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0.

홍콩, 싱가포르가 부러웠던 가카와 오세훈. 그러나...

내가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는 타이완,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이 네 지역이다. 그러고 보니 모두 한자문화권이며,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물론 홍콩, 마카오를 나라라고 볼수 있느냐는 말도 있겠지만, 엄연히 독자적인 여권과 화폐, 그리고 자치 정부를 가지고 있으니 나라라고 봐야 한다.

그럼 내가 중국 오덕님이시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난 중국 본토 여행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저 지역들이 아시아의 선진권이라서 그런것도 아니다. 물론 나는 농촌보다는 도시를, 자연스러운 곳 보다는 문명이 발달한 곳을 좋아한다. 나는 잘 발달하고 정비된 현대식 도시 탐험을 좋아하지, 거친 자연속을 헤집고 다니거나, 혹은 "사람 냄새 난다"는 말로 위장된 어지럽고 비체계적인 후진국 거리에서 저렴한 물가를 즐기는 일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래 사진들은 야경 멋지기로 세계 수위를 서로 다투는 홍콩과 싱가포르의 야경이다. 이 사진들만 봐도 이 도시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세련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이건 일부분에 불과하다. 오세훈과 이명박이 얼마나 이 도시들을 부러워했는지 알만하다. 그래서 여의도에 IFC가 생기고(외양도 실내도 한국이 아니라 홍콩에 온듯하다), 영등포에 타임스퀘어가 들어서고,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는 싱가포르의 에스플러네이드와 모양과 기능이 흡사한 독특한 구조물이 들어섰다. 싱가포르 강 주변 풍경을 따라 만들려고 한 것이 청계천이며, 인도에 작은 실개천 조성한 것 역시 싱가포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두배 혹은 그 이상 높은 나라들임을 생각해 보면 이건 뱁새짓이다. 아무리 도시를 화려하게 꾸며놓은들, 정작 시민들이 그것을 향유할 여유가 없다면, 단지 그것은 공허한 화장빨에 불과하다. 서울 시민들은 홍콩, 싱가포르 시민만큼 돈도 없을 뿐 아니라 시간도 없다. 저 사진들을 보면 야경을 위해 건물 외부에 설치한 조명이 주로 빛을 내고 있으며, 대형 빌딩 사무실의 등은 거의 꺼져있음을 알수 있다. 특히 싱가포르 국제 금융센터 건물은 완전 전멸이다. 저 사진들을 찍은 시간도 심야가 아니라 19시 좀 지난 시간이다.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나와야 야경이건 화려한 도시풍경이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6시 반이면 출근길에 나서서 10시가 넘어야 집에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사람에게 화려한 도시, 세련된 풍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보면 싱가포르의 인공섬 센토사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인 오세훈의 새빛둥둥섬이 그토록 욕을 들어먹은 이유도 거기 있는 것이다. 시민이 즐기고 향유할 여유가 없을때 디자인 서울은 공허하며, 단지 과시용에 불과하다.

그래서 최근 급격히 경제가 성장했다는 중국 본토는 영 내 구미에 맞지 않다. 사실 중국 본토에도 홍콩 싱가포르 수준의 도시는 충분히 있다. 예컨대 상하이의 일부구간들은 그 세련됨, 거대함, 화려함에서 싱가포르 못지 않다. 썬전이나 꽝저우는 풍부한 물자와 활발한 시장, 북적거리는 마천루가 홍콩에 못지 않다. 심지어 타이페이 같은 도시가 도리어 소박해 보일 정도로 중국 본토에도 크고 화려하고 현대적인 도시는 매우 많다. 세계 초고층 빌딩의 1/3 이상이 중국에서 지어지고 있을 정도로 마천루 하면 이제 중국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화려함과 거대함이 그 나라 인민들과 웬지 같이 녹아있지 않다는 생경함이 느껴지면 여행이 불편해진다. 2008 베이징 올림픽때 외국 손님들에게 중국의 발전상을 과시하기 위해 초고층 빌딩을 마구 짓고, 중국 전통 주택인 4합원 구역을 헐어내거나 커다란 담장으로 가려버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중국 도시가 이렇게 발전했구나 하면서 감탄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거대함과 화려함은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그 큰 빌딩 사이와 뒷골목을 잠깐만 돌아보면 단박에 드러날 일이다. 그 도시가 시민들의 것인지 아니면 시민들과 무관한 단지 장식품에 불과한지.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도시인가 정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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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21.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혁명가들의 꿈은 언제나 이루어졌을까?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기가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뮤지컬 영화는 장사 안된다는 통념을 깨고 벌써 관객 500만명을 돌파하였다. 이 뜻밖의 흥행 돌풍에대해서 처음에는 스타, 시너지 등 마케팅 측면에서 이유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대선에서 패배한 48%를 중심으로 한 셀프 힐링 측면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고, 심지어 영화를 정치적 스탠스에 무리하게 대입시켜 약팔지 말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레미제라블 원작,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했던 다른 영화들을 참고해 보면, 이 영화를 그렇게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원작 소설에서도, 그리고 이후 제작된 영화들에서도, 프랑스에서 제작한 연속극에서도 1832년의 혁명은 하나의 배경으로 주어질 뿐이다. 장발장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한 이가 아니라 다만 방관자다. 그는 코제트의 연인을 구출하기 위해 순전 개인적 동기에 의해 바리케이트 안에 들어설 뿐이다. 사벨이 자살하고 오랜 추적에서 벗어남으로써 작품의 긴장은 해소되며, 그것이 엔딩이다. 그러나 1985년의 뮤지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혁명과 바리케이트에는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스포트 라이트가 보태어지며, 원작은 물론 그 어떤 장면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미래의 혁명이라는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놓았다.  혁명은 더 이상 객관적인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제목인 "불쌍한 사람들"의 염원과 꿈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낼 바리케이트 너머의 세상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2012년 영화에서는 청년 혁명가들의 위상도 대폭 확대되었다. 1998년 영화에서는 마리우스를 제외하면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고 단역으로 처리되기까지 했던 앙졸라가 심지어 마리우스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전체 넘버들 중 1막과 2막을 마무리하는 곡들 역시 혁명 노래들인 "One day more"와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이다. 그러니 이 작품의 주제를 혁명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눈에나 혁명은 보이지 않고, 듣기 좋은 말로 용서와 휴머니즘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은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한 사람들을 기만한다. 이 영화 엔딩에서 보여주는 거대한 바리케이트는 실패한 1832년 혁명이 아니라 마침내 루이 필립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1848년 2월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2월 혁명 이후 이들이 꿈꾸던 그런 세상은 왔을까? 불행히도 역사는 이들의 꿈을 기만했다.

여기서 잠깐 프랑스 혁명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1. 프랑스 대혁명(1789년)
교과서 시민혁명 단원에 나오는 그 유명한 혁명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내걸고 의회를 탄압한 국왕 루이 16세의 권력을 내려 놓은 혁명이다.

2. 프랑스 대혁명에서 나폴레옹까지
프랑스 혁명 세력들은 공화정을 주장하는 급진파(자코뱅)와 입헌군주정을 주장하는 온건파(지롱드)로 나누어졌다. 이후 유명한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어, 조금이라도 왕당파 혹은 귀족옹호자의 기미가 보이면 목이 잘리는 혼란기가 왔지만,  자코뱅의 지도자인 로베스삐에르 자신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면서 테러정지는 막을 내린다. 한편 국왕의 처형을 본 이웃나라 왕들이 놀라 연합군을 형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뭉개기 위해 쳐들어오지만, 시민들은 의용군을 결성하여 이들을 물리치고, 이 전쟁에서 영웅이 된 나폴레옹이 권력을 차지한다.(군사 쿠데타!)

3. 나폴레옹 시대(1799-1815) : 너무 유명한 시대니 설명 생략

4.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1815-1830)
나폴레옹을 패망시킨 유럽의 왕국 연합들은 빈 동맹을 맺고, 혁명 따위가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부르봉 왕가의 복원이 가장 중요했다. 이들은 망명중이던 루이16세의 동생을 불러다 루이 18세로서 프랑스 왕으로 복위 시켰다. 이를 부르봉 왕정복고라 부른다. 루이 18세가 죽은 뒤에는 그 동생인 샤를 10세(만화 베르사이유 장미에서 무서운 사람으로 등장하는 아르투아 공작)가 왕위에 올라서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고 절대왕정을 되돌리려 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혁명이 7월 혁명이다. 7월 혁명은 들라크라아가 그린 이 그림으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결과 샤를 10세는 추방 당하고,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필립이 "시민들이 추대한 왕"이라 불리며 왕위에 오른다. 절대왕정은 폐지되고 입헌군주정이 실시된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바로 시민왕 루이필립이 있던 오를레앙 왕정 시절이다.

5. 오를레앙 왕정(1830-1848)

그러나 오를레앙 왕정 시절에도 인민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입헌군주정을 실시하고 의회가 소집되어 국가권력을 행사하였으나, 이는  대자본가와 금융귀족들의 이해관계만 대변할 뿐이었으며,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구왕당파들마저 의회에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다. 

의원이 되기 위한 자격, 의원을 선출할 자격 역시 엄격히 제한되어 일정 수준 이상의 세금을 납부한 자에게만 부여되었다. 대다수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전혀 참정권을 갖지 못했다. 의회의 다수를 장악한 금융귀족 등 대자본가들의 약탈적 정책들로 인해 많은 농민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하였으며, 프랑스 전역에 불만이 들끓어 올랐다. 이것이 바로 영화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혁명의 원인이다. 그리고  1832년 혁명을 계기로 단지 시민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력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저 시민이라고만 칭하면서 이 부분을 명확히 다루지 않았다,

6. 2월 혁명(1848)
앙졸라와 그의 동료들이 목숨을 잃은 1832년 혁명 이후 16년이 지나서야 모든 인민의 완전한 참정권이라는 꿈이 이루어진다. 이전의 혁명들이 부르주아 시민들이 중심이 된 혁명이었다면, 이 혁명은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된 "레미제라블(불쌍한 자들)"의 혁명이다. 파리 곳곳에 1500개가 넘는 바라케이트가 세워졌으며, 루이 필립 국왕은 물러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이 영화 엔딩에서 예고하고 있는 거대한 바리케이트가 필경 이 2월 혁명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7. 2월혁명 이후
군주정의 완전한 폐지와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임시정부는 과감한 실업자 구제책인 국민작업장 설치, 노동3권의 인정, 그리고 노동자들의 참정권 인정 같은 급진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부르봉 왕당파, 오를레앙 왕당파가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기회주의자들인 나치오날 파가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며,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의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880석 중 100석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노동자의 대표자인 블랑키, 알베르도 낙선했다). 보수파가 압도적으로 장악한 의회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들을 하나 둘 후퇴시켰으며,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공화국 정부는 이 노동자들의 봉기에 대해 5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파견하여 무차별 학살하였다. 3000명의 노동자가 봉기 현장에 있었거나, 혹은 노동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사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결국 7월 혁명의 재방송이 되고 말았으니, 앙졸라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8. 루이 보나파르트
더욱 어이 없는 것은 그 이후다. 이렇게 피로 노동자들을 진압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왕당파도, 금융귀족도, 자유주의자도, 노동자 대표도 아닌 루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오직 하나, "나폴레옹의 조카!' 뿐이었다. 나폴레옹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중간계급, 그리고 농촌 주민들의 압도적인 몰표를 받은 것이다. 최근에 치루어진 어느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연상되지 않는가?

루이 보나파르트는 노동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자도 아니었으며,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임기 4년이 끝나갈 무렵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었고, 이듬해 황제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60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결과는 "도로 황제!"인 것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9. 나폴레옹 3세 시대(1852-1870)
나폴레옹 3세는 황제로서 그다지 큰 업적이 없다. 무능하였으나 각종 미디어 등을 활용한 인기 영합적 정책을 펼쳤다. 무리한 대외 확장 정책을 통해 러시아, 독일(프로이센) 등과 충돌하였고, 끝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는다. 포로가 된 뒤 그는 프로이센에게 항복하였고, 공화정을 선포한 임시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는 프로이센의 영향력하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0. 파리코뮌(1871)
격분한 파리의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황제의 항복, 그리고 프로이센의 앞잡이인 임시정부를 모두 거부하고, 자신들의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것이 파리 코뮌(1871)이다.
어이없게도 나폴레옹 3세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파리 코뮌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승전국인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위해 파리 시민들을 무력 진압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행하였다 (그들 말로는 파리 탈환). 1871년 5월 21일,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파리 시내에 진입한 정부군은 무장, 비무장을 가리지 않고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하였다.  이날 적게는 1만명, 많게는 5만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10만명이 체포되었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1789)으로 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동자 등 "레미제라블"은 철저히 소외되었으며 무지막지한 피를 흘려야 했다. 1832년 바리케이트에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1848년 6월에는 수천명이, 1871년 5월에는 수만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1871년이면 마리우스가 노인이 되었을 시기다. 앙졸라 등의 죽음 이후에도 반백년이 지나도록 프랑스에서는 저 영화의 엔딩 같은 벅찬 광경은 일어나지 않았고, 처절한 비극만 반복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너무도 힘들고 슬픈 기나긴 여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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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4.

이범에게 묻는다. 진보 교육의 실력이 달리는게 문제인가, 아니면 진보교육자가 배제된 정책팀이 문제인가?

정말 오랜만에 포스팅을 한다. 거의 3주만인 것 같다. 미디어 오늘에 쓰는 기명 칼럼조차 근근히 채워 나가야 할만큼 생산력이 크게 떨어져 있기도 했고, 또 1월 20일 경에 출간할 신간 편집 작업 하느라 또 바쁘기도 했다. 물론 대선 이후 어느 정도 회복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 기간동안 대선에서 이래서 졌네, 저래서 졌네 하는 인상비평이 많기도 했지만, 이미 12월 23일에 밝혔듯이 나는 실제 회귀모형을 세워서 통계 검증해 보기 전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에는 반대하기 때문에 그런 인상비평에 대해 반론할 생각도 가치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대선의 충격이 다 가실만할때 느닷없이 소위 교육평론가 이범의 한겨레 칼럼에서 또 인상비평이 나왔고, 하필이면 그 인상비평 내용의 핵심이 진보진영의 실력부족, 그것도 진보 교육진영의 "실력부족"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고 하는 것이라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고, 심한 모욕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3주만에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아서 포스팅을 재개한다. (이범 칼럼 원문 보기)

길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직접 읽어보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겠지만, 독자의 편의를 위해 그의 칼럼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이범은 안철수 캠프와 이수호 캠프 양측에 모두 참가하면서 진보 교육정책의 한계를 절감했다.
2. 첫째, 차등없는 반값 등록금을 강변하면서 보편복지에 집착하는 모습인데, 최종적으로 무상등록금을 생각하면서 그 중간단계로 저소득층에 대한 차등적 무상등록금 같은 유연한 대책(이게 소득순위 1, 2 분위 계층에겐 오히려 더 유리하고, 이들은 반값 등록금 조차 부담스러워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을 낸 이범 같은 인재의 의견을 묵살했다.
3.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도 대학의 86%가 사립이고, 특히 서울·수도권에 국립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상위 사립대에 입학하기 위해 경쟁할 것이 뻔한데 무슨 소용이겠는가?
4. 학생인권만 강조하다 보니 학생의 수업 방해 문제 등, 교권에 대한 정책이 없었다. 이범은 용감하게도 이 문제를 제기하고, 교사의 긴급행동권 등을 제안했지만, 곽노현도 이수호도 듣지 않았다.
5. 따라서 진보진영은 교육정책에 관한한 정책의 대중적 호소력에서 앞서지 못했다. 한마디로 실력이 달렸다(이범을 중용하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이 다섯가지 테제에 대해 간단한 비판을 가하겠다.

먼저 1번. 이범이 안철수 캠프, 이수호 캠프에 참가하면서 진보교육정책의 한계를 절감했다는 것은 지극히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이다. 그 한계는 그냥 안철수 캠프, 이수호 캠프 정책의 한계다. 안철수, 이수호 캠프에서 내어 놓은 정책들을 진보교육정책이라고 주장할 근거도 희박하거니와, 그게 진보교육정책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거의 없다.

다만 진보 교육계에서 나서서 설치는 사람들의 빈곤한 상상력의 한계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범 같이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 외에 더 적극적으로 진보적인 교육자, 교육정책개발자를 발탁하지 못한 안이함부터 그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번. 보편복지라면서 반값등록금에 집착했고, 차등 무상 대학교육이라는 과도기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완전무상교육으로 가자는 이범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주장. 이건 말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이건 맞는 말이다. 다만, 보편복지라는 이념적 강령에 집착해서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한 방안을 내어 놓지 못한 것을 진보교육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보편복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했던 측은 진보교육진영이 아니라 소위 진보좌파 정치진영이었다. 진보교육진영에서는 이범식 방안 말고도 다양한 과도기 방안이 이미 나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괄적인 반값 등록금 대신, 우선 국립대학을 완전 무상화 함으로써 지방 국립대의 경쟁력을 높이고, 사립대의 등록금 인하 압력을 가할수 있다는 등의 제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값 등록금이 박근혜의 차등적 무상지원보다 설득력이 떨어져서 선거에 졌다는 주장은 오버다. 반값 등록금이건, 차등적 무상지원이건, 이 자체가 이번 선거에선 쟁점이 되지 못했다. 이것 때문에 현실성이 높아 보이는 박근혜에게 50대가 몰려갔다는 주장은 안철수 전 후보측 인사들이 흘리고 다니는 말을 은근히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한겨레 일반 독자들은 모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트윗 깨나 하는 사람들은 "복지세상"이라는 필명을 쓰는 어느 블로거가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는 주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3.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방안.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이범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문캠에서 이걸 고집했다면, 그건 문캠의 문제지, 이걸 무슨 진보교육 진영의 문제처럼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정책을 마련하는 일에 진보교육진영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현직 교사와 공무원의 선거캠프 참여가 불법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작 진보교육자들은 손가락이나 빨고 있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저 사람들이 교육전문가 행세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명망가들(이범도 그 중 하나다)이 교육정책팀이랍시고 꾸려진 것이 안캠이건, 문캠이건, 혹은 이수호캠이건 공통된 현상이었다.  고등학교 경력이 3년만 넘어도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방안이 별 효과 없다는 것을 안다. 저걸 고집한 것은 진보교육진영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진보교육진영이 정작 교육정책팀에서 배제된 한계의 결과다.

그리고 애초에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방안을 끄집어 내었던 민교협 측에서도 이미 이 방안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밝히는 교수들은 많이 있었다.

4. 학생인권 문제와 교권의 충돌 부분은 이수호 후보가 기계적으로 반응해서 실제로 많은 감표요인이 되었던 문제다. 그런데 이걸 이범을 제외한 진보교육진영이 모두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이수호 후보의 고민의 폭이 좁고, 교육경력이 부족해서 비롯된 일이다.  이 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하라고 조언한 진보교육진영 사람들은 이범 말고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수호 후보가 듣고도 무시했을 따름이다. 이건 이수호의 문제지 진보교육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폭력 가해자의 생활기록부 기재 문제에 대해서 곽노현 교육감이 즉각 반대에 나서지 않고 신중하게 반응한것도 주변에서 학생인권과 가해자에 대한 제재 방안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 "진보교육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5. 따라서 진보교육진영이 실력이 달려서 정책의 호소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진보교육자들이 진보교육진영을 대표하지 못하고, 각 캠프들이 엉뚱한 국외자들로 교육정책팀을 꾸렸기 때문에 정책의 호소력이 없을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범도 그 국외자 중 한명이다. 안캠프도, 문캠프도 교육정책팀의 면면을 바라보면 정작 학생들을 맞닥뜨리고 살아가는 교육자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거기서 무슨 현실적인 정책이 나오겠는가? 그러니 "교육"이 아니라 "보편복지" 같은 강령적 이념을 먼저 세우고, 교육을 거기에 종속시키고 맞추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의 정책이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학입시와 관련된 정책은 지나치게 많고, 교실에서 제대로 된 수업이 이루어질수 있도록 하는 세밀한 방안은 지나치게 부족한 상황이, 대학교, 고등학교 이외의 학교(정작 국고로 운영되는 의무교육 기관)정책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문캠이나 이수호캠프의 교육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이범의 자유이며 권리다. 그런데 그 비판을 마치 자신만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할 권리는 없으며, 더더군다나  자신이 한국교육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댓가로 수십억씩 벌어들이고 있는 동안 간난신고를 다 겪으며 조금이라도 나은 교육을 해 보고자 댓가는 커녕 희생을 감수해온 진보교육 전체를 싸잡아서 실력이 "달렸다"라는 식으로 말할 권리는 있을 수 없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