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13의 게시물 표시

교육은 사라지고 이벤트만 난무하는 서울 교육

문용린 교육감이 취임한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문재인을 지지했던 유권자들 중 상당수가 문용린 당시 후보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교사 출신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노동운동가, 정당인에 가까웠던 이수호 후보 대신 교육학자인 그가 교육중심의 정책을 펼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서울 교육은 명망 높은 교육학자를 수장으로 선택한 효과를 보기는커녕 외화내빈의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문용린 교육감이 내세운 진로교육, 행복교육, 인성교육의 취지가 바른 방향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문교육감은 교육부 장관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관료들의 행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알고도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교육관료들은 교실 수업에서 관심이 떠난 지 적어도 10년 이상 된 사람들이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시절에도 주 관심사는 학생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업을 외부에 잘 보여주기 위한 포장술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교육정책을 맡기면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인 포장술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 포장술은 우선 각종 사업 계획서 제목에 ‘행복, 인성, 진로’ 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것에서 출발한다.관료들이 포장술에 몰두하면 일선 교장들 역시 포장술에 몰두한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서 행복,인성, 진로라는 접두사가 붙은 특별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고 선전하고 싶어한다. 교육학적 고찰이나 평가 따위는 필요 없다. 이런 접두사가 붙은 프로그램의 숫자가 중요하다.

이런 약팔이 문화 속에서 군사문화의 잔재라 하여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던 구태들이 이 접두사들을 붙이고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이른바 교문지도가 ‘행복한 학생 아침맞이’란 이름으로 부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실제 행복한 맞이 따위는 없다. 과거와 같은 복장검열이 강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다 교육감이나 교육장이 시찰 오는 날에만 관현악단이 나와서 연주를 하고, 교장, 교감이 웃는 낯으로 학생을 맞이하기도 한다. 물론 그 날이…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공격은 실패했다. 전교조가 이 기회를 잡으려면?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될 위기에 몰렸다. 이 글이 읽히는 시점에서는 이미 법외노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론을 신경 쓸거라는 전망도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그런거 신경 안쓰기 때문에 강행 할 것이다. 얼른 보면 이명박이 감히 못한 전교조 축출을 박근혜는 해치웠으니 보수진영에서 개가를 올릴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고 멀리 보면(수구 보수에게는 절대 없는 능력이다), 이들의 공격은 실패했다. 무너져 가는 전교조를 오히려 살려놓는 악수를 두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교조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는 2003년부터 이미 전교조의 위기가 운위되었다. 어쩌면 합법화된 그해로부터 위기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위기는 조직이 축소되어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육운동의 중심으로서의 위상이 무너졌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합법화 이후 전교조의 교육운동 내에서의 권위와 위상은 조합원 1만명에 불과하던 불법노조 시절보다도 실추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합법화 이전에는 자기를 소개할때 "전교조 해직교사"라고 소개하면 곳곳에서 악수를 청하고 우러러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전교조 간부들은 곳곳은 커녕 조합원들로부터도 냉소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합법화 이전에는 일선 학교 분회가 활동의 중심으로살아있었고 백가쟁명이 들끓었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분회는 선전물 받아보는 단위로 전락하고 집행부만 분주한 조직이 되었다. 합법화 이전에는 전교조 하면 사람들이 '참교육'을 떠올렸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정치운동', '노동운동'을 떠올리게 되었다. 합법화 이전에는 "전교조이기 때문에 참교육을 했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참교육을 하는 교사들이 마지못해 조합에 적을 유지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전교조는 보수진영의 공격이 아니라 진보진영의 내부비판에 의해 고립되기도 했다. 전교조에게 가장 뼈아픈 기간은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시사인, 그리고 …

수업시간에 가능한 과제만 내라는 공문. 학원 숙제를 위해 학교의 창조적인 수업과 평가를 제한하라고?

요즘 학교나 교육청에서는 행복과 창조가 유행이다. 물론 학생, 교사, 혹은 공무원이 행복하거나 뭔가 창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모든 공문서, 모든 사업,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행복이나 창조라는 접두사가 붙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적어도 이름에 창조나 행복을 붙이면서 이명박, 공정택 시절과 같은 노골적인 국영수 몰입교육 경쟁강화 교육 같은 비교육적 만행의 여지는 줄어들었다.

한때는 단순한 지식암기가 아니라 창조성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교조 교사 식별법에 나올 정도로 금기시 된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말도 거의 상식처럼 되어있다. 학교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지필평가를 지양하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수행평가를 강화하고, 문제 기반학습, 토론 수업, 탐구 프로젝트 학습, 연극이나 영화 제작 같은 수업을 개발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바야흐로 교육계에 창조 르네상스가 열린 것일까?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행복과 창조는 공문서 제목에 붙는 접두사에 불과하다. 심지어 행복과 창조를 읊조리는 교육관료들조차 창조적인 수업을 위해 입시교육을 포기할 용기나 전망, 그러한 교육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단적인 예가 해마다 시험 기간이 되면 각급 학교에 뿌려지는 방과후 집에서 해야 하는 과제를 지양하고 활동과 평가를 가능하면 수업 시간 중 학교 안에서 해결하라는 내용의 공문이다.

이 공문은 앞에서 강조한 창조니 탐구니 하는 화려한 수사들을 단숨에 무력화 시킨다. 어떤 창조적인 작업도 수업시간 45분 안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탐구도 학교 안에 있는 시설과 자료만으로 그 시간 안에 진행될 수 없다. 교대 사대에서는 교사를 학습의 완성자가 아니라 촉진자, 안내자로 가르친다. 교사는 배움을 자극 할 뿐, 진정한 학습은 학교 밖의 실제 삶 속에서 배운 것, 자극 받은 것에 따라 배운 것을 확장하고 적용시키는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창조적인 교육이란 뜻이다. 학생들이 동료들과 혹…

전교조 위기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넋두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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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며 절규했죠. 요즘 저는 부쩍 생산력의 고갈을 느낍니다. 여러 후배들의 절규들이 들립니다. 80년대였다면 그 절규의 방향은 한 방향이었고, 그것들을 모아서 싸우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절규의 방향이 양 방향입니다.

이 상황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일단 하나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 참에 그 동안 꺼내지 못했던 난제들을 털어낼 계기를 삼아야 할까요? 고민이 깊어갑니다.

저는 한낱 글쟁이이며 연구자에 불과합니다. 곽교육감님 표현을 빌리면 워낙 수줍음이 많아서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도 않고, 사람들이 모인곳에 가는 것도 잘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도 최선을 다 해 무엇이든 기여하려고 애써왔습니다. 물론 아직도 저더러 "입으로 운동한다."라고 비아냥 거리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다행히 저의 입이 그 분들의 몸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이 될수도 있음을 이해하는 분들이 더 많은 편입니다.

문득 1989년 가을, 이맘때가 생각납니다. 늙은 좌빨의 무용담 같은거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면 합니다. 그때 저는 이 수줍음 많고 사람들 많은 것 싫어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범대 학생회장 후보로 나서야 했습니다. 힘겹게 원고를 썼고, 며칠 밤을 세워가며 대중 연설을 연습했습니다. 그 당시 정세는 아주 나빴습니다. 노태우는 물태우에서 갑자기 각을 잡으면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고(그 원인 제공자가 지금 국회의원이죠. 저는 아직도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 몰정세적이고 무책임한 돌출행동에 대해), 노동운동의 상승기라고 생각하고 출범했던 전교조는 갑자기 조성된 공안정국의 집중 타격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범대 학생회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바로 공안당국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 그래도 저는 당시 한창 재개발로 시끄럽던 사당동, 신림7동에서 빈민들과 연대해서 철거용역과 치고박고 싸우느라 잔뜩 찍혀 있었고, 구로 공단 노조들과 이른바 노학연…

기간제 교사에게까지 담임을 시켜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부장을 시켜라

교실붕괴, 교권실추 등등이 이슈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교권실추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사회가 교육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 사회가 교육을 존중하면 교권은 저절로 신장되며, 사회가 교육을 하찮게 다루면 교권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다. 최근 교사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권이 실추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사회가 교육을 하찮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경쟁밀도가 높아지면서 교육에서의 경쟁밀도도 높아졌기 때문에 비롯된 현상이지 사회가 교육을 존중하고 있어서는 아니다. 교육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교육에서 높은 성취를 얻으려고 하는 사회에서 교육은 도구적으로 취급되며, 이때 자연스럽게 효율을 중요시하는 시장주의가 스며든다.

이는 교육 투입에 비해 교육 성과를 높이자는 것인데,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보여주듯, 교육의 성과는 단기간 내에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교육에서의 효율은 결국 투입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해마다 스승의 날만 되면 ‘교사는 있고 스승은 없다’는 상투어가 난무하지만 실상 1997년 이후 교육정책에서 교사는 스승은커녕 다만 교육에 투입되는 비용, 인건비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원의 노동강도를 높이고, 비정규직 교원의 비중을 늘리는 것을 효율화랍시고 추진해왔다.

1997년 이래 학급당 교사 배치 기준은 늘어나기는커녕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서울지역 중학교의 경우 15년 동안 학급당 교사 정원은 10% 이상 줄어들었다. 경제 성장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 정원만 줄어든 것이 아니다. 정규직 교사의 비율도 줄어들었다. 1995년만 해도 비정규직 교사의 비율은 중학교의 경우 2.6%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3년에는 비정규직 교사의 비율이 무려 17.8%로 급증했다. 특히 이 비율은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8.7%나 늘어났다.

15년간 증가율보다 3년간의 증가율이 더 많은…

창조경제? 창조를 질식시키는 경직된 교장제도를 두고 무슨 창조?

재경부에서 일하다가 부처 이동 케이스로 교육부를 몇 년 경험해 본 어느 고위 관료의 경험담이다. 재경부에서는 국장이나 과장을 찾는 전화가 올 경우 부하직원이 내선 전환으로 연결해 주는 일이 매우 당연했다고 한다. 사실 재경부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분이 교육부로 오자 가장 먼저 느낀 변화는, 하급자들 중 내선 전화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전화나 메신저로 업무 추진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꼭 몇 층을 거슬러 올라와서 직접 대면 보고를 한 뒤 다시 몇 층을 내려가거나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외부에서 전화가 오면 내선으로 “전화 돌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십 미터를 직접 걸어와서 “전화 돌려 드릴까요?”라고 물어 본 뒤,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돌리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식 시간을 빌려 “메신저로 물어보면 바로 메신저로 답하거나 내선 전화로 이야기 하면 되지 왜 시간 낭비해 가면서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야기하고 다시 가느냐” 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웃 사람한테 어떻게 전화나 메신저 띡 던지고 그럽니까?" 였다.
사실 재정부라고 해봐야 어차피 관료조직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료조직이 권위적이고 경직된것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며, 재정부가 특별히 혁신적이거나 탈권위적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관료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의 눈에조차 교육관료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권위적이었다. 교육은 미래를 담당하는 창의적인 작업이다. 그러니 다른 분야가 다 관료주의적고 권위주의적이라도 교육계 만큼은 유연하고 창의적이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부처 관료에게 너무 권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훈수를 듣는 교육계가 우리 현실이다.
이 경직된 교육 관료들 중에는 교사 출신인 장학관들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관료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경직되고 권위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장학관들이 결국 몇 년 지나면 교장이 되어서 학교로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