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5.

교육은 사라지고 이벤트만 난무하는 서울 교육

문용린 교육감이 취임한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문재인을 지지했던 유권자들 중 상당수가 문용린 당시 후보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교사 출신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노동운동가정당인에 가까웠던 이수호 후보 대신 교육학자인 그가 교육중심의 정책을 펼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그러나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서울 교육은 명망 높은 교육학자를 수장으로 선택한 효과를 보기는커녕 외화내빈의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문용린 교육감이 내세운 진로교육행복교육인성교육의 취지가 바른 방향임은 부정하기 어렵다그러나 문교육감은 교육부 장관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관료들의 행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알고도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대부분의 교육관료들은 교실 수업에서 관심이 떠난 지 적어도 10년 이상 된 사람들이다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시절에도 주 관심사는 학생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업을 외부에 잘 보여주기 위한 포장술이었다따라서 이들에게 교육정책을 맡기면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인 포장술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 포장술은 우선 각종 사업 계획서 제목에 행복인성진로’ 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것에서 출발한다.관료들이 포장술에 몰두하면 일선 교장들 역시 포장술에 몰두한다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서 행복,인성진로라는 접두사가 붙은 특별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고 선전하고 싶어한다교육학적 고찰이나 평가 따위는 필요 없다이런 접두사가 붙은 프로그램의 숫자가 중요하다.

이런 약팔이 문화 속에서 군사문화의 잔재라 하여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던 구태들이 이 접두사들을 붙이고 다시 부활하고 있다이른바 교문지도가 행복한 학생 아침맞이란 이름으로 부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물론 실제 행복한 맞이 따위는 없다과거와 같은 복장검열이 강화되었을 뿐이다그러다 교육감이나 교육장이 시찰 오는 날에만 관현악단이 나와서 연주를 하고교장교감이 웃는 낯으로 학생을 맞이하기도 한다물론 그 날이 지나면 관현악단도 없고웃는 낯도 없으며단지 복장검열만 남는다.

그 밖에 정규 수업과 별도로 행복인성진로라는 접두사를 붙인 갖가지 프로그램과 특강이 최소한의 교육학적 평가조차 없는 상태에서또 강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도 없는 상태에서 학교에 난무하고 있다.그런데 교장교감에게는 밖에서 눈에 띄지 않는 정규수업보다 당장 교육청 눈에 잘 띄는 이런 특별 프로그램과 강좌가 더 중요하다어떤 교감은 수업중인 교사에게 당장 그 특강에 가서 사회를 보라고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어차피 정규수업이야 해 봐야 티도 나지 않지만이런 접두사 붙는 특별 프로그램이나 행사야 말로 교육청에 보여줄 포장이기 때문이다어차피 교육관료는 포장만 보며교육감도 보아하니 포장을 열어보지 않는 기색이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서울시민들이 명망 높은 교육학자를 교육감으로 모신 것이 아니다이런 모습들이야 부패하고 경직된 교육 관료들이 교육감을 하면서 갖가지 인사 비리로 추태를 부리던 시절에도 널리 성행했던 모습이다이건 진보보수를 떠나 그냥 구태에 불과하다물론 진로인성행복 교육은 중요하다그러나 바람직한 진로교육은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가치를 익히는 것이지별도의 진로 이벤트행사특강 따위가 아니며행복교육은 학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정규 수업시간에 행복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지별도의 행복 관련 이벤트행사특강 따위를 벌이는 것이 아니다인성교육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교육관료들이나 교장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의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정규 수업 시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이들은 수업을 훌륭하게 하려고 애썼던 사람들도 아니고또 그런 교사들 앞에서 교육 전문성으로서 어떤 권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이들은 대체로 수업을 하고 교육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고팠던 사람들이다그러니 교육관료들은 각종 이벤트행사 따위를 기획하고 그 실적을 보고하라고 학교에 공문을 내리며교장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각종 이벤트행사의 횟수와 연인원을 늘리기에 분주하다이 와중에 학교 현장은 각종 행사로 몸살을 앓고예산은 헛되이 낭비되며교사와 직원은 늘어난 가욋일에 허덕이며결국 정규 수업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마침 문용린 교육감은 국정감사에서 혁신학교에 대해 그 동안 잘못 생각했으며이제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듯이 말했다그렇다면 기왕 고쳐 먹은 마음혁신학교 뿐 아니라 일반 학교에서도 구태를 일소하고 학교를 혁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그 첫 걸음은 관료들의 보고서나 행사 사진 따위가 아니라 교실을 삶의 터로 생각하고 살아온 교사들의 목소리를 허심탄회하게 듣고모든 정책을 교실의 관점에서 구상하는 발상의 전환이라야 한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교육학자나 부패관료나 어차피 그게 그거라는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임기를 마치고 말 것이다

안 그래도 전교조가 위기를 맞이하면서 보수를 가장한 교육계의 구태세력들이 준동할 가능성이 크다. 구태 교육감으로 남을 것인지, 보수교육감으로 남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가 기다리고 있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블로그 주인이 쓴 책들 전체 소개
(주의) 이 블로그에 뜨는 광고는 구글이 임의로 전송하는 것으로, 이 블로그의 필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2013. 10. 21.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공격은 실패했다. 전교조가 이 기회를 잡으려면?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될 위기에 몰렸다. 이 글이 읽히는 시점에서는 이미 법외노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론을 신경 쓸거라는 전망도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그런거 신경 안쓰기 때문에 강행 할 것이다. 얼른 보면 이명박이 감히 못한 전교조 축출을 박근혜는 해치웠으니 보수진영에서 개가를 올릴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고 멀리 보면(수구 보수에게는 절대 없는 능력이다), 이들의 공격은 실패했다. 무너져 가는 전교조를 오히려 살려놓는 악수를 두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교조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는 2003년부터 이미 전교조의 위기가 운위되었다. 어쩌면 합법화된 그해로부터 위기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위기는 조직이 축소되어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육운동의 중심으로서의 위상이 무너졌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합법화 이후 전교조의 교육운동 내에서의 권위와 위상은 조합원 1만명에 불과하던 불법노조 시절보다도 실추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합법화 이전에는 자기를 소개할때 "전교조 해직교사"라고 소개하면 곳곳에서 악수를 청하고 우러러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전교조 간부들은 곳곳은 커녕 조합원들로부터도 냉소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합법화 이전에는 일선 학교 분회가 활동의 중심으로살아있었고 백가쟁명이 들끓었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분회는 선전물 받아보는 단위로 전락하고 집행부만 분주한 조직이 되었다. 합법화 이전에는 전교조 하면 사람들이 '참교육'을 떠올렸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정치운동', '노동운동'을 떠올리게 되었다. 합법화 이전에는 "전교조이기 때문에 참교육을 했지만", 합법화 이후에는 "참교육을 하는 교사들이 마지못해 조합에 적을 유지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전교조는 보수진영의 공격이 아니라 진보진영의 내부비판에 의해 고립되기도 했다. 전교조에게 가장 뼈아픈 기간은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시사인, 그리고 진보평론에서조차  전교조를 맹렬히 비판한데다가 여성조합원의 성폭행 사건까지 터졌던 2008-2009년 기간일 것이다. 이때는 진보진영에서조차 전교조는 일종의 터부로 취급되었다. 진보교육감 후보들은 자신이 전교조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빴고, 2008년 촛불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주경복 후보는 공정택 후보의 "너 전교조 2중대지?" 한 마디에 훅가서 낙선하고 말았다.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진보의 오점처럼 취급되는 상태에서는 조합원 수가 10만명, 20만명이라 할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전교조는 서서히 뇌사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같은 분회원 낯을 보아 적을 유지하고 있다가 학교를 옮김과 동시에 탈퇴했고, 20대 젊은 조합원들은 가뭄에 콩나듯이 들어왔다. 이 상태로 10년만 지나면 전교조는 자연사 할 것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그런데 전교조는 본의아니게 지금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내 기억에 지난 10년간 전교조가 이렇게 진보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진보진영 뿐 아니라 민주당을 포함한 야5당까지도 전교조를 지지하기 위해 단결하고 있다. 전교조가 이렇게 이른바 민주진보진영의 단결의 구심점이 된 것은 1989년 대량 해직사태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조합비만 내는 조합원으로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던 조합원들조차 회춘하고 있다. 서로 연락망을 개통하고, 전망을 나누며, 앞으로 무엇을 할지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모처럼 조직이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자연사하던 전교조에게 강력한 강장제를 주사한 꼴이 되었다.

이제 공은 다시 전교조에게로 넘어갔다. 이 호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어갈 것인가? 법내 법외는 중요하지 않다. 법외라 하더라도 교육적, 도덕적 권위를 움켜쥘수 있다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다시금 이 땅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지향하는 세력들, 시민들의 눈이 전교조를 주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기사회생이냐 완전한 확인사살이냐가 결정될 것이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2000-2012의 모습은 버리고, 1989- 1999 사이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 그때 전교조가 권위를 움켜쥘수 있었던 이유는 "전교조 교사는 남달랐기 때문"이지, 전교조가 가두에서 무시무시한 투쟁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989년 전교조 교사들이 경찰에게 연행되어가는 모습은 연약하고 엉성했다. 하지만 그 연약하고 엉성한 모습이 머리띠와 조끼를 똑 같이 맞춰입고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연상케 하는 강인한 대오로 주먹질을 하는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교조는 그 동안 교육자가 아니라 행정관료가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교육현실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교육자가 아니라 투쟁가가 조합을 좌지우지하는 조합현실도 비판해야 한다. 다행히 아직은 이 땅의 참교사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전교조 적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을 세워서 조합의 중추로 삼고, 이들의 목소리가 조합의 행보에 적극 반영되게 하며, 조합이 이들의 교육활동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이를 모든 교사들에게 보급하는 유통망이 되게 하자. 이런 노력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진 전교조는 합법 비합법을 넘어 교육부마저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블로그 주인이 쓴 책들 전체 소개
(주의) 이 블로그에 뜨는 광고는 구글이 임의로 전송하는 것으로, 이 블로그의 필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2013. 10. 17.

수업시간에 가능한 과제만 내라는 공문. 학원 숙제를 위해 학교의 창조적인 수업과 평가를 제한하라고?

요즘 학교나 교육청에서는 행복과 창조가 유행이다. 물론 학생, 교사, 혹은 공무원이 행복하거나 뭔가 창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모든 공문서, 모든 사업,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행복이나 창조라는 접두사가 붙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적어도 이름에 창조나 행복을 붙이면서 이명박, 공정택 시절과 같은 노골적인 국영수 몰입교육 경쟁강화 교육 같은 비교육적 만행의 여지는 줄어들었다.

한때는 단순한 지식암기가 아니라 창조성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교조 교사 식별법에 나올 정도로 금기시 된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말도 거의 상식처럼 되어있다. 학교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지필평가를 지양하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수행평가를 강화하고, 문제 기반학습, 토론 수업, 탐구 프로젝트 학습, 연극이나 영화 제작 같은 수업을 개발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바야흐로 교육계에 창조 르네상스가 열린 것일까?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행복과 창조는 공문서 제목에 붙는 접두사에 불과하다. 심지어 행복과 창조를 읊조리는 교육관료들조차 창조적인 수업을 위해 입시교육을 포기할 용기나 전망, 그러한 교육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단적인 예가 해마다 시험 기간이 되면 각급 학교에 뿌려지는 방과후 집에서 해야 하는 과제를 지양하고 활동과 평가를 가능하면 수업 시간 중 학교 안에서 해결하라는 내용의 공문이다.

이 공문은 앞에서 강조한 창조니 탐구니 하는 화려한 수사들을 단숨에 무력화 시킨다. 어떤 창조적인 작업도 수업시간 45분 안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탐구도 학교 안에 있는 시설과 자료만으로 그 시간 안에 진행될 수 없다. 교대 사대에서는 교사를 학습의 완성자가 아니라 촉진자, 안내자로 가르친다. 교사는 배움을 자극 할 뿐, 진정한 학습은 학교 밖의 실제 삶 속에서 배운 것, 자극 받은 것에 따라 배운 것을 확장하고 적용시키는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창조적인 교육이란 뜻이다. 학생들이 동료들과 혹은 부모와 함께 도서관, 박물관, 문화시설, 지역사회 등을 다니면서 삶 속에서 배움을 구현하도록 격려하고 고무해야 창조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배움이 행복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창조적인 교육을 위해 과제는 필수적이며, 그 과제 중에는 히 학교 밖에서 해야 하는 것 방과후에 해야 하는 것이 상당히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학교 안에서 해결하고, 수업 시간 중에 해결하라는 공문이 날아온다. 창조적인 교육과 배치된다. 결국 이런 모순적 요구에 처한 학교에서는 얼마 안 되는 수업 시간 중에 해결할 수 있는 과제로 활동을 제한하여 쪽지시험 수준에 불과한 평가를 한 뒤 문서 상에는 행복, 창조와 관계되는 엄청난 수업과 수행평가를 한 것처럼 꾸미는 화장술이 팽배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애초에 이런 공문이 내려간 근거가 더 기막히다. 그 근거는 '학생들의 과도한 학업부담'때문에 학부모들의 민원이 많아서’ 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 민원이 정말 학생들의 학업부담이 과중하다고 안타깝게 여기는 그런 민원일까?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즐겁게 놀고 가족과 친교활동이나 문화활동을 해야 하는데 학교가 내 주는 과제와 수행평가 때문에 이런 활동들이 어렵다는 그런 민원일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학생도, 교사도 심지어 학부모도 잘 알고 있다. 물론 학생들이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와 수행평가 때문에 부담을 호소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방과후 시간의 대부분을 학원에서 사교육 받도록 강요 받고 있기 때문이며, 학원에서 내 주는 단순 문제풀이, 선행학습, 단순암기 등의 숙제물량공세에 이미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학원이 보통 밤 아홉 시가 지나야 끝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학생들이 과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방과후의 약간 정도 시간 아니면 심야시간 밖에 없다. 그런데 학원 과제의 분량은 이 정도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학생들 중 상당수가 학교 수업시간에 학원 과제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문이 지시하는 대로 학교에서 수업시간 중에 과제를 할 수 있도록 하더라도 학생들은 그 시간에 학교 과제가 아니라 학원 과제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학원에서는 과제를 안 해오면 때리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학원 숙제가 그리고 그 과제를 하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교육적인가 하는 것이다.당연히 비교육적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창조적인 교육에 역행한다. 그렇다면 책임과 전문성이 있는 교육당국이라면 방과후까지 이어지는 과제나 수행평가를 줄여 달라는 민원에 대해 오히려 학원을 보내지 말고 그 과제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대답을 해야 옳다. 그런 과제와 수행평가는 앞으로 우리 공교육이 지향할 방향이기 때문에 학원에 보내고 학원 숙제 할 시간을 위해 이것을 축소할 이유가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옳다. 공교육 기관에서 사교육 사정까지 봐 주면서 수업을 운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학원 숙제 규제에 나서야 한다. 이미 세계적으로 시효가 지나간 단순 암기, 문제풀이 숙제에 학생들이 푹 젖어 있고, 그걸 학교 수업시간에 몰래 해야만 겨우 시간 내에 제출하여 매를 면할 정도니 이래서야 무슨 교육이 이루어 지겠는가?

학교에서 조금만 맞으면 인권 유린에 민사소송까지 감수하는 학부모들은 어째서 학원에서 맞는 것에 대해서는 이리도 무감각한지 신기할 따름이다. 학원의 무지막지한 구시대적 숙제에 허덕이는 것에는 아무 생각 없다가, 학교 수행평가 과제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사실은 답을 알고 있다. 학원 숙제는 국영수 문제 푸는 것이고, 학교 수행 과제는 뭔가 그리고 만들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원 숙제는 입시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착각을 주고 학교 과제는 웬지 입시를 방해하는 시간낭비로 보이기 때문이다. 학원에서는 성적이 떨어졌다고 벌을 주고, 학교에서는 성적과 무관한 일로 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이율배반과 교육을 가장한 내숭을 받아주어야 하나?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블로그 주인이 쓴 책들 전체 소개
(주의) 이 블로그에 뜨는 광고는 구글이 임의로 전송하는 것으로, 이 블로그의 필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2013. 10. 15.

전교조 위기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넋두리를 합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며 절규했죠. 요즘 저는 부쩍 생산력의 고갈을 느낍니다. 여러 후배들의 절규들이 들립니다. 80년대였다면 그 절규의 방향은 한 방향이었고, 그것들을 모아서 싸우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절규의 방향이 양 방향입니다.

이 상황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일단 하나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 참에 그 동안 꺼내지 못했던 난제들을 털어낼 계기를 삼아야 할까요? 고민이 깊어갑니다.

저는 한낱 글쟁이이며 연구자에 불과합니다. 곽교육감님 표현을 빌리면 워낙 수줍음이 많아서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도 않고, 사람들이 모인곳에 가는 것도 잘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도 최선을 다 해 무엇이든 기여하려고 애써왔습니다. 물론 아직도 저더러 "입으로 운동한다."라고 비아냥 거리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다행히 저의 입이 그 분들의 몸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이 될수도 있음을 이해하는 분들이 더 많은 편입니다.

문득 1989년 가을, 이맘때가 생각납니다. 늙은 좌빨의 무용담 같은거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면 합니다. 그때 저는 이 수줍음 많고 사람들 많은 것 싫어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범대 학생회장 후보로 나서야 했습니다. 힘겹게 원고를 썼고, 며칠 밤을 세워가며 대중 연설을 연습했습니다. 그 당시 정세는 아주 나빴습니다. 노태우는 물태우에서 갑자기 각을 잡으면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고(그 원인 제공자가 지금 국회의원이죠. 저는 아직도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 몰정세적이고 무책임한 돌출행동에 대해), 노동운동의 상승기라고 생각하고 출범했던 전교조는 갑자기 조성된 공안정국의 집중 타격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범대 학생회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바로 공안당국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 그래도 저는 당시 한창 재개발로 시끄럽던 사당동, 신림7동에서 빈민들과 연대해서 철거용역과 치고박고 싸우느라 잔뜩 찍혀 있었고, 구로 공단 노조들과 이른바 노학연대 투쟁을 조직하는 일에도 가담하여 또 찍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마했고, 불행히도 낙선했습니다. 낙선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기부(국정원)가 조만간 잡아가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관악경찰서에서는 소환장을 보냈습니다. 수배자 신세가 된 겁니다.

도망을 쳤습니다. 경상북도 경산까지 가서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경북 경산에는 양돈장이 많이 있었는데, 그 양돈장 중 하나에 취직을 했습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돼지 밥주고, 돼지 똥치우는게 일이었습니다. 날마다 손수레로 몇개씩 돼지 똥을 삽으로 퍼다 날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씼고 점심을 먹으면 오후는 대체로 한가한 편이었는데, 양돈장 주인아저씨(형님?)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 댁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양돈장 주인이 알고봤더니 농민운동가였습니다. 말을 더듬었는데, 유신시절 고문 후유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지역 농민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타자를 칠 줄 아는 젊은이가 왔다고 다들 좋아했습니다. 당시 태동하던 진보 진영 정당 설립 준비 지역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달 반 쯤 지났는데, 그 분이 그 더듬거리는 말로 "너, 학생운동하다 도망다니는 거지?" 이렇게 묻는 거였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남은 평생 돼지 치면서 농촌생활을 하고, 여기에 투신 할거냐, 아니면 나름의 학문과 전문지식을 활용해서 뭔가 해 볼 생각이냐?"
저는 "교사가 되어 학생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올바름을 가치있게 여기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할것입니다." 라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뜻밖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서울에 가서 자수해라. 그럼 초범이고 자수니까 정상참작도 되고 해서 큰 탈 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누구한테 쫓기는 거냐?"
"안기부하고 관악서입니다."
"그럼 관악서에 자수해라. 일단 경찰 유치장에 들어가면 더 이상 안기부 소관이 아니다. 관악서에서는 기껏 집시법 위반이지만, 안기부에서는 무슨 괴물같은 조직사건이 될지 모른다. 잪 판단 해라."

나는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분을 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리석게 굴지 마라. 네가 정말 교사가 되어서 올바른 교육을 하고 싶다면, 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을 걸어라. 어차피 농촌에서 농민운동가가 되지 않을 거라면 여기서 하루라도 더 있는 건 낭비다. 도망 다니지 말고 털수 있는 건 빨리 털어라. 교사가 되는 것이 농민 운동가가 되는 것 보다 덜 민중적이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러니 빨리 교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라. 비록 그러기 위해서 조금은 비굴해지고 조금은 나약해질지 몰라도 그건 치루어야 할 비용이다. 네가 적에게 굽히기 싫어서 끝내 출두하지 않고 여기서 버틴다면 결국 네가 들어갈 교단의 한 자리가 아깝게 되는 거다. 세상은 의로운 교사 한 명을 잃어버리는 거다. 내 생각에 그건 이 시골의 농민활동가 한 사람을 얻는 것으로 보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까운 일이다. 잘 판단하기 바란다. 때로는 타협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농촌에 완전히 뿌리박고 농민활동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사가 되어 교육운동을 할 결심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교사가 되는 길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코스를 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사가 되는 길로 다시 들어서려면 자수를 해야 했고, 저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현실을 민중속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운동가는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생운동 한답시고 결기를 세웠던 나는 사실은 천지분간 못하던 병정놀이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날로 짐을 쌌습니다. 정들었던 양돈장을 떠나던 날, 그 분이 아주 무거운 짐을 불쑥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민망한지 지금 말고 고속버스 안에서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보지 마라." 하고는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고속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난 그 무거운 짐의 포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여섯 권으로 구성된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번역서였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대구까지 고속버스가 4800원이었는데 한 권당 6500원씩 하는 이 책을 여섯권 산다는 것은 학생에게는 엄청난 지출이라 그 동안 침만 삼키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도  내 책장에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활자판이라 가독성이 떨어지고, 심지어 한문이 한글보다 더 많아서 쉽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질때마다 이 책을 꺼내어서 읽어 봅니다. 이미 외우다시피한 자본론이지만 자본론이 아니라 이 책에 얽힌 스토리를 다시 회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블로그 주인이 쓴 책들 전체 소개
(주의) 이 블로그에 뜨는 광고는 구글이 임의로 전송하는 것으로, 이 블로그의 필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2013. 10. 11.

기간제 교사에게까지 담임을 시켜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부장을 시켜라

교실붕괴, 교권실추 등등이 이슈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교권실추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사회가 교육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 사회가 교육을 존중하면 교권은 저절로 신장되며, 사회가 교육을 하찮게 다루면 교권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다. 최근 교사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권이 실추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사회가 교육을 하찮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경쟁밀도가 높아지면서 교육에서의 경쟁밀도도 높아졌기 때문에 비롯된 현상이지 사회가 교육을 존중하고 있어서는 아니다. 교육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교육에서 높은 성취를 얻으려고 하는 사회에서 교육은 도구적으로 취급되며, 이때 자연스럽게 효율을 중요시하는 시장주의가 스며든다.

이는 교육 투입에 비해 교육 성과를 높이자는 것인데,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보여주듯, 교육의 성과는 단기간 내에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교육에서의 효율은 결국 투입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해마다 스승의 날만 되면 ‘교사는 있고 스승은 없다’는 상투어가 난무하지만 실상 1997년 이후 교육정책에서 교사는 스승은커녕 다만 교육에 투입되는 비용, 인건비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원의 노동강도를 높이고, 비정규직 교원의 비중을 늘리는 것을 효율화랍시고 추진해왔다.

1997년 이래 학급당 교사 배치 기준은 늘어나기는커녕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서울지역 중학교의 경우 15년 동안 학급당 교사 정원은 10% 이상 줄어들었다. 경제 성장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 정원만 줄어든 것이 아니다. 정규직 교사의 비율도 줄어들었다. 1995년만 해도 비정규직 교사의 비율은 중학교의 경우 2.6%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3년에는 비정규직 교사의 비율이 무려 17.8%로 급증했다. 특히 이 비율은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8.7%나 늘어났다.

15년간 증가율보다 3년간의 증가율이 더 많은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정규교사 반, 비정규 교사 반이 될 날도 멀지 않다. 교사의 수는 줄이고, 비정규직 교사의 비중을 늘리는 이런 흐름이 갈수록 가속화되는 이런 흐름, 그리고 이런 흐름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여기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나 문제제기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학교를 무성의하게 다루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산 증표다.

더욱 놀라운 소식이 있다. 현재 학급 담임교사의 15%가, 특히 중학교는 20%가 비 정규직인 기간제 교사들로 충원되어 있고, 심지어 정규직 교사 중 담임 비율은 40%인데, 기간제 교사 중 담임 비율이 무려 66%가 넘는다는 소식이다(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0928_0012393985&cID=10301&pID=10300). 이는 사회가 교육을 무성의하게 다룰 뿐 아니라 이제는 교사들 조차 교육을 무성의하게다루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학교가 안팎으로 무너지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처음 발령받은 1992년만 해도 학급 담임교사는 아무나 할 수 없었다. 기간제 교사는 물론이려니와 정규직 교사도 발령 받고 적어도 1년이 지나기 전에는 학급 담임(정식 명칭은 학급 담당교사)을 배당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부임하면서 학급 담임을 희망하자 당시 학교장은 “당장은 어렵고 한 3년 차가 되면 담임을 배당해 드릴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발령받기 전 기간제 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감히 학급 담임을 맡아보겠다고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정규직 교사도 이 정도였으니 비정규 교사에게 학급을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기간제 교사에게는 학급 담임 등 책임이 중한 업무를 맡기지 않는다.’는 지침도 있었다. 이는 비정규 교사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학급 담임의 책임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급 담임을 중하게 여긴 것은 담임교사는 학생의 인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누가 생각해도 지극히 상식적인 처사이며, 교육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처사다.

그런데 중학교 학급 담임의 20%가 비정규교사이며, 정규교사의 40%가 담임을 맡는 반면, 비정규교사의 60% 이상이 담임을 맡고 있다는 현실은 교사들 스스로 학급 담임이라는 중요한 일을 힘 없는 비정규직들에게 떠넘기고 싶은 부담으로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교사들의 무책임만을 질책할 일이 아니다.

중학교 학급 담임은 사춘기 한 가운데에 있는 청소년들의 인성교육과 생활지도의 최전선에 있는 그야말로 수십 명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하면서도 또한 고달픈 직책이다. 그런데 중학교 교사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고달픔에 지치면서 정작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정과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이를 벗어버리고 싶은 멍에로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소명의식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사회가 교육을 ‘효율’의 논리로 재단하고 있는데, 교사인들 ‘효율’의 논리로 대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교사들에게 담임을 전가하는 과도기를 거쳐, 마침내 약자인 기간제 교사에게 집중적으로 담임을 전가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선 일선 학교에서부터 교육을 존중하고, 담임의 책무에 걸맞는 존중과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일선 학교, 특히 중학교는 교육의 최전방을 책임지는 담임보다는 행정업무를 분담하는 부장이 더 우대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험 많은 교사들이 담임을 이탈하여 행정직으로 옮겨가려는 ‘효율적’ 판단을 막을 수는 없다. 만약 학교에서 담임이라는 보직과 부장이라는 보직을 동등하게만 대우해 준다면, 그리고 행정업무까지 분담해야 하는 담임의 업무를 교육으로 한정시켜주기만 한다면 중견 교사들은 다시 담임을 맡기 위해 몰려 올 것이다.

또 담임을 맡을 인원이 부족하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인원만큼을 정규 교사로 새로 채용해야 한다. 교사의 20% 이상을 비정규직으로 채워놓고, 그 비율을 해마다 늘려가면서 담임교사 중 비정규직이 많다고 개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청년실업 해소는 학교에서 교사라는 좋은 일자리를 늘림으로써 해소되는 것이지 온갖 종류의 비정규 교원을 늘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교육 예산이 부족하고, 어차피 20%가 비정규 교사일수 밖에 없어서 학급 담임을 시킬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들에게 부장을 시키고, 기존의 부장들을 담임으로 돌려야 옳다. 부장교사라는 것은 결국 행정일을 담당하기 위한 자리지만, 담임은 교육을 담당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컴퓨터 등에 능한 젊은 교사들이 부장 일은 더 잘할수 있지만, 많은 경험과 인생의 경륜이 필요한 담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교의 중심을 교육과 행정 무엇으로 보느냐에 대한 철학의 문제다. 실제로 초등학교에서는 오히려 젊은 교사들을 부장에 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블로그 주인이 쓴 책들 전체 소개
(주의) 이 블로그에 뜨는 광고는 구글이 임의로 전송하는 것으로, 이 블로그의 필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2013. 10. 4.

창조경제? 창조를 질식시키는 경직된 교장제도를 두고 무슨 창조?

재경부에서 일하다가 부처 이동 케이스로 교육부를 몇 년 경험해 본 어느 고위 관료의 경험담이다. 재경부에서는 국장이나 과장을 찾는 전화가 올 경우 부하직원이 내선 전환으로 연결해 주는 일이 매우 당연했다고 한다. 사실 재경부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분이 교육부로 오자 가장 먼저 느낀 변화는, 하급자들 중 내선 전화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전화나 메신저로 업무 추진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꼭 몇 층을 거슬러 올라와서 직접 대면 보고를 한 뒤 다시 몇 층을 내려가거나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외부에서 전화가 오면 내선으로 전화 돌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십 미터를 직접 걸어와서 전화 돌려 드릴까요?”라고 물어 본 뒤,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돌리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식 시간을 빌려 메신저로 물어보면 바로 메신저로 답하거나 내선 전화로 이야기 하면 되지 왜 시간 낭비해 가면서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야기하고 다시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웃 사람한테 어떻게 전화나 메신저 띡 던지고 그럽니까?" 였다.

사실 재정부라고 해봐야 어차피 관료조직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료조직이 권위적이고 경직된것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며, 재정부가 특별히 혁신적이거나 탈권위적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관료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의 눈에조차 교육관료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권위적이었다. 교육은 미래를 담당하는 창의적인 작업이다. 그러니 다른 분야가 다 관료주의적고 권위주의적이라도 교육계 만큼은 유연하고 창의적이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부처 관료에게 너무 권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훈수를 듣는 교육계가 우리 현실이다.

이 경직된 교육 관료들 중에는 교사 출신인 장학관들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관료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경직되고 권위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장학관들이 결국 몇 년 지나면 교장이 되어서 학교로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학관들은 이른바 웃 선에게 직언하면서 교육적 소신을 지키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어차피 몇 년만 꾹 참으면 꿈에 그리던 교장이 되어 나갈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들은 상급자에 대한 절대 복종을 몸에 익힌다

학교라는 기관은 단일 기관으로서는 상당히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장 위로는 상급자가 전혀 없는 기관이다. 따라서 이런 권위주의와 경직성, 그리고 웃선 바라기를 학습한 관료들이 교장으로  부임할 경우 발생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장 큰 폐단은 이런 관료 출신 교장들의 눈은 교실이 아니라 항상 저 윗 선 어딘가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과정, 즉 수업이 아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학교보다 상급 관청을 지배하는 관료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들의 시책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특별 프로그램에 있다. 교육감이 진로라는 말을 강조하면 진로교육이 바로 교육의 중심이며, 교육부장관이 행복을 말하면 행복교육이 교육의 중심이 된다. 그러면 교장들은 진로나 행복과 관련된 특별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하나라도 더 실시하려고 안달이 난다.

결국 교사들이 이런 특별 프로그램과 행사에 매달리게 되면서 학교교육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교육과정의 수행, 즉 수업의 질은 곤두박질 친다. 그나마 이 프로그램이나 행사가 내실있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고 의전이다. 이런 보여주기 식 프로그램이나 행사에 얼마나 많은 예산이 허비되고 있는지 안다면 국민들은 교육세 납부를 거부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런 교장들이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또 다른 폐단은 독단주의다. 관료시절부터 상급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체질화한 이들은 교사, 학생, 학부모를 하급자로 간주한다. 그래서 전교생, 전교사가 반대하는 일도 교장의 한 마디에 시행하고, 전교생, 전교사가 원하는 일도 교장의 한 마디가 없으면 시행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교사는 학생이 원하는 것을, 교장은 교사가 원하는 것을, 교육청은 학교가 원하는 것에 민감한 것이 정상인데, 현재 우리나라 교육계는 교장은 교육청이 원하는 것에, 교사는 교장이 원하는 것에, 학생은 교사가 원하는 것에 민감해야 살아남는 정글이 되어 있다. 이런 학교에서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턱이 없으며,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소위 창조경제를 담당할 인재가 성장할 턱이 없다.

창조경제는 대통령이 창조를 외친다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조경제는 교실에서부터 시작된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창조적인 경제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며, 창조적인 사람들은 교육 없이는 저절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를 경직되고 권위적인 구태의 온상으로 만들고 있는 교장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야 말로 창조경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교장제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소위 민주정부, 혹은 좌파정부 10년 동안에도 터럭만큼도 바뀐 적이 없다. 이런 학교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며, 그렇다면 이런 나라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번 정부가 큰 업적을 남긴 정부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을 아직 가지고 있다면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감히 하지 못한 일, 수 십 년 간 학교를 좀먹어 온 교장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에 눈을 돌려보기 바란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