협정에 반대하고 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이번 법안의 강행처리가 무모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 방송, 신문과는 자뭇 논조가 다릅니다. 김선동 의원을 깡패, 테러리스트로 몰지 않고, 도리어 그 책임을 퍼런당의 강행처리에 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무모한 카드였다고 하면서 후폭풍까지 예고하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이 다루지 않는 노동자와 농민의 생계 위협까지 꼼꼼하게 다루어 주네요.

AFP통신도 “한국 집권당이 한미 FTA 비준안을 통과시키려고 돌발적으로 국회 본회의를 소집, 한 야당 의원의 최루탄 사건을 유발했다”고 부연설명했다고 합니다. "유발했다"라는 표현에 유의합시다. 즉 김선동 의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책임은 돌발적인 본회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르 피가로는 “한미 FTA 발효로 수출 주도형 나라인 한국에서 많은 실직자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FTA로 2015년까지 양국간 교역이 50%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라고 하네요.  대단한 각하의 호연지기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0% 증가를 말하는데 각하는 50% 증가를 말씀하십니다.수출이 느는건지 수입이 느는건지도 말씀 안하시네요... 마치 빚이 50% 늘어나는데 "금융 거래가 50% 늘어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격. 하긴 월 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이 2030년이나 되어야 40000불에 도달할 것이라고 했지만 각하는 임기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명단은 서비스.... 한미FTA찬성 의원 명단(엠군 펌)

2011. 11. 23.

한미 FTA는 국익의 상승 손상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어제 한미 FTA비준안이 날치기 통과되었습니다. 시민들이 전교조 같은 진보적(?)인 교육단체에게 바라는 것은 촛불 숫자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가르침이겠죠. 그런데 전교조는 아직까지 성명서도 논평도 한 장 나가지 못하고 있네요. 그래서 전직 전교조 부대변인인 제가 대신 합니다. 정봉주 전 의원, 김용민 전 교수... 요즘은 전직이 현직을 능가하는게 대세인가 봅니다.

(이하 논평)

11월 22일 오후, 한미 FTA 비준안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을사늑약, 한일협정 이후 외국과의 조약으로는 역대 세번째 날치기다. 그나마 앞의 두번은 일본 제국군대와 계엄령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물리적 압박이나 있었지만, 이번은 이른대 자유롭고 민주적인 대한민국 하에서는 최초의 날치기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기다렸다는듯이 신문과 방송에서는 앞으로 국운이 훨쩍 피어날 것이라며 축포를 날리고, 가담한 의원들은 마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양 거들먹 거린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절규하고, 경찰은 그들을 향해 물포를 날리다. 하지만 교육자 입장에서 흥분하거나 감정적 대응하는 것은 금물이기에 나는 차분히 그 의미와 득실을 따져보기로 한다.

나는 자유무역과 개방을 지지한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민족주의자에게는 국익을 지키는 보호무역이 멋져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보호무역은 결국 국가가 자국 자본가들의 독과점을 보장해주는 일에 불과하다. 그 피해는 국내 기업의 제품을 더 좋고 저렴한 외국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곱절의 값을 주고 구입해야 할 이 땅의 민중들이다. 따라서 나는  FTA를 하면 국익이 손상되고, 나라가 망하고 하는 등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어찌 보면 기분나쁠 수 있지만 ISD같은 조항을 나라 팔아먹은 독소조항으로 보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서로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이 최대한 지켜지도록 어떤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식이라면 WTO도 국제사법재판소도 다 주권 침해로 거부해야 한다(하긴 이 정부는 국제연합 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주권침해로 간주하기도 했다.). 오히려 ISD에 자꾸 집중하면 공연히 민족감정만 자극되어 한미 FTA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만 한다.  어쨌든 정리하면 FTA, 자유무역이 대세인 것은 사실이며, 개별국가의 주권을 제약하는 국제적인 약속이행 장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자유무역 일반,  FTA 일반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의 한미 FTA는 이런 일반론을 벗어나는 보다 밀접한 삶과 정치의 문제가 들어있다.

먼저 이번에 큰 일했다고 하는 FTA찬성파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이들은 이로써 대한민국의 경제영토가 넓어져서 국익을 크게 신장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대파들 역시 국익 손상을 들어 반대하고 있는 목소리가 높으니 찬성과 반대 모두 국익을 내걸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실은 나라에 이익을 준다 만다 하는 논란 자체가 FTA본래의 의미와 무관한 것이다. 어쨌든 날치기까지 감행한 것을 보면 이걸 당장 안하면 뭔가 큰 손실이라도 날 것 같으니 그쪽 논리를 좀 들어보자. 이들의 주장은 크게 셋이다.

1) 개방 하지 않으면 북한이나 미안마 처럼 고립되어 우리 모두 거지꼴을 못 면할 것이다. 2)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맹렬히 추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경제 체질을 선진화(미국화)해야 한다. 3) 한미fta는 우리가 미국에게 열어주는 만큼 미국이 열어주기 때문에 윈윈이며 우리 경제의 구조개선의 원동력이 된다.

결국 개방만이 살길이란 주장인데, 그럼 대체 무엇을 개방, 무엇을 폐쇄라고 하는가부터 따져보자. 그것은 국내 기업과 동종의 재화와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들어올때 (수입될때) 그것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행위는 크게 수입품에 직접적으로 세금을 때려서 가격을 올릴수 밖에 없게 만들거나 유통을 은근히 짜증나게 만들어 거래비용을 높여 가격을 올리게 만드는 행위가 있다. 전자를 관세장벽, 후자를 비관세장벽이라고 한다.

물론 북한이나 미안마가 고립폐쇄경제를 유지하면서 완전히 몰락해 버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과 한미fta를 연결시키는 것은 오버다. 한국 경제는 이미 상당히 개방화된 경제다. 얼마나 개방되었는지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국제 핫머니들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돈놀이하고 먹튀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장난질을 알면서도 문을 닫지 않는것은 그런 놀돈을 막으면 건전한 투자도 막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개방의 이득을 보고 있는 셈이다.
또 더 간단히 시장에 한번 가 보라. 수입품이 국산보다 터무니 없이 비싼지, 그리고 수입품을 구매하기 위해 뭔가 귀찮고 짜증나는 절차나 없는지 등등을 따져보자. 애플이나 htc제품을 지금 삼성이나 엘지 제품보다 오히려 더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 물론 아무 차별없이 같은 매대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미 우리 식탁에는 "우리 농산물을 먹읍시다"라는 호소가 들릴 정도로 외산 농산물이 가득하다. 물론 차별없이 판매되어 국내산 행세를 감쪽같이 해도 될 정도다. 한국 경제는 이미 충분히 개방되어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소국개방경제" 모델을 적용한다.

그럼 이제 우리 입장이 아니라 미국 입장에서 보자. 미국은 지금 십수년에 걸쳐 무지막지한 경상수지 적자를 누적해왔다. 그리고 그 적자의 대부분은 한중일 삼국에게 졌다. 세계경제 전체 차원에서 이런 불균형은 해소되어야 한다. 지금 유럽 여러 나라들이 독일을 홀겨보고 있는 것도 바로 그 까닭이며, 할 수 없이 독일은 1000억 유로를 게워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금 동아시아의 대미 누적 흑자는 상상 이상이다. 그 결과 중국이 3조달러, 일본이 1조달러, 대만이 4천억, 한국, 싱가포르, 홍콩이 거의 3천억 달러씩을 남겨서 비축하고 있다. 미국보다 동아시아에 달러가 더 많을 지경이다. 미국이 게워 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며, 국제 경제 균형을 위해서도 이런 불균형은 해소되어야 한다.

이런 불균형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면서 경상수지 흑자를 통한 GDP상승을 꾀했기 때문이다. 무역수지란 것은 누군가가 흑자면 누군가는 적자일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흑자의 공통된 적자 상대는 미국이다. 이젠 미국이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라?" 할 타이밍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지금 FTA찬성론자들은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니 FTA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다. 지금 한미 FTA의 주제는 한 마디로 미국이 "너희들 그 동안 수출로 먹고 살았으니, 이제 나도 수출로 좀 먹어 보자"다. 그러니 이 FTA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 유리하도록 진행될 수 밖에 없고, 미국 입장에선 그게 공정한 것이며, 사실 객관적으로도 그게 공정하다.

그러니 책임 있는 정부라면  "이로써 수출길이 열렸다"라고 뻥을 칠 것이 아니라(미국은 애초에 수입문을 높이 세운 나라도 아니어서 더 열만한 수출길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상대국도 아니다), 이제 "수출만이 살 길" 경제 모델이 한계에 이르렀으니 새로운 경제 성장 모델을 찾아야 함을 역설해야 한다.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패러다임의 끝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균형을 해소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문제다.  미국이 강제로 달러를 뺏아갈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미국의 수출이 증가하고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을 통해 자연스럽게 맞춰져야 할 일이다. 물론 남유럽, 동유럽 처럼 독일, 프랑스로부터 원조 형식의 돈을 받아서 균형을 맞출수도 있겠지만, 미국이 그걸 받아들일 리는 없으니...

문제는 미국이 동아시아 시장에 내다팔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산 제조품들은 한국산, 타이완산과 가격이 같거나 좀 싸도 안 팔릴 것이다. 한 마디로 구리니까. 현대차와 포드차가 같은 가격으로 나왔을때 누가 굳이 포드차를 사겠는가? 또 애플, 델, HP같은 첨단 정밀 제품들은 이미 대만이나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한미 FTA를 하건 말건 상관이 없다. 그러니 미국에서 직접 내다 팔 수 있는 상품들, 그리고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품들인 투자금융, 곡물, 육류, 의료, 바이오, 의약, 영화, 음악, 지적재산권 분야의 개방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료, 보건 분야는 우리나라에서 상품이 아니라 공공서비스로 되어 있고, 농업 분야는 정치적인 특수성이 적용되는 분야이며, 투자금융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국가의 제제가 필요하다고 인정되고 있는 분야다. 미국은 결사적으로 열어야 하지만, 그 분야가 우리나라에는 절대로 열수 없는 공공서비스인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열어젖힐 분야는 이 분야들 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가 공공서비스로 의료, 보건, 대중교통, 발전, 수도 등을 운영하고, 거시경제 건전성을 위해 투자금융을 규제하는 것을 "무역외 장벽"으로 간주하며 이를 해소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이 우위를 가지고 있는 특허, 엔터테인먼트 등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강화하여 일종의 지대소득을 올려서 달러를 회수해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결국 한미 FTA는 무역협정이라고 이름은 되어 있으되, 우리나라의 정책, 법률까지 무역외 장벽으로 몰아붙여 그 개정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다. 즉, 정치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는 그 동안 많이 먹었다. 그러니 이 불균형을 해소하여 미국에게 달러가 흘러들어가게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80년대때 일본 나카소네 총리가 국민들에게 "제발 미국 제품들 좀 구매해 달라"며 눈물로 호소한 것은 미국을 위한 매국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애국적 행위였다. 문제는 이게 흘러들어가는 방식과 속도다. 바로 여기에 한미 FTA의 쟁점이 있는 것이다.
그 속도와 방식은 그 동안의 수출주도 모형에 의존한 한국경제가 연착륙해서 무역수지 불균형을 이용하지 않은 건전한 경제성장 패러다임을 준비할 만한 여유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이 개방을 요구하는 공공서비스를 국민들의 삶의 질을 위해 정부가 최대한 버텨 주어야 한다. 이건 정치적인 문제다.
물론 받아가야 할 미국 입장에서는 당장 폭포수처럼 자기들에게 달러가 회수되기를 바라겠지만 말이다. 미국이 폭포수로 받아가면 한국은 엄청난 침식작용에 시달리겠지만, 미국이 그걸 고려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도 지금 제 코가 석자다.

그런데 도리어 미국에게 폭포수가 되는 상황을 마치 한국에게 큰 이익이라도 되는양 거꾸로 선전하면서 폭포수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해 주고 싶어서 앞장서는 한국 정치가, 한국 정부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국익을 위해 개방하면 안된다는 주장이 시대착오적이라면 더 넓은 수출길을 위해 한미FTA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제 체질을 미국화(선진화)해서 중국을 따돌린다는 주장은 지금 미국 경제체질을 조금이라도 관심깊게 들여다 보면 무지한 것인지 뻔뻔한 것인지 구별이 안되는 주장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부가 한미 FTA로 인해 달라지게 될 국민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고민해 보았는지, 캐어 물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국익이 아니다. 국민들의 삶이 요동치느냐 마느냐이다. 장기적으로 아무리 엄청난 이익이 보장된다 할지라도 당장 10년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질 가능성이 있다면 그 이익은 유보되어야 한다.  하물며 한미 FTA는 그동안의 경제성장 패러다임과 공공서비스, 공공정책 전반에 대한 손질을 요구하는 사실상 개헌에 가까운 조약이다. 이걸 공론도 없이 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막연하게 수출해야 먹고살지 식의 억견에 의존하여 통과시키는 국회는 도저히 민의의 전당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2011. 11. 18.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11- 교사가 되면 좋은 점 6

5) 봉사
이제 교사가 되면 좋은 점 다섯번째입니다. 이 다섯번째 좋은 점은 어떻게 보면 너무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바로 봉사하며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게 전혀 장점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봉사라고 하는 말은 나에게 있는 좋은 것을 혹은 나의 노력과 수고를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곱고 훌륭한 심성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리어 고역으로 여겨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봉사라고 하면 가치있고 훌륭한 일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자신과는 무관한 일, 그러니까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이나 하는 일로 치부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보통사람의 일상적인 행복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편협하고 그릇된 인간관에 서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이 인간관은 이미 수백년전 토마스 홉스가 설파한 바 있는 고독하고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인간관, 태초에 혼자이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타인을 자기 이익의 추구 대상이나 잠재적인 탈취자나 적으로 여기는 그런 인간관입니다
이런 인간관은 흔히 개인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을 하고서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했을 주류 경제학을 통해 우리 저변에 의외로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간을 도리어 쿨하다, 엣지있다 그러면서 동경하고 따스하고 동정심 많은 인간을 구리고, 위선적이라고 보는 고약한 풍토까지 퍼져있는 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 등에 대해 말하면 경쟁과 이익 추구는 인간의 본성인데, 그런 이상적이고 꿈같은 소리를 한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인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기적인 사람은 현실적이고 실속있으며 공동체를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은 몽상적인가요? 과연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현실일까요? 고독하고 냉철한 개인인가요 아니면 타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존재인가요? 일찌기 홉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루소는 개인이 자기 안전을 위해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은 존재할때 부터 사회속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루소의 생각 뿐 아니라 실제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낯설어 해야하는 말은 사회,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인 것입니다.


19세기 말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원시부족을 탐사했던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이들 원시부족들에게 개인을 뜻하는 단어도, 심지어는 그런 관념이나 생각 자체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혹은 역으로 1862년 메이지 유신 직후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일본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Individual을 옮길 적절한 동양의 용어를 찾지 못해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인간각개, 개개별별, 개별적인간 등 무수한 용어를 통해 이 말이 뜻하는 바를 표현하려고 애쓰던 끝에 개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이라는 말은 물론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 자체가 이미 철저한 근대 서양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개인주의는 커녕 홀로 있는 개인이라는 생각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당연히 관계속에 있는 존재지 관계밖에 있는 홀로 있는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 말대로 야수이거나 아니면 신일 것입니다.

, 개인주의가 아니 개인이라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먼 근대의 소산이라면, 그래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의와 계약을 통해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공동체, 사회는 대체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는 자기 것인 재산을 지키려고 사회계약이 수립되었다는 계몽사상가들의 생각을 뒤집어서 오히려 자기 것을 내어주는 증여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기본원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회는 서로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구성한 계약체가 아니라 서로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는 증여의 관계망인 것입니다.

사실 자본주의의 꽃이자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거래나 교환 역시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이익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모스가 말한 증여 동기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누군가가 일단 먼저 내어주려고 할 때 비로소 교환이 시작되는 것이지, 가져가려는 생각이 먼저 실현된다면 교환이 아니라 약탈이 자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약탈 시도를 금지하고 통제하는 인위적인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떤 교환도 거래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셀 모스가 관찰한 남태평양 부족들은 어떤 계약도, 규칙도, 법도 없이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다니면서 광범위한 교환의 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타계한 현대 인류학의 거장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증여-교환 행위가 전체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즉 상호 교환시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자연의 전반적인 균형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넘치는 쪽은 모자라는 쪽에 내어주는 것이며, 다시 넘치는 쪽이 바뀌면 반대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 원시부족은 사냥을 할 때 조차 자연에서 무엇인가를 가져왔기에 자연에게 무엇인가를 되돌려줌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의식을 합니다

이건 먼 옛날이나 원시부족의 이야기라고요? 근대 시장경제의 원리도 바로 이러한 균형입니다. 자본주의의 신인 보이지 않는 손이 빚어내는 최종 결과는 균형가격과 균형거래량입니다. 그런데 이 시장 균형 생태라는 것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상태는 소비자 잉여와 공급자 잉여가 일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누구도 상대방에 대해 더 이득 보는 것이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 상태에서는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소비자는 치뤄야 할 값에서 조금도 깎지 못했고, 판매자는 받아야 할 값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조차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각자 이익동기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설명보다는 애초에 인간은 상호간에 주고받음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더 현실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특별히 더 이상적이거나 몽상적이지 않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균형감각과 내어줌의 풍습은 심지어 돈 밝히기로 유명한 유태인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안식일이 그것입니다. 안식일의 규칙은 크게 둘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일하지 말라, 즉 생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생산하지 말라는 것은 재산을 더 늘리지 말라는 것이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은 잉여를 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 1주일동안 열심히 노동하여 일용할 양식을 얻고, 만약 남는 것 즉 +가 발생하면 더 이상의 노동을 중단한 상태에서 서로 이웃에게 나누어주어 +0으로 맞추라는 것, 그래서 매 주 첫날은 다시 무에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이는 여러분이 근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도리어 잉여를 남기고 축적하려고 하는 성향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사람을 수전노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한 뒤 돈을 받는 행위는 매우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직접 싸들고 다니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좀 그럴듯한 집에 가서 이리 오너라를 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쯤 해 두면 이익동기가, 이기적 동기가 아니라 내어줌이야 말로 오히려 우리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까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어주고자 하는 동기는 왜 발생했을까요? 과학에서 목적론은 매우 꺼리는 바 이지만, 그래도 억지로 끼워맞춰 보자면 이런 내어주고자 하는 본성이 있었기에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거대하고 복합적인 협력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내어줌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적응적 기능을 한 것입니다. 서로 먹이를 다투는 이기적인 포유동물은 매우 많지만, 처음 만난 타인에게 도리어 먹이를 내어주며 호의를 청하는 동물은 영장류 중에서도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고독함을 떨치며 자신이 단절된 개체가 아니라 거대하게 연결된 공동체의 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좀 이야기가 많이 벗어났습니다. 제가 여기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바로 봉사가 이 내어줌에 기반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내어줌의 대상이 사물이면 증여이며, 노력이나 노동력이면 봉사입니다. 따라서 봉사는 고역이 아니라 즐거운 내어줌이며 나를 더 힘있게 만드는 그런 내어줌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의 주군에게 “I am at your service"라고 말한 뒤 "It's my pleasure" 라고 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봉사함이 나의 즐거움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건 결코 주군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봉사할 상대가 없는 사람의 인생이 어떠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를 짜증나게까지 만들었던 부모님의 한없는, 그리하여 귀찮기까지 했던 간섭, 부모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던 집착의 어두운면이 바로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봉사해야만 하는, 그렇지 않으면 고독해지고 뿌리가 없어지는 인간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때 봉사할 상대방이 없거나 기껏해야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앙상하고 도독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독은 우울증과 자살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소수의 봉사 상대에게 과도하게 매달리는 강박적 집착을 가져올 것입니다. 1970년대에 베티 프리단이 간파한 바 있었던 단란한 가정과 이웃을 가진 여성들에게 별안간 엄습했던 그 우울증과 공허함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과 몇 안되는 이웃은 이제 더 커지는 봉사욕구를 감당하기에 너무 좁은 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사회라는 이름의 무한히 확장되는 거대한 봉사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맛을 충분히 알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풍성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명문대학을 나왔다거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면 재산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물론 제가 한국의 평균보다 학력이나 재산이 조금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 보다 더 높은 학력과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저보다 앙상한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을 수 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풍성한 인생은 다음의 수식과 같습니다.

, 인생의 풍성함은 증여할 수 있는 것의 종류와 증여할 상대의 종류와 함수관계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내가 증여할 수 있는 것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내가 증여할 상대가 많아질수록 풍성해집니다. 이때 단순한 양(Q)이 아니라 종류(k)와의 함수관계라고 말한 것에 유념하십시오. 아무리 내가 증여할 대상과 그 상대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종류가 얼마되지 않는다면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해서 그 효과는 점점 저감되어 마침내 증여하지 않는 고독한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진 것이 돈 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내어줌으로써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아가는 사람 역시 돈이 필요한 사람들로 한정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기부를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허무와 공허속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어줄 것의 종류가 다양한 사람은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 지식이 필요한 사람, 애정이 필요한 사람, 관계가 필요한 사람 등등.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에 있음을 느끼게 되며, 로버트 퍼트냄이 말했던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구축된 관계망과 기쁨의 네트워크는 유연하면서 쉽게 소진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종류의 자원이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그는 금방 다른 자원과 관계에서 자신의 사회성을 충족시킬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네트워크 조직과 같습니다.

반면 타인에게 증여할 것이 돈 밖에 없는 사람은 수입이 줄어듬과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위축됩니다. 오직 지식 밖에 없는 사람은 자신의 학설이 낡은 것이되거나, 기억력이나 지력이 감퇴하면 위축됩니다. 그리하여 돈이나 지식이 거의 소진됨과 동시에 그토록 풍성했던 그의 인생도, 그의 관계망도 모두 찌그러들고 맙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이 몰려들어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속담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그 정승이 가진것이 권력 외에도 다양하게 있었고,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들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관계망을 만들었다면 과연 그러했을까요? 내어줄 것과 그것을 받을 사람의 종류가 다양한 사람은, 그리하여 다양성의 그물망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중 어느 것을 상실하더라도 금새 그것을 보완하는 새로운 가치와 관계망을 엮어냅니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특히 한국의 교사는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근대적인 직업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교직은 그 행위 자체가 언제나 무엇인가를 내어주는 직업입니다. 그 내어줌은 지식일수도 애정이나 관심일수도 혹은 정말 단순한 신체적 노고일수도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예측불허의 내어줌에 늘 직면한 그런 직업입니다. 게다가 해마다 그 내어주는 것을 받을 학생들도 바뀝니다. 교사는 늘 대상을 바꾸어가면서 내어주고 봉사하는, 그러면서도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도 보장받는 그런 직업입니다.
 

2011. 11. 16.

교권을 지금 누가 침해하는데 학생 인권조례 탓을 하나?

요즘 학교와 관련해서 조중동이 대서특필하는 사안은 주로 둘이다.

하나는 주로 "어느어느 학교에서 학생 혹은 학부모한테 교사가 두드려 맞았다. 아 땅에 떨어진 교권이여! 학생 인권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교권이 무너져서야!"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기사가 10개든 20개든 다 똑 같다.

또 하나는 편향 타령이다. 교사가 편향된 수업을 한다, 교과서가 편향되었다. 교사 고발해라, 교과서 갈아 치워라!

그런데 이 두 주장을 같이 한다는 것은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고서야 하기 힘든 일이다. 교사의 학생에 대한 통제력은 권위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물리적인 우위,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사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 뭉개고 한탄 사상검증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교권이 침해되었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언제든지 수업 녹음해서 빨갱이 사냥의 대상으로 만들수 있는 대상이 교사인데 누가 그 교사를 존중하겠는가?
(다음 기사 참조)

설사 저들이 원하는 대로 체벌이 허용되었다고 치자. 그럼 체벌을 받은 학생은 반성을 하는 대신 그 교사에게 앙심을 품고 그 교사의 수업을 녹음할 것이다. 그 다음 그 녹음 내용을 적절히 짜집고 편집해서 빨갱이 수업을 만든 다음 인터넷에 돌리고, 조중동에 찌르는 것이다. 혹은 그 녹취물을 빌미로 교사를 협박해서 하루에 한번씩 교사 따귀를 때려도 될지 모르겠다. 혹은 그 녹취물을 들고 학부모가 학교에 쳐들어와서 교장에게 빨갱이 짤라라 악악 거린 다음 그 교사 따귀를 때려도 될지 모르겠다.

권위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그것은 믿음에서 생긴다. 교사 개인을 믿고, 또 그 교사들의 조직을 믿고, 커뮤니티를 믿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같은 독재국가가 아닌 다음에야 학교는 이 믿음의 바탕에서 운영된다. 학교에는 출퇴근부가 없다. 하지만 제멋대로 지각과 땡땡이를 치는 교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학교에서는 설사 형식적이라 할지라도 교사들의 각종 위원회들이 있다. 상명하복의 다른 공무원들과는 상당히 다른 조직운영 방식이 통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일반직 공무원들 혹은 대기업 사원들의 직장생활을 경험하면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이때 이런 교사들의 처우에 대해 "당연하다"라고 여기는 사회와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사회는 교사의 권위가 다르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느끼는 사회였고, 어느 정권이든 교사 처우를 개선한다는 정책을 내면 다 환영받았다. 한국을 소개하는 서양인들의 책인 론리 플래닛 한국 편에서도 한국에는 교사를 존경하는 문화가 있으며 그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라고 써 있을 정도다. 걸핏하면 한국 교육을 부러워하는 오바마도 아마 이런 판타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학생들은 교사에게 처맞거나 벌을 받을 가능성 때문에 교사를 두려워하고 복종한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사에 대한 존경심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맞거나 벌을 받아도 대들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억울하게 맞거나 벌을 받아도 "선생님도 사람이니까..." 혹은 "이 선생님이 좀 오해가 있는거지...." 이러면서 말이다. 그러니 체벌은 교사 권위의 원천이 아니라 교사가 권위가 있기에 용인되었던 것이다. 학생인권과 교권을 서로 제로섬으로 보는 관점은 그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다음은 교사의 정치중립성, 편향성 하여간 그 주제로 넘어가자. 나는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교사는 없다고 본다. 교사들도 당연히 선거에 나가서 누군가에게 투표 할 것이 아닌가? 그때 그 투표 기준에 좌든 우든 어떤 이념적 성향이 영향을 줄 것이 아닌가? 그러니 교사도 당연히 좌든 우든 편향될 권리가 있다. 나는 대놓고 말한다. 나는 좌파라고. 그렇다면 교육의 정치중립성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그것은 첫째, 학교가 좌파든 우파든 자유로운 공간이 될때 저절로 확보된다. 어떤 교사는 좌편향일 수 있고, 어떤 교사는 우편향일수 있고, 또 다른 교사는 중도파일수도 있다. 어차피 학생은 다양한 교사를 만나게 되며, 그 교사들 마다 다양한 정치편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정치편향을 가진 교사들과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것이 바로 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정치중립성이다. 교사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성향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단, 이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며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고서 해야 한다.
법으로, 교과서로, 심지어는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몰래 녹취로 좌편향의 교사들만 따로 찍어서 감시하는 학교라면 이건 교육의 정치중립성을 포기한 것이다. 더군다나 교육의 정치중립성의 보루가 되어야 할 교과부에서 일부 편향된 우익단체들의 요구에 덩달아서 신고센터를 운영하겠다는 파쇼적 발상을 보이는 나라에서 정치중립성은 사라지고, 단지 현 정권에 대한 편향된 충성만 남을 것이다. 이게 민주국가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나?

둘째, 학생들의 반론권이 보장될때 교육의 정치중립성이 지켜진다. 어떤 교사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을때, 여기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을 말할 권리가 학생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폭력이다. 나는 좌파든 우파든 이런 식의 교사는 경멸한다. 하지만 학생이 자유로이 반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교사들은, 특히 어떤 쪽이든 견해가 있어야만 수업이 가능한 사회, 정치, 윤리 교과의 교사들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것이 바람직하다. 또 만약 현재 언론과 방송이 특정 편향의 견해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면, 그 반대되는 견해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정치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교사의 의무다. 물론 학생들의 반론이 보장된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서 당장 모순이 생긴다. 학생들이 교사에게 반론을 제기한다? 이게 학생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사가 학생의 신체를 철썩철썩 때릴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가능할까? 결국 편향되지 않은 학교는 학생들의 인권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학교에서나 가능하다. 만약 학교인권조례가 지켜지지 않고, 거기에다가 교사들의 언행이 감시받으며 "사상검증"이라는 파시스트들이나 할 수 있는 말들이 거리낌없이 횡횡하는 분위기라면, 학교는 완전히 우편향된 교육만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왼쪽을 기웃거리는 학생들은 싸대기를 맞거나 무자비한 기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여겨지는 교사들을 지목해서 학생들로 하여금 이지메를 가하게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권침해를 운운하는 것은 코메디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비전문가들을 동원해서 교과서도 멋대로 뜯어 고치고, 모든 역사교사들이 입을 모아서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들은척도 안하면서 교과서 기상천외한 집필기준을 밀어부치는 반교권적인 교과부, 심지어 안철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교과서를 다시 쓰라는 명령을 내릴 태세까지 보여주는 교과부가 학생들을 패지 못하게 하니 교권이 침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코메디다.

이렇게 교권을 떡을 만들어 놓고서 체벌을 허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체벌 섯불리 했다가 학생들한테 다굴 당하는 교사일 것이다. 장담하건데 그렇게 다굴 당하는 교사는 주로 우편향 교사들일 것이다.

2011. 11. 15.

혁신학교 기반 닦기(3) 한국 교육의 구조를 이루는 낡은 교육 모형: 근대성

 
한국 교육의 구조를 이루는 낡은 교육 모형: 근대성
 
혁신학교, 진보학교
지금까지 한국 공교육을 어렵게 만드는 교육 패러다임의 혼란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혼란을 정리하면 한국의 공교육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그래서 혁신학교는 이 혼란을 정리하고 입신양명주의를 제거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않다. 이런 한국적 교육 패러다임의 혼란을 정리하고 나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교육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공통으로 직면하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런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입신양명주의가 강해 한 겹의 문제를 더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 점을 인지하지 못하면 자칫 혁신학교= 학교 정상화로 오인하기 쉬우며 혁신학교= 유럽 등 선진국 학교라는 심각한 오해에 빠지기 쉽다. 실제 혁신학교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일본, 유럽에서 각종 교육혁신 모델을 가져다가 무분별하게 적용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과 이명박 정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교육 선진화가 무엇이 다른지 애매하다.
성열관과 이순철(2011)이 혁신학교를 버전 1.0-3.0의 단계로 나눈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버전 1.0은 엄밀히 말해 혁신학교, 학교혁신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정상적인 학교, 학교 정상화에 다름 아니다. 교사가 수업에만 전념하고 행정 잡무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국에서는 엄청난 혁신이 되고, 학교장이 단지 행정가로서의 기능만을 가지고 교사들의 수업 자율권이 보장되며, 시험점수가 아니라 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에서는 거의 교육 혁명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모두 단지 정상적인 학교에 도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짜 혁신학교는 여기서부터 출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혁신학교, 교육혁신이라는 이름이 잘못되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학교의 몇몇 요소를 바꾸거나 활용방식을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혹은 우리보다 발전된 나라의 학교와 비슷해짐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물론 이른바 선진국 학교까지 포괄하여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 학교의 위기라는 말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우리 나라가 벤치마킹하려는 나라에서조차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핀란드에서 일어났던 일은 학교를 일부 개조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이루어진 교육혁명이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미 20세기 초반의 존 듀이를 필두로 등장했던 새교육 운동이 내걸었던 것이 혁신이 아니라 진보였음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혁신학교 운동은 현 상황을 혁신하고 난 결과물 역시 낡은 것임을, 그러나 정상적으로 낡은 것임을 인지하고 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버전 1.0이 소위 선진국 수준의 낡은 학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버전 2.0은 선진국과 같은 라인에 서서 낡은 학교를 일소하는 학교가 되는 것이며 버전 3.0은 이 시대의 한계 너머를 바라보며 진보에 기여하는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버전 1.0은 혁신학교 운동이라기 보다는 교육정상화로 불러야 하며 버전 2.0이 혁신학교이며, 버전 3.0은 진보학교다.
이런 정도의 비전까지 갖추려면 혁신학교운동은 학교운영 방식이나 교수학습 방법에 대한 혁신 아이디어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혁신학교 운동은 위해서는 지금까지 교육의 바탕에 서 있던 교육학, 교육철학의 전제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바뀌어야 마땅한 낡은 것들임을 입증하고 어떤 면에서 낡았는지를 적시해야 한다. 또 혁신학교가 진보교육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교육학, 교육철학의 전제가 기존의 질서를 공고화 하고 소외계층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음을 밝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기존의 교육철학과 교육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교육철학과 교육학을 수립할 정당성을 확보하며, 이 교육학을 진보교육학이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진보교육학에 기반한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혁신학교다.
 
낡은 교육은 근대 교육
 
다소 가치편향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나라 공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어왔던 문제들을 해소하더라도 그래서 소위 선진국 수준의 학교가 되더라도 그 학교는 낡은 학교고 그 교육은 낡은 교육이라고 하였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서는 낡은이라는 용어가 거슬릴 수 있겠지만 이것은 늙음에 대한 사회전반적인 멸시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 여기서는 단지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는 냉정한 의미 외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된 교육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낡은 교육은 모든 오래된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8세기-19세기에 산업 자본주의와 함께 형성되어 중세 봉건사회를 일소한 뒤 이제는 오히려 삶의 질곡과 억압이 되어가고 있는 근대성에 기반한 교육을 지칭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학교 교육은 사실 18-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18-19세기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최적화된 모델이다. 흔히 한국 학교를 비아냥 거릴떄 자주 나오는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실에서 19세기 교사가 가르친다는 말이 단지 비유가 아니라 실제인 셈이며, 그것도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이른바 선진 제국들을 포함하여 실제인 것이다.

근대 교육이라는 말 대신 굳이 낡은 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까닭은 복잡하게 왜곡된 한국의 공교육 체제 때문이다. 한국의 공교육 체제에는 근대적 억압 뿐 아니라 중세·봉건적 억압의 요소도 매우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학교에 온존하고 있는 중세·봉건적 잔재를 근대화하는 것 역시 혁신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자연히 근대낡은 봉건적 잔재에 대립하는 말로 받아들여져 왔고, 낡은 교육의 혁파라는 말은 교육의 근대화로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제왕적이고 자의적인 학교장의 권력은 분명 낡은 요소다. 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명문화된 규정과 세밀하게 지정된 권한의 한계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근대적 억압이다. 그런데 이 근대적 억압으로도 학교장의 권력은 분명히 통제하고 축소시킬 수 있다. 그래서 교육당국이 학교장의 권한을 명문화된 규정들 범위 내로 제한하고자 하는 당연한 근대적 합리화과정도 학교장들의 심한 반발을 샀으며 심지어 좌파정책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이와 경력에 상관 없이 능력있는 교사를 학교장으로 공모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방식이다. 그런데 층층시하의 봉건적 위계질서로 짜인 한국의 교육관료 시스템에게 이것은 좌파적 정책이 된다. 이것이 바로 1992년부터 20년 가까이 신자유주의의 도입을 교육혁신, 교육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원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근대화, 합리화도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근대화의 모순까지 극복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아야 하는 시대에 와 있다. 미국 월가를 비롯해 90여개국에 확산된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항의는 근대성의 시대가 이제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성의 부작용이 분출하고 있다. 따라서 비록 여전히 봉건적 잔재들이 남아 많은 교육자들과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근대의 합리적인 체제로 대체하는 것을 교육혁신이라 부를 수 없다. 이미 이 두 요소가 모두 섞여서 끊임없이 모순을 일궈내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둘을 한꺼번에 묶어서 일소해버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혁파해야 할 대상은 낡은 봉건적 잔재를 포함한 근대교육 체제 전반이며, 근대적 사유 전반인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낡은 교육이라는 말을 통해 고도로 합리화된 근대 교육체제를 지지칭하는 까닭이다. 우리 교육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근대성을 혁파해 낼 수 있다면 봉건적 잔재는 구태여 따로 혁파할 까닭이 없다. 지금 근대 민주정치의 핵심적인 제도인 대의제, 선거제도의 한계를 지적하고 아예 시민들의 직접 참여하는 참여주권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시민참여주권이 실현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라면 아직도 남아있는 봉건적인 세습체제의 잔재를 굳이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공교육의 기본 모형
 
그렇다면 이제 우리나라 공교육의 기본 모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여기서 모형이라는 말은 어떤 학교를 세우고 운영할 때, 또 교육제도를 세우고 개선할 때 항상 참조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전범을 뜻한다. 이 모형을 먼저 세워 보고, 이 속에 숨어있는 근대성의 흔적을 하나하나 추적해 내는 것이 이 책의 전반부를 이루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 나라 공교육은 그 동안 교육적이고 학술적인 바탕 보다는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온 경향이 강해서 어떤 튼튼한 이론적 모형에 바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교육과정 총론을 작성하고 학제를 편성할 때 담당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하는 학설들을 통해서 이 모형을 추론해 볼 수 는 있다. 그렇다면 비록 지금은 그 위세가 예전같지 않지만 타일러-테이바 모델과 김종서 모형이 우리나라 공교육의 기본 모형을 이루어 왔다라고 할 수 있다(이홍우, 1992). 타일러-테이바 모형은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교육제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주로 적용되고, 김종서 모형은 학교단위의 교육활동을 구성할 때 주로 활용되어 왔다.
물론 최근에는 공식적인 교육학자들이 이들 모형을 아직까지도 되 뇌이고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고시된 교육과정 해설서나 여타의 고시된 문서에서 아무리 다르게 말하더라도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천착된 이들 모형은 학교에서 사라지지 않고 일종의 문화 수준으로 고착되어 있다. 따라서 낡은 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형들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 모형들의 배경이 철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이론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타일러 모형부터 살펴보자. 타일러는 교육목표를 설정할 때 다섯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다섯 가지는 1)학습자에 관한 사실, 2) 사회에 관한 사실, 3) 교과전문가의 견해, 4) 철학, 5) 학습심리학이다(이홍우, 1992, p. 45) . 이 다섯 가지는 결국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어떻게 가르치느냐를 결정하는 체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타일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를 교육철학, 사회적 요구, 교과전문가에게 떠넘긴다. 결국 교육전문가가 고민해야 할 일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다. 즉 교육전문가의 역할은 학습심리학을 바탕으로 학습자의 심리와 상태를 파악한 뒤 주어진 교육 내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배치와 교수전략을 수립하는 것으로 축소되며, 학습 내용은 철학이나 사회적 요구(사실 교육철학이 당대의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에서 이 둘이 별개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에 의해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2단계의 소외가 발생한다. 첫 번째 소외는 학습자와 교육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무엇을 배울지에 대한 선택권이 이들에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교육자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일종의 숙련공이다. 여기에 더하여 학습자는 교육자로부터도 소외된다. 학습자는 외적으로 결정된 학습내용을 배워야 할 빈 그릇으로 간주되며, 이 그릇의 모양 역시 학습자가 아니라 학습심리학자, 교과전문가 등의 과학적 방법에 의해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습자는 자신이 배우고 싶은 내용을 배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학습전략 역시 원하는대로 할 수 없다. 무엇을 배울지는 교육당국이 결정하며, 어떻게 배울지는 교육자가 결정한다. 학습자는 그저 조작 대상으로 남는다
이런 종류의 교육관을 부르는 또 다른 명칭으로 브루너(1996)가 지칭했던 전수 모형’(transmission model)이 있다. 문자 그대로 교사, 교육자에게 있는 지식이 학생에게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를 프레이리(1991)는 은행저금식 교육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은 교사, 교육자에게 마치 은행 저금처럼 축적된 지식을 학생들이 인출해간다는 뜻의 비유다. 그 밖에 교육은 학생 행동의 의도된 변화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작용이라는 김종서의 교육관도 있다(이홍우, ). 이 모든 관점들을 관통하고 있는 공통의 아이디어는 교육은 어떤 지식이나 가치가 학생에게 전수되고 새겨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교사는 독자적인 지식의 생산자라기 보다는 이 전수과정의 매개체 역할을 하며, 이 과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보유한 일종의 숙련공이다.

이제 이러한 교육모형을 제도 수준으로 정리해 보자. 위의 모형에서 교사 대신 교사들이 근무하는 기관인 학교를 도입하면 된다. 그리고 계획된 교육 프로그램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한 부분은 한 부분은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을 결정하는 부분이며, 다른 부분은 그 목적과 내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현할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타일러-테이바 모형이 따르면 교육전문가는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을 결정할 수 없다. 교육 목적과 내용을 결정하는 부분은 교육자가 아니라 그 사회를 대표하는 정부, 즉 교육당국(교육관료집단)이다. 교육당국이 교육목적과 내용을 결정하면 교육전문가들(우리나라의 경우 교육과정평가원, 교육개발원 등)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것을 학교에 내려보내게 된다.
예컨대 교육 당국이 “A라는 학생에게 B라는 내용을 가르쳐서 K라는 변화가 일어나게 하라.”라는 명령을 내리면 교육전문가들은 이것을 일련의 단원과 교수-학습 패키지로 만들어서 학교로 학교에 내린다. 이 패키지가 바로 우리가 교육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육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과정이 일선 학교에 내려지면, 학교는 이 교육과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찾아서 실행에 옮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 과정도 더 세밀하게 분업화되어있다. 실행 방법을 연구하는 집단과 방법을 적용하는 집단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사는 이 연결고리의 최말단인 적용 집단에 자리 잡게 된다.
한편 정부는 이 명령이 전달되는 연결고리가 지나치게 길어짐에다라 발생할 수 있는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이것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를 각종 시험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실시한다. 시험 결과는 학생 혹은 학교에 다시 피드백 된다. 이런 세분화된 과정을 거치면서 A 학생은 K의 변화가 반영된 AK라는 학생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를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공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모형이다. 보기에도 답답한 이 교육모형은 매우 단순화 시킨 것으로 실제로는 이 보다 더 세밀하게 분업화되어 있어서 여러 종류의 학교, 여러 종류의 시험들을 거쳐가게 되어 있고, 이 학교들과 시험들은 모두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체제에서 벗어나기란 학생뿐 아니라 교사에게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 모형의 작동에 다소 교란을 불러일으킨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990년대까지는 정부가 학교에 내린 명령(국가 공동체 구성원의 양성 및 적재적소에 배치할 노동력의 양성)과 비공식적으로 학부모가 학교에 내린 명령(입시교육 강화를 통한 대입실적 향상)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바로 이 틈새시장을 노리고 사교육 시장이 비대해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틈새는 최근 들어 급격하게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축소되고 있다. 1998년 이후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정부가 교육의 공동체적 관점을 포기하고 단지 교육수요자로 격상된 학부모가 요구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서비스 사업자의 관점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학부모의 비공식적인 명령은 교육당국의 공식적인 명령으로 승격되었다. 이제 학교는 노골적인 입시교육을 해야 하며, 사교육기관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학교는 점차 입시 사교육기관과 차별성이 없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조치는 학부모를 수요자로 상정하는 시장논리를 통해 정당화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근대 공교육의 형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행해지는 교육이 반공교육이건, 입시교육이건 간에 이 모형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학생들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체계적인 조작에 의해 반공투사로 변신하건 아니면 입시기계로 변신하건 간에 외부 조작에 의한 변화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육운동이다. 교육운동은 크게 전교조 운동으로 대표되는 교사운동과, 이 모형 외부에서 새로운 교육을 하려 했던 각종 대안교육운동으로 대별된다. 교사운동은 이 모형에서 교육노동자의 역할을 하고 있던 교사들 중 일부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할 것을 거부하면서 이 모형의 핵심적인 과정들에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사운동은 처음에는 몇몇 개혁적인 교사들의 움직임이었다가 점차 이들이 결집하면서 마침내 전교조 같은 교사운동조직의 결성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최근에는 교사 수준이 아니라 몇몇 교육감들까지 이 운동에 가세함으로써 기존의 교육체제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대안교육운동은 이 교육기계를 거부하는 학생, 학부모, 그리고 개혁적 교육전문가와 교사들이 결합하여 이 기계 외부에 별도의 교육기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 역시 최근 몇몇 교육감들이 이 별도의 교육기관을 모델로 하여 이 기계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 기존 교육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교육당국의 대응은 탄압과 포섭으로 대별된다. 탄압은 개혁을 요구하는 교사들이나 학교 밖 교육기관을 공격하여 이들을 제거하거나 좌절시키는 것이다. 포섭은 이들의 요구들 중 체제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것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들을 협조적으로 만들어 체제내로 포섭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포섭보다는 노골적인 탄압이 두드러지며, 심지어 이 탄압의 대상에는 교육감들도 예외없이 포함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은 낡은 교육모형이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현상적으로 포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그 현상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본질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교육운동은 학생을 바꾸는 계획의 종류를 바꾼다거나 시험의 방식을 바꾼다거나 하는 식으로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 몇 개를 고치는 대증적인 개혁에 그치고 만다.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고 이렇게 현상들의 개혁에만 머무를 경우에는 성과도 쉽게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작은 탄압에도 쉽게 그 동안의 성과가 원상 복귀되기 쉽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교육운동은 낡은 교육을 그 본질까지 깊이 공격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학교에서는 이런 저런 움직임들이 있지만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교육내용은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즉 낡은 교육의 기반은 여전히 온존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운동이 그 성과를 계속 축적하여 마침내 낡은 교육 모형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그 외부 현상만 공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여러 전제조건들, 이론적 기반들을 완전히 허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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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3.

쥐왕의 몰락기




바닥소리 공장에서 책방 공연 한 판소리 쥐왕의 몰락기 입니다. 한 40여분 되는 공연인데, 이런게 정말 품위있는 저항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창하는 분의 전문성이 돋보입니다. 과연 전교조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길거리에서 악마복장 하고서 쥐잡기 퍼포먼스 하는 것은 대학생들이나 청년 유니온이 할 일이고, 그게 대세인가 보다 하면서 4,50대 교사들이 따라하는건 아니겠죠. 소리꾼은 소리로, 지식인은 해석과 분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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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0.

아이들이 뛰노는 곳, 성미산 마을

성미산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마을 공동체였지만 송파구에서 찾아가기엔 너무 멀어서 마음만 있었는데, 마침 연구휴식년 덕에 시간이 나서 찾아 보았습니다. 이런게 진정한 연구죠?

제일 관심을 끌었던 것은 마을극장과 마을책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을극장은 마침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하고 겹쳐서 너무 붐벼들어가 보지 못했고, 그래서 마을 책방을 향해 갔습니다. 정식 명칭은 개똥이네 책놀이터입니다. 정말 아이들이 마음대로 들락 날락 하면서 책도보고 놀기도 합니다. 물론 책을 팔기도 하고, 어른들 찻집도 있습니다.

이 건물 지하에는 아이들 놀이방이 있습니다. 이벤트가 있을 공간인것 같습니다. 갔을때 아이들은 다 밖으로 뛰어나가서 방이 비었습니다. 정갈하게 잘 다듬어진 방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을 주민들의 자치를 통해 가꿔지고 있다니 참 부럽습니다.

아이들이 저마다의 소원 말풍선을 붙여 놓았습니다. 만화책 많이 갖다 두라는 당부가 많습니다.

새로 오픈한 서점입니다. 휴머니스트, 보리 두 출판사에서 운영하기로 하고 아직까지는 두 출판사 책들이 주로 많았지만, 두 출판사만으로도 서점이 꾸려졌습니다. 휴머니스트가 이렇게 책 많이 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오며 가며 책을 읽습니다. 누가 책 읽으라고 잔소리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삶 가운데 책이 들어왔으니까요. 그리고 근처에는 어른들 찻집이 있고 하니 바로바로 교육이 됩니다. 누가 일부러 가르칠 필요 없이요. 박원순 시장이 말하는 마을이 학교다라는게 이런 것일까요?

골목에선 아이들이 뛰어놉니다. 지금 서울의 웬만한 동네에선 사라진 풍경입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골목을 누비며 뛰어노는 풍경 말입니다. 한계도 지적되고, 넉넉한 중산층만의 전유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넉넉한 중산층의 공동체기에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면, 그 차이를 정부가 메워주는게 복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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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체프와 만델링

예가체프는 다양한 느낌을 주는 화려한 커피다. 만델링은 우직하고 강한 맛의 커피다. 이렇게 둘이 모여 있으면 세상에 못할일이 없을것 같은 행복감을 준다.
발랄함과 우직함. 바로 이 양자간의 조합이 우리가 꿈꾸는 좋은 세상으로 가는 힘일 것이다. 발랄하게 경계를 넘고 우직하게 중심을 지킨다. 그런데 우리 나라 진보진영에는 예가체프를 좀 더 많이 공급해야 한다.

풋. 커피마시며 별 생각을 다 한다. 참고로 저 매장은 서교동에 있는 카페 더 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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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9.

학교를 노리는 파시즘의 음험한 눈초리


한때 진중권과 허지웅이 나꼼수를 들어 파시즘을 우려하는 한바탕의 코메디를 펼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절반은 옳고 절반은 틀리다. 파시즘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은 옳았지만, 그 대상이 틀렸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이 좌파를 지향한 경우는 찾기 어렵고, 또 웃음을 지향한 경우는 더욱 없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완전 헛다리 짚었다. 파시즘은 통상 위대한 전체를 지향하며, 항상 숭고함과 비장미를 드러내어 대중을 압도시킨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퇴조하고, 가카와 퍼런당이 동반 침몰하려는 상황에서 위기감을 넘어 비장감마저 감도는 조중동이 바로 예상되는 주역들이다.

파시즘은 물리적 폭압이 아니라 대중의 일체화된 정신을 통한 자발적인 열광과 복종을 획책한다. 폭력으로 몸은 지배하나 정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은 파시즘의 파 축에도 못낀다. 그건 그냥 전제정이다. 정신을 지배하고자 하는 파시즘은 당연히 언론과 교육을 틀어쥐려고 한다. 이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집요하게 언론을 틀어쥐고, 전교조를 탄압한 것은 이들이 적어도 좌파 지식인들보다는 파시즘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말기가 되면서 공포에 사로잡혀 파시즘을 갈망하더라도 불가능한 이유들이 있다. 그건 별개의 주제고)

그들은 언론을 철저히 틀어쥐는데는 성공했었다. 사실 나는 어떻게 방송사 사장 하나 바뀌자 방송국 기조가 송두리째 바뀔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간다. 기자들은 전부 정신분열자인가? 하지만 교육은 쉽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전교조는 언론노조보다 훨씬 완강하고 집요했다. 물론 학교라는 공간의 특성상 데스크만 틀어잡으면 되는 언론사와 달리 통제하기가 쉽지도 않다. 아무리 교육과정을 바꾸고 교장들을 쪼아도, 교실마다 CCTV를 설치하지 않는 다음에야 교사들이 뭘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최근 나꼼수는 그들이 틀어쥔 언론망 전체를 볍진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요일간지와 방송사를 다 움켜쥐었는데, 이걸 다 긁어 모아도 해적방송 하나만큼의 위력도 안되는 지경이니 정말 한심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남은것은 교육이다. 그런데 어떻게 학교를 숨쉴틈 없이 통제하겠는가? 아, 이들이 묘수를 찾아내었다. 나꼼수가 가카의 치부를 들춰낸다면, 학생들의 몰래녹취로 교사들을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들은 성공했다. 몇몇 교사들이 다소 편향된 수업을 진행한 부분이 있었고, 이걸 언론사는 재빨리 받아서 대서특필했고, 그러자 보수단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교사들의 발언을 통제해야 한다고 나섰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하는 교사들은 정신질환자일지 모르니 정신병 검사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미셸푸코가 정신병원=감옥=학교 의 동형성에 집착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기사 몇 개 인용해 보겠다.

"조선일보|김연주 기자
수업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정치인 등에게 심한 욕설을 하고 비교육적 막말을 하는 교사가 속출하는 현상은 무엇 때문일까.....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이런 교사들은 평소에 정치·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지만 표출을 못하다가 본인이 어떤 말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을 쏟아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훌륭하다. 기껏 교육관료 나부랭이가 이제 정신분석까지 하고, 그걸 또 기사라고 인용한다).... 실제 K고 H 교사는 "평소에도 학생들로부터 지적을 받고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또 화를 참지 못해 하게 된다"고 했다(이거 완전 미친 사람으로 몰고 있다.) 윤대현 서울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교사는 사회규범과 일치해 행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인데, 규범적으로 억압당하다 보니 일부 교사에게서 막말이나 심한 욕설 등이 터져나오는 것이라며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 교사는 충동 조절이 안 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교총 “교육청에 처벌 요청” [중앙일보 김민상]
수업시간에 교사들이 특정인을 비방하고 편향된 이념을 강조하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수업을 들은 학생이 문제 발언을 녹음해 인터넷에 폭로하고 있지만 교사들의 편향된 발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교육단체총연합회(교총)는 교육청에 진상을 파악해 책임을 묻도록 요구했다. 교육청도 실태 파악에 나섰다."

나도 처음에는 그 교사가 무리한 짓을 했고, 학생이 듣다가 너무 심한 것 같아서 녹음을 해서 알렸나 보다 했다. 사실 나는 교사가 수업시간에 정치적으로 치우친 발언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충분히 반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사정이 다르다고 본다. 다만 한국 실정과 문화상 그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을 권장했다"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발언인지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김정일 추모하라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대통령 추모하러 가라 한 건데? 그걸 문제삼는 것 자체가 매우 정치적으로 편향된 시각이 아닐까? 하여간 그렇다 치자.

그리고 내가 우려한 것은 그 녹취를 한 학생이 법을 오해할 가능성이었다. 몰래 수업 내용을 녹음해서 인터넷에 돌렸다면 이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10년이하의 징역에 해당된다. 면책특권 있는 노회찬 의원조차 이걸로 유죄 받은 항목이다. 하물며 학생이야! 그 학생을 영웅처럼 떠받드는 보수단체와 언론은 이 사실에 대해서는 경고하지 않는데 이건 너무 무책임한 모습이며 어린 학생을 정치적으로 편향되게 이용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기사 다음 부분을 보니 그 학생이 순진한 보통 학생이며 언론이나 보수단체에 이용당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소재 K고교 학생이 윤리 교사가 수업시간에 밝힌 정치 발언을 편집해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이 녹음 파일은 삭제된 상태다.....녹음 파일을 올린 학생은 전교조 소속이라고 밝힌 교사의 수업 내용을 녹음한 것이라며 사상을 주입시키는 전교조의 선동 수업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고 전했다."

자 섬뜩하지 아니한가? 이 학생은 장난삼아 혹은 듣다보니 너무 심해 녹음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전교조라 판단한 교사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불법녹취를 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을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인터넷에 올렸다. 이건 아주 중범죄자에 해당된다. 그런데 나는 SNS가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는 부분이 수상했다. 어떤 조직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통상 학생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SNS로 돌리거나 유튜브나 다음팟을 이용하지 특정한 사이트에 올리는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 말미에 가자 " 교사들의 육성이 연일 공개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수업시간에 흔히 보는 장면이라며 선동 내용을 계속 올리겠다는 댓글이 이어져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거 가관이 아닌가?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통비법을 무더기로 위반하는 것을 조장하는 특정 사이트가 있단 뜻이다. 이게 학생들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보이는가? 대체 어떤 사이트란 말인가? 이럴때 항상 허술한 뒷마무리로 팀킬을 하는 신문이 있다. 바로 동아일보다. 그래서 즉시 동아일보 기사를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동아일보] 교사가 수업시간에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내용의 녹음 파일이 잇따라 공개되면서 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한청련)이 만든 '에듀리크스(Edu Leaks)' 코너에 고교 시절의 경험이라며 대학생이 보낸 내용이다. 청소년 비정부기구(NGO) 단체인 한청련은 정치 편향적 교육을 바로잡자며 학생들의 사이트를 4월에 만들었다. 지금까지 약 20건의 제보가 들어왔다."

이제 그 사이트의 정체가 드러났다. 결국 배후에 단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트에 가 보았다. 명목상으로는 18세 청소년이 대표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의 설립 이념을 보니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의 설립 이념 우리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은
1. 민주주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을 지지합니다.
2.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는 이승만정부에 의해 건국된 대한민국임을 인정합니다.
3.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한 점진적인 한반도 통일을 지지합니다.
4. 튼튼한 국가안보와 국방력을 요구합니다.
5. 정치색에 물든 교원단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국가발전을 지지하는 청소년 NGO입니다.


오, 장하기도 해라. 정치적인 너무도 정치적인 단체가 아닌가? 저런 이념을 가지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겠다고 나서는 저 단체가 정말 청소년들 단체로 보이나? 그리고 저 5개 강령이 중립적으로 보이나? 아니라고? 그럼 그 단체의 연혁을 살펴보자.
2011년 1월에 우파의 미래전략이란 세미나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했단다. 와! 청소년 NGO가 도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참여연대에서도 쉽게 못 빌리는 프레스센터의 세미나를, 게다가 우파의 미래전략까지! 이 정도면 이 단체가 순수 청소년 단체도 아님을 또 정치적으로 우향우 치우친 단체임을 너무 쉽게 알수 있다. 그리고 이 단체를 통해 곳곳에서 교사 수업에 대한 불법 녹취와 악의적인 편집이 이루어지고, 그 녹취물이 인터넷으로 유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체 대표가 만약 그런 행위를 조장 내지 교사했다면 이건 10년짜리 법정 최고형 감이 아닌가?

동아일보는 계속 말한다. "중고교생 자녀를 둔 조연우 씨는 "정치적 성향이 아직 성립되지 않은 학생들은 스펀지 같아서 교사의 말 한마디에 큰 영향을 받는데, 교사의 편향적인 수업은 아주 위험하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교육이 편향되면 아주 위험하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치우친 의견은 불법 행위를 하고도 이렇게 빵빠레를 받고, 왼쪽으로 치우친 의견은 정신병취급을 받아야 하나? 그게 과연 균형잡힌 교육인가?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 최미숙 상임대표는 "자신의 절대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반대되는 건 모두 악이라고 교사들이 강요하는 건 학생들의 가치관을 훼손한다"며 "교육의 중립성과 학생의 학습권을 훼손하는 교사들은 수업권을 박탈하고 교단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아직 가치관이 여물지 않은 청소년들을 오른쪽으로 이우친 이념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불법행위를 야단을 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대서특필해서 조장하고 교육계에 풍파를 일으켜 이념싸움을 붙여보려고 조장하는 보수교육단체와 조중동은 퇴출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거짓말까지 하며 국민들을 호구로 보며 선동을 한다. "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사무총장도 교사는 수업시간에 자기 생각을 주입시킬 수 없다고 법에 명시돼 있지만, 어겨도 처벌을 받지 않으니까 이런 문제가 반복된다. 반드시 징계를 내려 일정 기간이라도 수업을 못 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내 평생 저런 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지면 교사는 특정한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하여 학생을 지도하거나 선동하면 안된다는 규정은 있다. 교사가 수업시간에 어떤 정책에 대한 의견을 말하면 안된다는 규정은 전혀 없으며, 다만 자기 정견의 도구로 학생을 이용하면 안된다는 정도의 규정이 있을 뿐이다. 즉 "엄마한테 한나라당 후보 찍으라고 말한 다음 도장받아오면 상점 10점" 이따구 짓 하지 말라는 뜻이다. 수업시간에 닥치고 교과서만 읽으란 뜻이 아니다. 더구나 사회, 역사, 윤리 시간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견해가 나올수 밖에 없다. 단 이때 교사가 이것은 자기의견일 뿐이며 반론이 가능한 부분이라고 밝히면 그만인 것이다. 더군다나 고등학교라면.

어쨌든 이번의 일부교사 정치발언 문제는 다소 조심성이 부족한 몇몇 교사의 언행, 이런 언행들을 매처럼 노리면서 걸릴때까지 계속 녹취한 조직적인 학생들의 불법행위, 그리고 이 불법행위의 결과물을 빨대처럼 침소봉대해서 여론화한 보수언론, 이걸 근거로 교육계의 반대정파를 공격할 빌미로 삼은 우익교육단체들의 합작품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 학생들이 녹취할지 모르니 다들 입닥치고 시키는대로 앵무새 수업을 하라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때 장제원 의원이 SNS규제 법안을 발의한다고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따로 움직이는 별개의 사건들일까?

생각을 얽어매고, 언제 어디서 감시가 이루어질지 몰라서 스스로 복종하고 자기검열하게 만드는것. 그리고 그것으 특정한 집단(주로 좌파집단)에 대한 마타도어로 귀결되는 것. 이게 바로 파시즘으로 가는 길이며, "자유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길이다. 그러니 자유민주주의자들이여, 그리고 반파시스트 전사인 진중권 선생 등이여. 파시즘과 싸워야 할 전선은 바로 여기에 있다.

2011. 11. 8.

갑갑한 회사원들

나는 교사가 지나치게 규범적이라 답답하고 일반 대기업은 보다 능력지향적이라 보다 자유롭고 유연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휴식년 덕분에 낮시간에 회사원을 관찰할 시간이 늘어난 지금 그 생각이 완전 잘못이란것을 알게되었다.
대기업은 관공서보다 더 관료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상사가 스마트폰을 하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의 바다를 이루는 이 장면은 코믹했다. 특히 진보적일거라 여겨지는 지역 출신이 도리어 부하들에게 더 권위적이고 고압적인것을 많이 목격했다. 이런식으로 회사생활하다 늙으면 자리 양보하라고 행패부리는 노인이 될지도.
사무직 노동자의 미시사회학. 이거 흥미있을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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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7.

보수 언론은 학생을 선동하지 말라

최근 수업시간에 한 말 때문에 설화를 겪는 교사들이 생기는 모양이다. 아마 설익은 정치적인 발언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기계적인 중립을 경멸하고, 스스로 좌파라고 공개하는 입장이지만 수업시간을 이용하여 나의 정치적 견해를 주입하는 행위 역시 경멸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나에게 반론할 수 있는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립적인 수업조차 "우편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좌편향으로 몰리는 이 나라의 실상은 나의 균형잡힌 수업조차 편향되었다라고 딴지 걸 지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해도 이번에 김포와 또 어딘가에서 문제가 된 국사, 윤리 교사의 발언 내용은 도가 지나쳤다. 그런데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고 관련교사의 처벌을 요구하는 보수언론의 대응은 더욱 도가 지나치다. 이들은 은근히 이런 녹취가 많이 나와서 좌빨 교사들을 싹 쓸어냈으면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그들의 태도는 자칫 철없는 학생들에게 불법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

수업내용을 녹취한 다음 이것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행위는 그 내용이 뭐건간에 매우 심각한 범죄행위다. 더군다나 그 녹취가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을 경우, 또 녹음자가 그 녹취에서 대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 경우 더욱 명백한 불법행위다. 물론 이런 불법 녹취를 근거로 어떤 사법적인 조치도 취해질수 없으니, 만약 이걸 근거로 해당교사에게 어떤 징계가 주어질 경우 당연히 그 교사들이 행정소송 걸면 승소한다. 문제는 이 교사들의 승소=녹취공개 학생들의 처벌 이라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법은 통신보호 비밀법이다. 이 법이 생각보다 무섭다. 벌금형도 없이 바로 징역이다.


통신비밀보호법

제3조 (통신 및 대화비밀의 보호)
①누구든지 이 법과 형사소송법 또는 군사법원법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우편물의
검열,전기통신의 감청 또는 통신사실확인자료의 제공을 하거나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한다.

여기서, 적법한 녹취는 피녹음자의 동의를 받았거나, 혹은 피녹음자에게 녹음이 된다는 어떤 신호가 주어진 경우, 그리고 몰래 녹음한 경우는 피녹음자가 녹음자 자신인 경우다. 즉, 상대에게 녹음을 한다고 어떤 형태로든 알리면 적법하며, 몰래 녹음인 경우는 자신의 대화내용을 녹음하는 중에 상대의 대화가 포함된 경우라야 한다. 본인은 아닥한 상태에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할 경우 이건 불법이 된다. 더더군다나 이걸 인터넷에 올렸다면, 더더군다나 이걸 어느 학교의 누구라는 것을 밝히고 올렸다면 엄청나게 심각한 범죄가 된다.

제16조 (벌칙) ①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1. 제3조의 규정에 위반하여 우편물의 검열 또는 전기통신의 감청을 하거나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한 자
2. 제1호의 규정에 의하여 지득한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한 자


10대들은 아직 사회에 충분히 적응되지 않아서 보다 세심히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구체적인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듯이 쏟아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그들이 불법행위인줄도 모르고 모방을 할 위험을 방치하는 것도 명백한 잘못이다. 물론 언론사들이 청소년들에게 불법을 조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따라해보고 싶은 행위를 보도할 경우에는 그런 위험에 대한 균형잡힌 예방책도 반드시 제시해야 할 것이다. 혹시 몇몇 신문 보도를 보고 "그럼 나도 선생 수업 녹음해서 엿먹여야지" 할 학생들이 있을까봐, 그러다가 무책임한 언론의 선동보도에 순진한 피해자가 양산될까봐 우려되어 몇 글자 적어본다.

참고로, 오장풍 사건은 그럼 뭐냐 할지 모르는데, 이 경우는 형사소추가 안되는 어린이의 작품이라 해당이 없다. 하지만 이번처럼 고등학생이 이렇게 할 경우는 녹음당한 교사가 고소할 경우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리고 보수언론의 선동처럼 교육청이 그 녹취를 근거로 징계를 의결하면 어쩔수 없이 고소는 이루어질수밖에 없다. 다들 현명하게 판단하기 바란다. 교사들도 자중하고 언론도 자중하라. 피해는 학생이 본다.

S대 바보들

원래대로라면 단풍이 다 떨어졌어야 하는 11월 이지만 올해는 아직도 푸르름이 가득합니다. 원래 오늘은 콜로키움(소규모 학회)을 해야 하는 날이지만 이 샌님들이 가는 가을이 아쉽다고 나들이를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일기예보는 토요일 비. 원래 노는 것 싫어하고 공부를 더 좋아하는 저는 잘되었다 하고 대학으로 가서 은사님도 뵙고, 일도 봤는데, 기어코 이 사람들이 한성대 입구에 모였다고 연락합니다. 성곽길 걸은 뒤 삼청동 나들이를 한다나요?

도리없이 다시 먼 먼 길을 떠나 삼청동 쪽으로 가서 북악산을 걸어 올라가 숙정문 입구에서 접선합니다. 가을이 지나가는 북악산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 풍경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내려와서 삼청공원을 거닐었습니다. 명산들에서는 맛이 간 올 단풍, 그나마 삼청공원은 그럭저럭 봐줄만 했습니다. 어쨌든 책읽고 세미나를 하지 못해 우울해 하는 나를 제외한 다른 동학들은 모두 즐거워 합니다.

전체적으로 준비된 프로그램대로 착착 진행됩니다. 한성대 입구- 간송미술관- 성곽길- 숙정문입구-삼청공원 하산 - 삼청동 보리밥집.

이제 마지막 프로그램인 삼청동 보리밥집으로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갑니다. 어딘지도 정확하게 좌표 찍고 갑니다. 그렇게 보리밥집 앞에 도달한 일행이 당황합니다. "자리가 없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준비된 프로그램이 어긋납니다. 안타깝게도 플랜B는 준비된 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지?" 다들 멀뚱 멀뚱 얼굴만 처다봅니다. 배는 고프고, 다리는 아프고, 날은 저물어갑니다. 인파로 미어 터지는 삼청동 길에 중장년 10여명이 마치 미아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얼굴만 쳐다 봅니다. 그 면면을 보자면 S대 교수도 한 분, S대 박사가 여섯분, 그리고 S대 박사과정생 세분.... 하지만 이렇게 모여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 "어디 가서 밥먹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누가 나서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습니다. 가히 패닉이 따로 없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오직 "준비된 플랜이 어긋났고, 또다른 플랜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득 김용민 씨가 "S출신들은 모든 길이 꽃가마 타고 가는 탄탄대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소한 좌절에 쉽게 자빠진다"라고 어디선가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계획은 완벽하고,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되어야만 하는데, 사소하게 어긋나기 시작하자 일의 경중을 떠나 계획이 어긋난 사실에 당황하면서 사고가 정지되는 딱 그런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나중에 합류하기로 한 다른 선생님이 더 좋은 식당을 오면서 잡았으니 그리 오라고 연락합니다. 간신히 살았다는 표정으로 버적버적 밥먹으로 가는 7박들. 문득 한 사람이 말합니다. " S대생들은 실천지능이 형편없기 때문에 머리 좋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구만." 다들 박장 대소합니다.

이렇게 힘겹게 자리잡고 홍합밥으로 배를 채우고 동동주를 마시며 결국 교육이야기를 합니다. 교육혁신? 결국 "어떻게 이론적 지능과 실천지능이 고루 균형잡힌 인간을 기르느냐?" "어떻게 이론지능만 발달하고 실천지능은 잼병인 정신적 불구(?)만 양산하는 교육을 바꾸느냐?"의 문제라는데 다들 동의하고, 그 열쇠가 문예체 교육에 있음에 동의합니다. 이렇게 가을의 마지막 주말이 저물어 가고, 어이없이 미아아닌 미아처럼 삼청동을 헤매었던 나름 자칭 최고 엘리트 교사들과 교수의 깨우침도 깊어갑니다. 우리들이 바로 우리 교육의 혁신이 절실하다는 산 증인임을.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