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30.

야권마저 촛불 희생자를 잊는다면, 누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나?

연거푸 촛불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다. 그 까닭은 그만큼 절박해서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주의와 진보를 외치는 정치인들에게 그 기본을 되새기라는 준엄한 요청이기도 하다. 너무 자주 이런 주제의 글을 올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해 너무 반향이 없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1. 지금 야권의 대선 주자들은 모두 촛불시민의 수혜자다


2008년 촛불은 특히 서울지역 시민들에게는 엄청난 자부심의 원천이자 동시에 씻을수 없는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있다. 반대로 아무런 희망도 꿈도 갖지 못한채 왜소화되었던 야권과 진보진영에게는 기적과 같은 경험으로 남아있다. 2008년 촛불은 결국 진압되었다. 촛불에 참가했던 시민들은 이 정권의 무자비한 공권력의 완강함만을 경험하였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승리 선언"을 하는 운동권 지도부들의 무책임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의 열매는 컸다. 그리고 그 열매는 대부분 민주당이 챙겨갔다. 2008년 4월만 하더라도 민주당은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정당이었다. 지금처럼 거대야당이라는 소리를 듣고, 유력 대선주자들을 배출하는 그런 정당이 아니었다. 정동영 후보의 참패와 이명박의 압승, 그리고 이어진 18대 대선의 압도적인 보수화에 질려서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런 정당이었다.


그런데 그 높디 높던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촛불이 반토막 냈다. 2008년 5월~7월 동안 이어진 촛불과 그 촛불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이명박의 이미지를 고집스러운 수구 이데올로그로 탈바꿈 시켰다. 그리고 그때 반토막 난 지지율은 임기내내 회복되지 않았다. 2008 촛불이 아니었다면 이후 이어진 여러차례의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연승행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주가를 높이고 있는 야권 대선주자들은 모두 촛불에 빚진 셈이다. 그리고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2008 촛불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깊은 한과 상처가 남아 있다. 이 한과 상처를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2. 촛불에 대한 태도는 박근혜와 야권의 대선주자들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지금 박근혜조차 복지를 말하고 인권을 말하고 노동을 말한다.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평등을 말한다. 물론 선거가 끝나면 혹은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지면 쑥 들어갈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야권 후보나 여권 후보나 색깔이 비슷하다. 한결같이 좌파일변도다. 모두가 이렇게 좌파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때 2008 촛불에 대한 단호한 대처는 야권 주자의 선명성을 가르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조중동과 보수세력은 시종일관 2008년 촛불을 촛불난동, 심지어는 좇불 난동이라 부르며 백안시 했다. 따라서 박근혜는 절대 2008년 촛불을 긍정할 수 없으며, 2008년 촛불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경찰 책임자들과 법무장관 등을 문책할 수 없다. 아무리 좌파코스프레를 하고자 해도 이건 할 수 없다.


따라서 야권주자들은 얼치기 진보의 가짜 좌파 코스프레를 가려내는 리트머스로 촛불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2008 촛불 피해자에 대한 국가 보상과 진압 책임자 문책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면 2008년 당시 진압하던 자들이 진압당하고 공권력을 빙자한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법의 철퇴를 맞고, 존재하지 않던 폭력 시위와 난동을 조작하던 거짓된 언론은 그 거짓된 입에 재갈을 물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선언해야 한다. 즉 한 마디로 수구세력과 조중동에게 쫄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선언해야 한다. 이건 박근혜가 천만번 코스프레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진정한 야권 후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3.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과 희생은 보상받아야 한다.


이런 정치공학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흘리고 다치고 상처입은 사람들은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한다. 518 피해자가 여전히 그 상태였다면 1987년의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여전히 그 상태였다면 그 이후 이루어진 정권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기념비와 역사의 페이지를 할애했기에 이후에도,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정의감이 이 사회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야권 주자들은 모두 그 정의감에 빚졌다. 그러니 2008년 촛불을 그냥 잊혀지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이렇게 잊혀진다면 앞으로 누가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던지겠는가?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이 바보짓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야권 대선주자 누구도 2008년 촛불을 말하지 않는다. 계승한다고도 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해주겠다고도 하지 않고, 또 원한을 갚아주겠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벌써 촛불을 잊었다. 아니 시민들 스스로 잊었는지도 모른다. 상처로만 남은 촛불을 잊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는 기억이며, 반드시 기념되고 영광을 누려야 하는 기억이며, 원한을 풀어야 하는 기억이다. 이걸 내 걸지 않는 후보는 아무리 코스프레를 열심히 해도 진보가 아니며, 민주주의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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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2.

2008년 촛불 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정치인은 어디 있는가?

요즘 대선 준비들로 한창이다. 벌써부터 빅3, 빅4 등등 말들이 많다. 야권은 문재인, 김두관 박빙 상황에 안철수까지 가세한 상황이고, 여권은 박근혜가 계속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516이 쿠데타가 아니라는 박근혜는 그렇다 치자. 516이 쿠데타가 아니라는 역사 인식이라면 518은 무장공비 소탕일 것이고, 610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난동일테니. 아, 물론 자기 아버지 명을 재촉한 부마항쟁은 부산마산 공산 폭동이고.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고 되살리겠다는 야권 후보들이 의외로 침묵하고 있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건이 있다. 바로 2008년 5월~6월 사이에 있었던 촛불 시위에 대한 무차별 무력진압 진상 규명과 피해 배상이다.




2008년 6월 1일 아침, 마치 1980년 광주 518 기록 사진을 연상시키는 처참한 사진을 보았을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조약돌 하나 던지지 않고, 오직 물통과 촛불만 들고 있을 뿐인 시위대에게 SWAT를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한 경찰들. 그리고 여기에 부화뇌동하여 그것도 권력이랍시고 알량한 힘을 과시하며 도취되었던 의경, 전경들. 그 와중에 무수히 피흘리고, 고막이 터지고 갖가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던 무고한 시민들. 심지어 사망설, 실종설까지 유포될 정도로 잔혹했던 폭력 진압.

여학생을 군화발로 짓밟고, 치료를 돕기 위해 나와 있던 여성 의료대원을 방패로 찍어 일격 필살시키던 철없던 전의경. 그리고 이들을 부추기면서 폭력진압을 유도했던 경찰 간부들. 그때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건 빨리 정권을 바꿔서 저들을 재판대에 세우고 책임과 진상을 규명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게 2008년 이후 411직전까지 모든 선거에서 야권에게 전승을 안겨준 동력이었고, 아직도 서울에서는 여권이 맥을 못추는 동력이었다.

생각해 보라. 압도적인 표차이로 이명박이 당선되고 한나라당이 국회의 2/3를 차지하여 멘붕상태에 빠진 야당에게 돌파구를 열어준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바로 이 무고한 시민들이 흘린 피다. 그 피 덕에 이만큼이라도 세력을 일으킨 야당은 그리고 그 덕에 이만큼 인지도를 높인 야권 대선후보들은 반드시 그들의 눈물과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2008년 촛불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등을 말하지 않는다. 이건 배은 망덕이다.

2008년 전국민을 울렸던 이 사진을 벌써 잊었는가? 아무리 한국인이 냄비라고 비아냥을 듣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도 2008년의 상처가 전혀 아물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찰만 손보면 되는가? 시민들의 상처, 시민들의 원한은 어찌할 것인가? 책임있는 대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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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8.

교총회장은 교육혼란이 걱정되면 대법원에 간섭하지 말고 교과부, 검찰 앞에서 1인시위라도 하라

안양옥 한국교총 회장이 양성태 대법원장을 만났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교총은 소위 보수적인 교원단체다. 교원단체라고 말을 하기는 하나 교사는 물론 교장, 교감, 장학사, 장학관, 대학교수까지 두루두루 회원으로 가입해 있어서 도대체 그들이 지키려는 교육이 어떤 교육인지 알기 어렵다.

주로 초중등교육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는 하나 정작 초중등교사의 목소리가 교총에 반영되는 경우는 드물다. 회장도 주로 교수들이며, 정책실장이나 대변인 등도 교사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총은 회원수에 비해 교육계를 대변하는 커버리지가 그리 큰 단체가 아니다. 사실은 일종의 이익집단이라 봐야 한다. 


그런 교총회장이 안그래도 대법관 청문회 때문에 1000건이 넘는 재판이 밀려서 정신없이 바쁠 대법원장을 찾아갔다. 실례도 이만저만 실례가 아니다. 게다가 찾아간 사유도 황당하다. "교육현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으니 곽노현 사건의 선고를 서둘러 달라"라고 건의하러 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사법부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법관이 법과 양심에 의해서만 판결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도 법관에 대한 로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특정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개인이 특정한 편향된 목적을 가지고 재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면 이는 엄하게 처벌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자를 처벌하기는 커녕 대법원장이 만나주었다는 사실은 도대체 이 나라가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는지를 걱정하게 만드는 한심스러운 일이다. 만약 선고공판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법관을 사적으로 만날것이 아니라 그럴 이유를 공식적인 의견서로 작성하여 법원이 접수시키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걸 대법원장을 직접 만나서 전달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대법원장을 만났다고 자랑질까지 해대는 작태는 이 나라가 자기들 몇몇 소수의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여 법관의 직무상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법관은 심판을 함에 있어서 오로지 헌법과 법률, 직업적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심판한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심리를 더 하는 것이고,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면 더 고민하는 것이고, 그건 법관이 결정할 일이지 3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긴가민가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사건은 어떤 합리적 의심도 없어야만 무죄라는 원칙이 따라 무죄로 판결나는 것이 당연하다. 


국회든 대통령이든 그 누구도 또 어떤 정치적, 사회적 단체, 매스컴 등도 법관의 재판에 간섭할 수 없다. 곽노현측도 그렇기 때문에 법관에게 직접 재판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지 않았다. 그게 헌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법학자의 관점에서 법학회 등을 통해 의견을 제출할수 있다. 이 경우도 법관에게 직접 제출하는 경우는 없다. 다만 법원 연구관에게 제출되며, 연구관들이 이걸 분석해서 자료화 한뒤 그 자료가 법관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서울법대 동문인 곽노현 교육감이 대법원장을 만난다면 조중동이 어떻게 나올지? 역사상 그 누구도 법관을 직접 만나서 재판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경우는 없었다. 이건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쿠데타를 한 박정희 조차 적어도 대놓고 하지는 않은 일이다. 하기야 한국교총은 박정희보다 더한 독재자인 전두환에게 만수무강 병풍을 진상항 정도의 단체이니 그럴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방문을 받아준 대법원장의 행동은 안 그래도 사접불신이 팽배한 요즘 같은 시기에 결코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이제 사람들은 곽노현 사건의 선고공판이 앞당겨지면 정상적인 법집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교총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따라서 보수집단, 사학재단의 영향력이 발휘되었다고 생각할 여지를 안게 되었다. 


지금 법원은 이미 선거 한참 끝난 다음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선거를 혼탁하게 했다면서 곽교육감을 단죄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곽교육감과 사사건건 각을 세워온 보수단체의 수장을 그것도 대법원장이 그것도 사전에 만났다. 더군다나 거기에서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곽노현 재판이라는 매개외에 두 사람은 따로 만날 어떤 면식관계도 아니다. 그러니 국민들은 이걸 어떻게 보겠는가? 이렇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여지를 만든 안양옥 교총회장은 일종의 국기문란을 행한 셈이다. 여기에 관련된 형법 조항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헌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정통 교원단체의 수장임을 자랑하는 사람이 말이다. 


더더군다나 한심스러운 것은 그 까닭을 교육혼란이 우려스러워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안양옥 회장은 대법원을 찾아갈것이 아니라 이주호 교과부 장관을 고발하던가 아니면 교과부 앞에서 1인시위라도 하라. 적어도 곽노현 교육감과 서울시교육청은 혼란 없이 차곡차곡 잘 해나가고 있다. 혼란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곽교육감 구속당시 이걸 뒤로 되돌리려던 이대영과 그를 배후조종한 이주호 때문이다. 그리고 시의회가 의결한 조례를 별 사소하고 해괴한 이유를 대가며 몽니를 행사한 이주호 때문이다. 오히려 학생이 교사를 때리고, 학교폭력때문에 잇따라 자살하는 대구 경북 울산 지역이야 말로 교육혼란 그 자체 아닌가? 그런데 교총회장은 그 문제에 대해 무슨 해결책을 내놓았나? 그 지역은 교총회원 비율이 높은 지역 아닌가?


이주호 장관이 2007개정 고육과정 발표하고 불과 며칠만에 교육과정 다 뜯어고치고 2009개정교육과정 강행해서 학교를 아수라장을 만들때 교육혼란을 걱정하는 교총회장은 어디 있었나?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집중이수제니 뭐니 해서 학교를 난장판으로 만들때, 그리고 1년만에 이번에는 집중이수제 안한다고 또 난장판으로 만들때 교총회장은 어디 있었나? 개학을 2주 앞두고 갑자기 체육 시수를 두배로 늘리라고 고과부장관이 억지를 써서 학교마다 다 짜 놓은 시간표를 발칵 뒤집어 놓을때 교총회장은 어디 있었나? 검찰이 학교폭력을 빌미로 교사를 사법처리한다며 으름짱을 놓고, 심지어 학생과 담임교사를 대질심문하는 만행을 저지를때, 교총회장은 어디 있었나?


자, 교육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멀쩡한 도종환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서 빼라고 했다가 다시 빼지 말라고 하는 이 혼란은 또 무엇인가? 그때 교총회장은 의견 하나라도 낸 적 있는가? 이게 지금 교육혼란을 걱정하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니 안양옥 교총회장은 교육혼란이 걱정되면 주제넘게 대법원에 압력 행사할 반헌법적 행위를 하지 말고, 교과부 앞이나 검찰청 앞에 가서 1인 시위라도 하라. 굳이 곽노현 재판이 늦어지는게 문제라고 생각되면 대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나 국회로 가라. 지금 곽노현 교육감이 기소된 법조항의 위헌성 여부가 심리중이며, 대체입법이 준비중이다. 이런 법조항을 가지고 섵부르게 판결 내리려는 법관은 없다. 만약 그랬다가 나중에 위헌이 되거나 대체입법이 되면 골치아프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와 국회의 일정이 빨리 진행이 되어야 대법원에서도 그 다음에 움직일 것이다.

자, 안양옥 교총회장에게 좌표가 주어졌다. 1)교과부, 2)검찰청 3) 헌법재판소 4) 국회. 그리고 좌표가 주어졌으면 주제넘게 높은 사람 만나면서 생색내지 말고, 성실성과 겸손함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인 단식 농성이라도 하던가 해라. 그게 교육혼란을 걱정하는 사람의 자세다. 말로 하는 걱정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그리고 안양옥 회장은 한국교총 회장이지 서울교총 회장이 아니다. 전교조도 서울교육감 상대는 서울지부장이 하지 위원장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역시 안양옥 회장은 교과부를 상대해야지 서울교육청 일은 서울교총에게 맡기라. 하긴 그러자니 조직이 실체가 없지?

참, 안양옥 교수는 같은 체육과 교수인 박명기 교수에게 혹시 후보 사퇴한 다음 밥이라도 한끼 사주면서 "사퇴하느라 맘고생 심했어." 이런 덕담이라도 한 마디 하면 곽노현 교육감과 똑같은 혐의로 기소될 수 있음도 명심해야 한다. 이 법이 이따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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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6.

곽노현 선고일 다가오는듯 하자 배신의 이빨 드러내는 교육관료들

6월부터 서울시 교육청은 롤러 코스터 같은 분위기였다. 6월 초에는 관료들이 교육감의 명을 교묘히 물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 이들에게 곽노현 6월 22일 낙마설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0일자로 대법관 4명이 퇴임할 것이기 때문에 6월 4주 목요일인 6월 22일에 선고가 나고, 그럼 곽노현 교육감은 물러날 것이니 말 들어서 뭐하리 하는 그런 태도다.

물론 관료들 중에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스스로 동의한 교육혁신의 상을 위해 묵묵히 자기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도리어 6월 22일 이전에 혁신사업을 최대한 추진시켜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초조하다 못해 자뭇 비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관료들은 6월 22일 설이 나오는듯 하자 즉각 태도가 바뀌면서 노골적으로 비협조적 변신을 꾀했다.

이들이 묵묵히 자기일을 하는지 기회주의적으로 배신의 틈을 노리는지는 교육청 파견교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관료들은 이들을 단지 파견교사로 보지 않는다. 이들을 전교조의 일부로 보며, 곽노현 교육감의 별동대로 본다. 따라서 교육감의 눈치를 보아야 할 상황에서는 파견교사의 눈치도 보며, 교육감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파견교사도 무시하며 심지어 모욕을 가하기도 한다.

이번에 학교폭력 토론연극으로 전국적인 히트를 친 부서의 관료들이 딱 그런 태도를 취했다.  교육감이 석방된 직후 이 사업이 추진될때는 매우 적극적이고 협조적이었다. 물론 이 사업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당한 파견교사인 K교사에게도 매우 협조적이며 적어도 겉으로는 존중하는 제스쳐를 취했다.그러다가 4월 18일 항소심 판결에서 엉뚱한 판결이 나오자 갑자기 안면 몰수 지지부진으로 바뀌었다. 담당 장학사는 한국 교육연극계 최고 권위자중 한 사람인 K교사를 마치 아랫사람 부리듯 하려 들었고, 학교폭력 토론연극 프로젝트는 준비하던 극단들이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질질 시간만 끌었다.

그래도 이걸 억지로 억지로 추진하여 여러 언론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고  학교폭력 대책은 바로 교육연극이다라는 대세를 이끌어낸 힘은 K교사의 열정과 뚝심, 그리고 높은 전문성과 연극 단체들로부터 받고 있는 신망이었다. 솔직히 담당장학사, 장학관이 한 일은 투덜거리면서 문서 작성하고 결재낸 것 밖에 없다. 심지어 그 문서조차 K교사가 거의 다 작성해주다시피 했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는 크게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 관료들은 이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공로자인 K교사를 무시했으며, 배제하고 투명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가 6월 22일 선고공판에 곽노현 교육감 사건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고 국회의 개원이 늦어지고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가 만만치 않아 7월 10일에 신임 대법관 임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렇다면 사실상 7월 28일 이전까지 선고나기는 어려운 상황이니 적어도 한달 이상은 곽노현 교육감을 모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담당 관료들의 태도가 다시 바뀌었다. 2학기에 추경예산을 잡아서 학교폭력 토론연극 사업을 130개 학교로 확대하겠다고 호언했다. 이 사업의 만족도가 75%가 넘는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K교사를 칙사대접을 하며 갑자기 친한척들을 하며 알랑거렸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7월 18일에 있을 학교폭력 토론연극 평가회 및 시연회를 위해 연습하고 있던 극단에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걸어 다른 팀이 공연하게 되었으니 그만두라고 했다. 이들은 마치 극단이 자기들 전화에 따라 공연 준비를 했다 말았다 하는 노예로 여기는 것 같았다. K교사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못하게 된 원한을(장학사, 장학관들은 교사를 껌으로 안다. 껌 앞에서 굽신 거렸으니 스트레스 깨나 받았을 것이다), 극단 관계자들에게 퍼부은 것이다.

그러더니 이들의 태도가 또 바뀌었다. 원래 7월 18일에는 상반기중 진행된 이 사업을 망라하고 평가하는 자료집이 배포될 예정이었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교육관료들과 관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처음에 이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K교사에게 행사 진행과 사회를 의뢰했다. 그리고 자료집에는 이 사업의 취지와 의의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를 정리한 K교사의 발제문, 그리고 이 사업의 효과를 통계적으로 검증한 나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담당장학사가 K교사의 발제문과 나의 논문을 자료집에서 삭제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18일 행사의 진행도 K교사에서 S장학관으로 바뀌었다. 자기들이 다 해먹고, 이 사업에서 K교사가 기여했다는 흔적을 지우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이 사업을 곽노현의 사업이 아니라 이주호의 사업으로 슬그머니 옮겨가겠다는 뜻이리라(이주호도 요즘 곽노현 따라하느라 열심히 연극마니아 행세를 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이제 7월 27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날 선고공판이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늦어도 8월9일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다시 배신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자면 이 사업이 곽노현표 사업이 아니라 이주호표 사업인것처럼 전향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곽교육감의 측근으로 보이는, 그리고 실제 이 사업을 추진할 것을 곽교육감으로부터 직접 지시받은 K교사가 적극개입한 흔적이 남아서는 안된다. 철저히 자기들끼리 한 일로 조작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교과부 특교예산 받아 한 일로 조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K교사의 흔적도 지우려는 마당에 곽교육감 진영의 주요 논객으로 알려진 내 논문까지 자료집에 실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못했으리라. 그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면서 논문을 삭제한 그들의 본심이리라. 심지어 그들은 내 논문을 삭제하면 교육감에게 직접 갖다 드리겠다는 말을 듣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럼 그래 보시라. 하지만 논문은 삭제한다."라고 대답했다. 이건 이미 교육감을 배신하기로 미리 모의하고 각오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태도일 것이다.

이에 나는 K교사와 함께 7월 18일에 있을 최종 발표회 및 평가회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두 사람이 불참하면 숱한 교육관료와 관계자들 앞에서 왜 학교폭력을 교육연극으로 풀어보려 했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어쩔수 없다.

 물론 이후 펼쳐질 간담회에도, 그리고 만찬에도 불참할 것이다. 사실 이 만찬 자리는 K교사가 교육감에게 수고한 극단 관계자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해서 만들어진 자리다. 하지만 불참하겠다고 한다. 모욕과 노골적인 인격말살, 흔적지우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인 것이다. 그날 이 프로그램을 한껏 자랑하고 싶어하는 교육감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의 자존이 손상받은 상태에서는 교육감도 제대로 모실수가 없다. 교육감보다는 나의 존엄이 먼저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언한다. 8월중 선고공판 일정표에 곽교육감 사건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확인되면 이들의 태도가 또 바뀔 것임을. 이들은 다시 갑자기 친한척 하고, 알랑거리고, 뭔가 혁신적인 생각 있는척 할것이다. 그렇게 되면 9월 인사를 곽교육감이 하게되니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주의자들. 칼자루가 남아 있을때 이런 것들은 싹 쓸어버려야 한다. 실제로 작년 12월 17일 일명 라벨지 사건을 통해 충성스런 관료와 기회주의자가 가려졌고, 그 결과 2012년의 비교적 튼튼한 집행라인이 갖춰질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시계추 같은 무리들이 마각을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관료들의 속성상 장학관, 장학사 혼자서 이런 짓을 획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그 윗선의 누군가일 것이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이대영 부교육감이랑 일선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도 그래서 몹시 찜찜하다. 여튼 결론은 나는 몹시 화가났고, K교사는 역사적인 큰 공로를 도둑맞게 생겼다는 것이며, 어차피 우리는 곽노현 교육감과 운명을 같이 할 사람들로 분류되었을 터이니,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교육감을 우습게 보고 말기암 환자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개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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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관련 조례만 나오면 결사 저지하는 교육과학기술부는 인권탄압부인가?

7월 11일 곽노현 서울교육감의 심야의 폭풍 트윗은 교육을 극우적인 이념과 일부 특권층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이 정권과, 이 정권이 임명한 교과부장관의 오만한 망동에 대한 나비의 울부짖음이었다.

우선 곽교육감의 폭풍트윗들을 한 번 읽어 보자.

"학생인권옹호관처우조례가 시의회를 통과하기 무섭게 교과부가 저더러 재의요구를 하라고 하네요. 100% 재의결이 확실하지만 학생인권옹호관 임명을 최대한 늦춰보자는 거지요. 아님 말고 식의 꽃놀이패를 즐기는 듯한 못된 심보, 어찌할까요?"
 "시대의 요구를 꼼수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치명적 착각이다. 인권의 행진을 명령으로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과대망상이다. 착각과 망상은 뻘짓을 부른다. 학생인권조례를 제소하더니 이제 학생인권옹호관도 안된단다. 정신 차려라." "안타깝다. 애처롭다. 금년도 인권훼방꾼의 불명예는 따논 당상이다. 도대체 뭘 위해 누굴 위해 학생인권옹호관을 저주하고 가로막나? 스스로 뭘 하는지 개념이 없다. 시대정신과 싸우다 맛이 갔다. 교육은 간데없고 정치만 나뒹군다. 통재!" 
"학생인권조례를 시비 걸고 학생인권옹호관을 가로막는 게 유엔아동인권조약 비준국의 교과부장관이 할 일인가요? 아이들에게 엎드려뻗쳐 시켜야 국격이 올라간다고 정녕 믿는 건가요? 시대착오적 해외토픽감 조치에 고개를 들 수 없네요." 
"교육기본법상 공교육당국과 학교는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법적 의무가 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옹호관을 두는 건 설령 학생인권조례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문제 삼을 수 없지요. 학생인권옹호관을 시비 걸면 법위반입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듯이 학생인권조례의 발목을 잡고 비틀어도 학생인권시대는 옵니다. 아니, 이미 와있습니다. 아이들의 열망속에, 어른들의 각성속에, 시의회의 조례속에 이미 용솟음칩니다. 교과부가 용을 써도 못 막습니다."

이 트윗들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학생인권, 시의회, 조례, 교과부, 재의다. 즉 이 폭풍 트윗들을 하나의 트윗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시의회가 학생인권을 증진시키는 조례를 통과시키면 교과부는 계속 여기에 대해 재의요청을 한다. 이런 시대를 거스르는 나쁜 놈들, 국격 돋게 만든다" 

이건 우리나라의 지방자치, 교육자치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긴 법령의 빈틈을 교과부가 마구 남용하기 때문에 발생한 사태다. 흔히 알고 있는 것 처럼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시의회와 시장, 그리고 교육감이 고도의 자율권을 가지고 주민자치를 실행하는 그런 제도가 아니다. 원래 그럴 의도는 있었으나 여전히 중앙집권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중앙부처의 장관이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괴롭힐 수 있는 장치를 마치 고려시대때의 기인제도처럼 슬그머니 남겨 놓았었다.

다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행안부 장관과 교과부 장관이 이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지방자치단체의 결정에 간섭을 자제했기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장관들은 이 장치를 이용해서 지방자치단체를 괴롭히는것이 거의 취미생활이 되었다. 특히 2010년 지방선거 참패 이후 자치단체장들을 내어준 것을 이 낡은 제도를 이용해서 벌충하려고 꼼수들을 쓰고 있다.

문제가 되는 이 낡은 잔재는 교육자치법 제 28조다.

제28조(시·도의회 등의 의결에 대한 재의와 제소) ①교육감은 교육·학예에 관한 시·도의회의 의결이 법령에 위반되거나 공익을 현저히 저해한다고 판단될 때에는 그 의결사항을 이송받은 날부터 20일 이내에 이유를 붙여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②제1항의 규정에 따른 재의요구가 있을 때에는 재의요구를 받은 시·도의회는 재의에 붙이고 시·도의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시·도의회 출석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전과 같은 의결을 하면 그 의결사항은 확정된다. <개정 2010.2.26>③제2항의 규정에 따라 재의결된 사항이 법령에 위반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교육감은 재의결된 날부터 20일 이내에 대법원에 제소할 수 있다.

이걸 살펴보면 원래는 시도의회와 교육감의 권력균형과 견제가 이 법의 취지임을 알 수 있다. 즉 시도의회를 국회, 교육감을 대통령으로 보고, 재의요구를 법률안 거부권 행사로 보면 된다. 그리고 거부권을 행사해도 2/3가 찬성한 조례는 확정된다는 점 역시 같고, 이 경우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기관쟁의를 신청하는 것 처럼 교육감이 대법원에 제소하는 것도 같다.
즉 이는 시도의회의 다수당의 전횡을 교육감이 견제하도록 하는 장치다. 그 까닭은 헌법 31조 4항(④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에 따라 대의기구인 의회라 하더라도 교육에 관한한은 함부로 좌지우지 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꼬리가 붙는다.

①....교육감이 교육과학기술부장관으로부터 재의요구를 하도록 요청받은 경우에는 시·도의회에 재의를 요구하여야 한다. ④교육과학기술부장관은 재의결된 사항이 법령에 위반된다고 판단됨에도 해당교육감이 소를 제기하지 않은 때에는 해당교육감에게 제소를 지시하거나 직접 제소할 수 있다. <개정 2008.2.29>

이 꼬리도 사실은 교육감 뿐 아니라 교과부 장관 역시 국가수준에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지킬 권리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감이 미처 찾지 못한 독소조항이 조례로 통과될 경우 이를 고지하는 수준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방자치 정신에 맞다. 따라서 "재의를 요청하여야 한다."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이 법에는 교육감은 요청받으면 반드시 재의를 요구하게 되어 있으니 이건 말만 요청이지 사실상 명령이다. 이렇게 되면 시도의회는 교육감 뿐 아니라 교과부장관의 견제까지 받게된다. 게다가 재의요구의 사유로 "조례가 법령을 위반할 경우"를 든다는 것이 문제다. 법령에는 법률과 명령이 들어가는데, 교과부장관은 명령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교과부장관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조례가 어느 시도에서 제정되면, 그 조례가 위반이 되겠끔 명령을 개정한 뒤 법령위반을 이유로 들어가며 재의를 강제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주호 장관은 실제로 이 짓을 했다. 학생인권조례가 마음에 들지 않자 실제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한 뒤 학생인권조례가 법령위반이라며 대법원에 제소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를 무력화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장관이 어거지로 시행령을 개정한 사례가 세계 어느나라에 또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더군다나 중앙정부가 지방자치정부의 조례들 중 하필이면 학생 인권, 교권과 관련된 부분만 콕콕 찝어서 무력화시키려고 나오는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또 있을까 싶다. 있다면 독재국가나 공산국가의 국가원수가 국회에서 민주적이고 인권적인 법률을 제정하지 못하게 하는 책동 정도나 있을까?

중앙정부의 장관에게 시도의회 조례에 대한 재의요구권이 남아 있는 것은 지방자치단체를 통제하고 길들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자칫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훼손하거나 헌법정신을 벗어날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도의회가 "타 지역 학생들이 이 지역 학교에서 수학하고자 할 경우에는 이주 여부와 관계 없이 반드시 전입 고사를 쳐서 평균 우 이상의 학업성취도를 입증하여야 한다. 또한 해마다 실시하는 학업성취도 검사에서 평균 미 이하의 학생들은 이주여부와 관계 없이 이 지역 학교에서 수학할수 없다" 이 따위 조례를 만들었다면, 그리고 교육감이 일제고사 평균점수를 높이기 위해 이런 조례를 공표하였다면 이때는 교과부 장관이 나서서 강력하게 재의 요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례는 반 헌법적이고 반 인권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의 존재 목적은 국민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인권을 증진시키자고 만들어진 조례를, 즉 헌법정신을 더 세세하고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례를, 그것도 국제법적 지위를 가진 협약에 근거한 조례를,  단지 자기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혹은 자기들과 친한 수구적인 단체, 교장들의 이익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매우 사소한 법령상의 문제를(그것도 명확히 확인되지도 않은)들어 재의를 요구하고, 법원에 제소한다면 이는 교과부 장관에게 부과된 권한과 책무를 한참 넘어선 횡포다. 아니 넘어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거스르는 횡포다. 이는 직권남용이며, 헌법을 거스른다는 의미에서 거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오른쪽으로 편향된 이념집단과 광적인 속성을 가진 종교집단, 특정한 이익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금 이 정권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이를 명심해야 한다. 저들은 이 세상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기계로 여기겠지만, 실제 이 세상은 복잡계이다. 그리고 복잡계 현상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비유로 사용되고 있는 "브라질 나비의 날개짓이 북경에 토네이도를 일으킨다"는 비유를 심각하게 되새겨야 한다.


서울시교육청과 대한민국 정부의 거리는 브라질과 베이징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고, 곽노현 교육감의 날개짓은 브라질의 나비의 날개짓 보다 훨씬 강렬하니, 그 결과는 토네이도보다도 훨씬 강력한 태풍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 폭풍트윗은 정말로 폭풍이 되어 그들을 덮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대정신을 거스르고 있으며, 곽교육감의 트윗은 바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침몰시킬 바람은 곽노현 개인의 바람이 아니라 정의와 인권이라는 이 시대의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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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3.

곽노현이 한국교육을 폄하했다는 동아일보의 학습부진

오랜만에 곽노현 교육감이 동아일보 1면을 장식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곽 대한민국 교육을 폄하하다"(동아일보 기사 )라는 내용의 흑색기사다. 문장어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거의 사춘기 감상문같은 문장으로 씌여진 이 기사를 신문기사다운 문장으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7월 12일 오전 10시 서울시교육청 9층 회의실에서 열린 로스 터너(호주국립연구원 출신 피사 출제 전문가)에서 곽노현 교육감은 다음과 같이 한국 교육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 “PISA 1등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없는 이유를 오바마는 몰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은 분이 성적이 높은 한국의 비결을 궁금해하지만 그 8할은 강요된 누적학습, 사교육비로 뒷받침된 학습시간의 결과라는 게 현실이다.”

여기에 대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김동석 대변인은 “사교육의 영향이 없을 수 없겠지만 국민들의 뜨거운 교육열과 현장 교사들의 노력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해 이뤄낸 성과를 너무 폄하했다”고 지적했다. 박경미 교수 역시 “PISA는 실생활에 적용하는 문제를 출제하므로 다른 시험과 달리 학원교육이나 선행학습과는 비교적 무관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세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자리에 나온 기자들이 "OECD새로운 교육방향은 협동(오마이뉴스 기사)", "한국 피사 상위권에 안주해서는 안되(연합뉴스 기사)"라는 내용의 기사를 쓴 걸 보면 동아일보 기자는 시각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시간이나 진행된 강연 내용은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직 곽노현 교육감 깔 거리만 찾고, 그걸 또 1면에 때리는 것을 보니 말이다.


자, 그럼 이 기사가 어째서 엉터리인지 한번 살펴 보자. 우선 피사 1등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없다는 류의 발언은 곽노현 교육감이 처음이 아니다. 그건 2003년 이후 계속 되어온 발언이다. PISA는 점수와 순위만 발표하지 않는다. 한번 나올때마다 300쪽 짜리 보고서 대여섯권 분량의 보고서가 나온다. 그런데 기자들은 1권의 첫 50페이지만 보고 만다. 하지만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 이후 수백페이지를 본다.

에컨대 2009년에 발표된 피사2006 분석자료에는 성취도 점수를 학습시간으로 나눈 학습효율과지수라는 것이 나온다. 즉 공부하는 단위시간당 학업성취도인 것이다.  핀란드는 성취도 점수를 학습시간으로 나누어도 여전히 1위인데, 우리나라는 학습시간으로 나눈 순간 30개국 중 24위로 뚝 떨어진다. 심지어 같은 동아시아권인 일본조차 학습시간으로 나누면 순위가 올라가는데 말이다. 이 그래프를 보면 이성이 박힌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의 높은 학업성취도는 결국 공부를 유난히 많이해서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곽노현교육감은 이 분석자료를 보고 받고 하는 말이다.


금년에 나온 PISA2009 분석자료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데, 읽기 영역에서 읽기를 즐기는 정도와 성취도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가 높으면 공부를 좋아하면서 또한 성취도도 높다는 뜻이다. 즉 배움이 행복이 된다는 뜻이다. 통계적으로 설명하면 학업성취도 중 학생의 흥미(선호)가 얼마나 많이 설명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높은 성취도에도 불구하고 이 성취도에 대한 학생의 선호, 흥미의 설명력은 매우 빈약하여, 역시 평균 이하로 쳐져있다.




이 두 결과를 결합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1) 한국 학생들은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이지만, 학습시간이 유독 길어서 나오는 현상이다.
2) 또한 한국 학생들의 높은 학업성취도에서 공부에 대한 선호, 즐김은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3) 따라서 한국 학생들은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오랜 시간 하고 있으며, 이게 결국 높은 성취도의 원인이 된다.
4) 물론 이것만이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겟지만, PISA 점수가 높다고 해서 한국교육이 훌륭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버다.

동아일보에게는 유감스럽지만 이런 결론은 유럽쪽에서는 이미 확정된 내용이다. 독일에서 한국교육의 기적을 분석한다며 보낸 조사관을 보냈다가 배울거 없다며 철수한 경우도 있고, 핀란드 교육부 장관이 한국과 비교되는 것을 매우 불쾌히 여긴 경우도 있다.


그러니 곽노현 교육감의 발언은 이미 세계 교육학계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분석을 인용한 것이며, 기껏해야 피사 1위라고는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는 수준의 진단을 한 것이다. 이건 폄하가 아니라 주의이며 비판이다. 그걸 문제삼아서는 안된다. 주의와 비판을 했으니 교육을 바꾸자고 교육감 나오지 않았겠는가? 한국교육 이대로 훌륭하고 문제없다라고 생각했다면 뭐하러 교육혁신 하겠다며 교육감에 나왔겠는가?


진짜 한국교육을 폄하하는 것은 이런 비판과 주의가 아니라 한국교육 글러먹었으니 애들 딴나라에서 가르치자라고 주장한다거나, 한국교육 글러먹었으니 다른나라 교육제도 빨리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짓은 바로 곽노현 교육감이 아니라 동아일보 자기들의 장기였다. 여기 한국 교육을 폄하한 진정한 사례들을 보여주겠다. 역시 한국교육 폄하에는 동아일보가 갑이었다.


동아일보 시론 "해외로 떠나는 아이들"(기사 보기)
동아일보 사설 "나도 미국 소도시로 이주하고 싶다"(기사 보기)

이 시론과 사설이 나온 2007년에도 우리나라 PISA성적은 여전히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명색이 정통일간지 주간이라는 자가 사설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리나라 교육을 부러워하고 있는 미국으로 애들을 보내고 싶다, 교육이 구리다라고 망발을 했다. 이게 바로 한국교육을 폄하하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곽노현 교육감이 객관적인 팩트를 가지고 피사1,2위의 환상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것을 대한민국 교육을 폄하했다고 호들갑 떨 자격이 없다. 그래도 정 그렇게 하려면 저 사설과 시론 쓴 사람들을 신문 1면에 소환하여 공개 사과시켜야 할 것이다.

참고로 저 기사 마지막에 인용한 박경미 교수의 발언도 왜곡이다. 박경미 교수의 실제 발언은 다음과 같다. 이건 내가 그날 박경미 교수와 마주앉아서 같이 점심식사까지 했으니 100% 정확하다.   “PISA는 실생활에 적용하는 문제를 출제하므로 TIMSS등 다른 시험과 달리 학원교육이나 선행학습과는 비교적 무관한 결과가 나올것이라는 것이 세계 전문가들의 예측이었으나, 실제로는 핀란드가 부상한 것 외에는 다른 시험과 동일한 결과가 나와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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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1.

곽노현이 물러나면 교육혁신은 교육혼란이 된다는 헛소리

어제 곽노현 교육감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교육감은 학교폭력을 다룬 연극 '니들 부모의 얼굴이 보고싶다'를 관람하고, 공연이 끝난 뒤 윤호진 교수(영웅, 명성황후 감독), 손숙 전 장관 등과 환담하고 관객들과 대화했다. 이때 취임 2주년 기자회견때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아마 기자들의 생각은 대법원 판결과 함께 직을 상실할 것인데, 앞일을 물어봐서 뭐하겠느냐 정도였을 것이다. 심지어 조중동과 보수언론들은 직을 상실하고 나면 곽노현표 교육개혁은 고스란히 정리해야 할 폐품이 되니, 결국 일을 벌리면 오히려 혼란만 준비하는 것이라고 거품을 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노현 교육감은 임기가 2년이 남았건 두달이 남았건, 교육개혁의 씨앗을 심는 일을 계속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대해 여전히 은인자중하라는 요구들이 심지어는 진보진영에서조차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것을 망각한 처사다.

교육의 작은 개혁 하나하나의 결실은 최소한 한세대, 보통은 두세대는 지나야 그 결과를 볼수 있다. 그러니 그 긴 시간을 염두에 둔다면 임기가 두달이 남았건 2년이 남았건 어차피 자기가 뿌린 씨앗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케르센슈타이너, 에르끼 아호 같은 전설적인 교육개혁가들은 교육정책을 관장하는 위치에 10년 이상 있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개혁을 펼칠수 있었다. 2년과 2개월을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니 잔여임기 같은 생각 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게 유일하게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더구나 모든 진보교육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존 듀이 사상의 핵심도 바로 "현재를 위한 과거, 현재를 저당잡지 않는 미래"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지금을 즐기라(카르페 디엠)'고 말한 것은 결코 쾌락주의나 향락주의적 의미가 아니다. 훗날을 대비해 지금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바로 교육개혁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아이들이 지금을 행복하게 보내는 학교.

그런데 이런 교육을 꿈꾼다고 말하면서 2년이 될지 2개월이 될지 모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라? 이것이야 말로 그 동안 우리 학생들을 괴롭혀온 입시이데올로기와 같은 논리 아닌가? 진보진영의 주요 논객들이 사실상 입시교육의 승리자인 경우가 많아서 빚어지는 현상인가?

곽노현표 개혁은 그의 퇴진과 함께 고스란히 교육혼란이 될 것이라는 조중동의 주장은 더 한심스럽다. 그들은 재임기간 내내 교육과정을 걸레로 만들고 마지막 가는날까지 도종환 시 스캔들을 일으키고, 3주만에 교과서를 다 고쳐쓰라는 만행을 저지르는 이주호 교과부 장관의 혼란유발 정책이나 비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의 이 엉뚱한 주장은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 1)곽노현의 정책은 영 틀렸고, 엉뚱한 것이라 교육감이 바뀌면 바로 폐기된다 2)곽노현의 정책은 곽노현 혼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건 그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곽노현의 교육정책은 한마디로 학생들의 행복이 우선이 되고, 이 행복의 격차,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조중동 기자들은 지금 당장 자기들의 여신인 박근혜의 교육공약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입시위주 교육을 창의적이고 행복한 교육으로 어쩌구 하는 미사여구가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즉 곽노현의 교육정책은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지 특정한 개인과 집단의 편협한 이념이 아니다.(그건 이주호의 시장주의, 경쟁주의에게나 돌려야 하는 말이다). 또 조중동 기자들은 주사파라 그런지 몰라도 항상 어떤 수령님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한다고 여기지만, 곽노현의 교육정책은 엄밀히 말하면 곽노현표 교육정책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망라되어 곽노현을 통해 관철되는 것일 뿐이다.

최근 곽노현은 중요한 교육정책을 반드시 시장, 구청장, 시의회, 경찰청장 등과 함께 발표했다. 즉, 이건 서울이 시민이 합의한 교육정책인 것이다. 이게 말로만 떠들던 거버넌스라는 것이다. 심지어 장학관, 장학사들도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으로 많은 개혁안들을 제출하였다. 따라서 지금 발표되고 있는 서울시교육청의 정책은 서울시민의 교육정책이지 곽노현의 정책이 아니다. 그런데 보수언론들은 누구를 대신해서 무슨 자격으로 해라 마라 하는가? 이 정책들은 심지어 곽노현이 은인자중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시민의 이름으로 남은 임기가 얼마가 되건간에 해내라고 요구되어 온 것들이다.

따라서 곽노현 교육감의 잔여임기는 곽노현표 교육개혁의 지속여부에 전혀 변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 이주호가 이대영을 꽂아 넣어서 어거지로 되돌리려고 해도 끄떡도 없이 교육감 없이 추진되었던 교육개혁이었다. 시장이 지지하고, 시의회가 지지하고, 시민이 지지하고, 교사가 지지하고, 교육전문직이 지지하는데 부교육감 혼자서 뭘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이 교육개혁은 심지어 박근혜마저 흉내를 내어야 하는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그러니 감옥에 있는 공정택을 꺼내다가 교육감을 시켜도 손톱만큼의 흠집도 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혼란의 원인 제공자는 이 시대정신을 거스르려는 한줌의 보수주의자들일 것이다.

조중동과 보수언론은 눈을 들어 세상을 보기 바란다. 이미 자신들은 심지어 새누리당에서조차 시대에 뒤떨어진 수꼴로 전락하고 있음을. 심지어 새누리당에서조차 시장과 경쟁대신 복지와 협력을 말하고 있음을.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2012. 7. 10.

진보교육감 취임 2주년을 기념하며 드리는 말씀

미디어 오늘에도 기고한 글인데, 여기에도 남겨 둡니다.

 혁신을 넘어 진보를 향하라 

어느덧  6개  시도에서 이른바 진보교육감이 탄생한지 2년이 지났다. 경기도는 벌써 3년이다. 이들 진보교육감들  덕분에 교육 혁신이라는 말은 아주 친근한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6개 시도의 교육이 꽤 활발하게 바뀌기도 했다. 얼른 눈으로 보아도 다른 지역보다 이들 지역의 학교가 더 다채롭고 활기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제는 새롭게 바꾼다는 혁신을 넘어 교육의 새로운 의미를 세우고, 교육이 학생과 나아가 사회의 전반적인 가능성과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됐다. 즉 혁신을 넘어 진보로 향해야 한다.

이들은 스스로 선언했듯이 진보교육감이지 혁신교육감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혁신과 진보의 연결 지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다만 새롭다는 것이 곧 진보는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다양화와 학부모 선택권 강화라는 방향성을 내건 경우가 더욱 그렇다. 획일성을 넘어 다양성으로라는 구호는 진보는 커녕 혁신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건 이주호 교과부장관이 늘 외치던 고교 평준화 해체와 고교 다양화와 사실상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선택권 강화는 누가 입시에 실적을 더 잘 올리는 교사이며 어느 학교가 입시 실적이 더 좋은가를 놓고 선택하게 만들고자 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과 강하게 공명한다. 

다양성과 선택의 원리는 철저히 시장주의적인 원리다. 이는 기본적으로 교사들은 그냥 두면 정체되어버리기 때문에 자극이 필요하다는 불신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각 학교에게 자율권의 미명하에 경쟁을 붙이자는 것이다. 학교의 자율성은 현 상황에서는 교사의 자율성이 아니라 교장의 자율성이며, 교장은 학부모들 중 유력한 학부모들의 요구에 굴복하게 되어 있다. 그 요구는 결국 입시교육 강화일 것이다. 따라서 다양성은 입시에 유리하기 위한 꼼수의 다양성이 되며, 학부모 선택권은 학교와 교사들이 이 꼼수와 무한정한 노동연장을 놓고 경쟁하라는 강한 압력이 된다. 백번을 시물레이션 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 혁신학교가 입시에 유리하도록 하겠다는 등의 엉뚱한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가 뻔히 보이며 진보는커녕 혁신도 되지 못할 다양성과 선택권의 유혹에 진보라는 사람들이 자꾸 휘둘리는 것은 이렇게라도 해서 빈곤계층과 취약지역의 진학율이 높아지면 사회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겠느냐는 미련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나는 신화가 그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이 미련의 뿌리는 80년대 운동가요 중 “못 배워 땅만 파는, 우리 부모 원망 하랴?” 라는 가사에서도 드러나듯 그 뿌리가 깊다.


여기서는 배움을 경제적 윤택이나 사회적 지위 향상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 그리고 아카데믹한 직업을 농사보다 우러러보는 관점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서울대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른 일각에서는 서울대학 들어가는 것이 갈수록 강남권과 특목고 출신이기 유리해진다면서 항의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진보적인 관점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나게 하는 것은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건 오히려 기존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개천에서 용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 나라는 1894년, 1910년, 1945년, 1950년, 1998년 등 거의 매 세대마다 나라가 초토화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서 전국이 개천이 되고, 용이 모조리 죽어버린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외적인 개천출신 용이 몇 마리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매우 드물고, 다시 와서도 안 되며, 그런 시대에도 허황된 용꿈을 꾸고 쓰러져간 무수한 미꾸라지들이 그림자 아래 감춰져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나라에서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는 매우 냉정하다. 그 중 블라우와 덩컨의 경로 모형, 그리고 콜맨 보고서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결과들은 한 마디로 어떤 학생이 장차 성공하느냐 마느냐에서 교육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학업성취도에서조차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교사나 학교의 노력보다 더 영향력이 강했다. 즉 부모가 용이면 자식도 용이고, 부모가 미꾸라지면 자식도 미꾸라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교육감이 할 수 있는게 대체 무엇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교육 혁신을 넘어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자면서 개천에서 용 나게도 안한다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진보교육감은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여기서 교육혁신과 진보가 만난다. 즉 그저 새롭고 다양한 것이 아니라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는 다양함의 세례를 일선 학교에 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참교육의 평등이다. 입시교육의 평등이나 허황된 개천에서 용나기 신화가 아니라 저소득층 자녀들이 부모들의 수준에 제한되지 않고, 부모세대 이상의 더 나아가 부유한 가정 이상의 덕성과 지성과 감수성, 그리고 신체관리 능력을 갖추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부모는 어쩌다 생긴 여가시간을 술, 담배, 막장 드라마에 탕진하는 삶을 살지라도, 그 자녀까지 그 수준에서 헤매게 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 차이를 학교가, 공교육이 메꿔 주자는 것이다. 이건 교사가,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더 높은 성적을 올리게 하면서 교육 불평등을 해소 할 수 없으며, 그건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덕성, 지성, 감수성을 함양하도록 할 수는 있다. 이렇게 덕성, 지성, 감수성이 높아진 학생이라면 스스로 결정한 어떤 목적이 있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할 경우 성적은 구태여 닦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라간다. 이렇게 저소득층의 자녀들이 부모의 수준을 넘어 지배층에게 결코 뒤질 것이 없는 지성과 덕성을 갖추게 된다면, 그래서 그 사회가 이런 지성과 덕성을 갖춘 피지배층으로 가득하다면 그 사회는 강력한 평등에의 요구에 직면할 수박에 없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듯이 국민들이 의문을 품는 사회에서는 어떤 독재와 억압도 성립될 수 없다. “어째서 일은 우리가 하는데 기업주가 모든 이윤을 다 가져가는가?”라며 의문을 품는 노동자, “어째서 한번도 만난적도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군인, “어째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가 아니라 어른들 마음대로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학생들이 늘어날수록 그 사회에는 어떤 차별도 권위주의도 발붙이기 어렵게 된다. “어째서 같은 돈 내고 흑인은 자리에 앉을수 없는가?”라는 로자 파크스의 의문 하나가 미국의 거대한 민권운동을 일으켰음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교육이 불평등 해소에 기여한다면, 즉 사회 진보에 기여한다면 이는 교육을 통해 빈곤층의 자녀에게 더 높은 소득을 올릴 능력을 길러줌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교육 평등이 사회 평등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하게 하는 것에 있지, 결코 교육받으면 더 잘살게 되는데 있지 않다. 


진보적인 교육운동이란 지식인으로서의 교사들이 끊임없이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속에서 사회적 평등의 열망과 조건을 개척하는 것이지 기존의 잘못된 제도와 체제 하에서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보교육감이 실천해야 하는 교육 불평등 해소의 방안은 명백하다. 그것은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능력과 미적 감수성, 그리고 민주적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교육을 혁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 이러한 수준을 높이는 교육의 혜택을 취약계층 자녀들부터 우선 제공하는 것이다. 서울시 교육청의 문예체 진흥 교육 방안은 이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교육감의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사들이 그만한 수준에 먼저 도달해야 하고 그만한 의지와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먼저 교사들부터 일으켜 세워야 한다. 교사들의 문화를 바꾸어서 교사들이 덕성, 지성, 감수성으로 충만한 집단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사들이 모였을 때 연예가 중계나 자식 이야기나 하지 말고 지성인다운, 문화인다운 대화를 나누고, 교무실의 풍토가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무궁한 지적, 도덕적, 문화적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교육혁신, 그리고 진보교육의 출발점이다. 교원업무 정상화가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교육 받느라고 바쁜 상류층 자녀들은 맘대로 하라고 두자. 그걸 부러워하거나 그것 때문에 경쟁에서 뒤쳐진다고 조바심 내지 말자.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면 참교육을 저소득층이 더 많이 받게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서울시교육청이 적극 지원하고 있는 교사학습동아리, 경기도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각종 교사학습모임의 활성화는 희망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소득층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의 교사들부터 이렇게 바뀌어나가게 한다면, 또 이런 훌륭한 교사들이 저소득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선호하도록 이끌어낸다면, 이것이 바로 교육평등이다. 


 그 결과는 용이 되어 개천을 빠져나가려는 미꾸라지를 기르는 것이 아니다. 개천의 가치를 인식하고 개천을 더 살기 좋게 만들려는 깨어있는 미꾸라지들, 용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하기 위해 떨쳐 일어서는 미꾸라지들을 기르는 것이다. 이제 진보교육감들은 단지 덜 부패하고, 덜 권위적인 것을 넘어 자신들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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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오늘 원문: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658

2012. 7. 9.

교육운동사를 돌아보며

우연히 교육운동사 기록물을 열람했습니다. 매우 소중한 기억들이고 귀중한 발걸음 들이었습니다. 제가 매우 가까이 지내는 한 선배가 있는데, 그 기록의 순간 순간마다 이름이 나오더군요. 82년부터 28년간 교직생활을 했는데 그 중 두번에 걸쳐 8년이 해직기간이라 나하고 호봉이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해직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트라우마가 쌓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트라우마가 없으니 보상심리도 없고, 보상심리가 없으니 과거에 매달리지 않으며, 과거에 매달리지 않으니 발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그래서 "선배들, 당신들의 고초는 알고 있으나, 이제 당신들의 운동은 낡았다."라는 말을 들어도 그 선배들과 자신을 같은 범주로 넣지 않으며, 따라서 성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앞장서서 "이제 89년 세대의 운동관과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고 맞장구를 칩니다. 내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고맙게도 많이 있습니다. 교육운동사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분들이 오히려 더 그렇습니다.

전교조의 1500 동지회... 귀중한 고통을 겪은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댓가로 한때 10만에 육박했던 거대 조직의 의사결정을 사실상 독점했던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합법화 이후에는 더더욱 그것은 현실적인 보상입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2006년 사이 의제를 선점당하고 반대투쟁으로만 일관했던 모습은 이미 그 분들의 운동론이 시대에 뒤떨어져서 더 이상 교육운동을 선도할 수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그 와중에 전교조 지도부와 조합원들은 완전히 딴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분들은 다른 조합대중들의 또 미가입 교사들의 마음을 얻으려 한 대신 자신들이 공유한 기억 공동체 속으로 달려갔습니다.

2007년 이후에는 그나마 반대투쟁도 안했습니다. 반대투쟁으로 일관하는 것은 문제지만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것은 오히려 선도적으로 의제를 던지고 교육개혁을 주도하라는 요구이지 반대투쟁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2012. 7. 8.

교원노조의 새 비젼: 산별노조에서 전문직 조합으로


이거, 오래 전에 번역했던 글인데, 요즘 갑자기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교조가 이렇게 무력해진 것은, 이미 변화된 상황에 맞는 옷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8년전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어났던 논쟁을 소개합니다. 참고로 캐나다는 전문직조합으로 변신했고, 미국은 여전히 교원노조의 틀을 유지했지만, 그 결과 미국이 훨씬 더 비참해 졌습니다.

교원노조의 새 비전이 필요하다


밥 피터슨 Bob Peterson (2004년 Rethinking School 통권 11권 4호에 수록)
         저의 번역이 의심스러우신 분들은 인터넷에 해당 아티클이 공개되어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NEA위원장 밥 체이스의 정책기조 연설이 끝나자 NEA의 가장 큰 지부인 위스콘신 교원노조 위원장과 집행위원장들이 일제히 체이스를 비난하고 그의 소견을 “섬뜩하다”라고 표현했다.

체이스는 이미 2월 5일에도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새로운 NEA: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원노조 개편”이라는 주제로 연설한 바가있다. 체이스는 NEA는 전통적인 노-사 대립론을 극복하고 공교육에 대한 공동체와 학부모의 관심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학교를 개혁하기 위해 학교재단, 교육청 등과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체이스의 주장중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교원노조가 교사의 질, 그리고 학교의 학습 환경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체이스의 말을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우리는 초점을 넓혀야 한다. 우리는 조합원들의 임금, 혜택, 근로조건, 안전 뿐 아니라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품질에 대해서도 그 만큼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리씽킹 스쿨 11권 3호)

부정적인 반응들

위스콘신 교원노조 간부들의 반응은 그나마 부드러운 편이었다. 2월 20일 밀워키 교원노조의 매디슨, 래신, 그린베이 지부장들과 집행위원장들은 연대하여 체이스에게 그의 연설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그들은 체이스가 노사간의 협동을 고무하고 노조가 조합원 자질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공교육을 파괴하려는 집단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리 조합의 기초가 당신 주장을 조합의 약함을 드러낸 것으로 악용하려는 자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라고 그들은 썼다. 2주 뒤 위스콘신 교원노조위원회는 체이스에게 지부장들의 편지들보다는 부드럽지만 추가로 비판 편지를 보냈다.

체이스는 위스콘신 교원노조에 보낸 답장에서 그는 비판을 환영하며 이런 대화와 소통이 NEA에 도움이 된다고 썼다. “한 마디로 NEA는 더 이상 교육개혁 논쟁 바깥에 국외자로 버티고 있을 수 없다.” 이 서신교환은 교원노조운동의 미래에 대해 필요한 논쟁의 국면이 무엇인지 드러내었다. 이 편지들은 또한 여전히 많은 교원노조 간부들의 마음에 강하게 자리 잡은 낡은 노동조합주의의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논쟁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원노조가 다루어야 할 수 많은 교육 쟁점이 있고, 각각의 쟁점에는 일련의 잠재적 응답들이 있다. NEA의 220만 조합원들, 그리고 AFT의 90만 조합원들은 교사 파업에서부터 교원노조의 교육개혁 참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다. 같은 노조 내에서도 지역, 혹은 주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더욱이 국가차원의 교육정책이 반포될 경우에도 그것의 이행은 지역과 주 수준에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원노조가 직면한 근본적인 질문은 교사가 새로운 교원노조운동의 비전하에 단결하고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이끌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체이스는 교원노조는 교사, 학생, 학교의 향상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위스콘신 등의 교원노조 위원장들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데, 이들은 현재 교원노조의 실천들 그리고 임금, 근로조건과 같은 이른바 빵과 버터 쟁점을 완고히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교원노조가 학교개혁 참여를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여기서더 나가야 한다는 세 번째 관점도 있다. 이 관점은 교원노조가 지역사회 이익을 위해 협동하고 사회정의와 형평성 같은 쟁점을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나는 이 세 가지 교원노조관을 "산별노조주의" "전문직조합주의" 그리고 "사회정의조합주의"로 일별하고자 한다. 물론 이분류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들은 서로 중첩될 뿐 아니라 산별노조 조합원이면서 이 셋 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관점의 스펙트럼에서 바라보는 것은 교원노조운동과 관련한 논쟁을 명료화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산별노조주의

1960~1970년대 초반까지 주도적이었던 오래 된 산별노조주의는 빵과 버터 조합주의로 잘 묘사된다. 1959년 위스콘신주 초등 공교육 종사자 단체교섭법과 함께 교사들의 단체교섭 기회가 증대되었다.

처음에는 AFT가 파업 의지가 더 강했고 대도시 교사들에게 조합주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데 더 성공적이었다. 이는 NEA가 보다 더 전투적인 산별노조 모델을 채택하는 추진력이 되었다. NEA에게 이는 큰 변화를 의미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이 단체의 본부는 교사를 전통적인 노동조합 관점의 노동자로 보려하지 않던 관리자, 행정가들이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AFT와 NEA는 모두 더 높은 임금과 혜택, 연금, 전제적인 교장과 학교재단으로부터 보호 등을 놓고 파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교육구들로 하여금 단체교섭을 하도록 강제하였다(남부는주목할 만한 예외였지만). 두 노동조합은 양적으로 성장하고 힘도 강해졌으며 여러 측면에서 지역 교육청과 광범한 교육정책에 결정에관여하는 “이중의 권력”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관계들은 양립되기 어려웠고, 교원노조와 교육청은 서로를 적대자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원노조들은 교사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우선하였고 학생들에게 무엇이 최고의 이익을 주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었다.

이 모델의 약점은 그것의 비전이 임금, 작업조건, 그리고 일종의 콘체른의 담장을 치는 고용안정성 같은 편협한 업종노조주의를 벗어나지못한다는 것이다. 교육 분야 단체교섭에서 산별노조 모델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교사들은 기계부품을 만들거나 고기를 자르는 것이아니라 광범한 사회적 문화적 요구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친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학습의 질 같은 전문적 관심사는최소화되고 보다 넓은 지역사회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지역사회 이익과의 충돌은 1968년 뉴욕의 Ocean Hill-Brownsville 파업에서 가장 생생하게 나타났다. 뉴욕시 교원노조(UFT)의 치명적인 파업은 알버트 섕커의 지휘하에 흑인 교사들을 포함한 흑인 공동체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갈등의 중심은지역사회가 특히 직원 채용의 문제에서 학교를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생커의 UFT는 뉴욕 중앙정부와의 투쟁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이제는 지역사회가 교사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하고 그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고 말았다. 어쨌든 교원노조가 승리하였고, 지역사회의 학교 통제는 뉴욕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후 몇년 간 계속 학교정책은 대부분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정부와 고도로 중앙집권화 된 교원노조의 협상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는 민간 산업부문의 사용자-노동자 모델을 복제한 것이며 학교의 공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처사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히 교사의 경쟁력에 해당되는 사항들 혹은 상급자에 의해 요구되는 전문성 관련 사항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에 대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왔다. 평가기간 연장과 해고 방지를 통한 조합원의 보호는 이제 최악의 교사들을 퇴출하는 일을 번거롭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교사임용 쟁점을 보면 대부분의 교육구에서 교사들은 학교 교육과정상의 필요, 학교의 교육 철학 등과의 적합성과는 무관하게 상급자에 의해 임용되었다. 세 교원노조 모델이 모두 교사 권리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산별노조모형은 정당한 권리와 교사권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편협한 기득권을 구별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직 조합주의

부분적으로는 앞에서 제시한 산별노조 모형에 대한 응답으로 또 부분적으로는 학교개혁에 대한 강한 압력에 의해 최근 10여년 사이에 일부 교원노조 활동가들 특히 지회 수준 활동가들 사이에서 전문직 조합주의로 전향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 관점은 커치너와 코피치가 설명했듯이 교사를 높은 교수 기준을 지탱하고 노동자와 지방 교육청의 상호의존을 이해하고 있는 전문직으로 간주하는것이다.

이관점은 “그들 vs 우리” 라는 전통적 노동조합의 대립주의를 벗어나 상호관심의 영역에서 작업하기 위한 책임의 공유를 받아들인다.신시내티 교원노조의 톰 무니를 비롯한 AFT의 몇몇 지도자들과 뉴욕의 아담 어반스키 등 NEA 지도자들은 이 흐름의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이 이끄는 지역은 승진 제도 개선, 동료평가와 같은 교육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협상들을 진행해 왔다.

이러한 전문직 접근은 교원노조개혁네트워크(Teacher Union Reform Network)같은 조직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NEA, AFT의 21개 지역 노조 지도자들을 포함하고 자선기금의 지원을 받은 이 그룹은 어떻게 지역 교원노조들이 교육 개혁에서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정기적인 회합을 가져왔다.

TURN은 스스로 "교원노조를 이끌어 이들이 국가의 교육개혁을 추동하고 궁극적으로 미국 어린이들에게 더 높은 학습과 성취를 제공하도록하자...TURN의 국극적인 목표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학교의 높은 수행능력을 수립하고 유지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새로운 교원노조 모형의 창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회정의 조합주의

나는 산별노조 혹은 전문직조합  중 어느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믿는다. 두 모델 모두 인종, 평등, 그리고 학교와 광범한 사회적 문제와의 관계 등의 쟁점을 만족스럽게 다루지 않았다. 사회정의 조합주의는 논쟁을 더 완성도 있게 구성하는 것을돕는다. 이는 산별노조와 전문직조합의 장점을 따왔지만 형평성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기여를 포함시켰다. 이는 교사의 기본적인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교사의 이익은 교사들이 보다 전문적이 되고 사회정의와 관련한 쟁점을 받아들일 때 가능함을 알고 있다.

1994년 29명의 교사 활동가들은 조합 내부 민주주의와 모든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교육개혁, 그리고 지역공동체와의 협력, 형평성과 관련한 보다 넓은 쟁점에 대한 고려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에서 사회정의 조합주의의 밑그림을 제시했다.

그 밑그림은 주장하기를 “개혁은 형평성과 사회정의의 기준에 의해 이끌어져야 하며 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높은 수월성과 기대를 포함한다. 우리로 하여금 조합을 결성하게 하고 경제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게 만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 교직에 입문하게 만든 이상들, 예컨대 아이들을 돕고, 미래를 희망차게 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공교육이 사회의 평등한 기회와 민주주의의 초석이라는 이런 이상들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꿈들은 현재 우리의 학교 혹은 우리의 교원노조의 일상적인 업무를 통해서는 이룰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체이스에 대한 공격

4개 지역 교원노조 위원장들의 체이스 비판 편지는 산별노조의 몇몇 단점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네 위원장들은 주장하기를 교원노조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적격교사의 퇴출을 돕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였다.“조합원들은 우리에게 이익을 증진시켜 달라고 조합비를 납부했다. 우리가 왜 교수의 질이 열악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하는가? 그것은 교원양성 프로그램의 열악함, 학교재단이나 교육청의 정치적인 편의에 의해 자행한 부당한 임용절차 탓 아닌가?”

그들의 관점에는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다. 바로 현실감 결여! 지금 공교육은 위기다. 사방팔방에서 공격과 비판을 받고 있으며 대중의 지지를 계속 잃어가고 있다. 그 존속 여부조차 위험한 지경이다. 민중들에 의한 많은 공격들이 공교육의 이념 그 자체 혹은 교사권리의 조직화를 명백히 반대하고 있다. 그러니 교원노조는 공교육 내에서도 심각한 결점과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물론 우리는 부적당한 교원양성 교육 프로그램이나 엉터리 채용 절차를 비판해야 하겠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교사의권리,교육의 공공성이라는 주문만 읊어대는 것은 교사와 교원노조가 우리 학교의 문제점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없다.

이때 체이스는 다른 접근을 보여주었고 공교육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유연하고 창의적인 실험으로 교원노조를 이끌었다. 이러한 접근은 체이스가 그의 진술들 속에서는 NEA가 기존의 노동조합과 전문직조합의 역할을 모두 할 수 있기 바란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치너와 코피치가 예로 든 전문직조합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네 위원장들은 체이스의 접근을 “이적행위”이며 1930년대 나찌에게 타협한 것과 비슷하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네 위원장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지역교육청과 협력하여 교육의 사사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공격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사실상 교육개혁에 완강히 반대하는 교원노조야 말로 도리어 공교육을 사사하고 교원노조를 포위하려는 대중들의 욕구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면 1991년 두 흑인 침례교 학교들의 채용규칙 개정에 대한 밀워키 교원노조의 반대는 밀워키 전체에 반 교사정서, 반 공교육 정서를 확산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교원노조의 완고함은 또한 미디어에 의해 공교육의 독점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나는 체이스의 연설을 여러 차례 되읽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적행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체이스가 기업공동체에게 “NEA는 학생 성취를 높이기 위해 협력할 것이며 고교 졸업자들이 최소한의 문해능력, 기초 기능에서의 경쟁력,그리고 일할 태세가 갖출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럼 네 위원장들은 공교육이 기초학습능력이 결핍된 학생들을 양산한다는 비판에 대해 교원노조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이적행위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교원노조가 직면한 진정한 위협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세 교원노조 모델들 중 어느 것도 교원노조가 임금, 근로조건,연금,고용과 같은 생계문제의 보호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교원노조가 결성되기 전 맥카시 광풍에 의해 수천명의 교사들이 사정없이 해고되었던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며, 종교적 도덕을 공교육에 투사함으로써 힘을 확장하려는 흐름 속에서 성적소수자 교사, 정치적인 교사들이 직면한 문제를 외면할 수도 없다. 그 뿐 아니라 비단 교육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서비스에 걸쳐 공공기구와 공적책임을 사사화하려는 강력한 초당적 지지가 있음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위스콘신에서는 단체교섭권이 주정부가 각 교육청에 부과한 교육예산, 교사임금 상한선 때문에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뉴저지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법원은 많은 교육 정책들을 비교섭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심지어 학급 규모, 수업부담 같은 쟁점까지 “경영권”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빵-버터 쟁점뿐 아니라 교사의 전문성 그리고 교육의 질에까지 영향을 준다.교원노조들은 이러한 정책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적 현실은 지역교육위원회나 교육청이 이 전투에서 동맹군이 될 수 있음을 자주 보여준다. 그들은 정부의 예산상한선,그리고 여타의 다른 공교육에 대한 위협 같은 교육적 위해를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교원노조가 어떻게 그들과 연대하여 공교육의 질을 저하하는 위협들과 맟 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책무성

교육개혁에서 핵심 쟁점은 책무성이다. 이 쟁점에서 세 교원노조 모델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산별노조 모델 관점은 책무성을 외적인 것(교장과 장학관이 강요하는 것이며, 교사의 것이 아닌)으로 간주한다. 이 모델은 노조가 심지어 무능한 교사라 할지라도 합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뿐 아니라 책무성은 관리자의 몫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무능한 교사들에대한 어떤 간섭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문직조합 모델은 개별 교사의 사적이익 너머를 보려 하며 학교와 학생들의 광범한 필요를 고려한다. 이는 동료평가와 같은 장치를 이용한 내적인 교사 질 관리를 시도한다. 사회정의 조합 모델에서 책무성의 범위는 학부모와 지역사회를 포괄할 정도로 넓어진다.

여기에서 이 모델은 전문직조합 모델과 잠재적인 대립점을 가지는데, 그것은 많은 도시 지역들은 인종 차별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외부지역 출신 교사들과 행정가들의 동료평가 가능할까? 아니면 학부모나 지역사회가 교원평가에서 역할을 해야할까?밀워키의 Hi-Mount 초등학교 같은 경우 교사뿐 아니라 학부모가 포함된 교원평가를 시도해 보았다. 다른 학교들은 학부모와 지역사회 구성원이 학교 운영위원회나 지역교육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책무성 쟁점에 대해 일정정도 권위를 행사했다.

사회정의 조합주의 관점은 교원노조가 지역 수준에서 교육형평성과 책무성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신시내티 교원노조는 어떤 고등학교가 미적분학과 고급언어 코스를 제공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저소득층 거주지역 학교들은 이런강좌들을 거의 개설하고 있지 않았지만 특목고나 대학준비고등학교는 이 코스들을 개설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게나타났다. 교원노조의 후속작업은 신시내티 공교육의 정책을 전환시켜 모든 학교들이 고급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특별할당을 제도화하였다.

인종의 문제

세노동조합 모델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인종 쟁점에서 드러난다.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체이스의 연설이 환영받은 만큼 그가 인종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당혹함도 있었다. 이제 NEA는 여러 쟁점들 중에서 공립학교에 근무하는 전문직 백인 교사가 점증하는 유색인종을 가르쳐야 하는 현실적 문제와 직면해야 한다.
인종주의와 인종 관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나라의 모든 단체, 기구들을 움찔거리게 하는 문제며 특히학교와교사들에게 어려운 문제다. 전문직 조합주의 옹호자들은 학교 재구성, 학생중심 교육과정과 같은 쟁점에서의 교원 능력 개발을 자주 언급하지만 소수민족, 반인종차별 훈련 같은 쟁점은 상대적으로 적게 언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정의 조합주의는 인종과 관련한 쟁점을 직접 움켜쥔다. 예를 들면 캐나다의 British Columbia 교원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인종문제를 인성, 정치, 교육학적 수준에서 다루는 연수 프로그램을 가동하였다. 웍숍과 훈련, 정책 진술,그리고 청소년 조직 등을 조합하면서 BC교원노조는 교사들이 인종 쟁점을 다루고 토론하도록 고무하였다.

인종 문제는 두 가지 다른 핵심 영역도 포함한다: 조합들이 지역사회와 유색인종 조직과 함께 발전하는 정치적 통합 ; 그리고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학교와 교사가 발전하는 사회적 전문적 연대.

OceanHill-Brownsville의 교사파업은 어떻게 교원노조가 흑인 공동체와의 관계를 훼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선명한 사례다.이는1996년 단체교섭에서 주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공교육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클리블랜드 교원노조의 전략과 강하게 대비된다.투쟁의 정점에서 주정부는 예상되는 파업을 예방하기 위해 수백 명의 경찰들을 투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 교원노조가 각종 유색인 단체들과 맺은 강고한 연대는 그러한 주정부의 개입을 막아내도록 지역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사태는 파업까지 가지않고 해결되었다.

지역사회와의 연대가 깨지는 또 하나의 원인은 상급기관이 제기하는 쟁점에 대한 노조의 극단적 비타협이다. 밀워키와 보스톤에서 교원노조들은 상급기관의 체계, 다른 말로 골탕 먹이기 체계에 의한 유색인종 교사정원 제도, 유색인 교사 비율의 유지를 위하여 만들어진 "가장 나중에 채용되고, 가장 먼저 해고되는" 전통적인 시스템을 뒤집어 엎기 위해 법정에까지 갔지만,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그 시스템 하에서 일해 왔는지 고려하지 않았다.

사회정의 조합주의는 과거 차별대우의 흔적기관들을 해소하는 구체적인 정책을 촉진하고 모두를 위한 평등을 증진하고자 한다. 예를들면 클리블랜드 교원노조는 흑인, 백인의 이원화된 승진경로를 승인하였다. 일부 교원노조들은 공격적으로 유색인 교사 채용프로그램을 지지하였고 그 과정에서 지역공동체들과 연대를 건설하였다. 여전히 많은 교원노조들이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대하여 교사의 이익과 직접 관련 없는 정치적 캠페인을 수행해 왔다.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교 교원노조는 최근 몇 년간의 반-확실성 행동 국민투표에 대항하여 일해 왔는데 이는 교사와 직접 관계없는 사안에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지표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교원노조가 여러 인종, 여러 유권자들과 연합하는데 실패한 사례가 더 많다. 이나라의 인종 문제의 역학을 고려한다면 이 영역에서의 성공은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연대를 건설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한 요원해질 것이다.

또한 사회정의 조합주의의 옹호자들은 학교수준에서 학교운영위원회, 지역교육위원회 등을 통한 학부모, 지역사회의 참여, 그리고 유급 학부모 조직자의 증가를 주장한다. 많은 조합 활동가들이 교직원들이 투입과 권한이 늘어나는 만큼 지역에 기반한 교육 위원회의 권한 역시 승인한다. 전문직 조합 지지자들은 이제 이러한 위원회들이 고용, 전근, 그리고 시간표 편성 같은 계약조건을 조정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여러 교육구들에서 교원노조들은 교사들이 지역 교육 위원회에서 다수를 보장받도록 협상하였다. 하지만 사회정의 조합주의는 도리어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참여를 더 강조하는데 심지어 교원노조가 학부모의 위원회 동수 참여를 지원하고 학부모들이 동등하게회의에참석하도록 하는 훈련과 교육의 예산 확보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구조적인 변화들을 판단하는 요점은 모든 학교 사안에 대한 진정한 학부모 참여를 어느 수준까지 증진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교원노조의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에 대한 연대는 학교개혁의 핵심이다. 이는 또한 교원노조의 성공과 생존의 중심 사안이기도 하다. NEA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산별노조로 회귀하라는 압력에 굴복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쟁점은 교원노조가우리의 공교육과 아이들 그리고 지역 사회를 돕는 사회정책과 운동을 증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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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6.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12. 교사가 되면 조심할 것들 1

젊은 벗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제가 교단을 떠나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 해직된것은 아니고요, 작년에는 연구 휴식년이었고, 올해는 교육연구정보원에서 근무합니다. 장학사 뭐 이런거 된거는 아니니까 금명간에 학교로 돌아가겠죠. 하지만 2년째 수업을 안하고 있으니 뭔가 허전하고, 교실이 무척 그립습니다.

교사가 되면 조심해야 할 것들 - 귀신들 


지금까지 교사라는 직업의 좋은 점을 이야기 했으니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좀 말해볼까 합니다. 물론 교사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더 많은 직업입니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공립학교 교사라는 직업은 단점은 거의 없고 장점은 무수히 많은 그런 직업에 속합니다. 번듯한 정규직 일자리가 10%나 될까말까한 상황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사가 되고자 멀쩡히 다니던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고시낭인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교사직이 이렇게 선망의 대상인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교무실의 풍경을 그려봅시다. 모두가 선망하는 그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교사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아주 즐겁고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졸업앨범이나 이런것들을 펼쳐보면 선생님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딱딱하며 즐거움과 행복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신규교사였던 시절 정말 놀랐던 것은 선배교사들은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불만이 너무 많아서 입만 열면 불만이며, 매사에 신경질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학생들 앞에서 거의 웃지 않았으며 늘 뭔가에 쫓기고 있으며, 행복과는 늘 거리가 먼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지금도 학교를 방문해 보면 그런 모습이 크게 바뀐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짜증스럽고 불만스럽던 얼굴이 요즘은 지쳐있는 얼굴로 바뀌었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선생님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와 모습, 그리고 저 힘없고 지친 모습에 관심을 가져보면 교사라는 직업의 나쁜 점도 꽤 많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나쁜 것”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구별하야 합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즉, 교사가 되면 이럴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불만은 교사라는 직업의 나쁜점의 사례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교사의 나쁜 점은 직장인, 노동자의 나쁜 점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쥐꼬리 월급(사실 그게 쥐꼬리인지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각종 카드사, 보험사, 증권사가 왜 교사를 집중 타게팅 하는지 생각해 보면), 불합리한 승진제도, 각종 부조리한 관행, 관리자의 횡포, 장기판의 졸처럼 취급되며 응분의 존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일 따위의 문제가 실제 학교에서 비일비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것들을 교사가 되면 나쁜 점이라고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직장생활이라고 하면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이며 학교가 다른 직장들보다 이런 것들이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도리어 더 가벼운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교육감이 학교를 방문해도 승진에 관심이 있는 몇몇 교사들이나 교장 따라 교육감 뒤를 졸졸 따라다닐뿐, 다른 교사들은 소 닭보듯 해도 무방한 곳이 학교입니다. 회장님 한번 떴다 하면 컴퓨터 키보드 청소까지 하는 이름난 대기업들과는 자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선배교사들은 왜 그랬던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그 선배들과 대화하면서 그분들의 개인사를 하나하나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명백한 공통점을 하나 찾아 내었는데, 그 분들은  교사 외에는 다른 직업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반회사, 관공서, 언론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서 교사가 된 분들은 저런 종류의 불만을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 저 역시 언론사에 있다가 교사가 된 케이스인데, 그 삼류저질 언론사가 비록 보수는 두배 가까이 더 많지만, 그리 가라고하면 죽어도 안갈겁니다. 두배 가까이 되는 보수도 전혀 부럽지 않고요. 하지만 교사 이외의 경험이 없는 분들은 그 많은 보수를 부러워 하더군요. 절대 그럴 일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교사가 되면, 오직 교사가 되었을 경우에만 나타나는 나쁜 점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임금이나 승진처럼 눈에 띄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사를 퇴행시키며 가치를 떨어뜨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보람없는 인생을 사는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소리없이 스며들어 교사를 망친다는 의미에서 나는 이것들을 교사를 나쁘게 만드는 귀신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사실 교사의 좋은점, 특히 실용적인 장점들은 매우 눈에 잘 띄는 반면에 나쁜점들은 이렇게 귀신같이 스며들기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사직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이 한국적인 상황에서 멋도 모르고 교직에 입직했다가 귀신에게 사로잡혀 자신은 물론 학생들까지 망칠 위험이 큰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라는 선정적인 용어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여러분이 특히 이것들을 경계하고 조심했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절단신공으로 끊고, 다음 편지 부터 구체적으로 귀신을 한마리씩 잡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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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밝힌 곽노현 교육감의 교육관 몇 토막

얼마 전 김미화의 오후 두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곽노현 교육감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기서 그의 교육관이 뚜렷하게 드러난 부분이 있어서 갈무리 해 둡니다. 그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생기던 간에, 이런 교육은 이런 교육정책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꾸준히 견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면 진보교육이란 라벨을 붙일 수 없습니다.

(이하 인용)

김미화 : 요즘 아이들이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곽노현 교육감 : 기본적으로는 아이들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어요. 우리 부모들이 그냥 부모들의 욕망이라고 할까. 물론 아이들을 위한 욕망이지만. ‘너희들만큼은 정규직으로 공무원으로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아야한다. 그러려면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 그러려면 자나 깨나 국영수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학교마치면 학원을 가야하고. 이렇게 12년을 보내면 네 미래가 창창해진다.’ 이런 생각으로 아이들은 몰아대시거든요. 더구나 엄친딸, 엄친아가 등장하잖아요. 애들은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경쟁을 강요받아요. 그럼 아이들은 숨통을 틀수가 없는 겁니다.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공부, 공부, 공부 잔소리에 치이게 되고, 부모님과 관계가 틀어지고 입을 닫게 되요. 내 마음 갈 곳을 잃고 내 마음 둘 곳이 없잖아요. 이러면서 좌절, 분노가 남에게 향하면 폭력과 왕따가 되고 내부로 향하면 우울과 자살, 절망이 된단 말이에요. 우리 어른이 아이들의 필요를 보지 않고 어른들의 욕망을 주입시키고 있는 거죠. 아이들이 자율이나 자유를 느낄 수가 없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자기주도적으로 하는 것에서 오는 보람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오직 교과서 속 국영수 공부에 매진하게 되는 거죠. 이것이 집안에 희망으로서 네가 할 일이라고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니...

 김미화 : 그렇다면 지금 학교 교육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곽노현 교육감 : 기본적으로 ‘제가 원하는 학교 교육이 이겁니다’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맞다고 할 거예요. 다만 현실이 그렇지 않지 않느냐. 현실은 교육감 권한 밖의 사안입니다. 현실은 불안경제, 그 밑에 서열화된 대학이 있고, 여기에 기를 쓰고 명문대에 짚어 넣고 싶은 욕망, 거기에 부응하는 명문대의 난도 높은 시험 출제, 여기에 맞추는 고교 교육과정, 이거에 따라 아이들은 사교육 시장을 내몰아 2-3년 선행학습을 시켜야 하고.. 이런 일련의 원인과 결과들이 있거든요. 이 부분을 사회적 합의로 바꿔내지 않고는 올바른 교육으로 갑시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학부모 마음속에 와 닿지 않는 거예요. ‘내 자식만은 지금 현재 명문대 바늘 구명에 집어넣기 위해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방법은 선행학습이야’라고 하는 거죠. 

김미화 : 불안해요. 선행학습 안 시키면.

강인봉 : : 친구 아들, 딸들은 학원 가는데 우리 아이는 집에 있으면...

곽노현 교육감 : 우리 아이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옆집이 하니까 따라한다는 거예요. 그럼 옆집 엄마랑 다 같이 하지 말자고 결의를 하면 되요. 이걸 어디서 하느냐하면, 학교 단위로 학급부모회가 있고, 학년부모회가 있고, 학교전체부모회가 있고, 학교운영위원회가 있잖아요. 나 혼자 있을 때는 내 새끼 주의밖에 남는 게 없어요.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모두가 힘든 겁니다. 내 노후자금을 다 쏟아 넣어서 애들 교육시키는데 애들 90%는 하늘대학 못가잖아요. 그러면 꿈에서 멀어지고 여기서 상처가 생기고.. 힘을 합쳐서 잘못된 교육 시스템을 바꿔보자고 가야죠. 이런데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임무예요. ......

 ‘자, 그러면 맞다 당신이 얘기하는 교육철학 다 맞는 얘기다. 그것 중요한 거 누가 모르냐, 그런데 현실은 이렇다’ 하면서 반발을 하셨잖아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지금 여기서 가능한 더 나은 교육이 있다는 것을 보여 드려야 하거든요. 그것이 혁신학교예요. 곽노현 표 교육철학과 교육정책을 집대성해서 눈으로 보여드린 곳이 59개 초중고가 서울 전역에 생겼다는 것. 이것이 제가 대안을 보여드린 거니까. 이게 제대로 된다면 확산되지 않을까요.

 강인봉 : 요것만큼은 꼭 고쳐놓고 말겠다. 하는 것은?

 곽노현 교육감 : 사실은 전 수업 혁신인데요, 21세기를 감성의 시대, 지식의 시대, 인성의 시대, 협동의 시대, 네트워크의 시대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학교 교실마다 아이들을 국영수 점수 경쟁으로 모래알을 만들어놓고 있죠. 협동교육으로 바꿔야 합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끼리 모듬을 이뤄서 모듬 구성원끼리 협동하고, 발표, 토론하게 해야 합니다. 발표와 토론은 민주주의의 핵심이고요, 모둠과 협동은 협동교육의 핵심이에요. 그럼 수업방식을 칠판을 앞에 두고 아이들 시선을 선생님에게만 향하게 하는 일제식, 주입식 강의에서 아이들끼리 활동하는 수업, 발표와 토론 수업으로 바꿔야 합니다. .......

저는 공교육의 가장 큰 책임은 가정환경의 격차를 이기게 하는 것이다. 제가 계급 계층을 이기는 공교육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요. 잘 사는 가정이 특정 구에 모여 살잖아요. 못사는 가정이 특정 지역에 몰려 살고요. 어떤 지역의 학부모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어떤 지역의 학부모는 상대적으로 부자예요. 학교마저도 격차가 난다면 큰 일 나겠죠. 그런데 현실에는 그렇게 되기 쉬워요. 그래서 가난한 지역의 학교를 더 부자로 만들어줘서 가난한 지역 아이들이 부족한 것이 없도록 넉넉한 마음을 느끼도록 해야죠. 이것을 근본적 목표로 삼고 모든 교육정책에서 학교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는 부분을 걸러내야죠. ...... 

첫 번째는 가난한 집의 아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와 부잣집 아이나 장애가 없는 아이는 같은 한 명이지만, 교육재정 투입은 달라야겠죠. 만약 똑같은 교육비를 투입한다면 가난한 집 아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를 차별하는 셈이거든요. 기계적 평등주의로는 절대로 실질적 평등을 이룰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예산 배정방식을 실질적 평등으로, 그래서 가난한 지역을 더 우대하는 더 지원하는 방식으로 대전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이고요. 더 필요하고 더 가난한 지역에는 더 우선적으로 줘서 더 풍요로운 학교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간신히 격차를 메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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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

교육연극은 학교폭력 예방에 효과가 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른다 ㅠ

곽노현표 교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업으로 온 동네에 선전했던 학교폭력 예방 교육연극 프로그램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연구원으로서 나의 본분은 미리 설정해둔 통제군과 처치군에 뿌렸던 설문지를 수합하여 통계처리 하는것.

사전사후검사가 포함되어 있어서 설문지 문항은 100개가 넘고, 이걸 200명 이상 코딩하자니 일주일간 어깨가 빠질뻔 했다. 막상 코딩에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이지만, 분석 시간은 두어시간 남짓. 오 컴퓨터의 위력이여.

그런데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가설은 피해자에 대한 방어자 성향의 증가를 종속변인으로 하고, 교육연극 참여 여부를 독립변인으로 하고, 정서적 공감능력의 증감을 매개변인으로 하는 모델을 검정하는 것이었다. 즉 교육연극이 학생들의 정서적 공감능력을 향상시키고, 이렇게 향상된 공감능력으로 인해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피해자를 위한 방어자 성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피해자를 지키려는 학생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학교폭력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런데 왜 이상한 결과냐 하면 교육연극이 학생들의 정서적 공감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가설이 기각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정서적 공감능력은 향상되기는 하였으나 교육연극 참여 여부와는 무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연극의 참여여부가 피해자에 대한 방어자 성향에는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교육연극이 학교폭력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큰 가설은 검정되었지만, 그 세부적인 메카니즘에 대한 가설은 기각된 것이다.

효과가 확인되었으니 된거 아니냐 하겠지만, 이게 연구자 입장에서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다. 효과가 있기는 있었으나, 당초 예상했던 메카니즘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결과만 좋게 나왔으니 장님 문고리 잡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책 담당자 입장에서는 프로그램의 효과가 검정되었으니 입에 귀에 걸리겠지만, 학자의 입장에서는 왜 그런 효과가 나왔는지를 수립해둔 모델로 설명할 수가 없으니 낙담 천만이다.

아무래도 훨씬 더 맣은 배경변인을 수집했어야 한 모양이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이미 100문항이 넘은 설문지인데, 뭘 더 투입한다면 아마 풀지도 않고 1자로 그어 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버린 불량응답이 10명 가까이 된다.

하지만 학생들의 학업스트레스, 긴장도 같은 변인들을 같이 투입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교육연극과 같은 문화예술활동이 학생들의 학업스트레스나 긴장도를 완화하여 폭력성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후약방문 같은 가설이 자꾸 떠오르니 말이다. 게다가 학생들의 긴장도와 일탈행동의 관계에 대한 관련 배경이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측정하지 않은 변인은 도리 없다.

좋다. 이럴때 쓰라고 모든 논문에는 "후속연구 제언"이란 부분이 있는 것이다. 후속연구다, 후속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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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