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9.

학부모가 상대적 약자라고? 교권 침해 따위는 무시하자고?

교육과학기술부가 모처럼 한건을 했다. 이른바 교권보호 종합대책이란 것이 그것이다. 진보진영은 교과부가 한건을 하면 무조건 반발하는 반사작용은 좀 접어둘 필요가 있다. 이건 시기적절한 대책이며, 오히려 이런 절호의 안을 선점당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엉뚱한 반응들이 나왔다. 학부모를 교권침해의 주범으로 모는듯한 표현이 거슬리며, 상대적으로 약자인 학부모를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있다는 진보교육단체의 반응이 그것이다.

물론 그 취지가 뭔지는 안다. 학부모나 학생으로 인한 교권침해만 다루고, 교장이나 여타 기관으로부터 가해지는 교권침해는 다루지 않았다는 불완전성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그럴 경우는 불완전성만 지적하면 그만이다. 즉 교권침해는 학부모 학생 뿐 아니라 교장이나 기관으로부터도 가해진다. 이 부분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 이렇게. 그런데 전교조는 꼭 여기다가 학부모가 무슨죄냐 식의 현장감각 없는 반발을 붙여서 안그래도 교총에게 빼앗기고 있는 교사들의 지지를 더 빼앗기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 교사들이 교권을 침해하는 주체로 뼈져리게 느끼고 있는 상대는 교장이 아니라 학부모이며, 실제로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 교사를 처절하게 약자 위치로 만들어버리는 상대도 교장이 아니라 학부모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학부모가 자식맡긴 죄로 교사앞에선 약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서 아주 단적인 사유실험을 하나 해보자. 학부모가 학교로 쳐들어와서 교사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와, 교사가 학부모를 찾아가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 어느쪽이 신문에서 더 대서특필되며, 어느쪽이 사회적으로 더 확실히 매장될까? 당연히 후자다.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을때 어느쪽이 막장전술을 구사해도 뒤탈이 더 적은가? 대개의 경우 학부모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상황에서 학부모가 교사보다 선택지가 더 많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자식 맡겨놓은 죄로 저자세? 그건 옛날 얘기 아니면, 퇴학이 가능한 고등학교 얘기다. 아무래도 학부모가 막장으로 나올 수 있을 정도 학생이라면 이미 교사들로부터 벌이란 벌은 다 받았고, 그까짓 여선생의 회초리 쯤이야 하는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사회봉사? 교내봉사? 수업 안하고 더 좋다. 만약 교사가 체벌이라도 하면 도리어 동영상 찍어서 돌리면 된다. 더 좋은 방법은 미워하는 교사의 발언을 발췌 녹음해서 정치적 좌빨로 만들어서 조중동에 뿌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자식맡겨놓은 죄"(?)는 교양있는 중산층 학부모의 일이며, 그런 학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학부모단체 활동하는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표준적인 학부모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좋지 않은 일로 학교에 소환되는 학부모들의 경우는 이미 자식맡겨놓은 죄따위는 면벌부를 구입한지 오래다. 오히려 이들은 학교에서 막장으로 깽판을 쳐도 학교에서 이렇다할 제재를 할 수 없으며, 도리어 그럴수록 자녀가 받을 불이익에 브레이크를 걸수 있고, 최소한 밑져야 본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권은 학부모와의 균형 타령을 하기에는 너무도 약하다. 자꾸 선진국 타령을 하는데,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교사들의 교권은 위로는 교육당국과 교장으로부터, 아래로는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마음껏 유린되어 사실상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지경이다.


반대로 선진국의 학부모는 교사 앞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훨씬 저자세다. 우선 미국의 경우를 보자. 우리나라는 학부모가 학교에 아이를 맡겨둔 뒤 나중에 검사해 보고 나서 따지는 체제다. 아니 아이를 믿고 맡겼는데 왜 이모양이야 이런 식으로. 하지만 미국은 학부모가 자기 아이를 학교라는 공동체에 조심스레 소개시키는 형식이다. 만약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학교공동체에 자기 아이가 누를 끼친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해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시스템이다. 다음 링크를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http://blog.daum.net/sayme613/462514

엔엘 성향이 강한 전교조나 참학에선 그럼 "그건 미국놈들 얘기다"그럴지 모르겠다.  안그래도 오늘 어떤 전교조 활동가가 미국사례 같은거 검토해서 뭐하냐, 다 쓰레길텐데 따위의 헛소리를 했다.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진보진영이 교육성지처럼 여기는 핀란드의 얘기다.


진보진영이 그토록 좋아하는 핀란드에서도 학생이 교사를 모욕하거나 욕설을 하면 교사는 이를 지도하려 하는 대신 즉시 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학생이 70여만원의 벌금을 무는 판결을 받기도 한다.

그럼 독일은 또 어떨까? 독일의 경우도 학부모는 교사앞에서 큰소리를 치거나 행패를 부릴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 독일은 지필고사 점수가 50%밖에 들어가지 않고, 교사가 임의로 매길 수 있는 점수가 50%나 된다. 그러니 시험 다 맞아도 수업태도가 불량하면 50점밖에 못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살인사건 날 일이지만 독일에서 학부모가 찾아가서 항의하고 소리지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다음은 영국의 사례다. 영국의 경우도 신자유주의 교육론을 들여오면서 학부모가 교육수요자라는 식의 인식이 팽배했고, 이는 학부모에 의한 교사 폭행, 폭언으로 이어졌다. 이에 영국은 공동체 정신의 해체를 우려하여 교권에 대한 강력한 보호조치를 시행했다. 그 그 내용을 보면 매우 삭막하다.


영국은 교사를 위협(폭행이 아니라 위협이다!)만 해도 75000달러의 벌금 혹은 6개월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교사를 위협하면 학교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체포되며, 교사 위협, 폭행에 대해서는 불관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학교는 세속의 성전이며, 교사는 사회의 성직자라는 에밀 뒤르켐의 말을 염두에 두자. 물론 교사가 과연 그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느냐고 따지고 들수 있겠으나, 그런식으로 따지고 들면 사회 자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럼 당신은 경찰들이 벌금 스티커를 발부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가? 육법전서 달달외운 영혼없는 법관들이라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그 판결을 존중하지 않는가? 그건 경찰관과 법관 개인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 그 자리가 대표하는 공동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잘먹고 잘사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을 가르치는 곳이다. 따라서 교사는 우리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대변한다. 설사 그가 미숙한 24세의 젊은이라 할지라도 사회는 그에게 이 사회의 부모같은 지위를 준 것이기 때문에 이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권이다.

그럼 선생들 살판난다고? 고대 중국에는 천리마의 뼈를 천금을 주고 구입한 군주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자 살아있는 천리마를 팔겠다고 상인들이 몰려왔고, 무능한 신하를 예를 다하여 존중해 주자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대우하는만큼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필요한 교사는 공동체의 가치를 대변할 고결한 존재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방법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이 알아서 찾아오고, 또 그 사람도 거기에 걸맞게 변해 갈 것이다.

자기 자녀의 성적과 처우에 조금의 불이익이 생겨도 언제든 찾아가서 따질수 있는 존재로 교사가 남아있는 한 이 나라에 공교육은 없는것이며, 공동체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교사가 정말 **같은 사람이라도 일단 그 앞에서는 그 지위를 존중해야 하며, 그 대신 공식적인 통로고 그와 같은 중요한 지위에 저런 **같은 사람이 있어선 되지 않는다고 청구를 하면 되는 것이다.

2012. 8. 21.

박근혜 후보는 봉하마을 방문 전에 이 영상들을 스스로 돌아보라

박근혜 후보는 봉하마을을 방문하기 전에 이 영상들을 스스로 돌아보기 바란다. 그럼 봉하마을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가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알아낼 수 없다면 **가 없는 것이고.


첫번째 영상은 저질 연극으로 유명했던 "환생경제"다. 누가봐도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연상되는 노가리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 아들 경제가 죽었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가리를 죽이자는 섬뜻한 내용에다가 노가리에게 육시랄놈, 거시기 달 자격도 없는 놈 등의 막말을 퍼부었던 연극이라 할 수도 없는 연극이다. 다행인건 여기 나왔던 한나라당 의원들 중 상당수가 낙선, 낙천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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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의 사진은 이 연극을 보던 박근혜 후보의 모습이다. 불쾌해 하거나 저러면 안되는데 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주 박장대소를 하고 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망자를 찾아서 참배를 한다? 이건 정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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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동영상은 지금은 가카에 의해 폐지된 돌발영상에 기록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정도 사안으로 탄핵이라면 이명박은 수백번 탄핵되어 마땅했다.) 당시의 정황들이다. 노무현은 "사실상 탄핵"되었다는(이분들 사실상 참 좋아한다) 열변을 토한 홍사덕씨가 지금 박근혜 후보의 선대본을 지휘한다. 이것 참. 게다가 탄핵안이 가결되던 그 당시 너무 행복해하던 박근혜 의원의 사진도 보너스로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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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20.

입시 문제만 해결되면 정말 교육문제가 해결되는가? 불편한 진실


내가 늘 바탕화면에 올려놓는 MB잔여 임기 카운터가 188을 가리키는 것을 보니 대통령 선거가 정말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 실감난다. 자천 타천으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분들의 행보도 활발하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들에게 나라를 맡기면 더 좋은 나라로 만들어 보이겠노라며 각종 정책들을 펼쳐 보이느라 분주하다. 이들이 펼쳐 보이는 다양한 정책들을 비교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다른 영역의 정책들과 달리 유독 교육 영역에서만큼은 후보들 간의 이견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후보들이 “대학 입시 제도를 바꾸고 공교육을 강화하여 사교육 부담을 줄여주겠노라” 고 공약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정답이 정해진 서술형답지를 보는 것 같다. 물론 후보들간에 견해가 일치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단 그것이 올바른 해법일 경우에 말이다. 하지만 얼른 보면 모범답안 같아 보이는 저 말이 사실은 지독한 오답이라서 문제다. 오답은 오답인데 모범답안 같아 보이니 더욱 문제인 것이다.

이들이 정말 답을 몰라서 그랬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들인데, 오답을 정답으로 착각할 정도로 교육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말하면 다수 대중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정답은 대단히 듣기 거북한 불편한 진실이다.

그럼 그 불편한 진실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 “당신들의 자녀는 평범합니다. 당신들의 자녀는 명문대학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공연히 자녀들 명문대학에 보내려고 사교육 업자 배불리지 말고, 소박하면서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기르세요. 우리나라 입시문제, 사교육문제의 가장 큰 문제는 여러분들의 허영심과 그걸 부추긴 사교육업자의 상혼 때문입니다. ” 이다. 이건 패배주의를 퍼뜨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녀가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그래도 내 자식인데” 하는 허영심이 패배주의의 원흉이다.

실감이 나지 않으면 구체적인 수치로 따져 보자. 미국의 아이비 리그처럼 우리나라에서는 통칭되는 명문대 리그는 없지만, 고3들은 “서연고서성한이중경외시동건홍숙”을 노래처럼 외우고 다닌다. 소위 말하는 인 서울 대학이다. 혹자는 이걸 무슨 한국의 아이비 리그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학부모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아이비 리그란 최고 명문대학의 의미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족보는 최고 명문대학의 의미가 아니라 심정적 마지노선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인 서울 대학은 가야 할 것 아니야?”라는 부모의 잔소리는 드라마 등에서 아주 익숙하게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아닌가?

그런데 이 “하다못해”의 수준이 기가 막히다. 이 15개 대학의 입학정원을 모두 합하면 전체 수험생의 6~7%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특수 분야의 명문대인 한예종, 포스텍, 카이스트 등을 보태더라도 8%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상위 8%가 “하다못해” 수준으로 취급되는 어이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상위 8%에서 “하다못해” 컷트라인이 끊어진다면 나머지 92%는 뭐라 불러야 할까? 8%에게 특별한 성공을 축하해주고 92%가 보통의 삶을 살아야 정상적인 세상일텐데, 8%에서 보통수준의 하한선이 그어지고 92%를 패배자로 낙인찍은 세상은 얼마나 뒤집혀진 세상일까?  누가 이렇게 세상을 뒤집었는가? 정부가? 재벌이? 아니면 서울대 출신들이? 아니다. 이건 누가 시킨 것도 아니며, 가르친 것도 아니다. 학부모 한 사람 한 사람의 허영과 욕심이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인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 뿐 아니라 힘써 일하지 않고, 애써 저축하지 않으면서도 큰 돈을 벌고 싶어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탐욕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또 온실가스가 줄어들지 않은 원인 역시 거대 석유자본의 로비 뿐 아니라 온실가스 감축에는 찬성하면서 자동차 이용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에는 불편하다며 반대하는 우리들 각자의 위선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꼬일대로 꼬인 대학입시와 나날이 치솟는 사교육비 문제는 명문대 출신들의 패권주의 때문도, 사교육업자들의 광고 때문도 아니다. 92%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보다는 내 자식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8% 안에 넣어야 한다는 학부모 개개인의 이기주의와 내 자식은 당연히 8%에 들어간다는 헛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허영심이 계속 누적되어온 결과인 것이다.

이건 한국 경제를 폭발 직전의 풍선으로 만들어 놓은 부동산 투기와 흡사하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하는 것 외에 돈 버는 방법은 없으며, 위험 부담이 있는 투자를 하려면 먼저 여유자금을 충분히 저축한 다음에 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온갖가지 대박 재테크가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넘어가 자산을 털고 빚까지 져 가며 달려들었다. 정부가 투기를 부추겼건 말았건 간에 어쨌든 부화뇌동했다면 그건 일차적으로 본인 책임이다. 그 결과는 겉잡을수 없게 된 부채, 그리고 위험 직전 상황으로 내몰린 국가 경제다.  마찬가지로 8%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지 못하고, 샛길을 찾는 반칙 심리의 빈틈을 노리고 족집게니 뭐니 하는 갖가지 사교육이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거기에 넘어가 빚까지 져 가며 사교육비를 퍼부어 대었지만 남는 것은 막대한 부채와 황폐해진 아이들의 마음 뿐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중독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녀에게 8%에 집착할 것을 강요하지 말고 92%의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92%가 “하다못해”도 안 된 패배자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임을 일깨워야 한다. 사실 이 세상은 “하다못해”에도 들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출퇴근을 도와주는 버스기사, 택시기사, 식사를 해결하는 식당 주인, 조리사,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는 아파트 경비원, 내가 일용할 양식을 지은 농부,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자, 그리고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 이들이 그토록 하찮은가? 어차피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이런 일하는 삶을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이지만 동시에 다수의 지배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 바 있다. 토크빌에 따르면 특히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하는 정치가들이 표를 얻기 위해 다수 대중들에게 쓴 소리는 하지 않고 환심을 살 말만 할 때 민주주의가 타락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아직 아무도 “8%의 명문대에 들어가는 좁은 문에만 매달리지 말고 92%의 소박한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자녀를 길러 주십시오. 그럴 때 92%의 삶이 개선됩니다. 그렇지 않고 모두 92%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8%에만 들어가겠다고 아등바등 거리면 제도를 아무리 뜯어고쳐도 입시문제, 사교육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라는 불편한 정답을 거론하지 않는다. 나는 이들 중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대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진실을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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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8.

늙은 전교조의 노래: 나 태어난 이 강산에 전교조 되어..절망


유신시절 군사독재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 군인을 처량하게 묘사하여 금지곡이 되었던 김민기(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노래다. 저항가요를 만들던 운동가가 군가 작곡을 강요받자 만든 노래로, 평생 군인으로 살다 퇴역하게 된 어느 준사관의 회한을 쓸쓸한 행진곡으로 엮어 낸 정말 역설적인 노래다.
먼저 노래부터 좀 들어 보자. 노래 듣기

이건 정말 적어도 어떤 경력을 20년 이상 지켜온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노래다. 하지만 중년기를 넘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수밖에 없는 그런 가사다.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 내 청춘 다 갔네” 이런 대목에서 누가 마음 약해지지 않을까?

인생 8단계설로 유명한 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기를 “통합이냐 분노냐”로 정리했다. 나는 그 중 7단계를 살고 있다. 맙소사 7/8 지점이라니! 7단계에서는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칠만한 뭔가를 세상에 남기고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된다. 현재 후세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한결 여유롭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침체감, 권태, 대인관계 악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럼 8단계로 넘어가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행복하게 되돌아보며 어린 시절부터 늙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로 통합할 수 있다. 이거야 말로 완전한 자아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바로 이러이러하기 위한 것이었어. 그때 했던 이런 일이 나중에 이런 결과가 되었지 하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인생. 자신이 했던 일들이 인생의 뒷 단계와 인과적으로 잘 연결되어 늙은 지금까지 단절없이 인과적으로 잘 이어지는 삶.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삶. 이렇게 자아통합을 이룬 사람이 가지게 되는 훌륭한 능력이 바로 “지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나간 인생을 회환, 후회, 분노, 좌절감, 증오로 돌아보게 되며, 아득한 절망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지혜와 절망!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러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불행히도 많지 않다. 더군다나 청소년기만 지나면 더 이상 공부도 교육도 필요 없다고 여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삶을 배울 기회가 없기에 더더욱 그렇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온 인생을 여유로운 성찰대신 성마른 절망으로 돌아보게 되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 동안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초조함과 성급함을 드러내게 된다. 얼마나 슬프고 아득한 일인가?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을 탄식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평생 옳은 일,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통합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 같은 경우가 그렇다. 수많은 운동가들이 진보정당을 국회에 입성시키기 위해 수십년을 애써왔고, 또 이를 넓히기 위해 삶을 바쳐왔지만, 이제는 그 과거가 온통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십 년의 운동이 순식간에 회한덩어리가 되어버렸을 때 그 아득한 절망감을 누가 공감해 주겠는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내가 몸담아 온 교육운동 단체인 전교조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몇 줄로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전교조의 상태는 이 조직을 만들기 위해 두 번씩이나 해직되었던, 그래서 이제 정년퇴직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연금 수급에 필요한 20년 경력도 빠듯한 그런 분들을 아득한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이 분들은 “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남들 출세하고 승진할 때 그런 것 다 포기하고 이 고생을 했단 말인가?” 하며, 꽃다운 내 청춘을 탄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의 승인과 인정, 그리고 로마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영광을 원하는 존재다. 수십 년을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면, 이제 그 삶이 마무리 되는 노년기쯤 되면 뭔가 기억되고 기념될 것들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전교조다. 이제 합법조직에다가 한국 최대의 시민단체인 전교조 아닌가? 말이 민주노총 산하연맹이지 실제로는 민주노총보다도 더 영향력이 큰 전교조 아닌가? 그 전교조에서 이제 은퇴할 나이가 다가온 노 조합원들의 삶과 헌신을 기리는 멋진 기념물을 남겨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전교조는 전직 위원장들 중 한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만든 것이 마치 그 간의 간난신고에 대한 보상인양 하는 이상한 모양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수많은 희생자들은 탄식한다. 그들의 그 고통과 괴로움과 인내가 결국 정 아무개 국회의원 만들어주기 위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 정 아무개가 무슨 넬슨 만델라처럼 모든 교사들이 애타게 국회로 들어가소서 하며 갈망했던 대상도 아닌데 말이다. 어디 그 뿐인가? 전교조 활동가였다는 경력을 이용해서 참여정부나 진보교육감 진영에서 나름 중책을 맡거나 큰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영광을 전교조에 돌리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청춘을 흘려보낸 동지들에게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50대 이상 나이 먹은 전교조 조합원들, 특히 평생 헌신과 희생을 많이 하신 분들의 절망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 동안 승진과 출세를 등한히 했던 자신의 삶이 후회스러워지고, 인생이 회한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리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도 출세하고 승진해야겠다는 익숙치 않은 욕심과 야망의 유혹이 점점 가슴 속에서 맥박치듯 밀려 올라온다.  전교조는 어쨌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조직이다. 비록 지금은 아무 실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전교조가 20년간 쌓아온 공적과 역사는 그 자체로 자산이다. 그리고 그런 전교조의 원로활동가였다는 경력은 아직도 쓸모가 있다. 이게 쓸모가 있을 때 빨리 이것을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로 교환해야 한다. 그래야 기껏 이런 전교조 따위, 이런 통진당 따위에 바치느라 날려버린 꽃다운 청춘을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분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전교조 지도부와 수뇌급 활동가들이 함께 싸워왔던 수많은 늙은 동지들의 영광과 명예를 높이는 일 대신 자신들의 자리와 명성을 높이는 일에만 계속 몰두한다면, 이런 슬픈 타락의 물결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이걸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6년이 넘는 해직기간을 견뎠고, 같이 발령받은 동기들이 교감되고 교장될 때 그 밑에서 교감은커녕 부장교사도 못하면서 그 수모를 견뎌온 것은 그들이 갖지 못한 고귀한 가치를 지키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의미 없어진다면? 그럼 공모제 교장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그리 큰 잘못인가? 위원장, 지부장급들이 온갖 명분을  내세우며 국회의원 등등이 되면, 노 활동가들은 공모제 교장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교조 경력이 크던 적던 도움이 되어 국회의원되고, 교육감 되신 분들이 노 활동가들, 노 조합원들을 모셔서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공식적인 기념식과 그들의 지혜를 존중하고 배움을 청하는 자리를 몇 번 만들었다면 아마 이런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이제 전교조 30년의 고난을 출세로 보상받으려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년기의 그들에게 그런 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은 20대에게 연애하지 말라는 것 만큼이나 어려울테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도 이미 교사 경력 21년이며, 대학생 시절 전교조 사수대 활동까지 치면 24년째 전교조와 엮여져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24년을 전교조 활동에 올인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절망감에 사로잡혀 무슨 짓을 하거나, 아니면 그 절망을 보상받을 욕심에 *누리당 쪽에 줄을 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어쩌면 다음과 같은 늙은 전교조의 노래를 부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글을 마친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전교조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이 먹고 힘 빠지만 퇴직하면 그만이지 
(후렴)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팔뚝질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너희들은 자랑스런 전교조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전교조의 아들이다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학교가서 참교육 받는 걸세 
배움이 행복하고 가르침이 자랑스런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내청춘 다 갔네 

좁은 교실, 높은 계단, 푸른 회의실에 /검은 양복 흰머리에 교장후보 걸어가네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우리 손주 손목잡고 공모제 교장하세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2012. 8. 15.

IOC가 박종우의 동메달을 박탈하더라도 흥분하지 말자

얼마 전 막을 내린 런던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킨 경기는 금메달 결정전도 아닌 동메달 결정전이었던 축구 한일전이다. 그런데 동메달의 감격도 잠시 박종우 선수가 들고 달린 "독도는 우리 땅" 파문 때문에 한일간 민족감정으로 사태가 치닫고 말았다. 여기에 엎친대 덮친 격으로 대한축구협회는 일본 축구협회에 해명 메일까지 보내서, 이게 사과다 아니다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자크 로제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은 박종우의 이 행위가 명백히 정치적 행위(polotical action)으로 보인다고 나름의 의견을 밝혔다. 여기에 대해 국내 네티즌들 중 상당수가 올림픽 위원회가 일본 편을 든다면서 끓어오르고 있다.

그 동안 스포츠를 민족주의적으로 소화시켜온 한국은 이렇게 스포츠에 대해 과몰입, 과잉 의미부여 하는 경우가 많다. 이기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드 높인 5천만의 쾌거가 되며, 지면 심판이나 주최측이 약소국을 무시한다며 울분을 삼키는 패턴은 어떻게 수십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좀 냉정하게 살펴보자. 그래야 우리는 앞으로 이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 생긴다. 하지만 이렇게 흥분해서 쪽발이편이냐 아니냐 난리굿을 피우면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느닷없는 독도방문과 대일 강성발언으로 뉴스의 촛점을 돌리려는 가카의 꼼꼼하심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흥분되기 쉬운 문제에서 냉정하게 추론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바로 사회과 교육의 목표이기도 하다.

먼저 정치적 행위가 무엇인가 보자. 고전적인 정치학에서 정치적 행위라 함은 바로 "표현"의 문제다. 하나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정치적 행위는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내고 생각을 퍼뜨리고 설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고대에는 자신의 주장을 밝히는 연설과 논변이 주된 정치적 행위였지만 근대 이후에는 집단적으로 주장을 드러내는 시위(demonstration) 상징과 기법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프로파간다가 널리 활용되었다. 테러 조차도 살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견해를 강렬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축구장 안에서 토론을 할 수는 없으니 선수가 어떤 정치행위를 경기장에서 한다면, 그건 주로 프로파간다나 시위다. 그리고 IOC는 바로 경기장에서의 시위나 선전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선수는 정치적 행위를 경기에 끌고 들어올수는 없지만 반대로 경기장 밖에서 한 정치행위나 정치적 견해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도 없다. 이 둘이 다 겸비되어서 정치적 중립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리그 최고의 윙포워드였던 마니치(아마 이 선수의 도움이 없었으면 안정환의 k리그 평정도 어려웠을것)의 골 세레모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유고 출신의 마니치, 샤샤는 이렇게 나토의 공습 중단을 촉구하는 골 세레모니를 펼쳤다. 이들이 모두 탁월한 골잡이였기에 이럴 기회가 많았겠지만, 이들은 곧 경고를 받고 이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에 대한 반대가 가지는 보편적인 가치, 이들의 가족이 있는 곳이 폭격당하고 있다는 사정 등이 고려되어 중징계 는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k리그가 아니라 A매치에서 유고슬라비아 대표선수로서 이런 행동을 했다면 문제는 심각해졌을 수 있다. 또 이 선전문의 내용이 "공습을 중단하라"가 아니라 "코소보는 유고슬라비아 땅이다!"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아마 선수생명이 끝났을 것이다.


그럼 박종우는? 우선 국제사회에서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나토와 유고슬라비아 같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관계다. 즉 박종우의 나라는 마니치의 나라처럼 "이렇게라도 해야 호소할 길이 있는" 그런 고립된 처지가 아니다.따라서 여기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야 독도가 당연히 우리땅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건 국제사회에서는 단지 우리 생각일 뿐이다. 독도의 정확한 위상은  "실효적 지배", 즉 "니들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초소 박아 놓은 쪽은 우리" 이게 답인 것이다. 이 실효적 지배란 것이 얼마나 구속력이 강한 것이냐 하면, 국제사회에서 중국만을 합법정부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처럼 한 나라를 실효적 지배로서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국제사회에 가서 "독도는 우리땅" 이렇게 외치면 일본은 "다께시마는 우리땅"이렇게 응수하게 되고, 독도는 순식간에 영토분쟁지역으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우리 가카께서 독도에 방문함으로써 초래한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가카가 독도방문해서 분쟁을 촉발한 다음날 국가대표 선수가 이런 표어를 들고 운동장을 달렸으니 이게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잘 계산된 "정치 선전"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씌어 있기 때문에 널리 알릴 목적이 없어서 정치선전이 아니라는 한국선수단측의 해명도 구차하다. 다른 나라 외신기자들을 무시하는가? 한 시간 안에 다 번역되서 돌게 되어 있으니, 오히려 영어로 썻을때 보다 더 주목효과가 크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일본 체조 선수들의 "욱일승천기" 유니폼을 문제 삼으며 이건 정치적 행위 아니냐며 올림픽위원회가 일본편을 들어준다고 펄펄뛰었다.  자크 로제 IOC위원장은 일본의 욱일승천기에 어떤 정치적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했으니 형평에 크게 어긋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욱일기는 독일의 꺾인 십자가처럼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상징이 아니다. 욱일기의 정확한 의미는 "일본 군기"이지 무슨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만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은 예나 지금이나 "일장기"다. 조선 총독부에 게양되었던 깃발도 일장기이며, 손기정 선수가 달고 뛰었던 깃발도 일장기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일본 국기는 일장기다. 마찬가지로 일본 군기는 욱일기다. 이건 아주 심플한 문제다. 게다가 이 욱일기가 무슨 신우파들이 부활시키고 그런것도 아니다. 

욱일기의 사용이 금지되었던 것은 일본이 패전국이기 때문에 군대가 해산되었기 때문이지 여기 무슨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미군정이 종결되고 일본이 다시 군대(이름은 자위대지만)를 보유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욱일기는 계속 사용되어왔다. 그 시점이 무려 1952년이다. 만약 이 깃발이 나치의 꺾어진 십자가 같은 파시즘적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승전국 측에서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 역시 전통적으로 독일 군대의 깃발이었던 "철십자기"는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다시 사용할 수 있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나치의 상징인 꺾어진 십자가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아래 사진을 보라. 태극기와 욱일기가 나란히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이건 치욕도 뭐도 아니다. 이건 단지 대한민국 해군과 일본해상자위대를 서로 상징하는 깃발일 뿐이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과 만행이 주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일제침략이라고 하면 당연히 일본 군대를 떠올리고, 일장기보다 먼저 욱일기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욱일기만 보면 울컥하는 마음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또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욱일기를 자주 휘두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 역시 욱일기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욱일기가 "군기"이기 때문에 휘두르는 것이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일본의 강한 군대와 병영국가를 주장하기 때문에 국기 대신 군기를 휘두르는 것이다.

그러니 아시아 나라들을 대표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상처입은 나라가 많은데,  "올림픽에 군대의 상징을 들이대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다"라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깃발 자체 혹은 그 깃발이 연상되는 유니폼 자체만으로 어떤 정치적 행위를 했다고 우기기는 어렵다. 더구나 명백하게 문자화된 메시지가 적힌 박종우의 팻말과 같은 급에 놓고 겐세이(이크 일본식 말?) 치자고 우기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다.

사실 관중도, 시청자도, 선수도 한일전에서는 좀 더 냉정했으면 한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여기에 한일전, 숙명의 대결 운운하며 의미부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지 않은가? 선수들이 일본한테만은 질수 없다, 국민을 위해 어쩌구 그러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정치적이지 않은가? 그러니 기성용의 원숭이 세레모니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손쉽게 민족주의적 열광에 빠져들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독재자들은 스포츠를 이용해서 우민화를 펼쳐온 것이다. 유난히 한일전을 강조하고, 유난히 한일간의 대결을 강조하는 흐름이 감지될때는 저의를 의심해라. 그 배후에서 뭔가 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 이건 참으로 부끄러운 사진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들이 황인종들을 비하할때 쓰던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으니, 이건 정말 부끄러운 인종차별 행위다. 이 원숭이가 미국이 하는 거라면 양잿물도 마시는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와서 일본을 비하하는 용어로 굳어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당시 미군들이 사용한 이 원숭이는 일본 뿐 아니라 황인종 전반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사실 미군들 눈에 일본인과 한국인과 만주인은 전혀 구별이 불가능하다. 사실 나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니 미군들 앞에서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다 멍키였던 것이다.

피파에서 이 세레모니를 크게 문제삼지 않은 이유는 그들 눈으로 볼때 인종차별이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황인종이 상대방을 황인종이라고 놀리고 있는 형국이니 이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코메디였다. 하지만 만약 기성용이 아니라 백인 선수가 일본 선수단을 향해 원숭이 흉내를 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스포츠가 정치 중립지대는 아니다. 그리고 스포츠 스타에게도 애국심은 중요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만약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선수들이 자기들의 인기를 이용하여 정치선전을 마구 해도 제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나라가 유리할지? 과연 약소국일까 강대국일까? 메달리스트들이 승리 세레모니나 시상식에서 그 열광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치선전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나라가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 독일이 기회의 90%를 차지하지 않을까? 그러니 올림픽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강대국의 위선과 또다른 정치편향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올림픽은 말하자면 일종의 명절이다. 우리도 명절때 사업얘기 하고, 명절때 성적얘기 하는거 싫어하지 않는가?

물론 그래도 그 빈틈을 이용해서 할말을 하고 국민을 시원하게 해주는 스포츠 스타가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때 안정환의 쇼트트랙 세레모니조차도 논란이 되었음을 명심하자. 그리고 WBC에서 일본에게 이긴뒤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은 서재응의  행위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이 쏟아졌음도 명심하자. 선수들이 이 둘 사이 적절한 지점에서 적절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생각을 꼼꼼하게 할 줄 아는" 그런 지혜를 가졌으면 하며, 그런 지혜는 선수들만의 노력이 아니라 부화뇌동하지 않는 합리적인 팬과 관중이 길러냄을 명심하자.

이 글을 읽고 흥분한 네티즌이 여기를 성지로 만들어도 나는 할 말은 한다.

2012. 8. 3.

경제교육? 집값의 환상(이미 가진자들의 재테크)

사실 이 내용은 나는 곱사리다에서 여러번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하지만 소리로만 들리는 팟캐스트의 한계 때문에 선대인 소장의 복잡한 설명이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던 분들도 계실것 같아 간단하게 정리해 봅니다.


흔히 부동산으로 대박난다는 말을 합니다. 예컨대 송파에 있는 32평 아파트를 3억에 샀는데, 1년만에 7억이 되었다더라 이런말 말입니다. 그럼 다들 부러워 합니다. 1년만에 4억을 벌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게 돈 번 것일까요? 그건 상황마다 다릅니다. 그럼 상황상황을 알아봅시다.


1. 1주택 소유자



이 경우는 송파의 32평 아파트가 유일한 주택인 경우, 즉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인 경우입니다. 이 경우 돈은 그대로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손해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따져 봅시다.


1) 3억이 모두 자기돈인 경우


이 아파트 구입자금이 모두 자기돈인 경우입니다. 아마 원래 살던 집을 판 대금과 보유하고 있던 다른 자산을 합쳐서 이 집을 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얼마를 번 것일까요? 역시 4억을 번 것이 아닐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른 집값의 차액 4억이 현실화되려면 집을 팔아야 합니다. 하지만 1주택자가 집을 팔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다른 집을 사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집만 4억이 올랐을 리 없습니다. 집값은 어디나 다 오를테니. 따라서 적어도 이 사람이 송파에 계속 거주하려면 7억으로 오른 집을 판 뒤, 그 돈으로 7억짜리 다른 집을 사거나 아니면 5억정도를 주고 24평으로 집을 낮추거나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여전히 같은 평수 아파트가 3억인 곳을 찾아야만 차액 4억을 건집니다. 하지만 이 집이 7억인데 3억인 집이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거주 조건이 열악한 것이죠. 그러니 나쁜 거주조건을 감수하는 기회비용을 감안하면 이 역시 벌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등록세, 취득세, 양도세, 재산세, 부동산거래비용 등을 감안하면 차액 4억 마저 온전히 지키기 어렵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 사람은 집값이 3억에서 7억으로 올랐을때 마치 주머니에 현금이 늘어난 양 더 쉽게 돈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집값을 실현한 것을 전제하고 미래에서 당겨 쓴 것입니다. 그러니 필경 부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손해라고 해야 하겠죠?


2) 3억 중 일부가 빚인 경우


이 경우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3억중 일부를 빌려서 충당한 경우, 다른 경우는 3억짜리 아파트를 전세를 끼고 구입한뒤 자신도 전세를 사는 경우입니다. 앞의 경우는 매우 간단합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설사 집을 팔아서 차액을 실현한다 해도 앞에서 본 것 처럼 사실상 남는 것 없는데다 빚 갚고 나면 끝입니다.
전세를 끼고 3억짜리 아파트를 사고, 자신도 어디선가 전세 사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3억짜리 아파트의 전세가 더 비쌉니다. 아니면 원래 살던 전세집 보증금 받아서 들어가면 될테니까요. 즉 3억짜리 아파트를 전세2억을 끼고 1억만 내고, 자신은 1억짜리 전세에 살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엄연히 집주인이지만 집주인 행세를 하려면 전세 보증금 2억을 내어 주어야 하는데, 살고 있는집 전세 보증금이 1억 뿐이니 사실상 1억을 빚진 셈입니다. 그래도 집값이 7억으로 오르면 여전히 전세 2억을 낀 채로 5억에 팔아버리면 되니, 이 경우 차액 4억을 거래비용, 세금을 뺀 뒤 가장 확실하게 챙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거품이 한창일때 이 방식이 아주 횡횡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면, 혹은 도리어 떨어진다면 이 집주인은 전세 보증금 2억 내주고 나면 빈털털이가 될수도 있습니다. 즉 이 방식(전세를 끼는 방식)은 집값이 해마다 은행금리+제세금 및 거래비용  이상으로 꾸준히 올라간다는 전제하에서만 이득이 있고, 그 외의 경우는 무조건 손해입니다.


2. 다주택 소유자



이 경우는 이미 주택을 소유하고 살고 있는 사람이 송파의 32평 아파트를 추가로 3억에 한 채 더 구입한 경우입니다. 만약 이 아파트 값이 7억으로 올랐다면 어떻게 될까요?


1) 3억이 모두 자기돈인 경우


이 경우는 가장 확실한 돈 벌이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자기 집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7억으로 오른 아파트를 팔아 치워도 다른 집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금과 거래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차액은 고스란히 소득으로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득은 전형적인 불로소득입니다. 한 일이라곤 단지 집을 사고 판 것 뿐인데 거기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득에 매기는 세금이 양도소득세입니다. 1주택자의 경우는 집을 팔면 다시 집을 사야하기 때문에 차액소득에 별 의미가 없으므로 양도소득세는 1가구 다주택자에게만 중과세됩니다. 이렇게 아무 일 하지 않고 버는 양도소득을 세금으로 무력화시키면 이미 살고 있는 집이 있고, 집 한채 더살만큼 자금도 있는 사람이 그 여유자금을 집사는데 들이지 않고 시장에 풀고 기업에 투자하여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동산 차액에 중과세 하는 것은 수구언론의 선전질과 달리 일시적으로는 부동산 경기를 침체 시킬지 몰라도 중기적으로는 오히려 자금을 생산적인 영역에 흐르게 함으로써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2) 3억 중 빚이 있는 경우


이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살고 있는 집이 있고 여유자금 1억이 있는 사람이 2억을 빌려서 송파의 아파트를 샀다고 합시다. 이 2억을 은행에서 빌리는 것은 참 어리석습니다. 그렇게 3억을 만들어서 집을 사면 살던 집에 그냥 살고, 새로 산 집은 월세를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월세가 빌린돈 2억에 대한 이자보다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거기에 집을 보유함으로써 들어가는 비용(재산세, 주택유지보수비용)이 있습니다. 세입자 받을때 들어가는 복비등 거래비용이 있습니다. 결국 남는 것 없습니다.
이 아파트가 7억으로 올랐을 경우라면 팔아치워도 이미 살고 있는 집이 없으니 차액을 챙깁니다. 하지만 빌린돈 2억을 빼면 차액은 2억으로 줄고, 제세 거래비용을 빼고, 또 그 동안 냈던 이자들을 감안하면 남는 돈은 1억 이하로 뚝 떨어집니다. 만약 3억이 7억으로 안오르고 4억 정도로만 오른다면 1억을 버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손해를 볼수도 있는 겁니다.
또 다른 방법은 2억을 은행이 아니라 이 집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빌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네가 2억만 빌려주면 내가 내돈 1억 보태서 이  그런데 이 사람은 이미 집이 있기 때문에 두 집 중 한 집은 비어야 하는데, 그건 곤란하죠. 그래서 누군가에게 남는 집에 들어와 살아라, 그 대신 2억만 빌려줘 하는겁니다. 이게 바로 전세입니다. 그러니 전세 2억 끼고 1억만 내서 아파트를 샀다는 것은 살고 있는 사람에게 2억 빌리고 1억 보태서 샀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 경우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7억쯤으로 올라야(두 배 이상) 좀 벌지 적당히 올라서는 돈 못 만집니다.


최악의 경우는 원래 집이 있는 사람이 3억을 빌려서 송파의 아파트를 구입한 경우입니다. 이 경우 집값이 4억으로 오르면   이 집을 팔아도 거래비용과 이자가 있어서 그냥 본전입니다. 1년만에 한 5억쯤 넘어야 조금 남습니다. 하지만 3억짜리 상품이 1년만에 2억이나 오른다는게 이게 정상입니까? 그러니 이건 비정상적인 가격 상승에만 올인한 참으로 무모한 투자입니다. 만약 이 아파트가 3억을 계속 유지한다면 공연히 빌린돈 이자 갚느라 돈이 더 나갑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 살던 집까지 날리는 수가 생깁니다. 이 아파트가 3억 밑으로 떨어지면 서류상으로는 집이 두채지만 두채 다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으로 떨어집니다. 하우스 푸어입니다.



3. 결국 누가 돈을 버느냐?




결국 부동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상승하는 버블시기가 아니라면 집 사고 팔아서 돈을 벌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종류, "원래 자기 집이 있으면서 자기 돈 만으로 집 한채를 더 살수 있는 여유 자산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사람" 뿐입니다. 이 사람은 추가된 주택을 값이 오르면 팔아서 차액을 실현하고 오르지 않으면 월세를 놓아서 재산소득을 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내집 갖고 내집 하나 더 살정도 여유자금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집 하나 갖고 빚만 없어도 상위 20%라는 나라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부동산으로 돈을 번다는 신화가 누구를 위한 신화인지 분명해 집니다. 1%를 위한 신화입니다. 그럼 이들은 왜 그런 신화를 퍼뜨릴까요? 멋도 모르고 집 사서 돈 벌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달려들수록 집 값이 올라가서 이들이 차액 실현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9%가 개털되는 미쳐버린 갬블인 것이죠.


(사회 수업은 계속됩니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