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25.

마술피리 -초월과 현실의 화해(1)

마술피리처럼 다양하게, 그런데 전혀 상반되게 해석되는 오페라도 드물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디선가 공연하고 있을거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많이 무대에 올라가는 작품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 편차는 너무도 크다.

마술피리의 해석 중 가장 흔한 것은 동화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이 작품은 가족 오페라라는 명목으로 자주 무대에 올라간다. 동화적으로 해석한 마술피리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는 단연 파파게노다. 동화적으로 해석할 경우 타미노는 왕자의 전형을 너무 벗어난다. 그는 백마를 타지도 않았으며, 낭만적이라기 보다는 차가운 수도사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동화적으로 해석할 경우 타미노는 매우 이질적이며, 다루기 힘든, 차라리 없었으면 나을 주인공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완벽주의자다. 모차르트는 이런 이질적 요소를 용납하는 타입이 아니다. 따라서 타미노를 중심으로 놓고 해석을 해야 하며, 그렇다면 동화적 해석은 잘못이다.

물론 이 작품은 동화적인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는 아니다. 이런 오해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무조건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 여기는 한국 어른들의 메마름에 기인한 바가 크다. 사실 독일 문화에서는 동화(Maerchen)을 진지한 문학으로 여긴다. 특히 모차르트의 시대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경계시대이며, 이때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 바로 동화의 수집이었다. 따라서  마술피리를 동화적, 아니 아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억지로 아동 코드에 맞춘다거나 하는 것은 작품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시도다.

그 반대되는 경향이 철학적, 혹은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프리메이슨적인 해석이다. 이렇게 되면 무게중심은 단연 타미노로 넘어간다. 평범하고 나약한 청년이었던 타미노가 밤의 여왕에게 속아넘어가지만, 거룩한 자라스트로를 만나 스스로의 나약함을 벗고 성스러운 대열에 합류한다는 초월적 이야기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파파게노와 히로인인 파미나의 존재가치가 없다. 단지 지루할까봐 추임새로 넣어 준것에 불과할까? 그러기에는 파파게노의 음악은 너무 매혹적이다. 모차르트는 이런 불균형을 용납할 성품이 아니다. 분명 파파게노 역시 타미노 만큼 중요하게 여겼기에 그런 음악적 비중을 부여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활동에 열심히긴 했지만, 그들의 초월적인 이신론에 완전히 찬동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일상적인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동자, 농민 등 민중들의 삶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정신은 고귀하고 육체는 천하다는 식의 2원론은 베토벤이라면 몰라도 모차르트에게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술피리의 해석은 이 양자를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밤의 여왕의 세계와 자르스트로의 세계, 파파게노의 삶과 타미노의 삶의 대립이 해소되면서 새로운 세계와 삶으로 지양되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파파게노는 책임을 지는 삶을 살게 되었고, 타미노는 파미나와 함께다. 밤의 여왕은 파멸하였고, 자라스트로는 떠났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라지고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그리고 대 합창이 이어진다. 이 합창은 마치 헤겔의 변증법이 그려내는 파노라마를 연상시킨다.

이 변증법의 파노라마는 이미 서곡에서부터 예시되어있다. 서곡은 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금관악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밤을 용해하는 집요한 대위법이 제시된다. 매우 단순하고 코믹하기까지 한 동기들이 대위법적으로 집요하게 반복되면서 여러차례의 변형을 거쳐 마침내 찬란한 코다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길이며, 인생의 위대함이며, 모차르트 자신이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제발 영화 아마데우스의 경박한 모습은 잊어라!) 5분여의 짧은 곡임에도 불구하고 마술피리 감상에 필요한 개요를 충분히 제시한 셈이다. 마술피리 서곡 올려본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마술피리 서곡듣기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마술피리 -초월과 현실의 화해(2)




음악 이야기 주절거렸던 것들, 옛날 글들 정리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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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학자들은 모차르트를 계몽주의자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인 기계적인 분류다. 사실은 계몽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표현이다. 계몽사상가로 분류되는 루소와 볼테르 사이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은 어린 모차르트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릴때 부터 모차르트는 루소에 대해서는 무한한 존경을, 볼테르에 대해서는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볼테르는 백과전서파와 그 맥을 같이하는 유물론자였지만, 루소는 어떤 초월적인 이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차르트의 정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장 자크 루소
루소의 사상은 모차르트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 모차르트는 12살때 이미 루소에 심취해 있었고, 그의 전원시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를 오페라로 만들기도 했다. 루소의 사상은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모차르트 음악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루소는 당시 모든 계몽사상가들의 고민거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을 제거한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의 미덕과 진보를 정당화 할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계적 유물론으로는  단순히 반복하는 세계 이상을 표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을 탓하지 말자. 다윈보다 150년 먼저 활동한 사람들이니, 이들에게 자연은 변화와 발전의 도가니가 아니라 영원하고 고정된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이 변하지 않는 자연에 변화의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질수 밖에 없고, 결국 작용인으로서 신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계몽주의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루소는 인간 이성의 초월적인 성격을 상정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각자 나름대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입법자들이다. 인간 사회 외부에서 군림하는 초월적인 절대자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이 이성은 보편적이기기 때문에 인간들은 각자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의지, 즉 일반의지를 형성할 수 있다. 이 일반의지의 소산이 바로 법이다. 이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손대지 않을수록 원형에 가깝다. 따라서 이 이성을 더럽힌 여러 사회, 문화적 오염들을 제거하면 비로소 만민이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 아래서 살면서도 자유로울수 있게 된다.

이렇게 루소는 개인의 자유와 보편적 원리를 모두 설명하는 탈출구를 열었지만, 유물론적 계몽사상가들에게 루소는 반동적인 신비주의자로 보였다. 결국 루소는 계몽사상가들 사이에 왕따 비슷한 존재가 되었던 셈이다.

인격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를 설정함이 없이 어떤 초월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인간의 자유를 정당화하면서도 그것이 무질서가 아님을 입증하려는 이러한 루소의 시도는 훗날 칸트의 실천이성 개념의 원천이 된다. 물론 자유와 필연의 이 모순의 해소는 철저히 유물론적 바탕 위에서도 초월적인 법칙을 설명해내는 사회학적 관점을 제시한 마르크스에 이르러서야 가능하게 되었지만......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마술피리를 이해하는 핵심이 바로 자유와 규칙의 화해와 지양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오페라에는 두 세계가 등장한다. 하나는  밤의여왕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자라스트로가 지배하는 신전 구역이다. 파파게노는 철저하게 욕망에 따라 사는 자유롭고 자연적인 존재이며, 타미노는 초월을 추구하는 구도자적 존재다. 밤의 여왕의 세계는 욕망의 세계이며, 자라스트로의 세계는 초월적 이성의 세계다. 이 두 세계는 결코 화해 할 수 없으며, 단지 대립물로만 남아있다. 그러나 이 두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타미노가 등장함으로써, 또한 타미노가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끌고 들어옴으로써 이 두 세계의 대립이 무너진다.

얼른 보이는것처럼 밤의 여왕의 세계만 무너진 것이 아니다. 잉그마르 베리만이 훌륭히 해석했듯이 밤의 여왕은 죽었지만, 자라스트로 역시 떠나야만 한다. 이제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것은 어떤 권력과 다른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파미나(자연)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동기로 삼은 청년 타미노가 등장하여 욕망과 이성의 화해를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다. 이제 욕망과 이성은 인간성이라는 보다 큰 전체의 한 계기들이 되었으며 더 이상 대립물이 아니다. 그렇게 된 이상 각 대립물의 한 부분만 대표하던 밤의여왕과 자라스트로의 세계는 해소될 수 밖에 없는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원초적인 욕망만을 알던 파파게노는 가족을 얻어서 떠나간다. 그 역시 소박하지만 하나의 화해인 것이다.
 
모차르트가 이 정도까지 생각했을까?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시절 루소에 대한 열광, 루소와 볼테르의 대립을 명확하게 파악했던 예리함을 감안하면, 그가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를 그대로 타미노와 파미나로 승화시켰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이 깊게 자리잡았기에 세계 역사상 가장 엉망인, 심지어 글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수 있는 수준이라는 형편없는 대본에도 불구하고 "마술피리"는 헤아리기 어려운 성찰과 초월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 타미노가 처음으로 파미나에게 연정을 느끼면서 그의 여정을 시작한 계기가 된 아리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의 목소리로 들어보고, 음미하자.

타미노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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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21.

일본은 동경대학, 대만은 대만대학, 한국은 태산대학?

한국, 중국, 일본은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다. 그러다 보니 이 중 어느 나라에서 히트한 대중문화 상품은 다른 두 나라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같은 드라마가 세 나라 버전으로 각각 제작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일본 만화가 다다 카오루의 “장난스런 키스”다. 이 만화는 작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큰 인기를 끌었고,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에서 각각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줄거리가 같은 드라마다 보니 비슷한 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분석하기 아주 좋은 재료가 되기도 한다.

이리에 나오키
장즈슈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각 나라마다 이름만 다르고 그 외의 설정은 같은데(일본에서는 이리에 나오키, 대만에서는 장즈슈, 한국에서는 백승조), 아이큐 200의 천재이며 고등학교 3년을 만점으로 졸업할 정도의 우등생이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과 같은 대학에 다니기 위해 최고 명문대학 입학을 포기한다. 

이런 설정은 최고 명문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동아시아권 시청자들이 유럽이나 미국 시청자들보다 훨씬 깊게 공감한다. 입시경쟁은 마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과 같다. 아들이 하바드 대신 프린스턴 대학을 간다고 할 때 미국 학부모가 느끼는 충격과, 도쿄대 대신 메이지 대학 간다고 할 때 일본 학부모가 느끼는 충격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학부모 역시 일본 학부모에게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조금 더 살펴보면 한국판 드라마가 이 부분을 일본판, 대만판과 매우 다르게 처리했음을 알수 있다. 일본의 이리에 나오키가 포기한 일본 최고의 대학은 도쿄대학이다. 그리고 실제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은 도쿄대학이다. 장즈슈가 포기한 대만 최고의 대학은 대만대학이며, 마찬가지로 실제 대만 최고의 명문대는 대만대학이다. 그런데 한국의 백승조만 태산대학이란 대학을 포기한다. 한국에는 이런 이름의 대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일본과 대만 드라마에서는 실제 일본과 대만 최고 명문대학 이름을 극중 최고 명문대학 이름으로 사용했지만, 한국 드라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대학 이름을 사용했다.

비단 이 드라마 뿐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아예 대놓고 덜떨어진 폭주족들의 ‘도쿄대 도전기’라는 설정의 ‘드래곤 사쿠라’ 같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사실 이런 설정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만한 설정이다. 그러나 만약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면 필경 대학 이름만큼은 서울대학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는 대학으로 창씨개명 되었을 것이다. 대학 이름은 한국 드라마의 금기어인 세이다.실제 존재하는 대학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경우는 유시민이나, 박종철을 태산대학 학생 같은 식으로 부르는 것이 불가능한 사극뿐이다.

미국 드라마의 경우는 어떨까? 백악관을 무대로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의 활약을 그린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의 예를 들어보자. 이 드라마는 몇 회만 보면 등장인물들의 출신 대학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아주 상세하게 설정되어 있다.
제드 바틀렛 대통령은 노트르담 대학과 런던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다트머쓰 대학 교수였다. 다 실재하는 대학들이다. 영부인은 노트르담 대학 출신의 하바드 대학 교수다. 대변인과 비서실 차장이 서로 하바드 녀석, 버클리 녀석 그러면서 다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등장할 수 없는 설정이다.
웨스트 윙 주요 등장인물들: 위스콘신,  노트르담, 죠지타운, 하바드, 버클리, 프린스톤 등 실제 존재하는 대학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심지어 대통령의 측근이 “각하는 하버드, 예일에 다 합격했는데도 왜 노트르담 대학에 가셨나요?”하고 묻는 장면도 나온다. 이거 우리나라였다면 큰일 날 상황이다. 대사를 통해 하버드 대학과 노트르담 대학의 서열을 명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면 이 대사를 “각하는 서울대, 연세대 동시 합격했는데 왜 동국대 가셨나요?”로 바꿔보자. 그리고 이게 인기 드라마에 나온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드라마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이 이 칼럼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비유다 어쩐다 말들이 많을 것이다. 결국 이 대사는 자체 검열에 의해  “각하는 한국대, 민주대 동시 합격했는데 왜 정토대 가셨나요?” 이런 식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나 역시 대학 서열화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대학 서열화 반대, 학벌사회 반대가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아니라 일종의 위선의 표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문제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학벌사회 반대라는 그럴듯한 가치의 가면 아래, 실제로 내새끼만큼은 명문대학에 보내고 싶은 음험한 욕망이 감춰진 사회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욕망이 미덕의 가면아래 숨어있는 위선의 사회는 차라리 노골적인 욕망의 사회보다 위험하다.

이렇게 드라마에서조차 대학 서열이 드러나지 않게 대학 이름을 금기시 하는 나라라면 대 놓고 명문대학을 드라마에서도 드러내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대학 서열 의식이 낮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의 대학 서열의식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더 투철하다. 이런 이율배반 뒤에 은밀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진정 대학 서열이 드라마에 반영되는 것을 우려하는 나라라면 대학서열이라는 설정 자체를 드라마에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드라마의 현실은 가공의 대학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머지 오히려 부담없이 더 노골적인 대학 서열주의를 펼칠수 있다. "서울대학만 나오면 네 인생은 180도 달라지는거야"라는 대사는 부담스러워도, "태산대학만 나오면 돈, 명예,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이 네 것이 되는거야"라는 한층 더 오버스러운 대사는 부담이 없는 법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먼저 숨김이 없는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우선 내숭부터 제거해야 한다.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직면하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왜곡되고 굴절된 욕망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진보적 담론과 퇴행적 일상이라는 모순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고로, 서울대학만 나오면 무슨 크나큰 혜택이라도 있는 것 처럼 생각하는 분들에게 서울대학과 서울대 교수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당부드리고 싶다. 용감한 녀석들의 말대로 서울대를 열번을 나온다 한들, 어차피 안될 놈은 안된다. 그러니 자녀가 각자 자기 즐거운대로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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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5.

교육시장화 단숨에 이해하기(교육시장화의 네 바퀴)

대안교육전문지 민들레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이제 과월호가 꽤 지났기 때문에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교육 시장화의 네 바퀴
 
엄밀히 말하면 교육 상품화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한 축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해 2000년대 초반에는 거의 전 세계를 휩쓸었다. 비록 지금은 퇴조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이것이 남긴 교육계의 상흔은 아직 깊다. 상처를 차유하려면 먼저 상처를 낸 흉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상처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싸운 여러 나라 교원노조의 경험을 집대성한새로운 글로벌 질서에서 강철새장과 그 해체(Martrell, G. , 2005)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의 대부분은 이 책을 참고로 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교육의 사사화(privatization), 교육의 상품화, 경제·경영 기법의 도입, 표준화라는 네 축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진다. 이 네 축을 조금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교육의 사사화: 이른바 자율화에 관해서다.
이는 공립학교를 사립학교로 만든다는 수준의 의미가 아니라, 관료제의 폐단을 빌미 삼아 공공 부문을 비효율과 권위주의로 등치시키고, ‘민간 부문을 효율과 창의성으로 등치시키는 이데올로기다. 한 마디로 국가가 개입하면 구리고, 민간에게 맡길수록 참신하다가 된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공립학교는 구리고, 사교육 기관은 참신하다가 된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국민의 정부 이후부터 사교육이 창궐하기 시작하고,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같은 경우는 아예 학원을 학교가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상정하고, 사교육문제가 심각하다는 나라에서 유명학원 강사 출신 인사들이 진보진영에서조차 환영받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학생들의 취향과 수준이 다양한 만큼 획일적인 학교가 아니라 다양한 학교가 나와야 하며, 이렇게 학교가 다양해지려면 평준화 같은 국가주도의 학교체제는 해체되고 민간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이 길을 먼저 간 미국이나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 민간의 자율을 확대할 경우 늘어나는 학교는 이른바 귀족학교거나 엘리트 학교들이며, 버림받는 학교는 일반 국민들이 다니는 보통 공립학교들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도 이 이데올로기는 학교의 자율화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창궐하고 있다.
 
두 번째로 교육의 상품화: 학교 다양화와 선택권 강화라는 미사여구로 둔갑해 있다.
이는 교육을 일종의 서비스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상품은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되는 재화나 서비스다. 따라서 상품에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있다. 판매자는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기 위해 경쟁하며, 구매자는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기 위해 경쟁한다. 이 논리가 교육에 적용되면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상품 판매자, 경제학적 용어로는 공급자가 된다. 그리고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노동자이자 판매자가 된다. 역설적으로, “교사가 어떻게 노동자냐?”1990년대 전교조를 탄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교사를 노동자로 취급하게 된 셈이다.
교사가 노동자고 학교가 공급자라면 구매자, 즉 수요자가 있어야 한다. 수요자는 돈을 낼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학부모를 교육의 공동책임자가 아니라 서비스를 구입하는 구매자, 수요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수요자의 역할은 같은 품질을 가진 상품이라면 가장 저렴한 것을, 같은 가격의 상품이라면 가장 높은 품질의 것을 선택하여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때 문제는 품질의 기준이 사회적 가치 같은 것이 아니라 수요자의 기호, 수요자의 욕구라는 것이다. 학부모가 원하는 것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저렴한 교육상품이 학부모의 선택을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교육에서 교사의 전문성, 교육당국의 공공성을 말할 여지가 사라진다. 수요자인 학부모의 뜻을 거스르면서 사회적 가치에 의한 교육, 교사의 교육전문성에 입각한 교육을 말하면 공급자 중심주의라는 거센 질타를 받는다. ‘고객은 왕이다. 아무리 선행학습이 학생들의 정상적인 발달 속도를 교란시키고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궁극적으로는 학습 능력을 손상시킨다 할지라도, 그것을 원하는 학부모들이 많다면 학교는 그것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제 학교는, 교사는 공공기관, 전문가가 아니라 서로 학부모의 눈에 들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상품 공급자다. 선택 받으려면 튀어야 한다. 이 튀기 위한 몸부림을 정부는 점잖게 학교 다양화라는 말로 엉뚱하게 부르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학부모의 선택권 강화라고 듣기 좋게 부르고 있다.
학교는 특목고, 자율고, 자사고, 각종 특색학교, 자율형 공립고, 창의 인성학교 등등으로 다양화 되면서 그냥 일반적인 학교가 아니라 뭔가 다르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해야 한다. 심지어 혁신학교조차도 이런 다양화의 한 변종으로 간주되며, 일부 진보교육감은 혁신학교를 광고까지 한다. 그리고 학부모는 쇼핑센터에 늘어선 상품처럼 여러 학교들 중 하나를 고르고(고교 선택제), 방과후 학교 등에서는 여러 교사들 중 하나를 고르는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이 다양화와 선택권은 거짓된 다양성, 거짓된 자유다. 이는 마치 시장에서 다양한 상품들 중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행하는 것들 안에서의 자유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교육주체의 목적과 철학이 없는 교육 다양화와 선택권은 입시교육의 여러 다양한 버전, 자본과 권력의 목적에 복무하는 범위 내에서의 선택으로 제한된다. 이는 사실상 강요된 선택이 되고 만다. 진정한 교육 다양화와 선택권은 이러한 벽 너머까지 고려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주의자들은 진입장벽을 치고 이러한 다양한 교육의 진출을 가로막는다.
 
세 번째로 경제경영 기법의 도입: 이른바 효율화와 경쟁이다.
교육이 서비스 상품이라면, 이제 학교를 운영하고, 교사를 다루는 방식도 당연히 거기에 준하여 달라져야 한다. 학교는 기업이며 학교장은 교육자가 아니라 CEO이며, 학교는 교육의 원리가 아니라 경제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경제 원리의 첫 번째 항목은 효율화다. 이는 투입비용 대비 산출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산출이 아니라 비용 대비 산출이다. 그리고 이 비용에는 돈, 노력 뿐 아니라 시간도 포함된다. 투입된 비용에 대한 산출을 극대화 하는 방법은 산출을 늘리는 방법도 있지만 비용을 극소화하는 방법도 있다. 기업들은 불확실한 미래의 산출보다는 당장 눈 앞의 비용 줄이기를 선호한다. 이것을 기업가들은 경영 합리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교육의 경우 비용을 줄이려고 해도, 시스템 자체에 막대한 고정성 경상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 그나마 줄일 수 있는 것은 유동자본이라 불리는 각종 교육 기자재, 관리비, 그리고 교사와 직원들의 인건비다. 간단히 말하면 돈을 덜 주고 일을 더 시키는 방법을 찾는 쪽으로, 이른바 합리화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두 번째 원리인 경쟁이 도입된다. 돈 덜 주고 일 더 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승자에게 혜택을 더 많이 주는 경쟁보다는 패자의 몫을 삭감하여 승자에게 혜택으로 제공하는 경쟁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교육청에, 학교에, 그리고 교사에 대한 각종 평가체제가 도입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는 시도 교육청을 평가해서 그 결과에 따라 각종 교부금을 차등 지원하고, 교사들을 평가해서 성과급을 차등지급한다. 물론 아직 미국의 경우처럼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학교가 문을 닫거나 교장·교사가 해고될 수도 있는 수준까지는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학교에는 전교조나 교총이라는 강력한 이익단체가 있고, 공공영역이이라는 국민 정서가 여전히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어 속도는 느린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시장원리, 즉 경제 원리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일단 문이 열리면 시장원리는 물밀 듯이 학교에 들어서게 되어 있다.
학교를 시장에 완전히 내맡기지는 않더라도 학교나 교사를 시장원리, 기업원리에 따라 운영하고 관리하려는 시도는 국민의 저항감이 덜하다. 세계 어느 나라나 이를 위해 소위 철밥통프레임을 짜고, 불완전 고용에 시달리는 국민의 반감을 이용해 교사에 대한 마타도어를 동원했다. 이해찬으로부터 시작되어 문용린을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교사에 대한 이러한 마타도어는 거의 위험수준이었다. 물론 마타도어를 받아 마땅한 교사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런 무차별한 마타도어는 여러 가지 다양하고 진보적인 실천을 하던 교사들까지 한꺼번에 무력화 시켜버림으로써 학교 내부의 개혁동력을 억압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선생님, 저도 여러 가지 면에서 교사에 대한 마타도어가 있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떤 마타도어는 잘 안 먹히지만 어떤 마타도어는 아주 잘 먹힙니다. 불완전 고용에 시달리는 국민의 반감도 있긴 했지만, 교사들에 대한 마타도어는 국민들에게 잘 먹혔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교사들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먹혔을까?’ 교사들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외람되지만 선생님 글에서도 그 점이 언급되었으면 합니다.)
 
네 번째는 표준화·계량화다. 이는 경제 원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표준화 또는 계량화는 교육을 측정가능한 표준적인 행동과 산출물의 형태로 조작(operate)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교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바로 이해가 된다. 수요자인 학부모는 돈을 주고 어떤 학교의 교육을 구입할지 선택하게 될 텐데, 학교들 마다 교육내용을 표준적인 척도에 의해 수치화해놓으면 숫자만 보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를 평수로 비교하고, 자동차는 출력이나 연비로 비교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교육이 대단히 추상적이고 가치 함축적이고 복잡한 활동의 총체라서 표준화된 척도를 만들어내기도 또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계에 미국과 같은 처참한 경쟁체제가 정착되지 않은 것은 아직 이런 표준화 척도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교육을 특별히 더 가치 있는 영역으로 존중해서가 결코 아니다.
표준화 척도를 개발하려는 시도는 1998년 이래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그 결정판이 바로 전자화되어 운영되는 교무업무시스템’, 이른바 NEIS. NEIS에 입력되는 내용은 실로 방대하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전반을 관할하고 있다. NEIS의 입력 항목이 이렇게 방대해진 까닭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활동들을 매우 작은 단위 활동들로 세세히 쪼개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작은 행동으로 쪼개어 놓을수록 비교하기 용이해진다. 예컨대 청소를 누가 더 잘하느냐 보다는 누가 단위 시간 내에 더 많은 면적에 걸레질을 하느냐, 청소기를 더 빨리 돌리느냐 따위를 비교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다.
NEIS는 바로 교육이라는 총체적인 활동을 표준화된 수많은 단위 활동들로 쪼개어서, 여기에 이미 표준화된 입력 방식으로만 기입하도록 짜 놓은 전자처리 프로그램이다. 교사가 어떤 교육활동을 했더라도 그 결과는 NEIS의 분류 항목에 따라 NEIS의 입력요령에 따라 표준화된 형태로 입력된다. 여기에 입력될 수 없는 활동, 단위 행동으로 잘게 잘라낼 수 없는 전반적인 활동, 학생과의 교감 같은 것들은 결과적으로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버린다. 아무리 평소에 학생들과 퇴근시간 지나서까지 상담을 했어도 NEIS의 학생 상담 칸에 소정의 양식에 따라 입력하지 않으면 그건 상담이 아니다. 더 나아가 NEIS상의 입력 분류표에 포괄할 수 없는 활동들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다.
이미 시스템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면, 학생들이 NEIS에 입력된 이른바 스펙의 수량에 따라 입학사정관의 선택을 받듯, 머지않아 교사들이 여기에 입력된 실적의 수량에 따라 소위 교육 수요자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다. ‘학교정보 공시제시스템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교육 당국자가 공시 항목에 교사 개인별 실적하나면 더 추가하면 될 정도다. 여기에 교원평가까지 이미 실시되고 있다. 다만 전교조 뿐 아니라 한국교총도 여기에 격렬히 반발할 가능성이 있어서 힘에 의해 잠시 유보되어 있을 뿐이다.
교사만큼 이익단체의 힘이 강하지 않은 대학교수들은 이미 속절없이 이런 효율화·표준화·계량화의 칼날 앞에 노출되었다. 수치로 표시되는 강의평가가 보편화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교수의 연구실적 평가도 철저히 표준화·계량화 되었다. 외국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가장 점수가 높고, 국내 일반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고, 학술지들도 어떤 기준에 따라 등급과 점수가 부여되며, 논문이 인용된 횟수 등도 모두 점수로 계산된다. 그 외에 학생들의 강의평가, 각종 사회활동, 봉사활동 등 다양한 교수의 활동이 점수화되며, 이 모든 것들을 합산하면 총점과 평균이 나와서, 모든 교수들을 점수로 줄 세울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 줄 세우기 결과는 승진 및 보수에 실제 적용된다. 계급정년제가 있는 대학교수는 2년 혹은 3년마다 승진하지 못하면 그대로 해임될 수 있기 때문에 줄 세우기의 위력은 대단하다. 또 줄 세우기에 따라 연봉이 책정되기 때문에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비슷한 경력의 교수들 중에서도 연봉이 몇 억인 교수와 이천만원 남짓한 교수까지 갈라질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이런 표준화·계량화된 기준이 학문과 교육의 본성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기준 대로라면 논문 편수가 극히 적은 비트겐슈타인, 허버트 미드 같은 사람은 불과 3~4년 만에 교수직에서 탈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학문에서는 단 한편의 논문일지라도 그 내용과 그것이 가진 학문적 가치가 중요한 것인데, 이 표준·계량 척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한 주제를 평생에 걸쳐 천착하며 꼼꼼하게 논문을 쓰는 학자다운 교수는 해고의 위협에 시달릴 지격이 되었다. 교수들은 자신의 관심사, 흥미, 연구의 중요성과 무관하게 오직 논문 편수를 늘리기 위한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를 어느 교수는 논문 노가다라며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누군가가 체르니가 베토벤보다 작품수가 더 많기 때문에 더 훌륭한 음악가이며, 오페라도 한편 없고 교향곡도 겨우 4곡인 브람스는 퇴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일까? 하지만 시장원리가 적용된 대학에선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말이 현실이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학문의 자유와 교육의 중립성은 모두 공문구로 전락한다. 모든 권력은 이 표준과 기준을 만드는 자에게 집중된다. 그리고 이들은 경제학자, 경영학자들이다. 즉 경제학의 제국주의화가 관철되는 것이다.
표준화 검사의 대표주자로 일제고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고사는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품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도입 초기에는 시장이 관료주의보다는 더 자유로운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시장의 힘으로 우선 낡은 관료제부터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주장은 일부만 옳다. 신자유주의가 관료제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나, 국가 권력은 교육에 대한 통제권을 선선히 시장에 넘기지 않는다. 다만 교육에 대한 공적 책임만 시장에 떠넘겼을 뿐이다. 교육을 직접 통제하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번거롭다. 하지만 시장 원리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히려 교육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모든 학교에서 공통적으로 치르도록 되어 있는 표준화 검사’,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일제고사. 관공서까지 출근시간을 조정해야 하는 대입수능이 바로 대표적인 표준화 검사다.
물론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각 학교에는 자율권이 주어지며, 학부모들은 각 학교를 자유로이 시장 상품처럼 선택한다. 하지만 시장의 모든 상품에 그 가치를 표시하는 가격표가 붙어있듯이, 학교에도 공통의 가치척도가 필요한데, 바로 표준화 검사 점수다. 이 시험점수가 바로 가격표다. 학부모들은 각 학교의 점수를 보고 학교를 선택한다.
이런 상황에서 각 학교들은 아무리 폭넓은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할지라도 표준화 검사 시험점수를 높이기 위한 경쟁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게 된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고등학교들이 정상적인 교육과정까지 위반해가면서 알아서 대입수능 입시교육에 올인하는 것을 보면 이는 쉽게 확인된다. 정부는 구태여 개별 학교수준까지 통제할 필요가 없이, ‘표준화 검사의 문항만 통제하면 된다.
우리나라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대입수능 문제 출제과정에 모인 자부심 가득한 교사와 전문가들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것 보다 사실상 정부가 임명한 단 한사람만 통제하면 되는 묘안까지 등장했다. EBS 문제집 70퍼센트라는 기상천외한 기준이 그것이다. 이제 정부는 일선 학교들을 통제하기 위해 단 한사람, EBS 사장만 통제하면 된다. 효율의 극치가 아닌가? 최근 정부가 물의를 일으켜가면서까지 EBS사장을 낙하산 임명하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런 메커니즘을 알게 되면 왜 정부에서 그토록 고등학교의 학교별 수능점수를 공개시키려고 압력을 행사하며, 왜 소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한 교사들을 파면하면서까지 표집검사로도 충분한 학업성취도 조사를 모든 초·중학교에 일제고사로 치르게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교육 시장화를 통해 누가 무엇을 얻나?
 
지금까지 교육시장화를 움직이는 네 가지 원리가 학교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떠오르는 의문은 도대체 이걸 통해 누가 무엇을 얻는가 하는 것이다. 당파적으로 대답하면 교육시장화를 통해 이득을 얻는 집단은 자본가다. 그 이득은 직접적인 수준과 간접적인 수준에서 관철된다.
 
직접적인 이득, 즉 교육을 통한 이윤의 획득이다

자본은 축적을 멈추면 죽는다. 따라서 자본은 축적을 위해 점점 더 많은 시장을 요구한다.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던 곳을 시장화, 즉 식민지로 만듦으로써 이를 해결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배제된 영역은 더 이상 이윤이 창출될 가망이 없는 지역 외에는 없다. 더 이상 식민화 할 곳이 없다.
이때부터 시장화는 영토적 개념이 아니라 영역적 개념으로 바뀐다. 자본은 이전에는 이윤 창출의 영역으로, 시장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영역, 차가운 경제의 원리가 아닌 전통·전승·문화의 원리가 통용되던 영역을 하나하나 시장화 하면서 축적을 계속했다.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먼저 예술, 다음은 학문, 그리고 가장 마지막이 교육이다. 자본은 돈을 벌 목적으로 교육을 하는 행위를 정당화해 달라고 정부에게 압력을 행사했고, 성공했다. 영국, 미국, 그리고 일부지만 일본에서 이미 국가나 지자체가 기업가에게 학교를 넘기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이른바 사회적 기업가가 설립하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아무리 화려한 수사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표는 이윤이다.
하지만 교원조직과 시민사회의 저항이 심할 뿐 아니라 기대할 수 있는 이윤도 크지 않은 초·중등 교육은 자본 입장에서 매력이 크지 않다. 그러나 대학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나라 최대 대학인 서울대학이 국립대학에서 대학법인으로 바뀐 것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다. 서울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그 막대한 지적재산들이 더 이상 국가의 것, 즉 공공의 것이 아니라 학교의 것이 된 사건이며, 앞으로 서울대학교는 공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활동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업료 수입만 가능한 초중등 학교와 달리 대학은 막대한 지적재산권과 막강한 연구 인력을 거느리고 있다. 대학은 이들을 활용하여 로열티 수입을 올리거나, 각종 특허 기술들을 개발 판매하며, 심지어는 기업의 연구개발을 위탁 대행하기도 한다. 우리보다 이 흐름이 앞서간 많은 나라에서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 아니라 거대한 연구개발 기업으로 바뀌어나가고 있다. 미국에서 교수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제 첨단 과학· 공학 분야가 아닌 인문사회계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장식품에 불과하며, 보다 실용적인 대학에서는 아예 구조조정 대상이 된다. 또 경제·경영 교수들이 마치 기업의 이사진처럼 대학의 지도부를 형성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관철되었는지는 최근 10년간의 중앙대학교의 변천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간접적인 이득으로는 부유층의 감세 및 사회의 친 시장화가 있다

20세기의 역사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계속되는 양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는 그 양보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로, 이른바 복지사회의 정점이다. 이 양보는 자본가의 기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 대한 높은 세율에 의해 이루어졌다. 1980년대 이후 강력하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양보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자본의 반격이었다.
모든 신자유주의 정권이나 정치가가 이구동성 외치는 구호는 감세. 물론 감세의 혜택은 부자들이 대부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세금을 덜 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더 많은 돈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부지출을 무작정 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공공부조나 복지지출을 줄여서 그만큼의 세금을 덜 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 중 교육지출은 집중적인 공격대상이다. 이들의 눈에 교육지출은 쓸 만한 노동자가 될 소수의 학생에게만 집중되어야 하는데(이게 소위 말하는 수월성 교육), 쓸모없는 학생들까지 챙기고 있어서 지극히 낭비가 심하다. 이런 지출은 삭감해야 한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저항에 부딪치기 때문에 효율성, 선택과 집중 등의 수사가 동원되다. 그러면서 교육에 대한 공공 지출은 경쟁을 통해 될 성 싶은 곳에 더 집중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우수한 학교, 학생에게 혜택을 더 주는 방향 보다는 전체적으로 교육지출을 줄이고서, 쳐지는 학교에 대한 지출을 삭감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경우에서 보듯, 이 경쟁에서 패하여 공공지출 혜택에서 제외되는 학교는 한 결 같이 가난한 지역, 소수민족 지역의 학교다. 이것을 매우 거칠게 표현하면 부자들이 "내 아이와 나를 위해 일해 줄 인재들을 교육하는 학교에만 내 세금을 사용하라"는 요구다. 그럼 다른 학교는? 시장에 맡긴다. 그들 학교가 배제되고, 그들 학생이 소외되는 것은 그들의 교사, 그리고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 되는 시장에 맡긴다.
 
지금까지 교육에 적용되는 시장원리의 네 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어떻게 교육을 황폐화시키는지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 시장원리는 절대 노골적인 모습으로 교육에 들어오지 않는다. 항상 자율화, 다양화와 같은 매혹적인 탈을 쓰고 스며든다. 자율과 다양은 해방적 실천과 자본 사이의 칼 날 같은 경계이며, 상호 포섭이 이루어지는 전선이다. 교육운동가들은 빈틈만 보이면 파고드는 이런 시장원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단호한 거부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교육에 관철되는 시장원리는 게다가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시장원리가 관철된 학교에서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승자독식 경쟁의 당연함, 시장의 편재성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라게 된다. 이들은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어떤 불평등도 감수할 것이며, 오히려 퍼주기 복지에 반대하며 보수정당에 표를 주는 흥미로운 유권자로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교육 시장화의 가장 큰 효과일지 모른다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2013. 2. 1.

진보진영은 먼저 익숙한 것들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1) 민족주의

이번 대선 평가도 대충 마무리 되어가는 모양이다.  중요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이털남에서 다 다루어졌으니 여기에 대해 추가로 왈가왈부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저런 팟캐스트에 나와서 이야기 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빼먹은 것들이 있다. 일부 출연자는 넌지시 암시하기도 했지만 역시 주변을 의식하여 과감하게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이털남이 아무리 돌직구를 던지라 요구해도, 돌직구 던졌다 망할 가능성은 보수보다 진보진영에서 더 크다. 돌직구 던지는게 더 꺼려지는 진영이라면 사실 진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하여간 그렇다.

진보진영이 이렇게 서로 말조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까닭은 이른바 진보 운동권 출신들은 몇가지 신화에 사로잡혀있고, 심지어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를 믿고 중독된 사람들은 이성적인 대화의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화와 중독대상을 거론하면 화를 낸다. 그러나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유능한 보수 vs 무능한 진보" 의 이 치명적인 이분법은 계속될 것이고 앞으로도 승리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독을 치료하는 첫단계는 중독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듣기싫고 기분나빠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일을 할 사람은 어차피 진영 내부에서 별로 인기도 없고, 조직적 관점도 없다고 비판받는(맙소사, 저 사람들은 인간관계 잘 유지하고 잘 어울리는게 조직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이다.  그럼 이제 진보가 벗어나야 할 중독을 차례로 소개해 나가겠다.

1. 민족주의, 그리고 국가주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물론 민족이나 국가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가 되어버리면 문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민족이나 국가가 판단의 준거가 되면서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사실 이건 한중일 모두의 문제다. 3개국의 역사책을 보면 모두 저마다 나름의 중화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를 자기민족을 선, 다른 민족을 악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일종의 춘추필법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문제는 어떠한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할 진보진영조차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일반인보다 더 중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중독되면 한국인 혹은 대한민국의 문제점이나 과오를 보지 못하거나, 보더라도 부정하거나, 심지어는 미화한다. 이를테면 서울의 지하철은 매우 불편하다. 일본이나 쿠알라룸푸르 보다는 편리하지만, 타이페이, 홍콩, 싱가포르, 심지어 방콕보다도 불편하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은 "비록 지옥철이지만 그래도 난 서울 지하철이 더 좋다."이렇게 말한다.

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10개에 싱가포르와 토쿄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왜 서울이 없냐? 서울이 제일 안전하다"라고 외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한 "계속 지옥철"일수밖에 없으며, 세계적으로 사기, 횡령, 우발적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로 머물러 있을수 밖에 없다. 즉  발전도 진보도 없다.

사실 이렇게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중독되는 증상은 민주시민의 훈련이 덜 된 나라에서, 삶이 고단할때 발생한다. 양차대전 사이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최근에는 미국에서조차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보진영의 나름 선진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반 시민들보다 더 중독증이 심하니, 그 모양이 몹시 찌질하다. 그렇게 스스로 눈가리고 귀가리다 보니 "박근혜는 친일파 딸" 이거 한방으로 이길수 있다고 정신승리하면서 '다까끼 마사오"하고 외쳐대고, 그 말한 이정희를 영웅취급했던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40,50대 진보단체 회원들까지 이렇게 부화뇌동 하는걸 보면 기가 막히다.

하지만 이미 시민들은, 적어도 40대 이상의 시민들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이미 상당수 시민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며, 냉철하게 자기 삶을 돌아본다. 중국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이미 삶 속에서 터득한 사람들이다. 민족주의적 소아병에 중독된 이른바 진보인사들보다 한참 더 나아가 있는 것이다.

사실 민족이나 국가에 중독되는 현상은 우리나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역시 그런 경향이 있다. 상당수 미국인들은 "여기가 미국이라 가능한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그 자긍심은 때론 중독의 경향까지 보인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미국은 진보진영이 그런 국가, 민족 중독증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제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더러운 전쟁을 할때, 이를 종식시킨 것은 바로 미국내의 치열한 반전운동이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미국에서 태어나"라는 노래를 통해 "여기가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찌질한 노동자의 삶"을 규탄했다.

아래 동영상을 3분 10초 부분부터 보기 바란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미드 "뉴스룸의 한 장면이다."



유명한 뉴스앵커인 윌리엄 맥커보이에게 한 대학생이 "미국이 가장 위대한 나라인 이유가 뭐냐?"라고 묻자 맥커보이는 "미국이 뭐가 위대하냐?"라며 독설을 퍼붇는다. 그 덕분에 인기가 떨어지고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이 앵커는 보수파다. 즉, 민족, 나라에 중독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눈, 내 민족, 내 나라의 치부까지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눈, 이게 배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하물며, 진보라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다.

이런 냉정한 시각을 갖추면 종군위안소가 설치되었던 자리에 한국인 종군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려는 계획을 싱가포르가 불허한 조치를 놓고 싱가포르에게 욕질하지 않고,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싱가포르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이른바 숙칭 대학살의 피해자로 누구보다도 일본이라면 이를 가는 나라다. 숙칭 대학살은 일본군이 단 일주일동안 싱가포르에서 3만명에서 많게는 9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대만행이다. 심지어 싱가포르의 국부인 리콴유 전 총리도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했을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이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에 한국인 전범도 상당수 섞여 있었고, 리콴유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인보다도 오히려 한국인이 더 잔학하게 굴었다고 한다. 그러니 싱가포르 눈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원수인 것이며, 수만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은 장소에 한국인 추모상을 만든다고 할때 이게 석연치 않은 것이다. 당시 싱가포르 대학살, 그리고 마닐라 대학살(10만명 추정)에 가담했다가 전범으로 체포되어 일본군과 함께 처형당한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시켜서 했다.", "안그러면 일본이 우리를 갈구기 때문에 가혹하게 할수밖에 없었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런 항변은 유태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의 항변과 내용이 같다.

그리고 1932년, 만주에서 중국마적들이 조선인을 죽인다는 오보(조선일보의 오보!)에 흥분한 조선인들이 화교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수백명을 죽이고, 곳곳에서 중국인 가게나 차이나 타운을 파괴한(특히 평양은 차이나 타운이 먼지가 되어 버림) 사실도 있다. 이 냉정하고 잔혹한 역사에 대해서 민족주의에 중독되면 "만주 침략을 앞둔 일본의 한, 중 모략 책동" 드립을 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 그런 모략을 했을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제까지 멀쩡히 이웃으로 살고 있던 중국인들을 마구잡이로 때려죽인 일을 어떻게 합리화 할 수 있는가?이건 관동대지진때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강간한다는 헛소문에 흥분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마구 학살한 관동대학살 사건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런 과거로 보건대, 당시 한국군들이 주로 싱가포르나 필리핀의 화교들을 살상하는 일에 별 가책이 없었거나 적극 가담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수 있는가?

일본의 관동대학살에 분노하면 우리는 일본에 대한 증오밖에 배우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인 등에게 가한 그리고 그 뒤에 베트남인들에게 가한 잔혹한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면, 우리는 그런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막는 장치를 만들수 있고, 또 일본에게 제대로 된 반성과 대비책을 요구할 수 있게된다.

일본에게 독일을 본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일본을 욕하는 쾌감 외에 우리에게 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독일을 본받아 화교들에게 사과하고 소수민족과 공존할수 있는 노력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일본의 만행을 "일본인"의 특성에 돌리면서 "우리는 안그래. 착한 한국인이까"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실제로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를 더 훌륭한 민족으로 만들어 나갈수 있다. 이게 진보다.

하지만 이런 시야 확대와 노력은 민족, 국가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진보적인 지식인은 이런 중독에서 깨어나 차갑고 맑은 시야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거기 편승하거나, 더 깊이 중독되어 있다면 이를 어떻게 진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지금 진보진영이라 불리는 사람들, 또 그쪽 후보 지지자들 사이에서 '외노자'라는 용어가 경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걱정스럽다. 적어도 우리는 1932년보다는 더 성숙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인장이 쓴 책들  셀프 스폰서: 부정변증법의 저서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