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4.

동아시아 3국의 명문대학 분포도

PISA 2012의 뜻밖의 결과 때문에 세계 교육계하 흉흉하다. 그 동안 교육자, 특히 진보적 교육자들을 위로해왔던 사실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부 빡세게 시키는 모델이 성적은 올릴지 몰라도 학생들의 멘탈을 무너뜨리는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공부는 잘하지만 불행한 동아시아 학생들. 이게 거의 클리셰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PISA 2012 결과 싱가포르와 대만이 학업 성취도는 물론 학생의 학교 행복지수에서도 최고를 기록했고, 홍콩, 일본 역시 학업 성취도와 행복지수 모두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이제는 공부도 잘하고 행복하기도 한 아시아 학생? 유럽과 미국에서 "거 봐라. 빡 세게 시키는 아시아 방식이 좋다."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예외. 바로 대한민국. 오직 대한민국만은 여전히 "공부는 잘하는데 학생들은 불행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교육의 상황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과 아시아 4룡(대한민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은 모두 어려운 교육과정, 많은 학습시간, 치열한 경쟁, 입시위주 수업, 자율이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 방과후 학습과정, 입시사교육(한국 일본은 학원, 대만 홍콩은 보습소)이라는 판박이 교육 체제다. 심지어 일본은 중학교부터 입시가 있고, 대만, 홍콩, 싱가포르 역시 고등학교 입시가 빡센 편이다. 그렇다면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공통되는데 우리나라만 아닌 것,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눈에 확 띄는 자료가 있다. 세계 여러나라의 명문대학들을 조사하다 보니, 유독 우리나라만 다른 나라에 비해 이른바 명문대학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나라나 수도에 명문대학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정도가 우리와는 자뭇 다르다.

먼저 일본의 이른바 일류대학의 분포도다. 4년제 대학만 700개가 넘는 일본이기 때문에 그 중12개라고 하면 일류 중 초 일류 대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절반인 6개가 도쿄에 자리잡고 있는 대학이라 편중률이 50%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동북지역, 중부지역, 관서지역, 규슈 지역에 각각 초 일류 대학이 자리잡고 있어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 특히 관서지방의 교토대학, 오사카 대학, 동북지역의 도후쿠 대학은 도쿄대학을 제외하면 도쿄의 어느 대학에도 꿀리지 않는 명문대학들이다. 교토대학은 심지어 도쿄대학과 맞먹는다고도 한다. 오사카 근방에서 태어난 학생이라면 공부를 아주 잘하더라도 구태여 도쿄까지 가서 대학을 다닐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는 센다이나 후쿠오카 나고야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와세대 대학, 게이오 대학을 제외하면 모조리 국공립대학이라는 점이 매우 이채롭다.

다음은 대만이다.  대만은 인구가 대한민국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10개 대학 정도면 명문대 리스트가 가득 찬다. 이 중 국립 타이완 대학의 위상이 압도적이며, 그 외에 10개 이내의 명문대학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연고대에 해당되는 교통대, 칭화대, 성공대가 지방대학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그 외에 각 지역별로 일류대학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일본보다 타이페이 편중현상이 훨씬 덜한 것이다.  남부지방 학생이 공부 아주 잘하면 성공대학 가면 되고, 타이완 대학 갈 게 아니라면 구태여 서울로, 서울로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명문대학이 몽땅! 국립대학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우리나라.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대학 순위를 매긴 리스트 등이 없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이 명문대학 이니셜만 따서 구전가요처럼 부르는 리스트가 있다. 서연고서성한이중경외시동건홍숙. 여기에 이공계 명문인 카이스트와 포항공대를 넣으면 대략 다음과 같은 지도가 완성된다.
서양인들에게는 다 같이 동아시아 문화권이지만 일본, 대만과 비교해 볼때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대학이랄 것이 거의 없이 싹 전멸해 버린 모습이 몹시 안타깝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호서의 서울대라 불리던 공주대학, 영남의 명문 부산대학과 경북대학이 건재했었다. 그런데 그 위세가 영 예전같지 않다.
엄청난 수도 편중현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학이 일본, 대만과 매우 다른 또 다른 점은 압도적인 사립대학 비율이다. 간단히 서울대학과 서울 시립대학, 그리고 교육부 소속이 아니라 애매한 카이스트를 제외하면 모조리 사립대학이다.  도에의 편중, 이른바 명문대학의 사립대학 쏠림현상. 이는 확실히 우리나라와 다른 동아시아 선진국들의 확연한 차이점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 학생들의 상황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인지, 이 차이가 우리나라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동떨어진 교육으로 내달리는 상황에 어떤 원인이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확연하게 다른 점이 느껴져서 일단 한번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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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8.

이제는 동아시아 모델에서 조차도 따로 노는 한국 교육

동아시아 교육모델이라고 흔히 불리는 유형이 있다. 1.교육에 대한 높은 가치, 2.교사에 대한 사회적 존경, 3.자녀의 교육에 헌신하는 부모, 4.엄격한 학교 규율과 강도높은 학습 의 특징을 공유하는 우리나라, 일본,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최근의 중국 일부지역(상하이, 썬전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나라는 각종 국제 학업성취도에서 상위권을 독점했으며, 심지어 PISA문제의 진화방향은 이들 나라들이 상위권을 독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분투의 결과라는 말까지 있다. 실제로 PISA문항은 단순히 학습 시간을 늘리고 많은 내용을 암기하고 연습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늘리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의 상위권 독점은 전혀 기가 꺾이지 않는다.

그러자 유럽과 미국등의 기존 선진국들은 '학생 행복지수'를 들고 나왔다. 동아시아 나라들이 공부는 잘 할지 몰라도 행복하지는 않다는 뜻이렸다. 그런데 막상 조사를 해 보니 그것도 아니다. (기사원문) 싱가포르, 타이완 학생들이 공부도 최상위권이면서 행복도도 상위권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콩, 일본, 상하이도 행복도가 평균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 그래프를 보자.

The Best Schools and the Happiest Kids infographic
이 그래프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학생들은 행복하고 왼쪽으로 갈수록 불행하다. 그리고 위로 갈수록 공부를 잘하며, 아래로 갈수록 못한다(베스트 스쿨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학업성취도 결과임). 그렇다면 오른쪽 위칸에 위치한 나라들이 좋은 교육을 하고 있는 나라라는 결론이 나온다. 공부도 잘하고 아이들도 행복하고. 이 그래프에서는 점의 색깔이 하늘색인 나라들이다. 남색이나, 보라색인 나라는 뭔가 좀 부족한 나라이며, 빨간색인 나라는 최악의 학교를 가진 나라들이다.

이 그래프에 따르면 싱가포르, 타이완, 스위스, 아이슬란드, 홍콩, 일본, 리히텐슈타인, 마카오, 네덜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노루웨이 정도가 최상의 교육강국으로 나온다. 카타르, 아르헨티나,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사이프러스, 미국, 리투아니아, 러시아,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라트비아, 체코, 요르단 정도가 교육 개판인 나라로 나온다.

그럼, 우리나라는?  우리가 모범이라고 여기고 있던 핀란드와 함께 나란히 중하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학업 성취도는 높으나 학생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전혀 다르게 핀란드에서만 학생들의 행복도가 바닥인 결과가 이채롭다. 게다가 이 그래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도는 최하위다! 대만 아이들하고 성적은 비슷한데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불행한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교육은 동아시아 교육모델도 아닌셈이다. 공부도 잘하고 아이도 행복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공부만 잘하고 행복하고는 담 쌓은 한국식 교육모델로 따로 독립했으니 말이다. 교육선진국 찾아 멀리 북유럽을 갈 것이 아니라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동아시아 모델에서조차 이탈한 것, 그 계기가 고통의 근원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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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

학교문화예술교육의 방향에 대한 소고

클라우드를 뒤지다 발견한 글입니다. 어디에 무엇 때문에 쓴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읽어보니 좋아서, 여기에 기록삼아 남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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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예술은 다르다.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또 교육의 방법이나 소재로 예술이 활용되면서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예술은 예술이고 교육은 교육이다. 예술의 목표는 심미적 체험이다. 교육의 목표는 어떤 능력의 향상이나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행동 변화다.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과 교육적으로 훌륭한 작품은 다르다. 예컨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더라도, 그것을 중·고등학생에게 예술교육용으로 사용할 교사는 없다. 여기에 대해 폐쇄적이다, 예술에 적대적이다 비난해 봐야 소용이 없다. 아무리 심미적으로 큰 감동을 준 예술작품이나 예술 활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능력의 향상이나 행동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거나 심지어 악영향이 예상된다면 그것은 교육에 활용될 수 없다.

따라서 이른바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말할 경우에는 문화예술의 교육인지 아니면 교육에서의 문화예술인지 분명해야 한다. 전자라면 이는 어떤 문화예술 분야의 소양을 익혀서 그 분야의 전문가나 전문가 수준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다. 후자라면 그 분야의 기능이 아니라 그것을 익히고 누리는 과정에서 어떤 다른 능력, 태도, 행동의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고 비슷한 훈련을 하는 등산학교와 스카우트 캠프를 예로 들 수 있다. 등산학교는 실제 등반, 야영 기술을 익히는 것이 목적이다. 스카우트 캠프는 그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단결력, 모험심, 자립심 같은 미덕을 쌓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둘 중 하나에만 치우치는 경우는 없다. 미덕 없는 등반가는 있을 수 없고, 야영, 독도법 같은 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스카우트도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이 사이의 균형점을 어느 쪽으로 기울이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능력, 태도, 가치의 함양없이 기능만으로 예술가가 되지는 않는다. 또 어떤 능력, 가치, 태도를 교육하기 위해 예술적 요소를 사용하지 않는 교육도 없다. 문제는 균형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문화예술교육”의 경우는 이미 그 답이 명백하다. 학교는 공식적 교육기관이다. 즉 학교는 교육을 명시적인 목표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특화된 기관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그 앞에 무슨 수식어가 붙더라도 우선은 “교육”이다. 이를테면 스포츠클럽 활동은 학생들을 운동선수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문화예술교육은 학생들을 예술 전문가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매개로 하여 어떤 교육적 효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문화예술교육의 성공적 정착과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한 이해가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적 효과란 학생의 변화를 말한다. 즉 어떤 프로그램을 시행했으면 시행 이전과 시행 이후 학생의 생각, 태도, 행동 등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시간낭비고, 부정적 변화가 나타난다면 반교육적이다. 따라서 교육은 이러한 목표로 하는 변화를 설정하는 단계,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단계, 실제 프로그램의 집행단계, 그 효과를 검증하는 평가단계로 이루어진다. 학교 등 공교육의 경우는 이 네 단계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된 문서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교육과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흔히 교육과정을 어떤 프로그램의 순서도나 방법론으로 오해하면서, 목표 설정의 부분과 평가의 단계를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관점이다. 또 이 평가를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것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칙적으로 평가는 학생들에게서 관측되는 변화를 통해 해당 교육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것이다.

학교에 어떤 프로그램이 투입된다는 것은 그 학교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학교 범위를 넘어서 국가 정책으로 학교문화예술교육을 추진한다는 것은 국가교육과정의 한 부분, 혹은 여기에 기여하는 어떤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프로그램과 정책은 먼저 국가교육과정, 그리고 각 학교의 교육과정을 충실하게 이해하고, 그것의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까지 모두 갖추어야 한다. 심지어 여기에는 강사의 복장, 언행, 행실과 같은 것까지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포함된다. 학생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교육자의 모든 요소가 다 교육과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육당국이나 학교는 이러한 프로그램의 도입에 소극적이 되기 쉽다.

이는 학교가 아직 미성숙한 사람을 다루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병원이 새로운 치료법이나 약재의 사용에 매우 신중하고 소극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병원은 획기적인 치료법이나 약재보다 위험이 적은 치료법이나 약재를 선호한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안정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획기적인 효과보다는 학생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답답한 보수성으로 보일수도 있으나 아동·청소년기라는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는 많은 학생들과 함께해야 하는 교육자 입장에서는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과 교육은 그 사후 책임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관객의 내일 이후의 삶에 대해서까지 책임지는 연출가는 찾기 어렵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교사는 학생의 내일 이후의 삶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학교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현장에 투입될 프로그램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 프로그램이라야 하며, 이 교육은 그 분야의 기능과 소양을 기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성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보완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또한 학교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현장에 파견될 사람은 학교에 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을 하는 교육자라야 한다. 그가 직접 교사의 마인드를 가질 수도 있으며, 교사와 서로 상보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학교의 교육 전체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신중하게 찾고 고민해야 한다.

이런 신중한 고민 없이 단지 예술가의 마인드로 학교에 접근할 경우 학교의 거부감을 사거나 혹은 활동의 폭을 상당히 제한당할 수 있다. 물론 학교 측이 실제로 구시대적인 폐쇄성, 고루한 보수성 때문에 그렇게 나올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학교 측의 여러 요청이나 제한을 무작정 고루한 보수성, 혹은 문화예술에 대한 몰이해로 몰아쳐서는 절대 바람직한 답이 나오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가 문화예술은 없이 교육만 강조하는 반대 방향의 편향을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예술”을 활용하는 교육이며, “문화예술”에 대한 교육이다. 따라서 이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교육적 소양을 갖춘 문화예술 전문가라야지, 문화예술을 장식으로 달고 있는 교육자라서는 안 된다. 특히 치열한 기능연마를 요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좀 더 편안한 길의 하나로 학교문화예술교육이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문화예술교육자가 빼어난 걸작을 창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느 정도 수준있는 수작은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과학교사가 새로운 발견을 할 필요는 없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법칙에 대해서는 충분히 통달해야 하고, 사회교사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지휘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경제 분야의 쟁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듯, 문화예술교육자는 자신의 분야에 상당히 숙련되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미술 분야 프로그램으로 학교에 파견된 문화예술교육자라면, 학교에서 행사가 있고, 걸개그림이 필요하다면 그 정도는 그려낼 수 있어야 하며, 그 그림에서는 충분히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져야 한다. 그래야 미술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그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연극 분야 프로그램으로 파견되었다면, 비록 자신의 전문 분야가 교육연극이라 할지라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30-60분 정도의 드라마를 제작해서 학교 예술제 등에서 공연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예술교육사지 예술가가 아니라는 등의 변명은 학교에서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자신의 전문 기능을 통해 학교 전체의 프로그램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와 그의 프로그램의 학교내 위상도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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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 조례를 개정해서 교권을 회복? 이 무슨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

12월 28일에 기미가 보이던 감기가 김빠지고 맥빠진 서울시청, 광화문 집회 갔다와서부터 기승을 부렸다. 그 와중에 12월 30일에 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 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조중동은 일제히 "학생권리만 강조한 곽노현 조례 개정예고"라는 식으로 타이틀을 달았다.

몇몇 청소년 인권운동하는 지인들이 나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감기때문인지 감기약 때문인지 머리가 도통 돌아가지 않아, 글 한 줄 쓰는데도 시간이 몇십분씩 걸려, 이제야 그럭저럭 완성하게 되었다. 칼럼 하나 쓰는데 두시간이면 충분했던 싱싱한 머리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

이하, 칼럼에 들어갈 내용이다. 칼럼이 노출되는데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 블로그로 공유시켜서 미리 미리 쓰임이 있게 하려고 한다. 


서울시교육청이 서울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서울시의회가 이것을 의결해 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교육부가 제기했던 무효소송 때문에 1년이 넘도록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이번에는 개정안 때문에 또 다시 표류할까 우려스럽다. 어쩌면 문용린 서울교육감이나 교육청의 보수층 일각은 개정안의 통과가 아니라 학칙이 제·개정되는 민감한 학년말에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대로 적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마저 가능하다.

서울시 교육청 담당자는 학생들이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를 소홀히 하여 일선 학교의 학생지도가 어려움을 겪고 교권이 실추되는 등 부작용이 있어 이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 학생인권조례는 제정되기가 무섭게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제기한 무효소송에 계류되었고, 보수적인 학교장들은 1년이 넘도록 아직 무효소송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학생인권조례를 사실상 사문화된 법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학교 현장에 제대로 적용되지도 못한 학생인권조례가 무슨 부작용을 보여 줄 수나 있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백보를 양보하여 이들의 주장대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침해되어 일정부분 개정이 필요하다고 치자. 그런데 막상 이 개정안 내용을 보면 학교장이 학칙에 따라 복장·두발 등 용모에 관한 사항을 정할 수 있고, 교사가 합리적인 의심이 있는 경우 소지품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교권강화라며 들어 와 있다. 교권의 개념을 학생들에 신체나 복장에 대한 통제권이라고 잘못 이해하지 않는 한, 혹은 교권을 학교장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라고 강변하지 않는 한 이 개정안이 교권을 강화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학생이 교사에게 대들거나 서로 얼굴 붉히는 상황을 가장 많이 만든 장면이 바로 이 놈의 복장검사, 두발검사였다. 그런데 그 복장검사, 두발검사를 교사가 소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이 복장, 두발 규정은 "학교장의 취향"일 뿐이다. 학교장의 취향이 어느새 "선악의 기준"으로 둔갑하여 모든 교사들에게 이것을 바탕으로 학생과 일대 전쟁을 벌이도록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장이 복장, 두발 규정을 멋대로 제정할수 있게 하는 것은 교권을 저 맨틀 이하까지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교권이라는 말 자체도 애매하다. 교권은 도대체 누가 가지는 어떤 권리란 말인가? 부모의 친권조차 아동의 인권을 우선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 법체계인데, 과연 교사, 아니 학교장의 교권이 학생의 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나라 법체계에서 나온 발상이란 말일까? 당연히 교권은 그런 것이 아니다.

흔히 교권이라고 부르는 권리는 대한민국 헌법 32조에서 보장하는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헌법 조항의 의미는 교육을 담당하는 전문가인 교원은 정치적 혹은 그 밖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오직 자신의 전문적인 판단에 의해 자주적으로 교육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교권은 교원이 교원-학생의 교육적 관계에 간섭하는 온갖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오직 교육전문가로서의 판단에 의해 교육할 수 있는 권리이지, 학생에 대해 더더군다나 학생의 인권을 거슬러가며 행사되는 권리가 아니다. 이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수 있는 판사의 권리가 피고인에 대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를 간섭하는 외부 압력에 대해 행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침해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일부 학생들이 학생인권조례를 오해하여 마치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처럼 굴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는 교육의 대상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며, 그 교육 역시 인권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처럼 학생들의 머리모양이나 복장을 좌지우지 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처벌하지 못하여 박탈감을 느끼는 일부 교사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일부 비정상적인 교사들의 비뚤어진 욕망의 박탈을 교권침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교권침해는 이런 것들이다. 뉴 라이트 성향의 극우 인사를 교사 연수 강사로 초빙하여, 강사보다 더 전문적이고 학식이 깊은 교사들에게 강제로 이를 듣게 한다거나, 학교장이 특정교과서를 채택 혹은 배제하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교장단 회의라는 친목단체에서 학교장들이 담합하여 법정 수업일수보다 5일이나 수업일수를 늘려, 8월 무더위가 한창일 때 개학하게 만드는 것이 교권 침해다. 공공기관 적정 실내온도 지침과 무관하게 냉난방기의 가동을 학교장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 여름에는 찜통, 겨울에는 이글루 같은 교실에서 수업하게 하는 것이 교권침해다. 장관의 생각에 따라 교육과정을 엿가락처럼 바꾸고, 학교마다 특정한 프로그램을 이행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교사가 학생들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각종 업무를 만들어 부과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교사의 전문적이고 양심적인 판단을 믿지 못하여 각종 누가기록부니 뭐니 하는 장부만 자꾸 만들어서 기록하게 하는 것이 교권 침해다.

자, 그렇다면 교권 침해의 주범이 누구인지 바로 답이 나온다. 학생이 아니라 바로 교육청, 교육부의 교육 관료들, 그리고 교육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비뚤어진 정치인들이 바로 교권침해의 장본인들이다. 교권은 바로 이들의 압력으로부터 교실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교권강화를 외치는 소위 보수교육단체는 이런 교육 관료와 정치권의 압력으로부터 교권을 보호하도록 한 서울교권보호조례에 대해 거의 목숨 걸다시피하고 반대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권은 교장권, 혹은 교육 관료권에 다름 아님을 고백한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개정안을 내어 놓아도 좋다. 어차피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주장을 내어놓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라. 그냥 교칙을 마음 내키는 대로 정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교장권 회복이라고 솔직히 이유를 밝히라. 학생의 인권을 제한해야만 보장받거나 회복될 수 있는 교권이라면 그건 애초부터 교권이 아니며 병든 권리이다. 그런 권리를 교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권에 대한 모욕이며, 교사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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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써 놓고 나니 약기운 때문에 잠이 쏟아진다. 그냥 여기서 덮으련다. 이른바 진보교육진영은 권재원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진영이 모른다면 나 스스로라도 나의 소중함을 알아야겠다. 따라서 좀 쉬련다.

권재원의 저서 소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권재원의 저서 소개<대안 경제 교과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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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