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30.

체육복 등교를 허용하라. 학교는 고행의 장소가 아니다.

하지가 지나면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이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정부의 이른바 블랙아웃 경고와 에너지 절약 시책에 따라 학교는 특수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반 가정집과 마찬가지로 전기를 아껴서 산업시설에 더 많은 전기가 가도록 해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일반 가정집은 20평에 많아야 네다섯명이 거주하지만 학교는 20평에 30명 이상이, 그것도 일생중 체온이 가장 높은 시기의 아동과 청소년들이 펄펄뛰며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집에서야 정 더우면 활동을 멈추고 오수를 즐기던가 할 수 있지만, 학교는 그렇다고 쉬어서는 안되는 곳이다. 더워도 공부는 해야 하며, 최신 교육학에 따라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학습을 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냉방과 관련한 어떤 배려도 받지 못하고 있는 학교는 전기요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냉방을 거의 가동하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 많은 학생들이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학교 건물 자체도 어마어마한 열을 흡수한다. 대부분의 학교건물은 콘크리트로 무성의하게 지어진데다가 이렇다할 단열재도 이중창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단열도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는 학교건물은 한여름의 햇볕을 받으면 손대면 뜨거울 정도로 달아오르고, 이렇게 달아오른 열기는 빈약한 단열재를 뚫고 교실에 그대로 복사된다. 핀란드 사우나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특별한 배려나 조치는 꿈도 꾸지 못하며 그저 공공기관 실내온도 28도 기준에 맞추어 냉방하라는 공문시행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엉뚱하게 대부분의 다른 공공기관들은 에어컨의 설정 온도를 28도로 맞추어 가동하라는 것으로 이 공문이 해석되는데, 학교는 기상청 발표 외부 기온이 29도가 되어야만 에어컨을 가동한다는 쪽으로 해석되고 있다. 쉽사리 달아오르는 학교건물의 특성에다 많은 학생들의 체온이 뭉쳐 있는 교실 특성상 외부 기온보다 3-4도 높을 교실 상황은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을때는 거론이 되지만, 냉방을 해야 할 근거로는 거론되지 않는다.

게다가 전기요금 절약이 학교평가에 반영된다는 낭설까지 떠돌면서 학교들은 웬만하면 냉방을 가동하지 않고 버티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고 졸음이 쏟아지는 교실에서 공부라는 것을 강요당한다. 혹자는 교무실에는 에어컨이 가동된다면서 교사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만, 교사들의 일터는 교무실이 아니라 교실임을 유념하자. 교무실의 에어컨은 교감용일 뿐이다.

그래도 학생들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옷을 가볍게 입고, 풀어서 입고자 한다. 현재 대부분 학교의 교복은 기본적으로 정장 스타일이기 때문에 한 여름에 냉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교실에서 활동적인 수업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나마 바람이 잘 통하고 특히 남학생의 경우 반바지를 입을 수 있는 체육복 차림을 선호한다.

그런데 일부 학교에서는 이것마저 강하게 규제하면서 학생과 학교간의 불필요한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일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는 고가의 생활복 등교는 허용하면 저렴한 체육복 등교는 불허하면서 앞으로 이 학교에서 여름을 더 보낼 일이 없는 고3 학생들의 원망을 듣고 있다. 심지어 체육시간 이외에는 교복 풀세트를 갖출 것을 강요하고, 복장 검사를 도리어 강화하는 학교까지 있다. 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도착증 환자가 아닌 다음에야 있을 수 없는 처사다. 더구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처사들이 대개는 교사들의 여론이 아니라 시원하고 드넓은 공간을 홀로 사용하는 교장의 개인적인 취향과 고집, 혹은 그것을 미리 읽고 과잉 충성하는 교감이나 생활지도부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강요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조치다. 냉방을 제한하면서 복장까지 더 까다롭게 규제하다는 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인들이 근무하는 공공기관조차 냉방을 줄일 경우 복장을 완화한다. 정장대신 간편복을 입고, 노타이로 출근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이 앞장서서 반바지 출근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성인들이 간편복이나 노타이로 출근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학생들에게는 교복이 아닌 옷을 입고 등교하는 것이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 게다가 체육복은 교복과 마찬가지로 학교의 마크와 이름표가 새겨져 있어서 사실상 유니폼이라는 점에서 교복과 같은 옷이다. 구태여 막을 이유가 없다.

사실 학생들도 체육복차림으로 등하교 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모양이 안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체육복 등교는 더운 날씨에 냉방도 되지 않는 교실에서 수십명이 무더기로 공부를 해야 하니 선택한 궁여지책일 뿐이다. 따라서 굳이 학생들의 단정한 복장을 봐야만 한다면 그 복장으로 활동이 가능하게끔 실내 온도를 낮추어 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궁여지책이라도 허용해야 한다. 학교는 공부를 하고 활동을 하는 곳이지, 도를 닦고 고행을 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의 체육복 등교를 허용한 송파구의 P중학교에서는 눈에 띄게 수업 분위기와 학습 효과가 좋아져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만족해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체육복 등교를 허용함으로써 학습 효과를 높인 학교들의 사례는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다. 안 그래도 입시경쟁에 사교육에 고문당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제발 하나라도 덜 괴롭히자.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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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8.

남북정상회담록의 노무현과 NLL 논란 한방에 정리하기

진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인층들을 중심으로 "노무현이가 김정일한테 서해바다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따위의 말이 먹히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늙은이가 젊은이를 가르쳤습니다만 지금은 젊은이가 늙은이를 가르쳐야 하는 역사회화의 시대입니다. 그때를 위해 최대한 간단하게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NLL관련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사회수업의 일종.

먼저 NLL(Northern Limit Line:북방한계선)이 무엇인지 부터 살펴봅시다.  NLL은 일부 어버이님이 주장하는 것 같이 바다에 그어진 휴전선(군사분계선)이 아닙니다. 다만 그 동안 사실상의 분계선의 기능을 해 왔을 뿐입니다. 일종의 임시라인입니다. 그러니 NLL은 포기해야 하는게 맞습니다. NLL을 지우고 분쟁의 소지가 없는 정식의 분계선을 긋는것이 원칙입니다. 


땅에는 휴전선을 그었지만, 바다에는 나중에 협의하기로..


이 분쟁은 NLL이 처음 그어지는 첫단추 때문에 비롯되었습니다.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의 휴전협정 당사자인 UN군(대한민국은 여기에 끼지 못했음)과 북한, 중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조인합니다. 이때 오늘날의 휴전선은 협정문에 포함되어 정확하게 상호 추인되어 명확한 국경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상 경계선은 북한의 12해리설(연안으로부터 12해리까지: 1해리는 18.8Km)과 UN의 3해리설(연안과 최외곽 섬으로부터 3해리)이 충돌하면서(국제 관례를 따져보면 이 경우는 3해리설이 맞습니다. 안 그러면 부산 앞바다도 일본 영해가 되니까요)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연해의 섬 및 해면'에 관한 통제권은 625 전쟁 이전을 기준으로 하되, 서해5도는 UN군 관할로 한다는 단서규정만 두고 일단 미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클라크 UN군 총사령관은이 여기에 따라 서해상에 38선 이남구역 중 북한 연안 3해리 남쪽, 그리고 서해5도수역을 연결하는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하였습니다. 협약에 따라 해상경계선이 확정될때 까지의 임시 분계선을 설치 한 것이니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유엔군사령부는가 이를 대한민국 해군에만 전달하고 북한에는 공식 통보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대한민국 해군에게 "저 선 북쪽으로 넘어가지 마"라고는 통보했으나 북한 해군에게 "저 선 남쪽으로 내려오지 마"라고는 통보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분쟁의 소지가 싹틉니다.

침묵은 곧 동의다


그런데 북한 측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 이 선이 북한에 일언반구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그어졌지만 북한이 1973년 까지는 이 선을 그은 것에 대해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년이나 침묵을 했으니 이건 사실상 동의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NLL은 어느새 해상분계선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73년 12월 이후 북한이 여기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에서 연장선을 그은 뒤 그 이북 수역을 자신들의 해역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후 1999년까지도 계속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니 NLL은 남한과 미국만이, 그리고 북한이 주장하는 해상경계선은 북한만 인정하는 상황에서 남한의 해군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심지어 대한민국 법률에도 북위 37도 이북인 소청도 이북 지역은 영해에 대한 규정이 모호합니다. 헌법에는 한반도와 부속도서가 모두 영토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북한이 또 다른 국가인 상태이니 빚어지는 일입니다. 이럴 때는 어쨌건 협상을 해서 양측이 상호승인한 정식 분계선이 합의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정식 분계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렇게 분쟁의 소지가 있는 선이 어느 한쪽의 힘에 의해 실효적으로 지배된다면 다른 쪽 역시 힘으로 이를 위반하고자하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분쟁이 끊이지 않게 되는데 특히 분쟁이 잦은 수역은 서해안의 황금어장인 연평도와 백령도 사이 수역입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황해도 연안에서 출어한 북한 어선이 NLL을 지키면 고기 잡을 곳이 없습니다. 자연히 침범할수 밖에 없는데(서쪽에서 중국 어선도 그렇게 침범하죠), 폐쇄적인 북한 정부는 이 어선들을 또 감시해야 하니 군함이나 경비정도 실실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계속 긴장상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공동어로 구역이니, 평화수역이니 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제대로 된 분계선이 확정되는 것은 협상의 협상을 거듭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니, 그 사이 기간에 분쟁의 소지가 되는 수역을 같이 쓰자, 뭐 이런 취지입니다. 말은 그런데, 이걸 가지고도 또 서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더 보기 위해 줄다리기가 심합니다.

아래의 지도는 김정일이 제안한 공동어로 구역인데(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 남한이 주장하는 경계와 북한이 주장하는 경계 사이의 교집합이 되는 지역을 공동으로 평화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남한은 실효적으로 100% 지배하고 있던 수역을 북한과 반빠이 해야 하니 손해입니다. 북한은 아주 많이 남는 장사죠. 김정일이 노무현에게 제안했던 것도 이것이며, 박근혜가 2011년에 하겠다고 했던 것도 이겁니다.  만약 노무현이 이 안을 받았다면 NLL을 사실상 포기했다 어쩐다 하는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 안을 받지 않습니다.



이때 노무현은 NLL 흉을 한참 봅니다. 협상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수법이죠. 그래 놓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쪽 사람들한테는 이게 실제적인 힘이 있으니" 운운하면서 자기가 NLL을 양보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댑니다. 노련한 외교술이죠.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결국 협상은 제자리입니다. 그래서 노무현은 다음 그림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NLL을 당장 없에는 것은 곤란하지만, 너희들 어업 문제도 있고 하니, 어선들을 NLL남쪽으로 내려오도록 해 주고 감시는 군함대신 경찰이 하도록 하자, 그런데 기왕 그러는것 남쪽 어선들도 NLL북쪽으로 올라갈수 있도록 하자, 즉 NLL을 경계로하여 남북 일정 구역을 공동어로 수역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안이 나오자 김정일이 당황합니다. 북한쪽에서야 NLL남쪽으로 내려가도 바다지만, 남한쪽에서는 NLL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황해도 연안에 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평화수역으로 하고 군함을 빼자고 하면 서해안에서 북한 해군은 사실상 기동이 불가능합니다. 북한 최대의 해군기지인 해주항 눈앞까지 남한 어선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상황입니다.   

이걸 읽고 있는 노무현은 "그렇게 하는 김에 개성에서 해주를 잇는 거대한 평화구역을 만들자"까지 치고 나갑니다. 사실상 북한더러 "돈 벌게 해 줄테니 무장해제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이 "아니, 해주는, 해주만큼은" 하며 버티게 되고, 그래서 해주 앞바다를 제외한 다음 그림 같은 공동어로 수역을 합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연평도에 포격을 가했던 포대들이 집중된 동산곶 일대도 훤히 남한 어선에게 노출되는 상황이니 김정일이 이걸 정말로 실행할지는 사실 의문입니다. 하지만 평화 하자는데 대놓고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NLL문제를 재론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며, 최소한 애초 그들이 주장하던 저 남쪽 아래로 그어 놓은 해상분계선은 사실상 폐기처분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김정일이 주장하던 노란색이 얼마나 작게 줄어들었는지, 그리고 그 중 절반은 NLL북쪽으로 넘어갔음을 유념해 주세요)



대화록 공개로 최고 존엄이 손상된 북한


이번 대화록 공개로 큰 상처를 입은 쪽은 국정원, 박근혜 뿐 아니라 김정은 쪽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정일은 최고존엄이라고 불립니다. 한 마디로 신이죠. 그런데 이 대화록을 주욱 읽어보면 이 신적인 김정일이 여우같은 노무현에게 말려서 애초에 주장하던 해상경계선을 다 내주고 NLL남쪽으로 조금 내려갈 권리, 그것도 북쪽을 같은 면적 내어주고 나서야 겨우 얻어내는 위치로 내몰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심지어 "해주는 , 그건 안돼"하며 쩔쩔 매는 모습까지. 청문회에서 증인들을 교묘하게 몰아세우던 노무현의 달변이 김정일을 상대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수꼴들이 노무현이 북한 변호사 노릇했다며 흥분하는 대목도 요약하면 "내가 미국이랑 국제사회 앞에서 네 변호 얼마나 해주었는줄 알아? 그러니까 너도 미국하고 마냥 그러지 말고 좀 부드럽게 굴어." 이며, 김정일 앞에서 미국 욕했다는 대목도, "그래 네 말대로 미국 나빠. 나쁘긴 한데 일짱이야. 어쩌겠어? 그러니 마냥 니편 들어줄수는 없다고." 이러면서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립을 자초하는 자주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문 열고 나오라고." 라는 훈계까지 하고 있죠. 

허어, 김정일은 노무현의 적수가 전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최고존엄 조롱이라며 흥분하고 있습니다. 누가 조롱한 것일까요?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에게 우롱당한 최고존엄의 모습이 노출된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2002년 박근혜는 김정일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2013. 6. 26.

부정변증법의 민주시민교육: 자유민주주의는 언제부터 대한민국 헌법에 등장했는가?

뉴라이트들이 입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이 읊조리는 말이 자유민주주의다. 놀라운 것은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늘 다른 어떤 것의 반대말로만 사용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북한을 절대 용납할 수 없고, 거기에 동조하는 자는 헌법에 반하는 국기사범이라는 흐름을 따라간다. 여기에서 아무리 예리한 분석을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이란 의미 뿐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주장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기실 반공인 셈이다. 뉴라이트나 어버이연합을 가장 당황스럽게 하는 질문은 그러니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입니까?"일 것이다.

그럼 자유민주주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뉴라이트들의 천조국인 미쿡의 위키피디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Liberal democracy is a form of government in which representative democracy operates under the principles of liberalism. It is characterized by fair, free, and competitive elections between multiple distinctpolitical parties, a separation of powers into different branches of government, the rule of law in everyday life as part of an open society, and the equal protection of human rights, civil rights, civil liberties, and political freedoms for all persons.

아린지 영어 교육을 옹호했던 뉴라이트 분들이야 이 정도 영어는 술술 읽겠지만, 요점만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대의정치이며, 그 특징은 1)복수의 자유로운 정당들의 경쟁에 의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2)권력의 분립, 3)개방된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일상의 법치, 4) 모든 사람들의 인권, 시민권, 시민자유, 정치적 자유의 평등한 보장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 따위의 말과는 천지 차이이며, 오히려 독재의 반대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구태여 '자유'자를 붙일 이유도 없이 민주주의와 혼용되는 말이다. 미국 대통령은 연설할때 '민주주의'를 지키자라고 말하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유'를 지키자 이런 말은 자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느냐 마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 언론 등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며, 각 권력기구의 권한이 얼마나 잘 분산되고 시민의 견제를 받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반공의 이름으로 정치적 자유를 축소시키고 언론을 통제한 유신정권은 가장 전형적인 자유민주의 적인 것이다.

어쨌거나 종북 색출에 혈안이 되고, 검열을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운동권 출신을 문제삼는 새누리당의 주장은, 이 나라의 정체성이 어디로 가는것이냐며 좌경화를 우려한다고 떠들어댄 이 나라 대통령의 주장은 위에서 제시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을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시민참여정당, 시민참여 정부를 전면에 내세우고 언론자유를 최대로 보장한 노무현 대통령이 제대로된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정치학에서의 이야기고, 대한민국 헌법으로 와 보면 또 사정이 다르다. 뉴라이트들이 국부로 내세우는 이승만의 1공화국 당시 헌법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아예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1호헌법(제헌헌법) 전체를 다 뒤져봐도 민주주의라는 말은 나오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제헌헌법 전문을 한번 보자.

제헌헌법 전문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年 7月 12日 이 헌법을 제정한다.

이 전문에서 밝힌 대한민국의 목표는 3.1운동의 독립정신 계승, 민주독립국가의 재건, 민주주의의 여러 제도의 수립,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세계평화에의 기여 등이다. 여기에 자유민주주의라거나 혹은 공산주의와의 대결, 공산주의 확산 방지 따위의 냉전적 용어는 들어있지 않다. 이 전문은 4.19 혁명으로 수립된 2공화국때도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제정한 3공화국 헌법에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3공화국 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에다가 4.19의거와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반공이 등장한다면 5.16 이념이 그나마 미약한 근거가 될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4.19 의거로 수립된 2공화국이 아니라 그 정부를 무너뜨린 박정희가 헌법에 4.19 계승을 명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공을 국시처럼 내세우고, 그것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며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박정희때 부터로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3공화국, 더 나아가 3선개헌때까지도 박정희의 헌법에서조차 대한민국의 정체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였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 헌법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악명높은 유신헌법때 부터다. 유신헌법 전문 중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라는 대목이 새로 등장했다. 여기서 새로 등장한 용어가 둘인데 하나는 1) 평화적 통일, 다른 하나는 2)자유민주적 기본질서다. 흥미로운 것은 통일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인데, 이는 북한의 적화통일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청화통일을 주창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엉뚱하게 기본질서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는데, 정치학적으로 이는 형용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만들때 김일성과 서로 교감을 이루면서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같은 시기에 김일성은 북한에서 사회주의 헌법이란 것을 만들면서 1인 독재체제를 굳혔다. 이때 김일성은 "자주적 사회주의국가"로 북한을 규정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이탈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박정희는 "자유민주적 질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한 것이다.

어쨌거나 유신시대조차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가치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었다. 그러니 유신 정권은 헌법정신에 입각한 통일이라는 주장을 하면 헌법에도 없는 반공의 이름으로 잡아 족친 스스로를 부정한 정권인 셈이다. 또 5공화국 시절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다'라고 국회에서 발언한 국회 부의장 유성환이 국보법 위반을 체포되기 까지 한 것은 탈헌법적 조처라 할 수 있다. 유신헌법에서조차 대한민국의 국시는 '통일'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는가?
박정희가 죽고 광주를 피로 물들인 뒤 집권한 전두환의 5공화국 헌법에서도 이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시 헌법 전문을 보면,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제5민주공화국의 출발에 즈음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4.19 의거의 정신이 삭제되었다. 광주에서 혼이 난 전두환의 멘붕이 느껴진다. 또 5.16 혁명의 이념도 삭제되었다. 전두환이 5.16을 부정한 셈이다. 따라서 반공정신 역시 헌법에는 아무 근거도 없게 되어버렸다.

다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자유민주적 질서를 세운다는 유신헌법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렇게 자유민주주의는 확고하게 만들어야 할 어떤 질서가 되고 말았다. 결국 박정희와 전두환 등의 독재자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를 실시하고 싶었지만 독재라는 말을 차마 쓸 수 없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을 창안한 것이다. 김일성이 자주적 사회주의란 말을 창안한 것 처럼. 지금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그것은 독재의 다른 말에 불과한 것이며, 유신헌법 이전에는 헌법에 등장하지도 않는 것이다.

불행히도 현행 헌법도 완전한 민주주의 헌법이 아니다. 헌법 전문만 보아도 유신헌법에서 5공화국 헌법으로 이어내려온 그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계승하는 정신 목록에 3.1운동뿐 아니라 임시정부, 그리고 4.19 의거를 추가했을 뿐이다. 5.18이나 6월민주항쟁의 정신도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신의 잔재인 '자유민주주의'가 여전히 헌법 전문에 남게 되었다. 속히 대한민국의 원래의 건국정신인 '민주주의'로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교육자들을 추방하고 있는 야바위꾼들의 학교


교사의 일은 겉 보기에는 지루하고 때로는 째째하다. 어린 학생들과 일상 생활을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겉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그 내밀한 부분은 바깥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다이나믹하고 변화무쌍하다. 배움이 일어나는 현장이며 변화무쌍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동과 청소년과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는 무덤덤하게 넘어갈 아주 작은 단초만 가지고도 학생들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바뀔 수 있고, 어른들은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넘어갔을 작은 단서만 가지고서도 학생들은 엄청난 규모의 앎과 상상을 초월한 창조적 산물을 내어놓곤 한다.


교사의 일이란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런 작은 단초들을 마련하기 위한 소소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코웃음이 나올정도로 사소한 그런 아이디어들 말이다. 그래서 훌륭한 교사는 겉에서 보면 아무것도 안하는 교사로 보인다. 그저 교실만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것 처럼 보인다. 교실 풍경을 봐도 아이들이 뭔가 하고 있고, 그 사이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유유자적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교사는 선생이 없어도 아이들이 충분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없으면 제대로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존재다.


따라서 이런 교사는 뭐 하나 양적으로 환산하여 바깥으로 내세울 실적이 없다. 이들의 진정한 실적은 학생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실적을 굳이 확인하고자 한다면 학생들과 함께 2주 정도 생활하면서 이들이 학생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보면 된다.


그러나 양적지표를 매겨서 순위를 매기고자 하는 관료주의자들이 이런 노력을 할 턱이 없다. 결국 이런 훌륭한 교사들은 점점 학교에서 무시 당하고 모욕 당한다. 대체로 아이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고 교육에만 매진하는 교사들일수록 각종 성과급이나 평가에서는 최하등급에 가까운 등급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 역시 성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비교육적인 일에 열과 성을 쏟는것도 견디기 어렵다. 결국 이들은 점점 학교를 떠나고 싶어한다. 학교가 이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반면 정해진 교과서의 정해진 내용을 학생들에게 쑤셔 넣는 것을 수업이라고 생각하는 교사들에게 교육은 행복한 작업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이 된다. 하루의 수업은 퇴근시간까지 견디고 버텨야 할 고역이고, 한 학기의 수업은 방학이 올때까지 견디고 버텨야 할 고역이 된다. 이런 교사들의 삶의 목표는 이 지긋지긋한 노동을 벗어나는 것, 즉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최소로 줄이는 것이 된다. 학생들과 함께하지 않는 자리로 옮기는 것을 '승진'으로 여기고,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자신의 지위가 '상승'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런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 즉 수업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들이 국어 교사라면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으며 기쁨을 나누는 일상적인 수업보다는 거창한 '시쓰기 대회'를 개최하거나 '학생 1명당 1년에 시집 한권 쓰기 프로젝트' 같은 프로그램을 펼치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천박한 교육관료집단의 시선은 학생들과 조용히 시를 음미하는 교사가 아니라 시쓰기 대회, 시집 펴내기 프로젝트 등을 펼치는 교사에게 스폿라이트를 집중한다. 이렇게 교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교사가 아니기를 열망하는 교사들의 경쟁으로 인해 학교는 수업 이외의 온갖 폼나고 뭔가 보여주는 사업과 프로젝트로 몸살을 앓는다. 그리고 정작 이런 사업과 프로젝트의 자잘한 실무는 교실에서 행복을 느끼고자 했던 교사들에게 분담된다.


최근 들어 고경력 교사들이 선망하는 자리가 된 상담교사직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학생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것이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임무다. 그런데 이런 상담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겉 보기에는 아무 일 안하는 것 처럼 보이는 상담교사가 최고의 상담교사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어느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아이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적절한 조치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담교사가 학교에서 존재감을 자꾸 드러내는 것은 마치 정부에서 국정원이 자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만큼이나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교실에서 탈출하는 방편으로 이 자리를 선택한 교사들은 일상적인 상담과 만남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거대한 프로그램을 계속 들여온다. 각종 상담 프로그램, 진로활동 프로그램을 들여와서 뭔가를 보여주며 홍보용 사진을 찍는다. 물론 외부의 시선은 묵묵히 아이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상담교사 보다는 이런 저런 상담,진로 프로그램과 행사를 개최하는 상담교사를 유능하다고 평가한다. 이제 학교에는 이런 행사들까지 추가된다. 물론 자잘한 실무는 교실에서 행복을 느끼고자 했던 교사들에게 분담된다.

이는 학교 관리자나 행정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사들의 수업이 훨씬 편리해지고 학생들의 생활의 질이 높아지도록 학교의 시스템과 시설, 기자재 등을 손질하는 일을 한다면 그 일은 매우 즐겁고 창발적이다. 밖에서 보면 째째해 보이겠지만 말이다. . 식당 배식대의 작은 변화에도 학생들의 행복이 크게 달라질수 있고, 각종 물품 구입을 조금만 더 신경쓰면 같은 예산으로 훨씬 좋은 기자재를 사용할 수 있고, 냉난방 시스템을 조금만 손보면 전기요금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시원하고 따뜻한 여름과 겨울을 보낼 수 있다.


교사가 신나게 가르칠 수 있고, 학생이 행복할 수 있도록 티나지 않게 소소하게 학교 시설과 시스템을 손 보는 것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관리자라면 학교 구석구석을 손 보고 다니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바깥에서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관리자는 든 자리가 나지 않는다. 이런 관리자가 있는 학교는 겉 보기에는 평온하고 평범하다. 그냥 모든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며, 얼른 보면 살짝 나태해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진정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런 소박하고 평범한 역할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관리자는 일상적인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뭔가 대외적으로 내세울 큰 행사를 열고 싶어한다. 그런 행사에서 개최자로 나서서 폼나게 한 말씀을 던지고 싶어한다. 그런 행사에 참석하는 고위관료, 유명인사들에게 폼나게 인사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학교는 또 행사와 프로젝트의 폭격이 쏟아진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일상적인 교육활동이 그만큼 위축된다. 관리자가 이런 행사와 프로젝트를 중요시하면 교사들도 수업은 제때 제때 교실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런 행사와 프로젝트에 매달릴 것이다. 이렇게 학교가 망가져 간다.

이렇게 자기가 하는 작고 소소한 일을 창조적으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거창한 일을 벌인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작고 사소한 아이디어들을 고민하는 사람 덕분에 학교가 움직인다. 그런데 저 거창한 일들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학교를 움직이는 소중한 인력이 위축되고 좌절하고 마침내 학교를 증오하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치명적인 손실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학교는 거의 이 지경까지 와 있다. 이제 이들을 잃어버린 학교는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이들의 존재감을 뼈져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든자리는 안나도 난자리는 크게 나는 것이다.

2013. 6. 23.

KBS 수신료 안 내는 방법

원래 이 만화는 노무현 시절 정연주 사장을 비토하던 수꼴 단체가 제작한 것인데, 그 절차를 너무 잘 설명해 놓아서 충분히 재활용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걸 네그리는 재전유 한다고 했고, 들뢰즈는 배치를 달리한다 했습니다. ㅋㅋ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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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1.

운동권 출신 검사가 뭐가 문제라는건가? 난 운동권 출신 교사다. 천번이라도 같은 상황이라면 운동권일 것이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6월 17일 황교안 법무장관을 상대로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데, 주임검사를 하필이면 운동권 출신 검사에게 맡기냐”고 비판했다고 한다. 이걸 비판이라고 보도하는 언론도 안습이지만 일단 비판이라고 치자. 그 비판은 국정원 사건 공소장을 쓴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의 담당검사가 서울대 부총학생회장 출신이라는 것을 두고 한 발언이라고 한다.

기가 막힌다. 운동권 출신이란 말을 부정적으로 그것도 극히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태의 말에 따르면 운동권 출신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공소장을 써서는 안된다. 그러면 이 논리는 자연스럽게 검사들을 운동권 출신과 비운동권 출신으로 분류하자는 주장으로 발전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운동권 출신들을 공직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발전할 것이다. 바로 매카시즘인 것이다. 

운동권이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길래 6억에 대한 조세포탈범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강간법, 성추행범도 과거지사로 퉁치고 넘어가는 새누리당 의원인 김진태가 수십년이 지나도 용서할수 없는 대죄라도 지은 양 입에 게거품을 무는가? 김진태 의원은 83학번이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대학을 다닌 세대다. 

1983-1986년이 어떤 시절인가? 전두환과 그 꼬봉 노태우가 독재를 휘두르며 나라를 농단하던 시절이다. 이명박은 교묘한 트릭으로 나라돈을 꼬불쳤지만, 전두환은 대놓고 몇조 단위로 나라돈을 삥뜯었다. 언론은 국정원(! 당시 안기부)의 감시하에 제대로 된 기사를 쓰지 못했고, 학생들에게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토론식 수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초등학교 교사를 빨갱이로 몰아 해직시켰다(당시 그 매카시즘 기사를 보도한 당시 MBC 기자는 천수를 못누리고 죽었다. 사필귀정이다. 지옥에 있을 것이다). 피의자도 아닌, 피의자의 후배라는 이유로 영장도 없이 끌려간 대학생이 경찰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 흔한 대통령 선거조차 없어서 체육관에서 2000명이 모여서 대통령을 뽑았고, 대통령 선거를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려서 어느날 의문사 사체로 발견되던 시절이다. 노동조합도 만들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착취당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공장에서 머리까지 스포츠로 깎고, 복장 두발규정 어기면 해고당하던 어이없던 시절이다.

운동권이 누구인가? 이런 시대에 저항한 사람들 중 좀더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당시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중 대다수는 이들을 지지했고, 동경했고, 이들에 대해 부채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자기들은 나서서 싸우지 못하는데, 감히 나서서 싸우는 이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느낌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당시 대학에서 소수였다. 심지어 오세훈조차 당시 나서서 싸우지 못함에 대해 미안함을 담고 있을 정도였다.

나 역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운동권 출신 교사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운동권 출신임을 처음부터 밝히며, 그 시절에 운동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길을 선택했는지 알려준다. 물론 나는 때로 운동권으로 사느라 학업을 등한시하고, 이 땅을 바꾸기 위해 유학을 포기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상황에 또 직면하면 다시 운동권을 선택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상황을 천번을 만나면 천번 운동권이 될 것이다.

그런데 김진태는 운동권 출신이 무슨 천형이라도 되는 양 운동권 출신 검사를 문제 삼는다.   그는 대학 시절 운동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운동권에게 동조한 적도 없는 학생이었음에 분명하다.(안철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임을 명심하자). 도대체 그 시절, 시대를 외면하고 자기 공부만 한 사람이, 그래서 다른 운동권들이 학점 깔아주면서 세상을 더 좋게 만든 빈틈을 파고들어 고학점을 누린 이들이 어떻게 감히 운동권 출신이라 안된다 만다 운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 시절에도 유신시절과 5공시절을 정상적인 시절로, 유신과 5공에게 저항하는 것을 빨갱이라고 부르는, 그래서 심지어 6월 항쟁 당시 서울 시청앞에 탱크를 몰고가서 시민들을 총으로 쏘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자유도 민주도 부정하는 사람이며,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하고, 이 나라를 북한처럼 몇몇 지배층이 독점하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운동권 출신 검사 운운하는 김진태 의원은 자신이 대학시절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음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철 없는 일베들이야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몰라서 그렇다 치지만 그 시절을 제대로 경험한 83학번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렇게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뇌리 속에는 4.19, 5.18,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공식적인 역사가 된것에 대한 강한 반발, 그리고 유신, 5공에 대한 가없는 동경과 열망이 숨어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민주주의의 적이며, 반헌법 세력이다. 

김진태 의원에게 권한다. 귀 당은 운동권 출신 정도가 아니라 운동권 수괴 출신의 최고위원과 도지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재오와 김문수를 보라. 서울대 부총학생회장 정도의 검사가 문제라면, 수많은 총학생회장들을 주렁주렁 거느리며 지령(!)을 내렸던 이재오와 김문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운동권 시절이 잘못되었다고 밝힌적이 한번도 없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80년대때 힘써 싸웠던 것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진태는 말단 검사 따위 신경쓰지 말고 당신 당 이재오, 배일도, 심재철 의원, 그리고 김문수 도지사나 몰아내도록 하라. 그들이 진짜 거물 운동권들이었으며, 현재 지위도 일개 검사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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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9.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통계청의 조작: 조선시대라면 실록을 조작한 꼴

국정원의 선거 개입에 이어 이번에는 통계청이다. 이명박 정부하에서 계속해서 정부에게 유리한 통계치가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조작은 아니다. 숫자를 뜯어고치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산출 방식이다. 

통상 통계조사 분야에서는 6년 정도가 지난 통계결과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새로 개발된 통계 기법들이 많기 때문에 그 결과를 새 기법으로 보정할 수 있으면 보정한다. 이 보정을 하지 않으면 엄청난 통계 왜곡이 가능하다.


예컨대 1980년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을 1240 달러로 배웠다. 그러나 2012년에 작성한 통계지표에서는 1980년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을 3220달러로 표시하고 있다. 산출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걸 반영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30년 동안 7배 증가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9배 증가한 것으로 엄청난 뻥튀기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숫자를 지우거나 바꿔치지 않고서도 말이다.


이번에 양심선언으로 폭로된 내용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새로운 통계기법은 항상 통계 수치와 현실이 어긋나기 시작할때 도입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갱신되어야 통계치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런데 새로운 통계기법이 정권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사용할수 없고, 입맛에 맞는 부분만 사용하고, 이런 식이라면 이건 통계가 아니라 쓰레기다. 현실과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그렇다. 그 동안 우리는 통계청이 발표한 0.310을 일단 사실로 받아들였다. 물론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니계수로는 대만보다 낮다. 따라서 대만보다 우리나라가 빈부차가 적은 나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빈부차를 나타내는 또 다른 중요한 지표인 빈곤선 이하 인구 비율이 대만은 1.5%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는 16.5%나 된다. 국민 여섯명중 하나가 빈곤층인 나라가 60명중 하나가 빈곤층인 나라보다 지니계수가 더 낮다? 매우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믿고 사용했다. 왜냐하면 통계청에서 발표한 수치였기 때문이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통계치는 매우 신뢰로운 것으로 권위를 인정받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나 언론사에서 그 타당도나 신뢰도에 대해 따지지 않고 그대로 원자료로 사용한다. OECD나 세계은행등 각종 국제기구에서도 의심없이 원자료로 사용한다. 통계청이 이런 신뢰를 받는 이유는 특별히 유능하거나 기법이 탁월해서가 아니다. 그 기관이 통계청이기 때문에 사기업이나 사설 연구소와 달리 철저히 중립적으로 산출한 객관적인 자료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계청이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제멋대로 통계치를 발표했다? 이렇게되면 이건 재앙이다. 


우선 통계청의 자료들을 원자료로 활용한 각종 2차자료와 연구들도 모조리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특히 사회과학 분야 논문들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폭격을 맞는다. OECD등 국제 기구의 자료도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더 나아가서 한국에서 제출되는 통계자료나 회계자료는 모두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막대한 신뢰비용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이후 한국 학자들이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려면 예전보다 훨씬 까다로운 검증절차를 거쳐야만 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국제기구, 국제비즈니스계에서도 한국에서 제출되는 자료, 보고서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진실성을 입증하라는 까다로운 요구를 붙일 것이다. 


IMF때 한국경제가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까닭도, IMF총재의 모욕적인 발언을 감내해야 했던 까닭고 통계수치가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통계수치가 죄다 엉터리니 이 나라의 경제상황을 IMF제대로 파악할수가 없었고, 이런 믿기 어려운 상대에게 돈을 빌려주는 IMF가 고자세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국정원의 선거개입보다 더 큰 재앙이다. 국정원이야 애초에 이승만이 만든 특무대, 방첩대, 박정희가 만든 중앙정보부 등 그 전신 시절부터 구린 기관이었고, 없어져야 할 기관이었다. 유신과 5공시절을 겪은 사람들이라면 국정원이 하는 말은 하나에서 열까지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반면 통계청은 그렇지 않다. 수학이 그토록 여러 과목중 왕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계청은 나라의 숫자를 총 책임지고 있는 기관이다. 그런데 은근슬쩍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니 거짓말을 강요당한 것이다.


과거 조선왕조때는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었다. 국가의 기록은 이후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일점 반획의 왜곡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기개있는 사관들은 왕이 아무리 협박해도 사초를 왜곡하지 않았다. 귀양은 예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도 자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사마천의 '사기'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 세계 최고의 기록으로 인정받는 까닭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중요한 기록은 서술이 아니라 수치로 기록된다. 오늘날 통계청은 조선시대 사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사관이 무너지면 왕조가 무너지는 것이듯, 통계가 무너진다면 이 나라의 모든 가치체계와 신뢰체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국정원 따위의 뻘짓보다 나는 이게 더 슬프다. 나라가 속속들이 다 망가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기초공사마저 망가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젠장 우울증이 도질까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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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6.

관료들이 판치는 교육부의 또 다른 대형 사고: 일진에게 학교폭력 단속권을?

대한민국 교육부는 참으로 해괴한 곳이다. 다른 전문 분야 부처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예컨대 국방부의 경우 장관, 차관 이하 대부분의 중요한 직책이 군인이나 군인출신으로 되어 있다. 법무부는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들이 주요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부는 교사, 교수, 교육전문가 출신이 아니라 "행정고시 출신 관료"들이 주요 직책을 꿰어차고 있다. 이런 해괴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은 교육부 외에는 재경부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들 고시출신들의 문제점은 교육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제를 안다고 착각하는" 모피아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그나마 모피아들은 아무리 뻘짓을 해도 시중의 기업이나 은행이 그 짓거리를 그대로 따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교육부의 행시관료들의 뻘짓은 각종 시행지침이 되어 학교에 내려온다. 뻘짓이 반드시 현실화 되는 것이다. 

이주호 장관시절 수많은 뻘짓을 한 이 관료들이 올해는 어째 잠잠하나 했더니 마침내 대형사고를 쳤다. 물론 아직 실시예정이니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이들의 그들의 행태를 보면 일단 언론에 뿌렸으면 무조건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부작용은 시행해 가면서 고치겠다고 우기면서.

바로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학교폭력 우범지대에 대한 단속권을 주어 학교폭력을 줄여 나가겠다는 기상천외한 방침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정책을 내어 놓게 된 동기는 나무랄 것이 없다.  "그동안 학교폭력 대책이 가해학생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처벌하는 등 징계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처벌보다는 "선도 위주"로 정책 전환을 하겠다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 선도가 오히려 완장을 채워서 권력의 맛을 보게 하는 것이라니 그 발상은 혹시 이 담당자가  "*사부 일체" 시리즈 오타쿠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여기에 대한 우려는 이미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고, 상식적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니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교육부 담당자라는 사람들이 아직도 학교폭력의 개념 정리조차 되지 않고, 그 교육적 해결책에 대한 마인드도 없다는 참담한 현실이다.

이들이 자신있게 내어 놓은 이 "창조적"인 정책의 논리는 이른바 일진들에게 일정정도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면 이들이 책임의식과 규범의식을 갖게 되어 학내에 질서가 잡힌다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학교폭력은 학교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그 사각지대에서 힘센 무법자들이 설쳐대면서 일어나는 현상, 즉 몇몇 깡패나 양아치들의 범법행위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범죄자들이 준법정신이 부족해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19세기적 사고방식의 학교판 변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오늘날의 범죄사회학 범죄심리학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범죄자는 수많은 사회적, 심리적 변인의 복합적 영향 속에서 탄생한다. 도덕성의 부족, 준법성의 부족은 범죄의 원인이 아니라 그 역시 일종의 결과이거나 혹은 매개변수에 불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교폭력 역시 많은 연구들을 통해 도덕성의 문제보다 복합적인 문제임이 밝혀지고 있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대체로 고도의 스트레스 상태, 지나친 긴장상태, 자아존중감의 손상,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의 강화, 그리고 타인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부족 등의 요인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가해자가 된다. 고도의 스트레스와 긴장상태에서 인간이 공격적이 된다는 것은 이미 심리학의 상식이다. 

또한 학교 동료들의 유형, 무형의 동조화 현상이 이들을 더욱 부추겨 폭력을 강화 지속시킨다는 것이 최근 학교폭력 관련 연구의 정설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적 조치는 1) 학교 동료들이 가해자들에게 동조하지 않게 함으로써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가 환영받거나 지지받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것, 2)가해자들이 처한 심리적 위기를 발견하여 해결해 주는 것, 3) 가해자 뿐 아니라 학교 동료들 모두 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이를 느끼게 하는 것의 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들에게 완장을 채워서 폭력 우범지역을 순찰하게 하겠다는 발상에는 이런 교육적 고민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세계적 흐름에도 전혀 맡지 않는다.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확인하려는 권력욕이 학교폭력 가해자의 주요 가해 원인인데, 이를 교정하는 대신 이것을 이용해서 이른바 질서를 잡으려는 발상은 조폭의 폭력성을 발산시켜서 정치적 반대파를 진압시키는데 활용했던 이승만 정권의 만행까지 연상시킨다.

게다가 효과라도 있으면 좋겠으나, 그것도 아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심각한 양상을 보여주는 학교폭력은 일진, 짱 등의 횡포가 아니다. 남학생들의 경우는 어떤 형식으로든 매겨진 서열 구조에서 최 하위에 속한 학생들이 겪는 "장난이라고 주장되는" 짖궂은 말과 행동들이 학교폭력의 전형적인 양상이며, 여학생들의 경우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교우관계망 속에서 별난 아이로 인식되어 고립되는 학생들에 대한 사회적 무시가 가장 심각한 학교폭력이다. 이들은 학업스트레스, 지나친 경쟁이 고조시키는 긴장감 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더욱 이러한 서열구조와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학교폭력은 서열구조가 가지는 폭력성 자체가 해소되고, 학생들이 스트레스, 긴장, 자기현시욕, 지배욕 등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해결되기가 어렵다. 

그런데 가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완장을 채워서 그들을 서열 피라미드의 첨탑을 만들어주겠다는 발상이 이런 섬세한 목표 달성을 위해 전문적으로 설계된 교육적 방책으로 보이는가? 도리어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면 서열이 상승하는 상을 받는다는 잘못된 신호를 던져주기 십상이다. 그리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여학생들의 학교 폭력에는 완전 속수 무책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남학생들의 폭력 역시 노출되지 않는 저강도 폭력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폭력은 주동자를 찾기도 어렵고, 사실상 학급 전체가 서로를 강화시키며 공동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학교폭력에서 순찰해야 할 우범지역이란 곳은 없다.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별명 한 번 더 부르는 것도 폭력이며, 이걸 학급 친구들이 일제히 부르면 심각한 학교 폭력이다. 그 밖에 각종 메신저나 SNS를 이용한 사회적 폭력 역시 그 파괴력은 주먹으로 두드려 맞는 것 보다 더 심각하다. 주먹은 신체를 통해 정신을 파괴하지만 이런 종류의 폭력은 정신을 직접 파괴한다. 게다가 이런 저강도의 집단 폭력은 뚜렷한 가해자가 없기 때문에 완장을 채울 짱을 찾기도 어렵다. 

그런데 교육부 관계자는  "현장 실사를 나가보니 일진에게 단속권을 주면 학교폭력이 더 판을 친다는 우려와는 달리 학교폭력이 오히려 줄어들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가 생각하는 학교폭력이 무엇인지 최근 학교폭력에 대한 국제적 수준의 논문들을 읽어 보았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게다가 이 관계자는 "학생에게 지위를 부여해 책임의식을 갖도록 해 학생 스스로가 학교폭력은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걸 몰라서 폭력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알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 특히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가해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진술이 "장난이었다. 그렇게 힘들어 할 줄은 몰랐다."이다. 가해자들의 대다수도 학교폭력이 나쁜일이라는 것은 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인식이 아니라 학교폭력은 좋지 않다는 인식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느낄수 있는 공감능력과 감수성이며, 넘치는 것은 이유 모를 분노와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스트레스와 긴장이다. 관료들에게 권한다. 굳이 가해자들에게 뭔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이수하도록 해서 실적을 올리고 싶다면 차라리 합창단이나 밴드부를 편성하도록 하자. 혹은 각 학교 일진들끼리 팀을 짜서 축구리그를 돌리자. 그 편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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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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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1.

시간제 정규직 교사 선발: 신종 교사 카스트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정부가 빠르면 올 하반기부터 교사와 공무원 신규채용시 시간제 정규직을 1만명 채용할수도 있다고 밝혔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89695.html). 주당 40시간 미만을 근무하면서도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인 교사와 공무원을 대폭 선발하겠다는 것이다. 이 자체는 나쁘지 않은 정책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에 기반한 지식정보사회에서는 노동시간의 유연한 배치가 필수적인데, 대부분의 직장에서 고용조건이 풀타임 정규직이 아니면 모두 비정규직인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의 피해와 저항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그 동안은10명이 하루 8시간 일하는 직장에서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80시간에서 64시간으로 축소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두명을 해고하는 방식으로 처리했고(정리해고), 이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이 발생했지만, 시간제 정규직 개념이 도입되면 6시간 씩 일할 사람 8명을 뽑거나 반일제로 일할 사람 네명을 뽑으면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교육과정 운용에 따라 일시적으로 혹은 비교적 장기적으로 수업 시간이 크게 감축되는 교과가 있다. 그런데 풀타임이 아니면 비정규직인 구조 때문에 이 교과를 담당하는 교사들은 두 학교, 심지어는 네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수업해야 했다. 만약 시간제 정규직이 정착되면, 해당 교과 교사들 중 소득의 감소를 감수하더라도 수업시간 감축을 희망하는 교사들을 찾으면 된다.

문제는 신규 교사를 선발할 때 미리 풀타임 정규직과 시간제 정규직으로 나누어 뽑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리고 정부 발표를 보면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렇게 되면 우선은 신규교사 채용 인원수가 대폭 늘어날 것이니 청년실업 해소에도 도움이 되는 것 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불가피하다.

먼저 시간제 정규직 교사가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지부터 따져보자.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교과 시수와 교사 수의 일시적인 불균형, 출산, 육아, 학위 공부 등 인생 설계 과정에서 전일제로 근무하기 어려운 제반의 사정이 있는 교사들에 대한 고려 등이 될것이다.

이 중 교과 시수의 불균형은 누구도 미리 예측하기 어렵다. 이건 교육과정이 바뀌다 보면 발생하는 현상이다. 누구도 앞으로 10년 뒤의 교육과정을 미리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어떤 교과의 시수가 늘어날지, 줄어들지 미리 예측해서 전일제와 시간제의 선발 비율을 어떻게 할지 미리 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출산, 육아, 학위공부 등의 여러 사정은 첫임용을 기다리는 청년 교사들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전일제 근무와 시간제 근무를 분리하는 것은 청년 교사가 아니라 경력교사에게 필요한 것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쁜 것은 선발단계에서부터 전일제와 시간제를 구별하면 청년 교사들이 교직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카스트화 된다는 것이다. 임용되는 순간부터 근무시간, 보수가 다르다. 그리고 시간표만 보면 저 교사가 전일제인지 시간제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들이 교직생활을 서로 존중하고 상호 인정하면서 시작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지나치게 인간성을 낙관하는 것이다. 오히려 청년 교사들간의 알력과 열패감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게다가 처음 선발할 때 시간제를 별도 선발했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제 교사들이 전일제 근무를 희망할 때 이들을 받아줄수도 없다. 임용 당시에 바로 카스트가 된 것이다.

심지어 교육당국은 시간제 교사의 수요를 해마다 정확하게 맞출 수도없다. 대개 수요를 너무 적게 예측해서 교사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될 경우 결국 비정규직 교사로 채워야 한다. 그렇게 되면 청년 교사들은 전일제 정규교사, 시간제 정규교사, 비정규교사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너무도 반교육적이다.

교육은 교사들간의 학생들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교사들은 평등해야 한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교사들의 지위가 평등하다. 교장 역시 교사와 평등하다. 이런 조건이라야 자유롭고 제약없는 토론과 협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임용때부터 이렇게 신분과 처지가 다른 교사들로 가득한 학교에서는 이런 자유롭고 의미있는 토론의 문화가 정착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교직에 시간제 정규직이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 정도다. 교직생활을 하다 보면 전일제 근무가 부담스러워 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예컨대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거나 육아 부담이 큰 경우, 그리고 고경력 교사들처럼 체력적으로 부담이 큰 경우가 그렇다. 그 밖에도 다양한 사유가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들이 학교에서의 근무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꾹 참고 전일제 근무를 하거나 아니면 휴직 혹은 사직 할 뿐이었다. 휴직, 사직을 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동료 교사들에게 민폐를 끼쳐야 했고, 크고 작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공부하는게 죄, 애 키우는 게 죄, 나이 먹은 게 죄가 된 것이다. 이는 이론과 현장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현장 교육학자의 양성, 교사의 대다수인 여성들의 경력 단절 예방, 그리고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갖춘 노장파 교사들의 체력적 부담 경감 등의 여지를 앗아가 버린다.

그러니 정부와 교육당국은 신규 교사 채용을 전일제, 시간제 투트랙으로 선발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표를 하지 않기 바란다. 해 마다 경력 교사들, 특히 출산과 육아를 앞둔 교사, 경력 20년 이상의 고경력 교사들에게 시간제 근무 희망의 사유, 희망하는 근무시간과 시간제로 근무할 기간(해당 기간이 경과하면 전일제로 복귀) 등을 기록한 시간제 정규직 근무희망원을 받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매해 총 감축된 수업시간수를 확인하고 그 만큼의 신규교사를 전일제 정규직으로 뽑는 것이다. 즉 신규교사 선발은 전일제 정규직으로 하고, 이후 이들이 인생 경로를 설계하고 항해해 가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시간제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제 정규직을 도입한 정부의 취지와 교육현장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길이다.

2013. 6. 10.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가장 큰 문제는 반민족이 아니라 반민주 (1)

지난 포스팅에서 밝혔듯이 교학사에서 발간하게 될 한국사 교과서에는 뉴라이트 단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필자들이 속해 있으며, 이들이 저자들 중 주도적 역할을 했음도 분명하다. 따라서 교학사 발간예정 역사교과서란 말 대신,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아직 발간되지 않은 책의 내용을 미리 단정지어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요 필진의 그 동안의 언론 인터뷰 내용 등을 중심으로 비판하고자 한다. 이 교과서와 관련하여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힘주어 강조한 내용이라면 교과서에서도 반영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언론에서 떠든 말 따로, 교과서 내용 따로라면 표리부동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저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저들에 대한 잘못된 비판(주로 진보진영에서 제기된)부터 논박하고 시작하려고 한다. 잘못된 비판은 오히려 팀킬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에서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에 대해 던지는 비판들 중 가장 무딘 것들은 1) 회원들 중 현대사 전공자가 없고, 사회과학자들이 많다 라는 것과 2) 일제 강점기를 미화한다 라는 것이다.

1)의 경우 근현대사라는 영역이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구분이 모호하며, 오히려 진보진영의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충실히 밝히고 사건을 재구성하는 수준을 넘어선 거대 담론과 인과론을 펼침으로써 유사 사회과학 노릇을 하려고 했다는 역 비판을 받을 수 있다.

2)의 경우는 더 심한 팀킬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뉴라이트 교과서라고 해도 일제 강점기를 종합적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미화하지 않았다. 증거를 대라.” 이렇게 나오면 매우 손쉽게 무너질 수 있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이고 악의 근원이며, 일제 강점으로 인해 만악이 만개하였다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비현실적이다. 만약 그렇게 기술된 교과서가 있다면 이건 선동물이지 결코 역사책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때 조선이 빠르게 근대화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조선 왕조보다 일본 총독부가 더 유능한 통치자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일제시대는 3·1운동의 저항에 일본이 놀라서 통치 방식을 전환한 뒤, 전쟁으로 인해 유화책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1936년 까지는 총칼과 강압에 의해서만 유지된 것이 아니다. 조선 왕조 말기 50여년간 일어난 민중들의 반란이 국권을 피탈당한 일제 강점기 36년 보다 더 많았음도 엄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당시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대하는 태도가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혹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대하는 태도와 달랐음도 명백하다. 일본은 이 지역들을 새로 획득한 자신의 영토로 생각했으며, 상당히 공을 들여 가꾸었다. 심지어 폐허 상태로 방치되고 있던 우리나라의 문화재와 유적들을 새로이 발견하고 정비한 것도 일제 강점기때의 일이다.

아직도 끄덕없이 버티고 선 한강 철교, 그리고 체계적으로 확대시킨 보통교육 제도 등을 보면(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주민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잠깐 털어먹고 갈 지역으로 여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건 사실의 문제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과연 친일일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침략과 만행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는 일본을 비난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독일을 칭찬한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한다. 자기 나라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식민지 종주국이 오히려 우리보다 나라를 더 잘 가꾸고 문화유산마저 더 잘 이해하고 있었음은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할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근대화론을 친일로 몰아 붙이는 주장의 배경에는 “근대화=선”이라는 관점이 녹아들어있다. 따라서 일제가 우리 나라에게 어떤 “선”도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산업화에는 어떤 가치도 들어있지 않다.

만약 일제강점기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도입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거나, 4·19 혁명때 발휘된 우리나라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일제강점기때 일본들 통해 도입된 근대 정치사상 덕분이라고 한다면 이는 친일 교과서라고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농업 경제가 산업 경제로 바뀌고, 봉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바뀌는 것, 온정적 혈연주의사회가 합리적 관료주의 사회로 바뀌는 것 등은 사회구조와 제도상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지 후자가 전자보다 더 좋다는 식의 가치판단이 들어 간 것이 아니다.

일본은 몽골제국 같은 약탈 사회로서 식민지 침략을 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로서 초과 이윤의 획득을 위해 식민지 침략을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역시 자본주의화 되어야 하며 근대적인 시장경제가 수립되어야 하며, 근대적 산업 노동자의 소양을 갖추게 해야 한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 사회를 근대화 시키고, 자본주의화 시키고, 시장경제에 필요한 인프라와 여러 조건을 갖추는데 일조한 것은 그들의 착취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일이다. 근대사회인 일본이 전근대사회인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근대화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일제 강점기때 조선이 근대화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에게 고맙다고 여길 이유도 없으며, 은혜로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이건 변명의 여지 없는 친일 교과서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다시 그 이면, 즉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 시키는 동기가 제국주의적 착취와 수탈에 있었음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한다면 이는 오히려 균형잡힌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뉴라이트 교과서 집필진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 보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의열 투쟁만 강조하고 외교 활동이나 실력양성 운동을 소홀히 다루었다”는 주장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작 이 뉴라이트 교과서 저자들의 역사관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 대한 관점이다. 이들은 4·19, 부마항쟁, 5·18,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사를 부정하고 있다는 혐의가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시간에는 이들의 해방 이후 역사관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뉴라이트 교과서 집필진의 생각을 비판하도록 하겠다. (또 다시 저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 편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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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4.

뉴라이트 교과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현대사학회 주장 중 옥을 가려내야 한다

한국현대사학회 핵심 간부들이 참여한 역사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다. 여기에 대해 네티즌들은 뉴라이트 친일교과서가 나오게 생겼다면서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교과서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친일/반일의 구도로 몰고가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나는 소위 진보진영이 걸핏하면 만사를 외세매판/민족자주 의 대결구도로 몰고가서 빛과 어둠의 대결이라는 일본 판타지 만화 수준의 사회인식을 강요했던 점을 매우 언짢게 기억하고 있다. 이른바 ‘100년 전쟁’은 그 단순한 현실인식의 극치이며, 그걸 수업용으로 어떠한 비판적 균형 장치 없이 학생들에게 틀어준 교사는 쉴드 칠 여지가 없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반대 급부로 뉴라이트의 역습을 얻어맞는것도 일정부분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들이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들 중 상당수가 소위 진보 역사교육계를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는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학회 소속 연구자들의 주장 중에는 일부 귀담아 들을만한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이 현대사학회=뉴라이트 라는 공식을 모략이라고 반발할 법도 하다. 그러나 5월 30일 아산재단에서 발표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의 상당수는 실제로 뉴라이트, 극우파라고 불릴만한 소지가 있다. 좌편향을 공격하면서 우편향을 답이라고 내어 놓으니 이거야 말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된 것이다.

그래도 이날 발표 내용들 중에는 함께 뭐묻은 개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러니 먼저 이날 발표 내용 중 옥을 먼저 가리고 난 뒤, 나머지 돌들을 뭉쳐서 버리도록 하자. 이른바 진보사학쪽(사실은 민족사학)에서는 옥이 어디 있느냐고 흥분할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옥은 있었다.

김도형 통일미래사회연구소 연구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근대사 서술이 “지금 시점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건 욕먹을 주장도 친일파 주장도 아니다. 사실 지금 시점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있다면서 이른바 민족주의 사학을 비판한 대표적인 학자는 좌파학자는 임지현이며,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 역시 “한중일 모두 중화주의에 빠져서 고대사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예컨대 김춘추를 일컬어 “외세를 끌어들여서 동포인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한 사대주의자” 이런 식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영토개념을 고대에 들이대고, 그 범위 안에 거주한 사람을 모두 한 민족으로 간주해야 성립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거의 어떤 시대의 사건을 무리하게 현재 시점에서 재단하지 말고, 과거 그 시점에서 일의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김연구원이 태어나기 100년전 독일 ‘역사주의 학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역사를 어떤 합목적적인 행로로 해석하려는(사실상 현재를 목적으로 두고 역사를 현재를 향한 경로로 바라보는, 그리하여 정해진 미래의 경로도 있다고 주장하는) 헤겔주의에 반발하면서 나온 것이다. 이들은 역사적 사건을 현재로 이어지는 어떤 인과성에 고리에 무리하게 넣어서 ‘설명’하려 하지 말고, 그 시점,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일 역사학파의 영향을 받은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와 근대를 역사의 어떤 필연적 단계가 아니라 16-17세기 유럽의 몇몇 조건의 우연한 조합에 의한 결과로 파악한 것이 바로 이 학설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베버는 서유럽, 인도, 중국을 비교하면서 서유럽의 자본주의화는 당시 성장하던 상공업 계급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우연한 조합의 결과이며, 따라서 인도경제와 중국경제가 시간이 지나면 자본주의 경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현재를 목적으로 삼고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려고 하면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현재가 되어야 할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방해 받았나 하면서 악당을 찾는 단순한 역사관이 되는 것이다.  이건 너무 쉬운 길이며, 지적으로 게으른 길이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조건을 갖추었으나 다른 결과가 나타난 사례들을 서로 중첩시켜서 무엇이 다른가를 끈질기게 분석함으로써 변인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나라 진보(?) 사학계가 외세의 간섭과 수탈이 없었으면 역사가 합목적적으로 흘러갔을 것이라는 신념에 경도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식민지(일본 제국주의) 통치로 인해 근대화, 자본주의화의 경로가 방해받았고, 종주국인 일본은 한국의 봉건세력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이러한 불완전 근대화를 온존시켜서 통치했다라는 것이 80년대 이후 지루할 정도로 유포되어 온 진보진영의 정통사관인 셈이다. 그러니 친일파는 단지 국권을 넘긴 세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 자본주의화를 지체시키는 세력으로 승격되며, 이후 산업화의 모순, 민주화의 지체는 모두 이 친일파 때문으로 손쉽게 설명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강화도조약 체결 약 30년 뒤 나라를 빼앗기는 이유는 일본이라는 거대한 악마보다는 조선이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을 먼저 둬야 할 것”이라고 한 김 연구원의 주장은 상당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가 지적한 대로 소위 진보, 민족 역사학계의 비교역사학적 방법의 부족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연성에 사로잡힌 역사가는 모든 나라의 역사가 보편적인 어떤 행로를 갈 것이라 전제하기 때문에 외세의 방해 외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실패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 진보는 중화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일본이 개항하던 1852년에 이미 조선보다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월등히 앞서 있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결국 20년 먼저 개항해서 총포를 갖춘 일본이 무력으로 침략한 데다가 내부의 배신자(친일파) 때문에 우수하고 위대한 한민족이 그만 스텝이 꼬였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역사학적 관점에 서면  불과 20년 먼저 개항한 일본이 열강의 반열에 올라선 반면, 조선은 왜 그렇게 형편없이 무너졌는가에 주목하게 되며, 양국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석하게 된다. 


한 나라의 운명은 한 두개의 변인에 의해 좌우될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저한 비교분석을 통해 조선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변인들을 발견해야 한다. 이건 매우 지루한 작업이며, 민족사관을 펼치는 것처럼 폼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은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지점에서 비판받기 시작하면 아예 논쟁이 성립되지 않는다. 방법론적 미숙함과 안이함을 지적받는 상황에서 무슨 대등한 토론이 되겠는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하다 보니 현대사학회에서 옥을 가려내는 것 보다는 진보진영의 역사관을 비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분이 안풀릴 정도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이 주제는 아니고, 또 진보진영 역사학자들이 다 저모양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 하자.

뉴라이트는 너무 좋아하지 말자. 칭찬은 여기까지니까. 저 하나 빼고 나머지는 거의 다 궤변이었으니까. 상대를 비판하려면 먼저 우리편 중 X맨을 가려낸다는 차원에서 진보진영을 비판했을 뿐이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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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