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8.

대자보에 일침을 놓은 "안녕하시냐고 묻지마라"라는 글, 미안하지만 꼰대짓 맞다.


요즘 "안녕하시냐?" 대자보가 대세다. 대학생에서 중고등학생, 주부, 성매매여성까지 곳곳에서 대자보가 등장하고 있다. 대자보 열풍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 모였다하면 숟가락 얹기 도사들인 기존 운동권, 기존 진보진영의 꼰대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진솔하게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생산한다 하더라도 대중에게 호소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사투리로 이야기 하기 때문에(미국, 계급, 민중 등에 만사를 환원시키는), 스스로 손글씨로 장문의 글을 설득력 있게 써야 입장권이 주어지는 대자보 행렬에 끼여 들수도 없고, 끼여 들어본들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강변하면서 듣지 않는 청중들에게 '너희들이 잘 몰라서', '아직 어린 것들이라', '개념이 없어서' 등의 이유를 대며 혀를 찬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를 일컬어 '꼰대질'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운동권, 진보진영에 모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꼰대질' 이다.


그런데 최근 또 다시 꼰대질 논란이 일어났다. '민중언론 참세상'에 실린 박병학의 '안녕하냐고 묻지마라'라는 칼럼 때문이다. 이 칼럼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서 내 소견을 밝혀보려고 한다. 원문에는 숫자가 없지만 편의상 내가 붙였다. 원문을 보고 싶은 분은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기사 원문 링크: 원래 나는 진신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 글을 조곤조곤 씹는 버릇은 없다. 그러나 교육자의 입장에서 젊은이들의 그나마의 항변에 가슴아파하기는 커녕 냉소와 지적질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위선으로 몰아붙이는 글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도 없다. )


1. 20대라는 건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라고 해서 어떤 공통성을 가정할 수 없다. 젊은이들 한 떼거리를 20대라고 부르는 순간 성별, 인종, 성적지향, 무엇보다도 계급의 문제가 사라진다. 20대라고 다 같은 20대일까?(필자 주: 부르주아의 자식도 있고 노동자의 자식도 있지 않겠는가?)

이건 운동권의 정말 해묵은 논리다. 이 글에서는 성별, 인종, 성적지향도 점잖게 한 자리를 주었지만, 페미니즘 초창기에만 해도 '여성'이라고 다 똑같냐,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통성을 상정하면 계급차별을 희석시키며,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포섭된다 따위의 비판이 빗발쳤었다. 교육운동에서도 "아이들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계급도 차이도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엾다라는 말 속에서,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 속에서 교사들은 자신의 소부르주아적 감상을 정당화 한다."라는 식으로.  
물론 젊은이를 꼭 20이라는 숫자로 한정짓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성별, 인종, 성적지향, 계급은 공통성을 설명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되는데 유독 '젊은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통분모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신좌파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68혁명도 계급의 혁명이 아니라 세대의 혁명이었고, 복지 혜택 감소를 반대하며 나라를 뒤엎었던 그리스나 프랑스의 대규모 시위도 기본적으로 세대의 갈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운동권은 흔히 한줌의 부르주아라는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젊은이(20대라는 숫자가 의미 없다고 치면)들 중 부르주아의 자녀 역시 한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30대 기업의 영업이익을 모조리 합쳐도 삼성전자 하나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1998년 이래 중산층이 사실상 붕괴해 버린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라고 다 같은 젊은이인 줄 알아?"라고 할 수 있는 부르주아 청년이 있어야 얼마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젊은이는 노동자의 아들딸이며 노동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정규직을 차지한 기성세대들(그들도 노동자다)의 무관심 속에 젊은이들의 미래는 점점 옹색해지고 있다. 젊은이라는 공통성으로 뭉칠 이유가 충분히 되지 않는가?
 2. 그래도 대학에 다니는 ‘20대’들은 대자보라도 붙여서, 안녕하지 못하다느니 부끄럽다느니 지껄일 수도 있고 ‘시대에 정직하게 응답하는’ 젊은이인 것처럼 스스로를 꾸밀 수도 있지만, 대학 문턱에도 가지 못해 책 끼고 다니며 술이나 처먹는 대학생들 말고 기계 돌리며 쇳밥 먹는 젊은이들은? 밭 갈고 소 먹이는 젊은이들은?

이건 80년대, 아니 넉넉히 잡아 90년에나 통하는 논리다. 그때는 분명 대학생이라는 것은 젊은이들 중 특권층이었다. 나는 80년대때 파업 투쟁중인 공장에 지원투쟁을 다니면서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어린 노동자들과 많이 만났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 진학률이 86%나 되는 시대다. 대학 근처도 못가서 기계 돌리며 쇳밥 먹는 젊은이들을 대학의 낭만이라며 책 끼고 술이나 처먹는 젊은이들과 대비시킬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계 돌리며 쇳밥먹는 일자리를 우습게 아는데, 요즘 세상에 그런 일자리 자체가 희귀하며, 그럴 능력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갑이다. 대학생들하고 비교도 되지 않는 위치란 뜻이다. 청소공무원 모집에 대졸자들이 무더기로 응모하는 시대다. 학교 청소원과 청소공무원의 차이는 하는 일이 아니라 정규직이냐 아니냐에 있다. 대학생 중에서도 정규직이기만 하다면 기꺼이 쇳밥 먹는 젊은이 행렬에 가세할 젊은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오히려 기계에서 쇳밥먹는 젊은이들은, 밭갈고 소먹이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연대체가 있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조직이 있다. 그러나 막연하고 불안한 미래만 바라보며 무정형의 덩어리로 살아가야 하는 대학생들은 어디에 자기 생각을 하소연할까? 


3.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자보 써 붙이고 국정원 댓글, 쌍용자동차, 밀양송전탑, 철도 파업 등등 굵직한 화젯거리들을 갖다붙이지만 그런 대자보조차 쓸 수 없는 다른 젊은이들에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이 깔고 앉아 있는 방석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때때로 부끄러움을 똥처럼 한 무더기씩 싸 놓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딴청을 피울 것이다.

대학생들은 대자보씩이나 쓸 수 있는게 아니라, 대자보 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누구를 신경써 주는가? 그나마 대자보에 취업난, 청년실업 등등의 이야기만, 즉 자기들의 어려움만 쓰지 않고 쌍차, 철도 등 공공의 문제, 즉 남의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이 기특하지 않은가? 여기에 칭찬은 하지 못할망정 똥 타령까지 하면서 비아냥 거릴 것은 뭔가? 지금 이 대자보가 똥 무더기로 보이나? 그들이 부끄러워서 대자보를 쓴 것으로 보이나?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배설하기 위해? 하나라도 작은 공통성의 단초가 있으면 그것을 찾아 연대를 넓혀나가는 것이 진보와 좌파의 미덕일텐데, 저리 베베꼬인 똥 같은 마음으로 무슨 운동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진신류가 1%의 지지에서 맴돈다고 말하면 듣기 좋은가?


4. 그들이 정말 부끄럽다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책임지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다. 아니, 방법이라기보다는 시작이라고 해야겠다. 대학을 당장 그만두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끝내 가지 못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대학과 함께 지긋지긋한 토익과 상식 공부도 시원하게 때려치우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스스로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편굴 같은 도서관을 뛰쳐나와 삶다운 삶을 살아 보는 것이다. 마음껏 시간을 낭비해도 되고 실컷 게을러져도 되니 자신이 하고 싶은 무언가를 틀어쥘 때까지 안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실업급여나 법정 최저임금으로 살아 보는 것이다.

자기가 못한 일을 왜 남더러 하라고 하는가? 지금 대학생이 법정 최저임금으로 살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알바하는 대학생들이 휴가비, 명품 가방비 벌려고 알바하는 것으로 보이나? 이미 최저임금, 아니 그 이하의 시급 받으며 고생하는 젊은이들이 대학생들이다. 참고로 실업급여는 이미 받던 임금이 있어야, 즉 일단 취업을 해야 받는 돈이다. 여기가 유럽인줄 아나?


5. 안녕하시냐고 묻지 마라. 어차피 다들 안녕 못한 거 알고 있잖은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누구와 함께 뭘 먹고 살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대자보 쓸 시간에 그냥 토익 책을 보든가 잠을 자라. 그게 오히려 스스로에게 더 솔직해지는 길이다. 어쩜 말을 그딴 식으로 할 수 있냐고 내게 따지기 전에, 이렇게 함부로 말하고 있는 내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 뭔가를, 서걱거리기만 하는 대자보 한 장보다 더 힘차게 펄럭일 수 있는 뭔가를 내게 보여 달라. 부끄러움에 푹 파묻히지 말고 더 뜨거운 무엇으로 스스로를 그득히 채운 모습을 보여 달라. 제발 부탁이다.

선생 중에, 선배 중에 제일 재수 없는 인간이 "껍냐? 그럼 날 이겨 봐" 라고 말하는 무리들이다. 아니 못 이기니까 학생이고 후배지. 지금 이걸 말이라고 하나? 철학 공부 좀 했다면 아포리아를 알 것이다. 모든 행동의 출발은 그 곤혹, 부끄러움, 난관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포리아를 느끼는 사람에게 부끄럽냐, 집어쳐라 하지 않고, 자, 그럼 같이 구도의 길로 가자며 권유를 했다. 부끄러움은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거기다 대고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라고? 이건 마치 100점 맞을 자신 없으면 공부하지 마 하는 것과 같은 말 아닌가? 그러니 어쩜 말을 그딴 식으로 할 수 있냐고 따지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말 하는 내 코를 납작하게?" 라는 자뻑은 또 뭔가? 필자 말대로라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젊은이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 필자가 능력있고 필력있는 진보 지식인이라면(만약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공연히 지면 낭비하지 말고 언론사의 한정된 공간에서 물러 날 일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을 모욕해서 그마저도 못하게 기를 죽이는 것잉 니라,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부끄러움의 대열로 끌어 내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6. 끝으로 궁금한 점 한 가지, 젊은이들에겐 대자보와 인터넷이라도 있지 나이 마흔이 넘은 어르신들은 끓는 속을 어디다가, 누구에게 풀어야 할까? 스스로를 기성세대라 부르며 젊은이들에게 괜히 미안해하는, 그리고 그 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그 어르신들은?

에라, 이 인간아. 별 걱정을 다 한다. 내 나이 며칠 뒤면 마흔 일곱이다. 이딴 소리 듣고싶지 않다. 2008년 촛불이나 아니면 당장 오늘 오후에 시내 나가 봐라. 태반이 마흔 넘은 어르신들이다. 그리고 마흔 넘은 어르신들 인터넷 잘 하고, 대자보는 원조다. 2008년 촛불이 꺾이고 진보지식인이란 작자들이(주로 진신류) 입을 쳐 닫을때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블로그 쓰고 트위터 하면서 힘을 길러간 사람들중 태반이 40대다. 그래 자네 말대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괜히 미안해하기나 하고 부끄러워 하기나 한다. 그래서 대자보에 뭐라도 화답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감정의 똥 취급하는 자네는 대체 그런 글로 뭘 얻고자 하는가? 대자보가 싹 사라지길 원하는가, 아니면 대자보 썼던 젊은이들이 자네 글에 자극받아 대학 때려치우고 사파티스타라도 되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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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2.

경찰의 민주노총 불법 수색 및 재물 손괴와 관련한 법규와 판례


내가 민주노총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고, 심지어 전교조가 민주노총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오늘 민주노총과 경향신문에 가해진 경찰의 테러는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땅을 치게 만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사회교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사태의 법적 쟁점을 정리해 봅니다. 내가 자격있는 법률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해설은 하지 않고 다만 참고가 될만한 조문과 판례만 급히 찾아 보겠습니다.
일단 오늘 있었던 희비극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경찰은 철도노조 지도부 9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 받는다. 체포영장을 가지고 있으면 이 9명을 보거나 혹은 이들의 소재가 분명하다고 판단이 드는 장소에서 이들을 체포할 수 있다.
2. 이를 근거로 경찰은 민주노총에 진입한다. 그런데 이미 9명은 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을 뒤져서 9명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법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게 경찰이 자기들 행위를 정당화 하는 근거인데,
형사소송법 제216조(영장에 의하지 아니한 강제처분) ①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제200조의2·제200조의3·제201조 또는 제212조의 규정에 의하여 피의자를 체포 또는 구속하는 경우에 필요한 때에는 영장없이 다음 처분을 할 수 있다. <개정 1995.12.29>
1. 타인의 주거나 타인이 간수하는 가옥, 건조물, 항공기, 선차 내에서의 피의자 수사
2. 체포현장에서의 압수, 수색, 검증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내 친구가 다이아몬드를 훔치고 도망가다 우리 집에 왔는데, 경찰이 내 친구의 체포 영장을 가지고 왔을때 압수수색 영장 없이 내 집을 뒤져서 이 친구가 있나 없나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인데, 미국 영화 보면 "FBI!"라고 외치면서 요원들이 와르르 들어왔는데 범인은 없는 그런 상황이죠.
그렇다면 오늘 경찰의 행위는 합법적인 공무 집행일까요? 글쎄요? "인권보호수사준칙(법무부훈령_제556호)"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준칙 19조의 5항과 26조의 4항을 보죠.
제19조【체포․ 구속시의 준수사항 】 피의자를 체포․구속하는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을 지켜야 한다.
5. 체포․구속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감이나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노력한다.
제26조【압수․ 수색시의 준수사항 】
4. 압수․수색 과정에서 사생활과 명예, 주거의 평온을 최대한 보장하고, 특히 매장․ 사무실 등 해당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압수․수색할 때에는 그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러니 경향신문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에, 그것도 경향신문사 문을 쳐 부수고 쌩 난리를 치고 진입한 체포구속, 압수수색은 법무부 훈령을 완전히 위반한 것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까짓 훈령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훈령을 위반한 수사는 불법한 공무집행이라는 판례까지 있기 때문죠다. 이 판례는 경찰이 체포 수색하는 과정에서 입은 손해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한 사례인데, 법원은 이 훈령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서울고법 2007.6.7, 선고, 2006나68348, 판결 : 상고]
[1] 국가배상책임은 공무원의 직무집행이 ‘법령에 위반’한 것임을 요건으로 하는 것이어서, 공무원의 직무집행이 법령이 정한 요건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는 법령에 적합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일이 생긴다고 하여 그 법령적합성이 곧바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의 ‘법령 위반’은 널리 위법성을 의미하고, 국가배상법상의 위법성이란 엄격한 의미의 법령 위반뿐만 아니라 인권존중, 권력남용금지, 신의성실 등의 원칙 위반도 포함하여 널리 그 행위가 객관적인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2] 경찰공무원은 그 권한 행사시 일반적으로 국민에 대하여 손해의 발생을 방지하고 국민의 안전을 배려하여야 할 직무상 의무를 부담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는 위법성이 인정되고, 근거법령에 따른 공권력의 행사라 하더라도 그에 부수되는 행위의 태양, 예컨대 공권력 행사의 방법 또는 수단 등이 위와 같은 직무상 의무에 위반하여 국민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에는 그 행위 전체를 위법한 것으로 평가하여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
[3] 압수·수색 절차는 강제처분의 하나로서 원칙적으로 수사기관이 임의로 할 수 없고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하여 하여야 하나, 예외적으로 영장 없이 압수·수색을 할 수 있는 경우를 형사소송법 제216조에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제1항 제1호에서 체포영장에 의한 체포를 하는 경우 필요한 때에는 영장 없이 타인의 주거 내에서 피의자 수사(피의자의 체포를 위한 수색 포함)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대검찰청에서 압수·수색에 관한 기본지침을 마련하면서 압수·수색영장의 집행시 지켜야 할 원칙으로 압수·수색의 전과정은 필요 최소한도로 실시하여야 하며 주거 및 사무실의 평온을 유지하고 온건한 방법으로 실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인권보호수사준칙 제19조에는 영장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압수·수색의 경우 대상자에게 그 사유를 알려주도록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긴급성을 고려하여 영장주의에 예외를 둔 경우라도 압수·수색 집행시 요구되는 준수사항은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이고, 대상자에게 그 사유를 알려주게 함으로써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취지를 살리게 하려는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할때 경찰은 국민의 손해를 최소화 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를 고의든 부주의든 위반할 경우 그 압수수색 행위 전체가 모두 위법한 과정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또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피의자가 있는 곳으로 갈때 압수수색영장 없이 들어가서 뒤질수는 있으나,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압수수색영장 집행에 적용되는 준칙, 즉 평온을 유지하는 온건한 방법으로 실시의 원칙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찰은 철도노조 지도부 체포를 위해 민주노총 건물을 뒤질수는 있으나 그러나 그 방법은 온건해야 하며,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불안하게 해서는 안되며, 특히 인근의 다른 매장, 예를 들면 경향신문 등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전혀 주의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도적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이는 불법한 공무집행이며, 따라서 민주노총 관계자나 경향신문 관계자들이 이를 막기위해 물리력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공무집행 방해가 성립되기 어렵고, 당연히 경찰이 뚜드려 부수고 영업을 방해한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배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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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1.

꼭 해 보고 싶었던 서울 교육 혁신 사업의 종합적 모델 수립을 위한 기초 연구

2012년, 곽노현 교육감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을때 재빨리 석 달 동안 이런 연구를 해서 마치려고 했었다. 내 능력으로는 서포트만 되면 석 달만에 충분히 결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곽 교육감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그 간의 성과를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려고 한 것인데, 진보진영의 소위 활동가, 명망가들의 고질병인 시기심과 견제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했다. 경기도나 다른 지역의 사례들을 종합하여 누구라도 이런 작업 완수했으면 한다. 이미 파견이 끝나 학교에 복귀한 나는 여력이 없다. 그때 기획안 요약을 그대로 보존해 둔다.


서울 교육 혁신 사업의 종합적 모델 수립을 위한 기초 연구
 
1. 취지
 
-현재 서울 교육 혁신 사업들이 서로 간에 연관성 없이 파편적으로 각자 운영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
-혁신학교, 문예체 진흥, 복지학교, 민주시민교육 등 서울교육혁신의 핵심 사업들간에 일관하는 공통의 철학적, 교육학적 배경이 직관적으로는 공유되고 있으나 이것이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 수준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음
-이러한 상황은 서울교육 혁신의 방향을 잡는 데 어려움을 주며,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교육혁신 방향에 역행하는 활동들마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폐단을 가져옴
-따라서 현재까지 진행된 각종 교육 혁신 사업들에 참여한 주체들의 생각과 실천의 결과물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일관성 있는 교육이론과 모델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함
 
2. 연구 목적
 
- 시대의 변화와 교육 본연의 가치들을 충실히 반영하여, 서울교육혁신 사업들에 일관되는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다.
- 이러한 철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서울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서울교육 혁신의 목표를 수립한다.
- 이러한 서울교육 혁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교육과정, 교수-학습, 학교운영, 학생활동의 모델 혹은 이념형을 구성한다.
 
3. 연구내역
 
-실태조사: 서울교육 혁신 각 영역들의 이름으로 어떤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선행사례 분석: 교육혁신을 주창했던 국내외의 교육운동들은 어떤 공통된 기반에서 이루어졌는가?
-공통점 발견: 수집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각 영역들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발견
-최신의 교육철학, 교육사회학 및 학습심리학 탐색
-수집된 자료의 공통점과 이론들을 바탕으로 서울교육혁신의 개념틀 개발
-구성된 개념틀을 이용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혁신 사업들을 분석하고 문제점 발견
모형의 정교화 및 완성
-관련 국내외 사례 수집 및 보급

2013. 12. 6.

만델라의 서거 소식에 기쁨의 변증법으로 추모한다

넬슨 만델라가 세상을 떠났다. 내 평생 나침반으로 삼아온 세명의 M이 있다. 모차르트, 마르크스, 그리고 만델라다. 그 중 유일한 생존 인물이었던 그가 이제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 그는 이미 역사 속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구태여 추모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는 살아 생전에 이미 만신전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델라가 나에게 지표가 되었던 까닭은 그의 불굴의 투쟁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굴할 줄 아는 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인류의 최소한의 보편적 가치 이외에는 어떤 도그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든 그 장소와 시간에 맞는 인간 존중의 길을 찾아서 실천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부정변증법적이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의 변증법이고 긍정의 변증법이다.

부정변증법과 기쁨이라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좌파 지식인들 중 가장 염세적이고 우울한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결국 문제는 문화라는 것" 을 밝혀낸 큰 업적을 남겼다. 문제는 문화예술이 자본에 의해 문화산업으로 포섭되었다는 것이며, 몇 안 남은 문화의 만다린들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벤야민에게는 이것이 아우라가 사라지는 긍정적인 현상이었겠으나, 아도르노에게 이는 몰개성한 대중의 전체주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절망적인 현상이었다. 이 세상 곳곳이 체제와 자본에 의해 장악당해 버렸으니 아직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할 수있는 일은 소스라치며 절규(이디오신크라시)하고 어렴풋한 희망을 모방하는 것(미메시스) 뿐이다.

그의 제자 하버마스는 그 절규를 의사소통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절망의 벽을 넘으려 했다. 그런데 의사소통행위로 절망의 벽을 넘으려면 사람들의 소통적 합리성을 전제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전제하는  순간 체제, 자본에 의해 왜곡된 문화를 비판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가장 중요한 의의가 흔들리고 말았다. 결국 그 역시 소통적 합리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에 의한 의사소통구조의 왜곡을 비판하는 쪽으로 가다가 급기야는 일상 담화 비판으로 선회. 사실 이런 일상 담화 비판, 특히 화용론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거대담론에 매몰된 진보이론들이 보지 못한 지점들을 많이 드러낸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바로잡으면 세상도 바로잡힐까 하는 의문 앞에서 여전히 무력하다.

이제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가서 아도르노가 절망했던 그 지점에서 다시 고민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분명 그 통곡의 벽을 넘기는 했지만 다만 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역시 문화를 응시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로큰롤 혁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 돌파구다. 물론 아도르노도 로큰롤 음악을 경험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혁명적인 힘을 보는 대신 자본에 의해 표준화되고 대량생산되는 문화상품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로큰롤은 분명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모든 요소의 총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큰롤은 끊임없이 자본주의의 아픈고리를 두드리는 갈고리가 되며, 그것을 절규가 아니라 흥겹게 춤을 추며 해낸다.

그래서 로큰롤의 본고장이었던 미국, 그리고 그 근방인 멕시코에서 아도르노의 진정한 계승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파티스타 부사령관인 마르코스다. 흔히 사파티스타를 총질하는 게릴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은 전세계를 상대로 활약하는 문화게릴라였다. 그들이 정말 총으로 승부를 봤다면 진즉 모조리 토벌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르코스의 여러 저작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 낙관성, 간결한 심미성, 그리고 유머다. 그들은 절규하는 대신 노래했고, 소스라치는 대신 춤을 추었으며, 어렴풋한 희망을 모방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네그리도 비슷한 귀결에 도달했다. 네그리 사유의 특징은 긍정의 변증법이다. 기존의 변증법은 항상 정립된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세우지만 네그리의 사유는 정립된 것을 이용하거나 연장하여 혹은 그 너머에 새로운 것을 세운다. 즉 굳이 부정, 반정립 할 이유가 없다. 이건 실천적으로 매우 무서운 사유방식이다. 만약 자본이 어떤 억압장치를 만들면 노동자는 거기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슬그머니 자기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아예 그걸 생까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나선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역시 이름이 부정이지 사실상 긍정 변증법이다. 아도르노는 정립된것, 기존의 것에 대한 반정립, 반대라는 의미로 부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그건 아니라는 의미로 부정을 사용했다. 그건 아니다. 그럼? 난 새롭게 하겠다. 이 새로움은 그것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과 다름, 그것 너머의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것 역시 정립되는 순간 부정되고 나는 또 다른 새로움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게 부정변증법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사유인 것이다.

한참 먼 길을 돌았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철학적 논의 따위 하지 않고서도 이 부정변증법에 가장 전범이 될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만델라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응용하고 어떤 장벽에 부딪쳐서도 그 너머를 응시했던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이룩한 것을 완수되는 즉시 부정하고 그 너머를 다시 바라보았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많은 혁명가들이 이른바 해방 이후 압제자로 전락한 것과 달리 그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영화 사라피나는 그런 점에서 만델라에 대한 거대한 찬송가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소울 계통의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흥겨운 춤곡들이다. 이들은 이 속에 분노와 울분을 감춘다. 이들은 분노를 말하지 않고 그것이 극복된 그 이후를 그려나간다. 탱크와 총칼 앞에서도 이들은 춤을 춘다. 이들은 탱크와 총칼 너머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것이 두렵지 않다. 현실의 장벽은 이미 부정되었다. 그리고 부정된 것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사라피나에 나오는 노래들을 만델라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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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4.

PISA보고서에서 등수만 보지말고 분석을 보자. (신문이 보도하지 않는 것들)

PISA 2012 결과가 나왔다. 피사 보고서는 모두 네권이나 되는 매우 두툼한 보고서로, 피사 점수(performance) 뿐 아니라 여러가지 변수들을 종합하여 교육정책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효과가 있거나 없는지 판단하기 위한 연구결과로서 꼼꼼하게 읽어볼 가치가 있다.게다가 2003년에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지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일종의 종단연구로서의 가치도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를 읽을때는 여러 변수들간의 관계, 그리고 10년간의 시계열 자료 등을 따져봐야 그 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역시나 이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 나와 있는 등수에만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면서 진보들이 칭찬하던 핀란드의 등수가 하락한 것을 보고 "얼씨구나"하는 반응이다. 여기에 대해 진보교육계에서는  피사라는 평가에 교육이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원론적 반발로 대응하고 있다. 두 입장 모두 너무 피상적이거나 너무 추상적이다. 피사 보고서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네권짜리를 다 읽을 여유가 없어서 '수학' 영역에 대해 분석한 1권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동아시아 부국들이 절대적인 강세를 보이는 점수



먼저 한국인들이 가장 관심있어하는, 그리고 이것만 보면 그 뒤는 안보고 제끼는 등수. 일단 순위가 높다. 샹하이-차이나는 빼자(상하이에 살고 있는 농민공들의 자녀까지 포함한다면 절대 이 퍼포먼스 나오지 않는다. 이런식이면 우리나라도 강남3구만 따로 시험치게 할 수 있다). 그럼 1. 싱가폴, 2. 홍콩, 3. 대만, 4. 한국, 5. 마카오, 6. 일본 순으로 상위권이 매겨진다.







이 순위를 보면 한 마디로 아시아 부국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그 다음은 서유럽과 북유럽, 그 다음은 동유럽과 남유럽, 이런 식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높은 순위는 우리나라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동아시아의 특징이다. 생뚱맞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베트남을 보라. 저 역시 동아시아 문화권의 효과다. 베트남이 말레이지아만큼만 살았어도 아마 10위권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2. 못살아도 공부 시키고야 말겠다는 집념



피사 연구진은 만만하지 않다. 그냥 아, 선진국들이 공부 잘하네, 그리고 선진국 중에서는 동아시아 선진국이 잘하네, 이러고 넘어가지 않는다. 물론 사회-경제적 지위가 학업성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정설이기는 하다. 그러나 피사연구진은 학생들의 성취도 중 사회-경제적 지위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지를 분산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가 다음의 그래프다.





이 그래프에서 좌상단에 있는 나라들은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성적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나라들 중 공부를 잘하는 나라들, 좌하단에 있는 나라들은 공부를 못하는 나라들이다. 우상단에 있는 나라는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성적에 영향을 적게 미치는 나라로서 공부 잘하는 나라, 우하단은 공부 못하는 나라다. 좌하단에는 나라들이 빽빽한데, 좌상단에는 한산하다는 것은 빈부차가 학업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 중 공부 잘하는 나라가 있기 어렵다는 뜻이다.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대체로 우상단, 즉 빈부차가 학업성취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성적도 높은 나라에 속해있다. 대만과 싱가포르가 빈부차 효과가 비교적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이 두 나라가 비록 작지만 꽤 복잡한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이다.(대만은 9개나 되는 소수민족, 그리고 중국어보다 대만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남부지방 등의 문제: 만약 시험문제가 중국어로만 나왔을 경우 점수에 영향을 줌/ 싱가포르는 말레이계의 문제: 시험문제가 영어나 중국어로만 나왔을 경우 점수에 영향을 줌) 또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나라들은 우하단에 주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잘살거나 못살거나 죽기살기로 공부해서 점수가 높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나라들은 잘살거나 못살거나 지지리도 공부 안해서 골고루 점수가 낮고, 서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균형점에 위치해 있고, 남유럽과 중남미는 안습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자, 이제 동아시아 선진국의 높은 점수가 이들이 잘살아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의 점수를 이토록 높여 놓았을까? 우선 우리나라의 경우를 설명하는 것은 쉽다. 다음 그래프들을 보라.





이 그래프 중 위의 것은 자녀가 서른살이 되었을때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비율을 보여준다. 여러나라 비교하면 복잡하니까 우리나라와 독일만 비교하자.  우리나라 부모는 겸손하게 60%만이 자녀가 전문직이길 희망한다. 독일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아래 그래프를 보라. 자녀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갖기 바라는 부모의 비율은? 우리나라가 80%를 넘어서 당당 1위로, 전문직에 종사하기를 바라는 학부모보다 훨씬 더 많다. 반면 60%의 부모가 자녀가 전문직이기를 바랬던 독일의 경우 대졸 희망은 30%를 조금 넘는다(!!). 이 극명한 차이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전문직이 되지 않을 학생들도 대학을 나와야만 하고, 독일은 전문직에 종사하고자 하는 학생들도 굳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직종이 전문직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한국은 일반적인 직장이라도 잡으려면 대학을 나와야 하고, 독일은 심지어 전문직이 되는데도 굳이 대학이 필요 없을수도 있다는 뜻이다. 자, 그럼 어느나라 학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빡세게 시키겠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다.


3. 그래서 불행한 우리 학생들



우리의 높은 교육열은 결국 삶의 절박함에 의해 강요된 불안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다음 그래프는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한 학생들의 비율을 가지고 매긴 순위다.




이 그래프를 보면 특이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아시아 선진국은 모두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OECD평균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 학교라면 이지메를 떠올리지만 일본 학생의 80% 이상이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싱가폴, 홍콩, 대만 다 마찬가지다. 오직 우리나라면 60% 의 학생이 그렇다고 응답하여 압도적인 차이로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결과를 거칠게 해석하면 홍콩, 싱가폴, 대만, 일본 학생들은 즐겁게 공부도 잘하고,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는 잘하는데 불행하다. 도대체 왜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전혀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는지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



(참고로 핀란드 학생들도 60% 대의 학생만 행복하다고 응답해서 하위권이라는 것인데, 이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다른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80% 이상과 상당히 다른 결과다.)



4. 동아시아의 높은 학업성취는 지속가능할까?



많은 학부모들(자기 아이는 잘할거라는 착각에 빠진)을 현혹시키는 환상중 하나가 수준에 맞게 분반수업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억측이다. 그러나 10년간의 시계열자료는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의 그래프를 보라.




오른쪽으로 갈수록 수준별 분반수업을 강화했다는 뜻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학생들의 학업 동기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이 둘간의 관계는 정확하게 반비례를 그리고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꾸 영미식 신자유주의 타령을 하는데, 정작 미국과 영국은 수준별 분반수업을 가장 추진하지 않는 편에 속하며, 덕분에 학업동기 하락을 크게 겪지 않았다. 희망이 있고 지속가능한 것이다. 물론 북유럽 나라들 역시 수준별 분반수업을 그다지 시행하지 않았고, 높은 학업동기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수준별 수업을 어느정도 진행 한 것으로 나오며, 그 결과 기대값보다 훨씬 큰 학생들의 동기저하를 겪고 있다. 이들 동아시아 선진국들은 10년간 학생들 학업동기가 하락한 것으로도 상위권에 포진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꾸준히 학업동기는 하락하고 있는데, 학업성취는 향상되고 있다? 학생들의 머리가 점점 더 좋아졌다거나, 아니면 선생들이 훨씬 더 우수해졌다거나 하는 변수가 없다면, 이건 갈수록 점점 더 빡세게 공부를 시켰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를 속단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동아시아 선진국들의 현재의 높은 학업 성취는 앞으로 지속가능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 높은 학업성취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 억지로 갈궈서 얻어진 성취이며, 그 댓가로 여러 인성 문제, 자살, 가정파괴 등의 부작용을 남기고 있는 성취인 것이다.



5. 교육복지와 교육성취는 함께 간다



다음 그래프도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 그래프의 가로축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교육 형평성이 높아지는 것, 즉 교육자원이 여러 계층에게 골고루 할당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로축은 피사 성취도다. 흔히 형평성과 효율성을 이야기하면서 이 둘을 상충관계로 보는 경제적 관점이 있다. 그러나 이 그래프는 교육에서는 형평성과 효율성이 동시에 성취가능하다는 것을, 아니 형평성이 커질수록 효율성도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래프의 직선을 경계로 위에 있는 나라들은 그 나라 교육형평성에 비해 교육성취가 높은 나라, 아래에 있는 나라는 형평성에 비해 성취가 낮은 나라다. 이걸 아주 상세히 볼 필요는 없고 멀리 떨어져 있는 극단값이 그렇다는 뜻이다. 예컨대 샹하이는 교육형평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성취도가 높다. 대만, 베트남, 홍콩, 싱가폴, 한국, 일본도 그러하다. 나라에서 교육자원을 공평하게 분배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들 어떻게든 공부 시킨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교육형평성이 비교적 높은 나라에 속하지만(역설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학생들이 많은 지역 공립학교에 서울대 출신 교사들이 가장 많다는...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그 형평성에 비해 훨씬 높은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 교육의 지속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게 결국 사교육으로 등골이 휘고 있단 뜻이니까. 이건 지속가능하지 않다.한마디로 오버페이스 중이란 뜻이니까. 이 오버페이스를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다. 가계파산, 청소년 자살..... 그리고 대학만 들어가면 그만인 공부. 만약 PISA가 25세를 대상으로 다시 35세를 대상으로 실시된다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대한민국 어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반면 핀란드를 보라. 교육형평성이 가장 높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는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핀란드는 이번에 성취도가 2009년보다 떨어지자 몇년 사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불평등이 다소 심화된 탓이라고 바로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형평성을 다시 높이면 성취도도 다시 회복된다고 바로 해법이 나온다. 이건 지속가능하다.







6. 교사 월급의 2중성



마지막으로 조금 낯 뜨겁지만 교사의 처우에 대한 부분. 아래 그래프를 보자. 가로축은 교사의 보수가 그나라 평균소득보다 얼마나 더 많으냐 하는 것이다. 100이하면 평균 이하란 뜻이다. 그리고 세로축은 피사 점수. 얼른 보면 아무 경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나라들을 1인당 국민소득 20000달러를 기준으로 분류했을 경우는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20000달러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교사의 보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학업성취가 조금씩 떨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반면 20000달러를 넘는 나라들에서는 교사의 보수가 높을수록 학업성취가 조금씩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기울기가 매우 완만하기 때문에 이걸 근거로 교사의 보수를 높여라, 깎아라 할 수 있을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피곤하다. 그만 하련다. 하여간 이런 자료 나오면 등수만 보지 말고, 또 무조건 피사 나빠 그러지 말고 좀 꼼꼼히 살펴보자. 특히 진보진영은 이런 보고서를 읽고 고민하는 학구적인 태세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의기충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대는 진즉에 지나갔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인용한 자료는 OECD가 발간한 PISA 2012 in Focus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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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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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