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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피리 -초월과 현실의 화해(1)

마술피리처럼 다양하게, 그런데 전혀 상반되게 해석되는 오페라도 드물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디선가 공연하고 있을거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많이 무대에 올라가는 작품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 편차는 너무도 크다.

마술피리의 해석 중 가장 흔한 것은 동화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이 작품은 가족 오페라라는 명목으로 자주 무대에 올라간다. 동화적으로 해석한 마술피리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는 단연 파파게노다. 동화적으로 해석할 경우 타미노는 왕자의 전형을 너무 벗어난다. 그는 백마를 타지도 않았으며, 낭만적이라기 보다는 차가운 수도사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동화적으로 해석할 경우 타미노는 매우 이질적이며, 다루기 힘든, 차라리 없었으면 나을 주인공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완벽주의자다. 모차르트는 이런 이질적 요소를 용납하는 타입이 아니다. 따라서 타미노를 중심으로 놓고 해석을 해야 하며, 그렇다면 동화적 해석은 잘못이다.

물론 이 작품은 동화적인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는 아니다. 이런 오해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무조건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 여기는 한국 어른들의 메마름에 기인한 바가 크다. 사실 독일 문화에서는 동화(Maerchen)을 진지한 문학으로 여긴다. 특히 모차르트의 시대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경계시대이며, 이때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 바로 동화의 수집이었다. 따라서  마술피리를 동화적, 아니 아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억지로 아동 코드에 맞춘다거나 하는 것은 작품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시도다.

그 반대되는 경향이 철학적, 혹은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프리메이슨적인 해석이다. 이렇게 되면 무게중심은 단연 타미노로 넘어간다. 평범하고 나약한 청년이었던 타미노가 밤의 여왕에게 속아넘어가지만, 거룩한 자라스트로를 만나 스스로의 나약함을 벗고 성스러운 대열에 합류한다는 초월적 이야기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

마술피리 -초월과 현실의 화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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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주절거렸던 것들, 옛날 글들 정리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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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학자들은 모차르트를 계몽주의자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인 기계적인 분류다. 사실은 계몽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표현이다. 계몽사상가로 분류되는 루소와 볼테르 사이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은 어린 모차르트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릴때 부터 모차르트는 루소에 대해서는 무한한 존경을, 볼테르에 대해서는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볼테르는 백과전서파와 그 맥을 같이하는 유물론자였지만, 루소는 어떤 초월적인 이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루소의 사상은 모차르트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 모차르트는 12살때 이미 루소에 심취해 있었고, 그의 전원시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를 오페라로 만들기도 했다. 루소의 사상은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모차르트 음악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루소는 당시 모든 계몽사상가들의 고민거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을 제거한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의 미덕과 진보를 정당화 할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계적 유물론으로는  단순히 반복하는 세계 이상을 표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을 탓하지 말자. 다윈보다 150년 먼저 활동한 사람들이니, 이들에게 자연은 변화와 발전의 도가니가 아니라 영원하고 고정된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이 변하지 않는 자연에 변화의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질수 밖에 없고, 결국 작용인으로서 신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계몽주의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루소는 인간 이성의 초월적인 성격을 상정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각자 나름대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입법자들이다. 인간 사회 외부에서 군림하는 초월적인 절대자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이 이성은 보편적이기기 때문에 인간들은 각자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의지,…

일본은 동경대학, 대만은 대만대학, 한국은 태산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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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은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다. 그러다 보니 이 중 어느 나라에서 히트한 대중문화 상품은 다른 두 나라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같은 드라마가 세 나라 버전으로 각각 제작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일본 만화가 다다 카오루의 “장난스런 키스”다. 이 만화는 작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큰 인기를 끌었고,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에서 각각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줄거리가 같은 드라마다 보니 비슷한 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분석하기 아주 좋은 재료가 되기도 한다.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각 나라마다 이름만 다르고 그 외의 설정은 같은데(일본에서는 이리에 나오키, 대만에서는 장즈슈, 한국에서는 백승조), 아이큐 200의 천재이며 고등학교 3년을 만점으로 졸업할 정도의 우등생이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과 같은 대학에 다니기 위해 최고 명문대학 입학을 포기한다. 
이런 설정은 최고 명문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동아시아권 시청자들이 유럽이나 미국 시청자들보다 훨씬 깊게 공감한다. 입시경쟁은 마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과 같다. 아들이 하바드 대신 프린스턴 대학을 간다고 할 때 미국 학부모가 느끼는 충격과, 도쿄대 대신 메이지 대학 간다고 할 때 일본 학부모가 느끼는 충격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학부모 역시 일본 학부모에게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조금 더 살펴보면 한국판 드라마가 이 부분을 일본판, 대만판과 매우 다르게 처리했음을 알수 있다. 일본의 이리에 나오키가 포기한 일본 최고의 대학은 도쿄대학이다. 그리고 실제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은 도쿄대학이다. 장즈슈가 포기한 대만 최고의 대학은 대만대학이며, 마찬가지로 실제 대만 최고의 명문대는 대만대학이다. 그런데 한국의 백승조만 태산대학이란 대학을 포기한다. 한국에는 이런 이름의 대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일본과 대만 드라마에서는 실제 일본과 대만 최고 명문대학 …

교육시장화 단숨에 이해하기(교육시장화의 네 바퀴)

대안교육전문지 민들레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이제 과월호가 꽤 지났기 때문에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교육 시장화의 네 바퀴 엄밀히 말하면 교육 상품화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한 축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해 2000년대 초반에는 거의 전 세계를 휩쓸었다. 비록 지금은 퇴조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이것이 남긴 교육계의 상흔은 아직 깊다. 상처를 차유하려면 먼저 상처를 낸 흉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상처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싸운 여러 나라 교원노조의 경험을 집대성한『새로운 글로벌 질서에서 강철새장과 그 해체』(Martrell, G. 등, 2005)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의 대부분은 이 책을 참고로 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교육의 사사화(privatization), 교육의 상품화, 경제·경영 기법의 도입, 표준화라는 네 축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진다. 이 네 축을 조금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교육의 사사화: 이른바 자율화에 관해서다. 이는 공립학교를 사립학교로 만든다는 수준의 의미가 아니라, 관료제의 폐단을 빌미 삼아 ‘공공 부문’을 비효율과 권위주의로 등치시키고, ‘민간 부문’을 효율과 창의성으로 등치시키는 이데올로기다. 한 마디로 ‘국가가 개입하면 구리고, 민간에게 맡길수록 참신하다’가 된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공립학교는 구리고, 사교육 기관은 참신하다’가 된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국민의 정부 이후부터 사교육이 창궐하기 시작하고,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같은 경우는 아예 학원을 학교가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상정하고, 사교육문제가 심각하다는 나라에서 유명학원 강사 출신 인사들이 진보진영에서조차 환영받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학생들의 취향과 수준이 다양한 만큼 획일적인 학교가 아니라 다양한 학교가 나와야 하며, 이렇게 학교가 다양해지려면 평준…

진보진영은 먼저 익숙한 것들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1)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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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 평가도 대충 마무리 되어가는 모양이다.  중요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이털남에서 다 다루어졌으니 여기에 대해 추가로 왈가왈부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저런 팟캐스트에 나와서 이야기 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빼먹은 것들이 있다. 일부 출연자는 넌지시 암시하기도 했지만 역시 주변을 의식하여 과감하게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이털남이 아무리 돌직구를 던지라 요구해도, 돌직구 던졌다 망할 가능성은 보수보다 진보진영에서 더 크다. 돌직구 던지는게 더 꺼려지는 진영이라면 사실 진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하여간 그렇다.

진보진영이 이렇게 서로 말조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까닭은 이른바 진보 운동권 출신들은 몇가지 신화에 사로잡혀있고, 심지어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를 믿고 중독된 사람들은 이성적인 대화의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화와 중독대상을 거론하면 화를 낸다. 그러나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유능한 보수 vs 무능한 진보" 의 이 치명적인 이분법은 계속될 것이고 앞으로도 승리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독을 치료하는 첫단계는 중독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듣기싫고 기분나빠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일을 할 사람은 어차피 진영 내부에서 별로 인기도 없고, 조직적 관점도 없다고 비판받는(맙소사, 저 사람들은 인간관계 잘 유지하고 잘 어울리는게 조직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이다.  그럼 이제 진보가 벗어나야 할 중독을 차례로 소개해 나가겠다.

1. 민족주의, 그리고 국가주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물론 민족이나 국가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가 되어버리면 문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민족이나 국가가 판단의 준거가 되면서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사실 이건 한중일 모두의 문제다. 3개국의 역사책을 보면 모두 저마다 나름의 중화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를 자기민족을 선, 다른 민족을 악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일종의 춘추필법에 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